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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찌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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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틱찌꽝은 1923년 베트남에서 태어난 불교 승려이자 민족주의 운동가이다. 프랑스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으며, 1963년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의 불교 차별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1960년대에는 응우옌칸, 응우옌까오끼 정권에 맞서 민간 통치를 요구하며 투쟁했고, 여러 차례 체포와 가택 연금을 겪었다. 2019년 95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2. 어린 시절

틱찌꽝은 1923년 12월 21일 베트남 중부 꽝빈성의 작은 마을 딤디엔에서 팜꽝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3세에 불교에 귀의하여 틱 트리 도(Thích Trí Độ)의 제자가 되었으며, 1937년 '후에 불교학 연대'의 '불교학 연구소'에서 수학, 1945년에 학업을 마쳤다. 1946년 승려계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스리랑카(당시 실론)에서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귀국 후, 구국불교협회(Hội Phật giáo Cứu quốc)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 1946년에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이후 한동안 반식민 활동을 지속하다가 종교적인 활동으로 복귀하였다.

3. 후에 팟 단 총격 사건 (1963년)

1963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가톨릭 신자인 대통령의 형 응오 딘 툭 대주교 임명 25주년 기념식에는 바티칸 깃발을 허용하면서도, 불교 최대 명절인 석가탄신일(베사카, 5월 8일)에는 불교기 게양을 금지하는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불과 일주일 전에 가톨릭교도들이 바티칸 깃발을 전시하도록 허용되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국가 위원회를 통해 디엠 정권이 툭의 즉위식에 예산을 지원하고 민중들에게 기부를 요청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불교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불교도들은 기념식을 위해 한 달치 월급을 주도록 압력을 받아왔다고 불평했다.

틱 찌 꽝은 팟 단에서 수천 명의 불교도들이 깃발 금지에 항의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군중에게 연설하여 불교에 대한 가톨릭교의 차별에 항거하도록 촉구했고, 저녁에 정부 라디오 방송국 밖에서 집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집회참가자들은 구호를 외치고 반정부 선전물을 들었으며, 틱 찌 꽝의 연설을 기대했지만 정부 검열로 인해 방송은 취소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군중 속으로 직접 사격했고, 그 결과 9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틱 찌 꽝은 그날 밤 확성기를 가지고 후에 거리를 차로 이동하며 정부를 비난하고, 5월 10일에 예정된 희생자들을 위한 대규모 장례식 참여를 요청했다. 이러한 호소는 수천 명의 목격자들을 모아 디엠 정권에 개혁 압력을 가했고, 정부는 통행금지를 발령하고 “베트콩(브이씨, 베트남 공산주의자)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24시간 무장된 직원을 대기시켰다. 이후 틱 찌 꽝이 집회참가자들을 설득하여 깃발과 선전물을 내리고 저녁 9시 통금을 지키도록 하면서 마찰은 해결되었다.

3. 1. 불교도의 대응과 투쟁

5월 10일, 틱찌꽝은 불교도들에게 “어떤 무기도 지니지 말라; 죽을 준비를 하라 … 간디의 원칙을 따르라”고 말하며, 간디의 원칙을 따른 비무장 투쟁을 요청했다. 틱찌꽝은 다음을 요구하는 다섯 가지에 중점을 둔 “승려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 불교기를 휘날릴 자유
  • 불교도와 카톨릭교도 간의 종교적 평등
  • 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상
  • 임의적인 연행의 중단
  •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


틱찌꽝은 집회참가자들에게 베트콩이 불안정을 이용하도록 허용하지 않도록 촉구했고, 수동적 저항 전략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것을 요청했다.

틱 꽝 득의 분신 항거가 있던 6월 11일 이후, 틱찌꽝은 협상과 이후의 투쟁을 위해 수도인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의 비밀 경찰과 특수 부대가 집행한 싸 로이 사에 대한 8월 21일 공습 전에, 그는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 피신했다. 그는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미국 대사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로지 대사는 뉴의 군대가 절을 수색하고, 민간인에게 발포하고, 남자와 여자 승려들을 구타한 후에 그를 넘기기를 거부했다. 후에에서는 30명이 뉴의 군인들로부터 그들의 절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사망했다. 당시에, 틱찌꽝은 미국에 의해 매우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디엠의 정책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1963년 11월 1일, 디엠를 권좌에서 제거한 쿠데타 이후, 군사 위원회가 틱찌꽝이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원했지만, 미국 국무부가 이것에 반대할 것을 제안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틱찌꽝은 11월 4일에 미국 대사관을 떠났다.

