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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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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티아누스는 51년 로마에서 태어난 플라비우스 왕조의 로마 황제이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 마이오르의 막내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81년 형 티투스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올랐으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그는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으로 칭하며, 문화 및 종교 정책을 통해 로마 사회를 통제하려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다키아와의 전쟁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96년 궁정 관리들의 음모로 암살당했고, 그의 사후 원로원은 그의 기억을 지우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에'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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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기본 정보
흰색 대리석 흉상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흉상
로마자 표기Domitianus
전체 이름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즉위명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출생일51년 10월 24일
출생지로마, 이탈리아, 로마 제국
사망일96년 9월 18일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매장지로마
배우자도미티아 롱기나 (70년 결혼)
자녀플라비우스 카이사르
플라비아
베스파시아누스 미노르 (추정상 입양)
도미티아누스 미노르 (추정상 입양)
통치
직위로마 황제
재위 시작81년 9월 14일
재위 종료96년 9월 18일
이전 통치자티투스
다음 통치자네르바
가문
왕조플라비우스
아버지베스파시아누스
어머니도미틸라
기타
로마자 표기Caesar Domitianus (69–81)

2. 생애

51년 10월 24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 당시는 4황제 시대의 혼란기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81년 9월, 형 티투스가 중병에 걸리자, 도미티아누스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형이 생존해 있는 동안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형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소문이 돌았다.[68] 83년에는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아그리콜라가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소환되었고, 같은 해 게르마니아에서 샤텐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처음에는 온건하게 시작된 그의 통치는 점차 폭정으로 변해, 사후 기억의 삭제(Damnatio Memoriae) 처분을 받았다. 유대인기독교를 박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 연구에서는 실제로 도미티아누스가 박해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고려되고 있다.

스베토니우스의 『로마 황제전』에서는 교양 있고 우아한 청년으로 묘사된다. 형과 달리 아버지의 유대 원정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점차 그의 행동은 대담해졌다.

70년 도미티아 롱기나와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라미아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도미티아와 결혼했다. 도미티아는 네로의 부하 장군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폭력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황태자로서 제사장 등의 명예직을 여러 번 맡았지만, 제국의 행정관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를 차기 황제 후보로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형 티투스가 죽자 야망을 드러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2. 1. 형제와의 경쟁

도미티아누스는 51년 10월 24일 로마에서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1][6] 그는 로마 제국의 제9대 황제인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형 티투스와 함께 플라비우스 가문을 이끌었다.

기원전 1세기 동안 지속된 내전은 로마의 구 귀족 계급 몰락에 크게 기여했고, 1세기 초 새로운 이탈리아 귀족들이 점차 그들의 지위를 대체했다.[8] 플라비우스 가문은 4대에 걸쳐 무명에서 유명세를 얻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 시대에 부와 지위를 얻었다.[6] 도미티아누스의 증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카이사르의 내전 중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켄투리오로 복무했다.[6]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전장에서 도망친 후 그의 군 경력은 불명예로 끝났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로는 엄청난 부를 가진 테르툴라와 결혼하여 그의 지위를 향상시켰고, 테르툴라의 재산은 페트로의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도미티아누스의 할아버지)의 상승을 보장했다.[9]

도미티아누스의 데나리우스 주화. 표기: CAES. DOMIT. AVG. GERM. P. M., TR. P. XIIII.


베스파시아누스는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쌓았고, 군 지휘관으로서 43년 로마의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다.[10] 그러나 고대 자료들은 도미티아누스가 자라는 시기에 플라비우스 가문이 가난했다고 주장하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칼리굴라(37~41)와 네로(54~68) 황제 시대에 불명예에 빠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12] 현대사는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며, 이러한 이야기는 후에 플라비우스 통치하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평판이 좋지 않은 황제들 시대의 성공을 축소하고 클라우디우스(41~54) 황제와 그의 아들 브리타니쿠스 시대의 업적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전의 일환으로 유포되었다고 제시한다.[13]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함께 궁정 교육을 받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성공적인 정치 및 군 경력을 쌓았다. 50년대의 장기간의 은퇴 후 그는 네로 치하에서 공직에 복귀하여 63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재직했으며, 66년 그리스를 공식 방문하는 동안 네로 황제를 수행했다.[14] 같은 해 유대 속주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현재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반란군에 대항하여 로마 군대를 이끌도록 지정되었고, 티투스(이때 군사 교육을 마쳤다)가 한 군단을 지휘했다.[15]

도미티아누스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는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지만,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를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다.

