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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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하 전투는 1757년 7년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프로이센은 작센을 점령한 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4개 종대로 보헤미아로 진격하여 프라하에서 합류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프로이센군에 맞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공격하려 했지만, 슈베린과 빈터펠트가 전사하고 프로이센군이 혼란에 빠졌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재정비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틈새를 공격, 오스트리아군은 패퇴하여 프라하 성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승리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략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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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전투 | |
---|---|
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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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프라하 전투 |
일부 | 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
날짜 | 1757년 5월 6일 |
장소 | 현재 체코 프라하, 보헤미아 |
좌표 | 50 |
결과 | 프로이센의 피로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로이센 왕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군주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사령관 1 | 프리드리히 대왕 |
사령관 1-1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
사령관 1-2 | 쿠르트 크리스토프 그라프 폰 슈베린 |
사령관 2 |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 |
사령관 2-1 |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백작 |
병력 규모 | |
병력 1 | 64,000명 |
병력 2 | 60,000명–61,000명 |
사상자 및 손실 | |
사상자 1 | 전사 및 부상 14,300명 p. 240. |
사상자 2 | 13,275명 |
2. 배경
7년 전쟁이 발발하고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면서, 프로이센은 선제 공격을 통해 작센을 점령하여 병참 기지로 활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보다는 자국 내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였다. 양국 군대는 각각 슐레지엔과 작센(프로이센), 보헤미아와 모라바(오스트리아)에서 동계 주둔에 돌입하였다.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은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인 카를 알렉산더 공자였다. 그의 군사 고문인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폰 브라운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먼저 공격하여 주도권을 확보하고 전장을 보헤미아가 아닌 작센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공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나폴레옹 전쟁 방식의 선례로 평가받는 기동을 펼쳤다. 오스트리아군이 넓게 분산되어 주둔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프로이센군은 4개 군단을 동원해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프라하를 향해 진격하는 구심 작전을 감행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단과 안할트-데사우 군단은 작센에서, 슈베린 군단과 베버른 군단은 슐레지엔에서 각각 침공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분산된 부대를 급히 후퇴시키면서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4월 21일에는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양측 군단이 교전하였으나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였다.
2. 1. 양측의 전략
1756년 작센을 항복시킨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겨울 동안 자신의 작은 왕국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단순히 방어에만 집중하는 것은 자신의 성격이나 군사 전략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또 다른 과감한 공격을 계획하기 시작했다.초봄, 프로이센군은 작센과 슐레지엔을 보헤미아에서 분리하는 산길을 따라 4개의 종대로 행군했다. 4개의 군단은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각개격파 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성공했다. 프리드리히의 군단이 모리츠 공작 휘하의 군단과 합류하고, 베베른 장군이 슈베린과 합류한 후, 두 군대는 프라하 근처로 집결했다.
한편, 오스트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기습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유능한 오스트리아 야전 사령관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백작 브라운은 능숙하게 후퇴하며 프라하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는 프라하 동쪽에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했고, 로렌 공자 카를 휘하의 추가 군대가 도착하여 오스트리아 병력이 6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제 공작이 지휘권을 잡았다.
브라운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지스카산과 타보르산에 거의 난공불락의 진지를 점령했다. 도시가 그들의 좌익에 있었고, 북쪽에는 가파른 협곡, 서쪽에는 아래에 개울이 있는 늪지대 경사지가 있었다. 두 오스트리아 사령관은 전략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공격을 원했지만, 카를은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패했지만 프라하로 후퇴하고 있을 것으로 알려진 쾨니히세크를 기다리기로 결정했고, 심지어 다운의 도착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5월 6일 오전 5시경, 프로이센군은 프라하 북쪽 프로세크 고지에 1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집결했고,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를 막기 위해 키스에게 3만 명을 이끌고 도시 서쪽으로 보냈다. 오스트리아군은 북쪽과 동쪽을 향해 전투 대형을 갖췄다.
7년 전쟁이 시작된 후, 각국은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갔다. 프로이센은 선제 공격으로 작센을 점령하여 병참 기지화했고, 오스트리아는 방비를 강화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과 작센에서,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와 모라바에서 동계 주둔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은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 공자였다.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폰 브라운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에 대비해 먼저 공격하여 주도권을 잡고 보헤미아가 아닌 작센을 전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카를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번 봄,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동은 나폴레옹 전쟁 방식의 선행 사례로 알려져 있다.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넓게 분산 주둔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4개 군단이 동서 양쪽 방향에서 동시에 프라하를 목표로 전진하는 구심 작전을 사용했다. 대왕 직솔 군단과 안할트-데사우 군단이 작센에서, 슈베린 군단과 베버른 군단이 슐레지엔에서 각각 침공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분산된 부대를 급히 퇴각시키고 포착되지 않도록 하는 데 그쳤고,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4월 21일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양측 군단이 교전하여 오스트리아가 패배했다.