4. 응우옌칸 시대 (1964년)

1964년 쿠데타로 집권한 응우옌칸 장군은 틱찌꽝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틱찌꽝은 칸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반대하며 투쟁을 계속했다. 칸은 불교도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듯했으나, 결국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틱찌꽝을 가택 연금했다.

응우옌 칸은 1964년 쿠데타로 두옹 반 민 위원회를 해체하고, 민의 경호인인 응우옌반눙 대위를 사형시켰다. 이는 친(親) 디엠 정치인들이 권좌에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을 불러일으켰고, 틱찌꽝은 인도로의 순례 계획을 취소하고 시위를 조직했다.

1964년 초, 틱찌꽝은 칸을 비판하며 불교도 수감에 대해 비난했다. 칸은 디엠 지지자들에게는 너무 유화적이고, 로마 카톨릭교도들에게는 보복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예측 불가능했다. 틱찌꽝을 달래기 위해 칸은 군대에서 모든 로마 카톨릭 신부들을 내보내는 데 동의했지만, 틱찌꽝은 칸이 디엠주의자를 권좌에서 내보내는 데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1964년 7월, 칸은 '붕따우 헌장'으로 알려진 새 헌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대규모 시위와 소요를 불러와 칸을 약화시켰다. 불교 지도자들은 긴급조치 상황과 새 헌법의 중단을 요구했다. 틱찌꽝은 칸이 디엠주의자들을 내쫓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과대망상증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8월 24일, 칸은 틱찌꽝, 틱탐차우, 틱티엔민과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칸은 사이공으로 가서 그들에게 투쟁 중단을 시도해야 했고, 이는 그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들은 칸에게 새 헌법 파기, 민간 통치 회복, 칸라오 소속원들을 권좌에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동적 저항 운동을 조직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 대사 맥스웰 테일러는 칸에게 불교 활동가들을 소수 단체로 간주하여 요구를 무시할 것을 제안했으나, 칸은 종교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불교도의 제안에 동의했다. 트란 티엔 키엠 장군은 "칸은 찌꽝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을 정부에 반대하도록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장된 세력의 사기(effectiveness)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1964년 후반, 칸과 그의 장군들은 민간 통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임명직 자문 기구인 '최고국가의회'를 만들었다. 최고국가의회는 판 칵 스우를 국가 원수로, 쩐 반 흐엉을 총리로 선정했지만, 실제 권력은 장군들과 칸이 가졌다. 흐엉은 틱찌꽝을 공산주의자로 비난하며 불교도들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했다. 틱찌꽝은 흐엉을 디엠주의자로 비난하고 새 시민 정부에 반대하며 대규모 투쟁으로 대응했다. 흐엉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고, 이는 폭력적인 맞대응으로 이어졌다. 1965년 1월, 흐엉은 미국의 원조 자금과 장비를 사용해 군사 지출을 확대하고 징집 기간을 연장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전국적인 시위와 소요를 일으켰고, 칸은 불교도의 지지에 의존하며 투쟁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칸은 무장 세력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기로 결정했고, 1월 27일 응우옌짜인티와 응우옌까오끼의 지원으로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흐엉을 제거했다.

5. 불교도 투쟁 (1965년 ~ 1966년)

응우옌반티에우와 응우옌까오끼 군사정권은 가톨릭 신자 중심의 권력을 유지하며 불교계를 탄압했다. 틱찌꽝은 티에우가 디엠의 '카톨릭 칸 라오 당黨'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파시스트적 성향"을 비난하며 티에우의 사퇴를 요구했다. 틱찌꽝은 티우가 종교에 바탕을 둔 발전을 했던 디엠의 카톨릭 통치 시기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친불교적 성향으로 알려진 티 장군이 나라를 이끌기를 바라며 티우를 그의 불교도들에 대한 과거 범죄 혐의에 대해 공격했다.

1966년 3월, 응우옌까오끼가 티를 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틱찌꽝은 민간 통치에 대한 불교도의 요구를 강조하며 시위를 조직했다. 불교도 활동가들은 중앙 베트남 전역에서 시위, 파업, 소요를 일으켰고, 일부 군대도 이에 동참했다. 틱찌꽝은 키에게 항상 도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티의 해임은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키는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선거와 사회 개혁을 약속하고, 틱찌꽝에게 경고했지만, 틱찌꽝은 키의 계획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했다. 틱찌꽝의 지지자들은 새 헌법을 만들 ‘헌법 의회’가 도의 그리고 시의 의회에서 선출될 것을 요구했지만, 키는 거부했다. 키는 왕실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투쟁가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틱찌꽝은 협상을 통해 투쟁을 계속했다.