2. 2. 결혼

70년, 베스파시아누스는 막내아들 도미티아누스와 티투스의 딸인 율리아 플라비아와 왕조 결혼을 주선하려 했다.[45]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도미티아 로긴가에 대한 사랑에 단호하여, 그녀의 남편 루키우스 엘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엘리아누스를 설득하여 이혼하게 만들고 자신과 결혼했다.[45] 도미티아 로긴가는 존경받는 장군이자 정치가였으며 아르메니아에서의 지휘 능력으로 명성을 떨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이었다. 65년 네로에 대한 피소의 음모 실패 후, 그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그녀는 또한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유니아 레피다의 손녀이기도 했다. 이 결혼은 원로원의 반대파와의 유대를 재건하고, 네로 치하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정치적 성공을 축소하려는 당시의 플라비우스 왕조 선전에 부합했다.[46]

80년, 도미티아와 도미티아누스의 유일하게 확인된 아들이 태어났으나, 83년에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47]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 직후 도미티아에게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고, 그들의 아들은 신격화되었다.[48]

83년, 도미티아누스는 도미티아를 잠시 망명 보냈다가 곧 불러들였다. 그 이유는 그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49][47] 84년까지 도미티아는 궁전으로 돌아왔고,[50]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51] 황후로서 도미티아의 활동이나 도미티아누스 정부에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녀의 역할은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적어도 황제와 함께 원형극장에 갔고, 유대인 작가 요세푸스는 그녀에게서 받은 혜택에 대해 이야기한다.[52] 도미티아누스에게 다른 자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로마 자료들이 간통과 이혼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은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53]

도미티아 로긴가의 흉상 (루브르 박물관)

2. 3. 황제 즉위 (81년)

81년 9월, 형 티투스가 중병에 걸리자, 도미티아누스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형이 생존해 있는 동안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형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소문이 돌았다.[68] 고대 저자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직접 살인 혐의로 고발하거나,[59][69] 병든 티투스를 내버려 두었다고 암시하거나, 심지어 그의 생애 동안 도미티아누스가 공개적으로 형을 음모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여 그의 형의 죽음에 연루시켰다.[69]

도미티아누스는 형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거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은 것 같고, 대신 근위대 막사로 가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 다음 날인 9월 14일,[70] 상원은 도미티아누스의 권력을 확인하고, 호민관 권력, ''최고 대제사장'' 직책,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존경받는"), "국부"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했다.[71]

황제가 되기 전, 도미티아누스의 플라비우스 정부 내 역할은 대체로 의례적인 것이었다. 71년 6월, 티투스유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왔다. 로마의 개선식에서, 플라비우스 가문은 전쟁의 전리품을 전시한 호화로운 행렬에 앞서 수도로 진입했다.[58] 가족 행렬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이끌었고, 도미티아누스는 웅장한 흰말을 타고 나머지 플라비우스 친척들과 함께 뒤따랐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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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들 중 장남이자 가장 경험이 많은 티투스는 아버지와 호민관 권력을 공유하고, 7차례 집정관직, 검열관직, 그리고 근위대 사령관직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제국에 지정된 후계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했다.[61] 차남인 도미티아누스는 "카이사르" 또는 "원로 유벤투티스"와 같은 명예직과 여러 사제직을 맡았지만,[62] ''권력''을 가진 직책은 없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통치 기간 동안 6차례 집정관직을 역임했지만, 그중 73년의 집정관직만이 정식 집정관직이었다. 나머지 5차례는 덜 권위 있는 보궐 집정관직이었는데, 그는 각각 71년, 75년, 76년, 77년, 79년에 보통 1월 중순에 아버지나 형을 대신하여 이 직책을 맡았다.[61] 이러한 직책들은 도미티아누스에게 로마 상원에서 귀중한 경험을 제공했고, 나중에 상원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태도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62]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했을 때 티투스가 아버지와 공동 황제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플라비우스 정책에 갑작스러운 변화는 없었다. 티투스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정부에서의 완전한 동반자 관계가 곧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시켰지만, 티투스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어떤 종류의 호민관 권력이나 ''권력''도 그에게 부여되지 않았다.[65]

3. 통치 (81년 ~ 96년)

81년 티투스가 중병에 걸리자, 도미티아누스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형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그가 형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94] 그의 15년간의 통치는 티베리우스 이후 가장 길었다.

황제로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화폐 평가 절하를 통해 경제를 강화하고, 제국 국경 방어를 확대했으며, 피해를 입은 로마를 복구하기 위한 대규모 건설을 시작했다. 그의 장군 아그리콜라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하여 브리타니아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에서는 데케발루스 왕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83년에는 아그리콜라가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같은 해 게르마니아에서 샤텐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도미티아누스의 정부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였다. 종교, 군사, 문화적 선전은 인격숭배를 조장했고, 그는 영구적인 검열관으로 스스로를 임명하여 공공 및 사생활 도덕을 통제하려 했다. 그는 백성과 군대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폭군으로 여겼다.

96년 궁정 관리들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통치는 끝났다. 같은 날 그의 조언자 네르바가 황제를 계승했다. 그의 죽음 이후, 원로원은 기억에서 지우는 형벌을 내렸고, 타키투스, 플리니우스 2세, 수에토니우스 등은 도미티아누스를 잔혹하고 편집증적인 폭군으로 묘사했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도미티아누스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프로그램이 평화로운 2세기의 기반을 마련한 잔혹하지만 효율적인 독재자로 묘사한다.