양군은 프라하에 집결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성 안에 1만 5천 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6만 명으로 동쪽에 진을 쳤다. 프로이센군은 야코프 폰 카이트를 분파하여 블타바 강 좌안에서 프라하를 견제하고, 주력 6만 4천 명으로 오스트리아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2. 2. 양군의 전력
1756년 작센을 항복시킨 프리드리히 2세는 겨울 동안 프로이센 왕국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방어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선호하지 않았다.초여름, 프로이센군은 작센과 슐레지엔에서 보헤미아를 향해 4개의 종대로 진군했다. 이들은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 집결할 예정이었다. 각개격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단은 모리츠 공의 군단과, 베베른의 군대는 슈베린과 합류하여 프라하 근교에 집결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도 대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유능한 야전사령관 막시말리안 율리시즈 브라운 백작은 군대를 프라하 쪽으로 집중시켰다. 그는 프라하 동쪽에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를 갖췄고, 로트링겐의 카를 공이 지휘하는 부대와 합류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전력은 60,000명에 달했다. 전군의 총지휘권은 카를 공이 장악하였다.
폰 브라운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지스카(Ziska)와 타보르(Tabor)산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측 측면에, 북쪽에는 가파른 협곡, 서쪽에는 옅은 개울이 있는 경사진 늪지대가 있었다. 폰 브라운은 공격을 원했으나, 카를 공은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패해 프라하로 물러나고 있는 코닉세그(Konigseck)의 부대와, 가능하다면 다운의 부대까지 기다리려 했다.
5월 6일 오전 5시경, 프로이센군은 프로세크(Prosek) 고지대에 115,000명의 병력으로 집결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케이스에게 30,000명의 병력을 주어 마을 서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퇴로를 끊게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북쪽과 동쪽에서 다가오는 적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정렬했다.
7년 전쟁이 시작된 후, 프로이센은 선제공격으로 작센을 점령하고 병참 기지로 삼았고, 오스트리아는 방비를 강화했다. 프로이센군은 슐레지엔과 작센,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바에서 동계 주둔했다.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은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 공자였다.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폰 브라운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에 앞서 먼저 공격하여 주도권을 잡고 보헤미아가 아닌 작센을 전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카를은 따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분산된 것을 이용하여 4개 군단이 동서 양쪽에서 프라하를 향해 진격하는 구심 작전을 사용했다. 대왕 직솔 군단과 안할트-데사우 군단은 작센에서, 슈베린 군단과 베버른 군단은 슐레지엔에서 침공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분산된 부대를 급히 퇴각시키느라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다. 4월 21일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했다.
양군은 프라하에 집결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성 안에 15,000명의 병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60,000명은 동쪽에 진을 쳤다. 프로이센군은 야코프 폰 카이트에게 블타바 강 좌안에서 프라하를 견제하게 하고, 주력 64,000명으로 오스트리아군과 결전을 벌이려 했다.
3. 전투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한쪽 날개에 집중 공격하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으며, 프라하 전투에서도 슈베린에게 오스트리아군 우익 공격을 명령했다. 슈베린은 지형 정찰이 필요하다고 진언했고, 빈터펠트가 정찰한 결과, 오스트리아군 우익 전면에 초원이 펼쳐져 있어 공격에 적합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슈베린이 주공을 맡고, 지텐의 기병대가 좌익을 지원했다. 그러나 빈터펠트가 언덕 경사면만 보고 지형의 요철을 파악하지 못해,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 진지 앞에 초원 대신 늪지가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너머 언덕에 유리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브라운은 프로이센군의 우익 공격에 서둘러 부대를 이동시켜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양 군의 진형은 L자형이 되었다. 프로이센군은 늪지를 건너며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포격을 받았고, 언덕을 오르려다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빈터펠트는 총에 맞아 후송되었고, 부대는 동요하여 전진을 멈췄다. 슈베린은 군기를 들고 최전열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전진하려 했지만,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스트리아군에서도 브라운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프라하로 후송되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막고 반격하며 압박했지만, 그 과정에서 우익과 중앙 사이에 간극이 발생했다. 대왕은 좌익 부대를 재정비하고 제2열을 투입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게 했다. 브라운슈바이크, 하인리히 등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면서 중앙의 간극으로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군을 분단시켰다. 지텐의 기병 부대는 오스트리아군 최우익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침투,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무너져 대부분 프라하 성 안으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멀리 있는 아군을 향해 패주했다.