5월에, 틱찌꽝은 키-티우 위원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비난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자국의 일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보았다. 후에의 거리로 정부 병력이 이동하자, 틱찌꽝은 불교도들에게 그들의 제단을 거리에 놓아 군인과 차량을 막도록 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탑밀러는 베트남 사람들이 가족 제단을 놓는 행위가 갖는 수치심의 깊이를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수천 명이 이에 동조했고, 경찰과 지역 베트남 공화국 군대 병력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틱찌꽝은 후에 온건해져서 하루에 몇 시간 동안 통행을 허용했고, "제국주의"로 미국을 비난하는 편지를 쓰고 단식을 계속했다.

키는 불교계 투쟁을 무시하고 군대를 보내 진압했고, 6월 22일, 틱찌꽝은 체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사이공으로 이송되어 무기한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했다. 1966년 9월, 그는 ‘베트남 통일 불교 연대’가 키와 티우에 의해 계획된 어떠한 선거도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6. 체포와 가택 연금

1965년 중반, 공군준장 응우옌까오끼와 장군 응우옌반티에우의 지휘 아래 군대가 총리와 임시 대통령으로 각각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 사회적 안정이 이어졌고, 남베트남의 네개 군단들을 통치하는 장군들은 나누어진 지리적 지역들을 통치했고,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받았다. 중앙베트남에서, 친불교 성향의 응우옌찬티는 1군단을 통치했고 틱찌꽝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우옌까오끼응우옌반티에우의 굳건한 통치는, 종교적 긴장은, 여전했다. 1개월 후에, 틱찌꽝응우옌반티에우의 사퇴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응오딘지엠의 '카톨릭 껀라오당'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인데, 그의 "파시스트적 성향"을 비난하면서, 그리고 껀라오당 구성원들이 응우옌까오끼를 못 살게 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틱찌꽝에게, 응우옌반티에우응오딘지엠의 카톨릭 통치의 시기의 상징이었는데, 발전이 종교에 바탕을 두었을 때 말이다. 그는 바라왔었는데 응우옌찬티 장군이, 그의 친불교적 성향으로 알려진 그가, 나라를 이끌기를, 응우옌반티에우를 그의 불교도들에 대한 과거 범죄 혐의에 대해 공격하기를 말이다. 틱찌꽝은 말했는데 “응우옌찬티는 명목상 불교도이지만, 종교에 대해 정말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긴장은 응우옌찬티 그리고 그를 위협으로 보는, 응우옌까오끼 사이에 존재했다. 1966년 3월에, 응우옌까오끼는 응우옌찬티를 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응우옌찬티의 그의 지역에서의 불교도들과의 좋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응우옌까오끼가 응우옌찬티의 퇴진을 위한 틱찌꽝의 지지를 얻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만약에 응우옌찬티의 사퇴에 반대하는 시위를 틱찌꽝이 조직하지 않으려 한다고 응우옌까오끼가 생각했다면, 그는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는데, 왜냐하면 민간 통치에 대한 불교도의 요구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 승려가 위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틱찌꽝이 항상 응우옌까오끼에게 도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왔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응우옌찬티가 물러나게 되었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광범위한 시위, 파업 그리고 소요가 불교도 활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서, 중앙베트남 전체에서 발발했고, 일부 군대 단위들이 그 불복종에 동참했고 응우옌까오끼의 정책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응우옌까오끼는 불교계 투쟁을 무시했고 400명의 전투 경찰뿐만 아니라 공군과 해군을 보냈는데 후에뿐만 아니라, 다 낭, 꽝 찌 그리고 퀴 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막힘없이 들어갔고, 복종하지 않는 경찰들을 체포했고 거리의 구석으로 제단들을 옮겼다. 6월 22일에, 틱찌꽝은 체포되었고 지역 군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후에 사이공으로 옮겨졌고 무기한 가택연금에 놓여졌는데, 거기서 오직 원로 불교 지도자들만 그를 볼 수 있었다. 틱찌꽝의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했는데, 비록 그가 여전히 체포 중인 상태에서 몇몇 발언들을 했지만 말이다. 1966년 9월에, 그는 선언했는데 ‘베트남 통일 불교 연대’는 응우옌까오끼응우옌반티에우에 의해 계획된 어떠한 선거도 거부할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평화 협정에 대해 지지하는 후보는 금지 당했기 때문이다. 1975년 4월에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려고 할 때, 틱찌꽝즈엉반민 장군이 권력을 잡도록 압력을 행사했는데, 그것은 이루어졌다. 사이공 함락이 이루어졌을 때, 틱찌꽝은 다시 가택연금에 놓여졌지만 이후에 석방되었다.

7. 말년

8. 사망

틱찌꽝은 2019년 11월 8일 오후 9시 45분에 쭈어뜨사에서 95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사망 6시간 후에 제단이나 향 없이 간소하게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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