3. 1. 권위주의적 통치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이 재위 기간 동안 유지했던 공화정의 허울을 재빨리 없애 버렸다.[72] 정부의 중심을 황궁으로 옮김으로써 상원의 권력을 무력화시켰다.[73] 그는 로마 제국이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신권 군주제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74]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도 황제의 역할이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여 문화적, 도덕적 권위자로서 로마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75]

이러한 거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통치하려고 했다. 행정부의 모든 부서에 직접 참여했다. 일상생활과 법률의 가장 작은 세부 사항까지 다루는 칙령이 발표되었고, 세금과 공공 도덕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77] 황실 관료 체제는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그 어느 때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그의 엄격한 기준과 의심 많은 성격 덕분에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의 부패가 속주 총독과 선출된 관리들 사이에 유지되었다.[78][79]

그는 자신의 절대 통치하에 상원의 중요성에 대해 전혀 꾸미지 않았지만, 그가 부적합하다고 여긴 상원 의원들은 상원에서 추방되었고, 공직 분배에서 그는 가족 구성원을 거의 선호하지 않았는데, 이는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가 행사한 친족 편애와 대조되는 정책이었다.[80] 전략적 직책에 임명된 사람들에게 충성심과 유순함을 중시했는데, 그는 이러한 자질을 상원 의원이나 자신의 가족 구성원보다는 기사 계급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발견했고, 황실 정책에 동의하지 않으면 의심하고 즉시 직책에서 해임했다.[81]

도미티아누스의 독재 정치의 현실은 티베리우스 이후 어떤 황제보다 수도에서 벗어나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118] 공화정 몰락 이후 상원의 권력은 이미 쇠퇴해 왔지만,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더 이상 로마에 있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72] 플라비우스 황궁이 팔라티노 언덕에 완공될 때까지 황궁은 알바 롱가 또는 키르케이에 있었고, 때로는 그보다 더 먼 곳에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럽 속주들을 광범위하게 순회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중 적어도 3년을 게르마니아와 일리리아에서 보내면서 제국의 국경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82]

그는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으며,[74]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기독교의 케뤼그마에 반대되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에 반대하여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3. 2. 경제 정책

도미티아누스의 미세 관리 경향은 그의 재정 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도미티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부채 상태로 남겼는지, 아니면 흑자 상태로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분분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균형 잡힌 경제를 유지했다는 증거가 있다.[91]

즉위하자마자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화폐를 극적으로 재평가했다. 그는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90%에서 98%로 증가시켰으며, 실제 은 무게는 2.87그램에서 3.26그램으로 늘렸다. 85년의 금융 위기로 인해 은 순도와 무게가 각각 93.5%와 3.04그램으로 평가절하되었지만,[92][93] 이 새로운 가치는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가 통치 기간 동안 유지했던 수준보다 여전히 높았다. 도미티아누스의 엄격한 조세 정책은 이 기준이 그 후 11년 동안 유지되도록 보장했다.[93] 이 시대의 주화는 도미티아누스의 칭호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뒷면 초상화의 세련된 예술 작품을 포함하여 매우 일관된 품질을 보여준다.[93]

존스는 도미티아누스의 연간 수입을 12억 세스테르티이 이상으로 추산하며, 그중 3분의 1 이상은 로마 군대 유지를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91] 또 다른 주요 지출은 로마의 광범위한 재건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했을 당시 도시는 여전히 64년의 대화재, 69년의 내전, 80년의 화재로 인한 피해를 겪고 있었다.[2]

단순한 개조 프로젝트를 넘어, 도미티아누스의 건설 계획은 제국 전역의 문화 부흥의 정점이 될 의도였다. 약 50개의 구조물이 건설, 복원 또는 완공되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업적이다.[94] 가장 중요한 새로운 구조물 중에는 오데온, 스타디움,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의 건축가 라비리우스가 설계한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플라비우스 황궁이 있다.[95]

도미티아누스가 복원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으로, 금박을 입힌 지붕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완공된 건물 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티투스 아치, 그리고 그가 4층을 추가하고 내부 좌석 구역을 완성한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콜로세움)이 있다.[60]

로마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 동안 약 가 기부금 또는 ''콩기아리아''에 사용되었다.[96] 황제는 또한 네로 시대에 단순한 식량 배포로 축소되었던 공공 연회 관행을 부활시켰으며, 오락과 게임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86년 그는 체육 경기, 마차 경주, 웅변, 음악 및 연기 경연을 포함하는 4년마다 열리는 대회인 카피톨리누스 경기를 창설했다.[97]

3. 3. 군사 정책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군사 정책은 주로 방어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확장주의 전쟁은 거부했다.[2] 그는 라인 강을 따라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도로, 요새, 감시탑 네트워크인 게르마니쿠스 국경 방어선(Limes Germanicus)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군사적 공헌을 했다.[98]

82년 또는 83년 초, 도미티아누스는 카티(Chatti)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라는 칭호를 받았으나,[107] 고대 저술가들은 이 승리를 "불필요한 것",[108] "가짜 개선식"이라고 조롱했다.[101] 카티족이 89년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더한다.[98]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보유크다쉬 산 근처 바위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로마 군대의 최동단 주둔 증거를 남겼다.[99]

그는 군대의 봉급을 3분의 1이나 인상하여 군대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103] 비록 군 지휘관들은 그의 전술 및 전략적 결정에 반대했을 수 있지만, 일반 병사들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104]

당시 갈리아에서는 카티(Chatti)족과의 전쟁이, 다뉴브 강 국경에서는 수에비(Suebi)족, 사르마티아(Sarmatians)족, 다키아(Dacians)족과의 전쟁이 벌어졌다.[2]