3. 1. 프로이센군의 초기 공세

프리드리히는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슈베린은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정찰대를 보내자고 그를 설득했다. 정찰대는 근교의 완만한 녹색 초원지대를 둘러보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을 공격할 기회라고 보고했다.[4][5] 프로이센군은 오전 7시경 진군을 시작했고, 오전 10시경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이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까지 성공적으로 공격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야전 사령관 폰 브라운은 6개의 보병 연대를 보내 동남쪽의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빈터펠트와 동행한 슈베린은 최종적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이 공격은 빈터펠트가 지휘하는 보병부대가 선두를 이끌었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그들이 초원지대가 아닌 작은 연못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전투를 벌이며 이 지역을 돌파하는 동안 빈터펠트는 머스캣 총탄에 맞았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슈베린은 스스로 이들을 재집결시킨 후에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슈베린은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이 쏜 산탄에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 나중에 전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돌격을 감행할 것을 명했다.[2]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프로이센군의 혼란을 알아채고 프로이센군을 경사지에서 몰아내기 시작했으나,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던 부대와 여전히 북쪽을 향해 있던 나머지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빈틈이 벌어졌다. 이때 폰 브라운은 프로이센 보병대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프라하로 실려 갔다.
3. 2. 오스트리아군의 반격과 전열 붕괴
프리드리히는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슈베린은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정찰대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정찰대는 근처의 완만한 초원지대를 보고 오스트리아군 후방 공격 기회라고 보고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전 7시경 진군하여 오전 10시경 오스트리아군 사령관들이 알아챌 때까지 공격 위치를 확보했다. 야전 사령관 폰 브라운은 6개의 보병 연대를 보내 동남쪽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2]
빈터펠트와 동행한 슈베린은 공격을 준비했다. 빈터펠트가 지휘하는 보병부대가 선두를 이끌었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초원지대가 아닌 작은 연못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투를 벌이며 이 지역을 돌파하는 동안 빈터펠트는 머스캣 총탄에 맞았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슈베린은 이들을 재집결시킨 후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쏜 산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돌격을 명령했다.[2]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프로이센군의 혼란을 알아채고 이들을 경사지에서 몰아내기 시작했으나,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던 부대와 북쪽을 향해 있던 나머지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빈틈이 생겼다. 폰 브라운은 프로이센 보병대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프라하로 실려가 며칠 후 사망한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폰 치이텐 장군이 남쪽에서 프로이센군을 재집결시키는 동안, 하우트카르모이 장군과 베베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벌어진 틈새를 알아차리고 프로이센 보병대를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 소속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오스트리아군 좌익 북쪽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틈에 프로이센군이 계속 공격을 가했고,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여 타보르 산 서쪽 끝자락에 새로운 전열을 구성해야 했다.[3] [4] [5] [6]
3. 3. 오스트리아군의 패퇴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각 공격을 명령했지만, 슈베린은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정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찰 결과 오스트리아군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완만한 경사의 초원 지대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오전 7시경 진군을 시작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오전 10시경에야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2]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폰 브라운은 6개의 보병 연대를 보내 남동쪽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빈터펠트와 동행한 슈베린은 공격 준비를 마쳤다. 빈터펠트가 이끄는 보병대가 공격 선두에 섰으나, 이들은 초원 대신 연못이 있는 지형에 도착했다. 프로이센 보병대가 혼란에 빠진 사이, 빈터펠트는 머스캣 총탄에 맞았다. 슈베린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산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즉시 공격을 명령했다.[4][5][6]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프로이센군의 혼란을 틈타 이들을 경사지에서 밀어내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틈이 벌어졌다. 폰 브라운은 프로이센 보병대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프라하로 후송되었고, 며칠 뒤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폰 치이텐 장군이 남쪽에서 프로이센군을 재집결시키는 동안, 하우트카르모이 장군과 베베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틈새를 발견하고 병력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 소속 크로아티아인들은 북쪽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틈새로 프로이센군이 계속 공격해 들어오자 결국 타보르 산 서쪽 끝자락에 새로운 전열을 구축해야 했다.