3. 3. 1. 브리타니아 원정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배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 군사 활동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 중 하나는 타키투스가 작성한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전기이다. 이 기록은 주로 77년부터 84년 사이 북부 브리튼 정복에 관한 내용이다.[98] 아그리콜라는 77년경 로마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즉시 칼레도니아(현대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시작했다. 82년 아그리콜라는 신원 불명의 수역을 건너 그때까지 로마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부족들을 물리쳤다.[109] 그는 아일랜드를 마주보는 해안을 요새화했고, 타키투스는 그의 장인이 단 하나의 군단과 소수의 보조병만으로도 아일랜드를 정복할 수 있다고 자주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10] 그는 망명한 아일랜드 왕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는데, 이를 정복의 구실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정복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언급된 강 건너편이 사실상 소규모 탐험 또는 아일랜드에 대한 응징 원정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111]

아일랜드에서 관심을 돌린 아그리콜라는 이듬해 함대를 조직하여 포스 강 너머 칼레도니아로 진격했다.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인치투틸에 대규모 군단 요새가 건설되었다.[110] 84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 군대와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맞섰다.[112] 로마군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칼레도니아 군대의 3분의 2는 스코틀랜드 늪지와 스코틀랜드 고지에 숨어 결국 아그리콜라가 브리튼 섬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막았다.[110] 85년 아그리콜라는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그는 6년 이상 총독으로 재직했으며, 이는 플라비우스 시대 집정관 사절들에게는 평균적인 기간보다 길었다.[110]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아그리콜라의 성공이 황제 자신의 독일에서의 보잘것없는 승리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소환했다고 주장한다.[101] 아그리콜라와 황제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아그리콜라는 개선식 장식과 동상을 받았지만, 그의 경험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민정이나 군사직을 맡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직을 제안받았지만, 건강 악화 또는 타키투스의 주장처럼 도미티아누스의 음모 때문에 거절했다.[113] 아그리콜라가 브리튼에서 소환된 직후 로마 제국은 동쪽의 다키아 왕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증원군이 필요했고, 87년이나 88년에 도미티아누스는 브리튼 속주에서 대규모 전략적 철수를 명령했다. 인치투틸의 요새는 해체되었고 칼레도니아 요새와 감시탑은 버려졌으며, 로마 국경은 남쪽으로 약 120km 이동했다.[114] 군 지휘부는 도미티아누스의 후퇴 결정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에게 칼레도니아 지역은 로마 국고에 손실을 가져다준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98]

3. 3. 2. 다키아 전쟁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일리리쿰 북부 속주에서 가장 큰 위협을 받았다.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 다키아족이 다뉴브 강을 따라 로마의 정착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는데, 이 중 사르마티아족과 다키아족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약 84년이나 85년에 데케발루스(Decebalus) 왕이 이끄는 다키아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메시아 속주로 진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메시아 총독 오피우스 사비누스(Oppius Sabinus)를 살해했다.[115] 도미티아누스는 즉시 반격에 나서, 근위대 대장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Cornelius Fuscus)가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직접 그 지역으로 갔다. 푸스쿠스는 85년 중반에 다키아족을 국경 너머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도미티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116]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86년 초, 푸스쿠스는 다키아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푸스쿠스는 전사했고, 근위대의 아퀼라(Aquila)가 유실되었다.[115] 전투 표준기인 ''아퀼라''(aquila)의 상실은 압도적인 패배와 로마의 국가적 자존심에 대한 심각한 모욕을 의미했다. 도미티아누스는 86년 8월 메시아로 돌아와 메시아 속주를 상, 하 메시아로 나누고 다뉴브 강에 3개의 군단을 추가 배치했다. 87년 로마인들은 테티우스 율리아누스(Tettius Julianus)의 지휘하에 다시 다키아를 침략했고, 88년 말 푸스쿠스가 전사했던 곳에서 데케발루스를 패배시켰다.[117] 그러나 89년 게르만 국경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면서 다키아 수도 사르미제게투사(Sarmizegetusa)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118]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는 데케발루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로마군이 다키아 지역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조건으로 데케발루스에게 매년 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118] 당시 저술가들은 이 조약을 로마인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사비누스와 푸스쿠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19] 도미티아누스 치세의 남은 기간 동안 다키아는 비교적 평화로운 속왕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돈으로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122]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원했을 것이며, 상 메시아에 시리아에서 온 2개의 기병대와 파노니아에서 온 최소 5개의 코호르트를 추가 배치했다.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을 계속하여 상 메시아의 보조군에 2개의 부대를 더 추가했고, 이후 그의 다키아 전쟁을 위해 군대를 증강했다.[120][121] 결국 로마인들은 106년 데케발루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 군대는 다시 큰 손실을 입었지만, 트라야누스사르미제게투사를 점령하고 다키아의 금광과 은광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122]

3. 4. 종교 정책

도미티아누스는 전통적인 로마 종교를 확고히 믿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고대 관습과 도덕을 준수하도록 직접 감독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신성한 성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는 최고 신 주피터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는데,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주피터 신전의 인상적인 복원을 통해 가장 중요하게 나타났을 것이다.[75] 69년 12월 20일 도미티아누스가 안전을 위해 피신했던 집 근처에 ''주피터 콘서바토르''를 위한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고, 그의 통치 후반에는 이를 더욱 확장된 주피터 쿠스토스에게 봉헌된 건물로 대체했다.[123] 그가 가장 열렬히 숭배한 여신은 미네르바였다. 그는 자신의 침실에 미네르바에게 봉헌된 개인 사당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화에 네 가지 다른 형태로 정기적으로 등장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따서 군단을 창설했다.[124]

도미티아누스의 ''게니우스'', 아이기스와 풍요의 뿔을 든 대리석상, 카피톨리니 미술관, 로마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치하에서 다소 사용되지 않게 된 황제 숭배 관행을 부활시켰다. 그의 황제로서의 첫 번째 행위는 형 티투스의 신격화였다. 그들의 죽음 후, 그의 어린 아들과 조카인 줄리아 플라비아도 신들의 반열에 올랐다.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도미티아누스가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님이자 신")라는 칭호를 부여했다고 주장한다.[125][126]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도미누스''라는 칭호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127][128] 이에 대한 공식 문서나 주화를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이언 존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그러한 문구는 그에게서 호의를 얻고자 하는 아첨꾼들이 한 말이라고 주장한다.[78] 그는 황실 가족에 대한 숭배를 장려하기 위해 키리날에 있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이전 저택 자리에 왕조의 영묘를 세웠고,[129] 신격화된 그의 아버지와 형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인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을 완공했다.[60] 플라비우스 가문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는 디보룸 신전과 포르투나 르둑스 신전의 건설을 명령했고, 티투스의 개선문을 완공했다.

이러한 건설 프로젝트는 도미티아누스의 종교 정책에서 가장 눈에 보이는 부분이었고, 종교법과 공공 도덕의 이행에도 관심을 두었다. 85년에 그는 로마의 도덕과 행실을 감독하는 영구 감찰관으로 자신을 임명했다.[130] 도미티아누스는 이 임무를 성실하고 주의 깊게 수행했다. 그는 간통이 유배로 처벌되는 ''율리아 간통 억제법''을 갱신했다. 배심원 명단에서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데려온 기사 한 명을 제외했고, 전 퀘스토르 한 명은 연기하고 춤을 춘 죄로 상원에서 추방되었다.[77] 환관들이 일반적으로 하인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다른 사람들을 거세한 사람들을 처벌했고[131] 환관 자신들을 금지하려고 했다.[132] 후대 황제들도 비슷한 금지를 내렸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최초였을 가능성이 있다.[133] 그의 도덕주의에도 불구하고,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총애를 받는 환관 소년 에리누스를 두었는데,[134][135] 당대 궁정 시인인 마르티알과 스타티우스에 의해 기념되었다.[136]

도미티아누스는 공직자들 사이의 부패를 강력하게 기소하여, 뇌물을 받은 배심원들을 제거하고 이해 상충이 의심되는 경우 법률을 폐지했다.[77] 자신을 향한 명예훼손적인 글은 유배 또는 사형으로 처벌되도록 했다.[77] 배우들도 의심을 받았으며,[137] 마임이 공개적으로 무대에 서는 것을 금지했다. 에피크테토스는 철학자들이 "폭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고,[138] 로마에서 모든 철학자들을 추방하는 94년 도미티아누스의 법령 때문에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로 거점을 옮겨 노년에 사망했다.[138] 87년에는 베스타 처녀들이 평생 순결을 지킨다는 신성한 서약을 어긴 사실이 발각되었다. 베스타 처녀들은 공동체의 딸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는 근친상간을 구성했다. 따라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또는 고대 관습에 따라 생매장되어야 했다.[139]

도미티아누스의 주화, 150~160년 쿠샨 제국 시대에 세워진 불교 스투파인 아힌 포시에서 발견됨, 현대 아프가니스탄


외국 종교는 공공 질서를 방해하지 않거나 전통적인 로마 종교와 동화될 수 있는 한 허용되었다. 이집트 신들의 숭배는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번성하여 코모두스의 통치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세라피스이시스의 숭배는 각각 주피터와 미네르바와 동일시되어 특히 두드러졌다.[124] 4세기 유세비우스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에 심하게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한다.[140][141] 요한계시록과 클레멘트 1서는 이 기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후자는 "갑작스럽고 반복적인 불행"을 언급하며 도미티아누스 치하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42] 유대인들은 세금을 많이 부과받았지만, 당대 저자들은 로마 종교 내부의 것들을 제외한 다른 종교적 범죄에 기반한 재판이나 처형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제공하지 않는다.[143] 수에토니우스는 젊었을 때 할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프로쿠라토르에 의해 옷을 벗겨진 90세 노인을 보았다고 언급한다.[144]

3. 5. 건설 사업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용도로 도미티아누스의 빌라를 비롯한 많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건설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도미티아누스의 빌라는 로마에서 20km 떨어진 알바니 언덕에 위치한 광대하고 호화로운 궁전이었다. 로마 자체에서는 팔라티노 언덕에 도미티아누스의 궁전을 건설했다. 그 외에도 투스쿨룸, 안티움, 사바우디아, 비카렐로, 카이에타, 테라치나[85], 바이아이[86]에 도미티아누스와 관련된 일곱 개의 빌라가 있었으나, 사바우디아에 있는 빌라만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87]