오후 3시경,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여전히 전열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남쪽에서 측면 공격을 가했다. 카를 공은 프라하로 퇴각했으며,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후위를 맡아 분전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프라하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승리했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프로이센군은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슈베린과 빈터펠트 등 유능한 장군들을 잃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프라하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포위 작전을 선택하게 되었다.[7]
프리드리히 대왕은 4만 명의 프로이센군과 7만 5천 명의 프라하 주민들이 곧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콜린 전투에서 구원군을 파견했고, 결국 프리드리히는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했다. 프리드리히는 카를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카를은 모라비아의 다운 군대의 구원을 기대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회전에서 패배하여 군대의 3분의 2와 총사령관이 프라하에 포위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4. 1. 전술적/전략적 평가
오스트리아군은 12,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4,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리드리히는 14,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단순히 사상자만 비교했을 때는 오스트리아 측의 사상자가 프로이센 측보다 적었다.[2]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프로이센의 승리가 컸다.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인 카를과 4만 명의 군대를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군단이 항복했다면, 오스트리아의 권위와 전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빈 진격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프리드리히는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지만, 슈베린은 그를 설득하여 오스트리아 우익을 정찰하도록 했다. 슈베린은 완만하게 경사진 푸른 초원이 오스트리아 후방에 대한 더 나은 공격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슈베린의 리더십과 야전 사령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연대 지휘관들의 독립적인 주도권은 전투의 승리적인 결론에 주로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6]
전투 전반에 걸쳐 프리드리히 국왕의 정확한 행방은 논쟁의 대상이다. 국왕에 대한 몇 안 되는 기록된 목격담은 그가 거의 전투 전체를 전장의 남쪽에서 보냈다는 것을 나타낸다.[3] 프리드리히 국왕은 잦은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위통으로 고통받았다고 주장하며, 정찰 문제와 슈베린이 전투가 시작될 때 프라하 근처의 중요한 마을인 슈테르보홀에 신속한 공격의 필요성을 촉구했을 때 슈베린에게 의존했다.[4][5]
4. 2. 이후 전개
오스트리아군은 12,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4,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리드리히는 14,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단순히 사상자만 비교했을 때는 오스트리아 측의 사상자가 프로이센 측보다 적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서 공성전을 벌이기보다 포위작전을 펼쳤다. 프리드리히는 40,000명의 병력과 75,000명의 주민들이 얼마 안 있어 성내의 물자를 모두 소비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오스트리아의 지원군을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 콜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7]프로이센의 승리는 큰 희생을 치렀다. 프리드리히는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그의 최고 장군 2명이 작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슈베린은 적의 포화에 사망했고 빈터펠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카를 공작 또한 큰 피해를 보아 8,9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4,500명이 포로로 잡혔다.[7] 그는 막대한 사상자를 감안하여 프라하 성벽에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포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40,000명의 병사들이 75,000명의 거주민과 함께 곧 도시의 식량을 소모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오스트리아가 콜린 전투에서 그에 대항하여 배치한 구원군을 고려하지 못했고, 그는 곧 포위를 포기해야 했다. 프로이센군은 카를과 4만 명의 군대를 프라하에 포위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를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카를은 모라비아의 다운 군대의 구원을 기대하며 이를 거부했다.
오스트리아군은 1만 7천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프로이센군도 측면 공격의 실패로 1만 4천 명을 잃었다. 따라서 전술적으로는 소규모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그 승리가 컸다.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인 카를과 주력 부대인 4만 명의 군대를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뛰어난 기동력이었다. 만약 이 군단이 항복했다면, 오스트리아의 권위와 전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빈 진격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회전에서 패배하여 완전한 파국에 빠졌다. 군대의 3분의 2와 총사령관이 프라하에서 포위되었어야 했으니, 파국이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참조
[1]
서적
The Battle Book
Arms and Armour Press
1992
[2]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Routledge
2016
[3]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Routledge
2016
[4]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Routledge
2016
[5]
서적
The Seven Years War in Europe, 1756–1763
Pearson/Longmont
2008
[6]
서적
The Seven Years War in Europe, 1756–1763
Pearson/Longman
2008
[7]
문서
Szabo
[8]
문서
クラウゼヴィッツ 著\岩田英雄 訳『戦争論』
[9]
문서
同上
[10]
서적
The Battle Book
Arms and Armour Pres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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