도미티아누스의 경기장은 79년 화재로 화성의 대부분 건물이 손상되거나 파괴된 후 황제 건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86년에 로마 시민들에게 선물로 봉헌되었다. 이 경기장은 로마 최초의 영구적인 경쟁 체육 시설이었으며, 오늘날 나보나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88] 이집트에서도 도미티아누스는 건물 건설과 장식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하토르 신전의 프로필론에 있는 헌납 장면에서 트라야누스와 함께 등장한다. 그의 카르투슈에스나크눔 신전 기둥 축에도 나타난다.[89][90]

3. 6. 원로원과의 관계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공화정 몰락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원수정 하에서 로마 원로원의 권위가 크게 쇠퇴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151] 원수정은 공화정의 형식적 틀을 유지하면서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허용하였는데,[151] 대부분의 황제들은 민주주의의 허울을 유지하였고, 상원은 그 대가로 황제의 사실상 군주 지위를 묵인하였다.[152]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이러한 관계를 교묘하게 다루지 못했고, 종종 상원에 개선 장군이자 정복자로 나타나 자신의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즉위 초부터 자신의 독재 정치를 강조했다.[152] 귀족들을 싫어했고, 그것을 감추지 않았으며, 상원으로부터 모든 의사 결정권을 박탈하여 행정적 기능으로만 남게 하였고, 대신 소수의 친구들과 기사 계급에게 중요한 국가 직책을 맡겼다.[153][154]

상원의 반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도미티아누스 암살 후,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상원 의사당으로 달려가 즉시 그의 기억을 영원히 말살하는 결의안(담나티오 메모리아에)을 통과시켰다.[155]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통치 시대에 상원파 저술가들은 도미티아누스를 폭군으로 묘사하는 역사를 출판했다.[1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는 도미티아누스가 상원의 여론에 양보한 사실을 시사한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가 집정관의 권력을 플라비우스 왕조에 집중시켰던 것과는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놀랍도록 많은 속주 출신 인물들과 잠재적 반대파들을 집정관직에 임명하여, 그들이 일반 집정관으로서 새해를 여는 공식 일정을 주관하도록 허용했다.[160] 이것이 상원의 적대 세력과 화해하려는 진정한 시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도미티아누스는 잠재적 반대파들에게 집정관직을 제안함으로써 그들의 지지자들 앞에서 그들을 타협하게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들의 행동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되면, 거의 예외 없이 재판에 회부되어 유배되거나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153]

타키투스와 스베토니우스는 모두 도미티아누스 치세 말기에 박해가 증가했음을 언급하며, 89년 사투르니누스의 반란 실패 이후인 93년경 급격한 증가가 있었음을 지적한다.[157][158] 적어도 20명의 상원 의원 반대파가 처형되었는데,[159] 여기에는 도미티아 롱기나의 전 남편 루키우스 엘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엘리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가족 구성원 3명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기원후 82년 집정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집정관),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집정관)가 포함된다.[160]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도미티아누스의 사촌이었고, 황제는 클레멘스의 두 아들을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라고 부르며 후계자로 지명하기까지 했다.[161]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83년 또는 85년 초기에 처형되었으므로, 타키투스의 도미티아누스 말기 "공포 정치"에 대한 견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스베토니우스에 따르면, 일부는 부패나 반역죄로, 다른 일부는 사소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의심을 통해 이를 정당화했다.

존스는 도미티아누스의 처형을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 시대의 처형과 비교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약 35명의 상원 의원과 300명의 기사 계급을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원으로부터 신격화되었고 역사상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지적한다.[163] 도미티아누스는 집정관 임명으로 적대 세력을 달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의 독재적 통치 방식은 상원의 권력 상실을 강조했고, 귀족들과 심지어 가족 구성원까지 모든 로마 시민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은 그들의 경멸을 샀다.[163]

3. 7. 암살 (96년)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는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 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반겼고, 생전의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을 선고했지만, 군대는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194]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미네르바를 자신의 수호 여신으로 숭배하며 미신적인 존경을 표했는데, 꿈에서 그녀는 암살 전에 황제를 버렸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 궁정 관리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164] 수에토니우스는 이 음모와 암살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시종 파르테니우스가 이 음모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존 그레인저는 파르테니우스가 네로의 전 비서 에파프로디투스의 최근 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암살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165][166] 암살은 파르테니우스의 해방 노예인 막시무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조카인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관리인 스테파누스가 실행했다.[167]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여러 징조가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을 예고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는 점복에 따라 자신이 정오에 죽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 시간대에 항상 불안해했다. 암살 당일, 도미티아누스는 괴로워하며 여러 번 하인에게 시간을 물었다. 하인은 자신도 음모자 중 한 명이었는데, 황제에게 이미 오후 늦었다고 거짓말했다.[172] 안심한 황제는 책상에 가서 칙령에 서명했다. 며칠 동안 팔에 부상을 가장하고 붕대를 감아 숨겨진 단검을 소지했던 스테파누스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부상당한 황제는 저항했지만, 스테파누스는 계속해서 황제를 7번 더 찔렀다.

공격 중에 스테파누스와 도미티아누스는 바닥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스테파누스는 황제에게 찔려 얼마 후 사망했다. 도미티아누스의 시신은 평범한 에 실려 무례하게 화장되었다. 그의 간호사 필리스가 황제의 유골을 플라비우스 신전으로 가져가 그의 조카 줄리아의 유골과 섞었다. 그는 44세였다. 예언대로 그의 죽음은 정오에 찾아왔다.[169]

거의 100년 후에 글을 쓴 카시우스 디오는 암살이 즉흥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스테파누스의 가장한 부상, 공격 전에 하인들의 숙소 문이 잠겨 있었다는 점, 그리고 도미티아누스가 암살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칼이 미리 치워졌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것이 잘 조직된 음모였음을 암시한다.[170][171][172] 디오는 도미티아 롱기나를 공모자에 포함시켰지만,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그녀가 도미티아누스에게 헌신했던 것을 보면, 그녀가 음모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52]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의 정확한 개입은 불분명하다. 근위대 사령관 중 한 명인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는 거의 확실히 음모를 알고 있었다. 다른 사령관인 레티아의 전 총독 티투스 플라비우스 노르바누스는 도미티아누스의 가족 구성원이었다.[173][167]

오스티아 달력인 ''파스티 오스티엔세스''는 도미티아누스 암살 당일 원로원이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선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74] 그의 정치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는 놀라운 선택이었다. 네르바는 나이가 많고 자녀가 없었으며, 그의 경력 대부분을 대중의 눈길 밖에서 보냈기 때문에 고대와 현대의 저술가들은 모두 그의 도미티아누스 암살 개입 여부에 대해 추측해 왔다.[175][176]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공모자들은 암살 전에 후계자로서 네르바에게 접근하여 그가 적어도 음모를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177][178] 그는 스베토니우스의 사건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저술이 네르바의 직계 후손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치하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 왕조가 살인으로 인해 권력을 잡았다고 시사하는 것은 다소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177]

반면에 네르바는 제국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알려진 플라비우스 왕조의 충실한 신하였기에 그의 행적은 공모자들에게 그를 추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사실은 역사에 가려져 있지만,[179] 현대 역사가들은 네르바가 암살 소식이 알려진 지 몇 시간 만에 원로원의 주도로만 황제로 선포되었다고 믿고 있다.[174] 이 결정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서둘렀을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음모에 연루된 것 같지는 않다.[180]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을 기뻐하며, 네르바가 황제로 즉위한 직후 도미티아누스의 기억에 대한 ''담나티오 메모리아에''를 통과시켰다. 그의 동전과 조각상은 녹이고, 그의 아치는 허물고, 그의 이름은 모든 공공 기록에서 지워졌다.[181] 도미티아누스와 1세기가 넘은 후의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는 공식적으로 ''담나티오 메모리아에''를 받은 유일한 황제들이었지만, 다른 황제들도 사실상 ''담나티오 메모리아에''를 받았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찬첼레리아 부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존의 도미티아누스 초상은 단순히 네르바의 모습에 맞춰 다시 새겨져 새로운 이미지를 빠르게 제작하고 이전의 자료를 재활용할 수 있었다.[182] 그러나 원로원의 명령은 로마에서만 부분적으로 실행되었고, 이탈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속주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181]

스베토니우스에 따르면, 로마 시민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소식에 무관심했지만, 군대는 매우 슬퍼하며 암살 직후 그의 신격화를 요구했고, 여러 속주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183] 보상 조치로, 근위대는 도미티아누스 암살자들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네르바는 거부했다. 대신 그는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를 단순히 해임하고, 전직 사령관인 카스페리우스 엘리아누스로 교체했다.[184]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은 네르바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결국 97년 10월 카스페리우스 엘리아누스가 이끄는 근위대원들이 황궁을 포위하고 네르바를 인질로 잡으면서 위기로 폭발했다.[185] 그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넘겨주기로 동의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킨 근위대에게 감사하는 연설까지 했다.[185]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와 파르테니우스는 찾아내 처형되었다. 네르바는 이 습격에서 무사했지만, 그의 권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 그 후 곧 그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입양한다고 발표했고, 이 결정으로 거의 퇴위한 것과 같았다.[186]

4. 유산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고대 자료 대부분이 상원 귀족 계급과 관련이 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이들과 어려운 관계를 맺었다.[155] 플리니우스(소),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같은 당대 역사가들은 모두 그의 치세 이후에 저술했으며, 상원은 그의 명성을 잊으려 했다. 도미티아누스 궁정 시인인 마르티알리스스타티우스의 작품은 그의 치세와 동시대의 문학적 증거를 거의 유일하게 구성하지만, 도미티아누스의 업적을 신들의 업적과 맞먹는다고 칭찬하는, 매우 아첨하는 내용이다.[187]

도미티아누스의 생애에 대한 가장 방대한 기록은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중에 태어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117-138) 시대에 저술을 출판한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황제들의 생애''이다. 그의 저술은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도미티아누스를 배타적으로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으며, 그의 통치는 잘 시작되었지만 점차 공포 정치로 기울었다고 주장한다.[188] 그러나 이 전기는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와 성격에 관하여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그를 양심적이고 온건한 인물이자 타락한 방탕아로 제시한다.[28]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가장했고 고전 작가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의 경구적인 표현에 대한 애정을 암시하는 다른 구절들은 그가 실제로 고전 작가들에 익숙했음을 시사하며, 그는 또한 시인과 건축가를 후원하고, 예술 올림픽을 설립했으며, 로마의 도서관이 불타버린 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직접 복원했다.[28] ''황제들의 생애''는 도미티아누스의 결혼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의 원천이기도 하다.

타키투스는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저자로 여겨지지만, 그의 장인인 아그리콜라가 황제의 개인적인 적인 가능성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복잡하다.[191] 그의 전기 작품인 ''아그리콜라''에서 타키투스는 아그리콜라가 칼레도니아인에 대한 그의 승리가 도미티아누스 자신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부적합성을 부각했기 때문에 은퇴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다.

타키투스의 주요 역사 작품인 ''역사''와 아그리콜라의 전기는 모두 도미티아누스의 후계자인 네르바(96-98)와 트라야누스(98-117) 치세에 쓰여 출판되었다. 불행히도 플라비우스 왕조의 통치를 다룬 타키투스의 ''역사''의 일부는 거의 전적으로 손실되었다. 2세기의 다른 영향력 있는 저술가로는 유베날리스와 플리니우스(소)가 있는데, 후자는 타키투스의 친구였고 100년에 트라야누스와 로마 상원 앞에서 그의 유명한 ''트라야누스 찬가''를 낭독하여 복원된 자유의 새로운 시대를 칭송하면서 도미티아누스를 폭군으로 비난했다.

20세기 동안 도미티아누스의 군사, 행정, 경제 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고고학 및 화폐학의 발전이 그의 통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동안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스테판 겔(Stéphane Gsell)의 1894년 저서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 règne de l'empereur Domitien)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새로운 장편 연구가 출판되었다.[194] 이 중 첫 번째는 존스(Jones)의 1992년 저서 『황제 도미티아누스』(The Emperor Domitian)이다. 그는 도미티아누스가 무자비하지만 효율적인 독재자였다고 결론짓는다.[194]

1930년, 로널드 시임(Ronald Syme)은 대부분 재앙으로 여겨졌던 도미티아누스의 재정 정책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를 주장했다.[196] 그의 경제 프로그램은 엄격하게 효율적이었고, 로마 통화를 다시는 달성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티아누스 정부는 전체주의적 특징을 보였다. 황제로서 그는 자신을 새로운 아우구스투스, 즉 플라비우스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대로 로마 제국을 이끌도록 운명 지어진 계몽된 전제 군주로 여겼다.[76]

그는 정부의 모든 부서에 개인적으로 관여했고 공무원들 사이의 부패를 성공적으로 기소했다. 그의 감찰 권력의 어두운 면에는 언론의 자유 제한과 로마 상원에 대한 점점 더 억압적인 태도가 포함되었다. 당대 역사가들에 의해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미티아누스의 행정은 평화로운 2세기 원수정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후계자 네르바트라야누스는 덜 제한적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정책은 그의 정책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1세기의 우울한 종결" 이상으로, 로마 제국은 81년부터 96년까지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 동안 번영했는데,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이를 우울하지만 지적인 전제 정치로 묘사했다.[194][199]

5. 연표


  • 51년 10월 24일: 로마에서 태어남.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4황제 시대의 혼란기였음.[1]
  • 70년: 도미티아 롱기나와 결혼함.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라미아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맺어진 결혼으로, 네로의 부하 장군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이었음. 이 결혼은 폭력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줌.[6]
  • 황태자 시절: 제사장 등의 명예직은 여러 번 맡았으나, 제국 행정관직에는 오르지 않음.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 차기 황제 후보로 여겨지지 않음.[7]
  • 81년 9월: 형 티투스가 중병에 걸리자, 형이 생존해 있는 동안 황제 자리를 탈취함. 이로 인해 도미티아누스가 형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소문이 돔.[2]
  • 83년: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아그리콜라가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후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소환됨. 같은 해, 샤텐족과의 전투가 게르마니아에서 시작되어 승리함.[3]
  • 통치 기간: 처음에는 온건했으나 점차 폭정으로 변해 사후 기억의 삭제(Damnatio Memoriae) 처분을 받음. 유대인기독교를 박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학 연구에서는 실제로 도미티아누스가 박해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고려되고 있음.[4]

도무스 아우구스타(도미티아누스 황궁의 유적)

6. 가계도

플라비우스 왕조 가계도
1234567891011
Titus Flavius Petro|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영어테르툴라
colspan="2" |Titus Flavius Sabinus|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영어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
Vespasia Polla|베스파시아 폴라영어베스파시우스
(praetor)
colspan="2" |베스파시아누스
(69–79)
Domitilla the Elder|도미틸라 대제영어
Titus Flavius Sabinus|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영어 (47년 집정관)플라비아
(어린 나이에 사망)
colspan="2" |Titus Flavius Sabinus|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영어 (69년 집정관)Domitilla the Younger|도미틸라 소제영어티투스
(79–81)
Arecina Tertulla|아레키나 테르툴라영어도미티아누스
(81–96)
Titus Flavius Sabinus|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영어 (82년 집정관)Titus Flavius Clemens|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영어Flavia Domitilla|플라비아 도미틸라영어율리아 플라비아Domitia Longina|도미티아 롱기나영어도미티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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