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넬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피사넬로(Pisanello)는 1380년에서 1395년 사이에 태어나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 사망한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메달 제작자이다. 베로나 화풍의 영향을 받아 초기 교육을 받았으며,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조수로 활동하며 섬세한 화풍을 익혔다. 만토바, 베로나, 로마 등지에서 활동하며 프레스코화, 초상화, 메달 등을 제작했으며, 특히 초상 메달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수태고지》,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 《성 유스타키우스의 환시》 등이 있으며, 15세기 국제 고딕 양식의 마지막 예술가이자 르네상스 미술의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피사넬로의 삶은 다소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는 1380년에서 1395년 사이에 피사에서 태어났으며, 1450년과 1455년 사이(아마도 1455년 7월 14일과 10월 8일 사이)에 사망했다. 그는 피사 출신이었지만 초기에는 베로나 지역의 산 비질리오 술 라고에서 보냈다.[2] 그의 초기 화풍은 베로나 화풍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아마도 베로나 화가(어쩌면 알티키에로 또는 스테파노 다 베로나)에게 초기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2]
1422년, 피사넬로는 곤차가 가문이 통치하는 만토바로 갔다. 당시 당주는 어린 루도비코 3세 곤차가(만토바 후작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의 아들)였다. 피사넬로는 1440년대까지 곤차가 가문을 위해 일했다.
2. 초기 생애 및 훈련
2. 1. 베로나 화풍의 영향
피사넬로는 피사 출신이지만, 초기에는 베로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초기 화풍은 베로나 화풍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알티키에로(Altichiero) 또는 스테파노 다 베로나(Stefano da Verona)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2] 베로나의 카스텔베키오 박물관에 있는 그의 초기 작품 "메추라기의 마돈나"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와 스테파노 다 베로나의 화풍이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2. 2.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조수
1415년에서 1420년 사이, 피사넬로는 베네치아에서 저명한 화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조수로 일하며 그의 세련되고 섬세하며 디테일한 화풍을 익혔다. 또한 젠틸레로부터 귀금속과 아름다운 직물에 대한 취향을 계승하여 후대 작품에 반영하였다. 조르조 바사리는 피사넬로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작업실에서도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파올로 우첼로와도 알고 지냈을 것이라고 한다.
피사넬로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함께 두칼레 궁전 벽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벽화, 만토바와 파비아의 궁전 벽화 등에서 함께 작업했으나, 이 벽화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3. 만토바, 베로나, 로마에서의 활동
피사넬로는 1424년 다시 베로나에 머물렀다. 연구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같은 해 피사넬로는 파비아에서 사냥, 낚시, 기마창 시합 장면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들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의뢰였지만, 오늘날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424년부터 1426년 사이, 그는 다시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으로 돌아가, 현재 남아있는 대표작 중 하나인 프레스코화 「수태고지」(베로나, 산 페르모 마조레 성당)를 그렸다. 이 작품은 같은 성당에 있는 난니 디 바르톨로(피렌체의 조각가)가 만든 니콜로 디 브렌조니의 기념비 상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
스승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142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로마에서 사망했지만, 그 당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은 미완성이었다. 피사넬로는 1431년부터 1432년에 걸쳐 이 프레스코화들을 완성했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17세기에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대성당을 수리하면서 소실되었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의 판화 소묘 컬렉션에는 보로미니가 이 프레스코화들을 베껴 그린 옅은 색조의 스케치가 남아 있다. 피사넬로는 로마에 있는 동안 르네상스의 고전적 양식에 점점 더 영향을 받게 되었다.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피사넬로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에도 여행을 하고 많은 궁정에 소개되었다. 피렌체에도 한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초상화」(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진품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음), 「남자의 초상」(제노바, 팔라초 로쏘 소장)이라는 두 점의 중요한 초상화를 남겼다.
1433년부터 1438년까지는 다시 베로나에 머물렀다. 이 시대의 프레스코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1436-1438년, 베로나, 산타나스타지아 성당 펠레그리니 예배당)가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 벽의 누수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복원이 필요하다. 피사넬로는 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많은 스케치를 남겼는데, 그중 많은 수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무렵의 작품인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런던, 국립미술관)는 그 완벽한 기교 때문에 오랫동안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 판화는 동물을 옆모습 또는 고정된 자세로 미니어처처럼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은 그림(판에 템페라)의 주제인 성인의 환시는 「고귀한」 동물들(말, 사냥개, 사슴, 곰 등)과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사냥하는 궁정인-을 그리기 위한 구실로 보인다.
3. 1. 베로나에서의 프레스코화 작업
피사넬로는 1424년 베로나로 돌아와 산 페르모 마조레 성당에 프레스코화 《수태고지》를 그렸다. 이 작품은 난니 디 바르톨로가 만든 니콜로 디 브렌조니의 기념비 상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같은 해, 일부 연구자들은 피사넬로가 파비아에서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를 위해 사냥, 낚시, 기마창 시합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에는 소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433년부터 1438년까지 피사넬로는 다시 베로나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그는 산타나스타지아 성당 펠레그리니 예배당에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19세기 말 벽의 누수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복원이 필요했다.
3. 2. 로마에서의 활동과 르네상스 영향
스승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142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로마에서 사망했지만, 그 당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은 미완성이었다. 피사넬로는 1431년부터 1432년에 걸쳐 이 프레스코화들을 완성했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17세기에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대성당을 수리하면서 소실되었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의 판화 소묘 컬렉션에는 보로미니가 이 프레스코화들을 베껴 그린 옅은 색조의 스케치가 남아 있다. 피사넬로는 로마에 있는 동안 르네상스의 고전적 양식에 점점 더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피렌체 및 기타 도시 방문
피사넬로는 여러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며 여러 궁정에 소개되었다. 그는 한동안 피렌체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두 개의 중요한 초상화를 그렸는데, 현재 비엔나 쿤스트히스토리셰스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지기스문트 황제" (하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와 제노아 팔라초 로쏘에 있는 "남성 초상화"이다.
5. 베로나로의 귀환과 대표작
피사넬로는 여러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며 여러 궁정에 소개되었고, 한동안 피렌체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두 개의 중요한 초상화를 그렸는데, 지기스문트 황제 (현재 비엔나 쿤스트히스토리셰스 미술사 박물관 소장, 작가에 대한 논쟁 있음)와 제노아 팔라초 로쏘에 있는 "남성 초상화"이다. 1433년에서 1438년 사이, 베로나로 돌아와 산타나스타지아 성당의 펠레그리니 예배당에 대표작 "트라브존 공주와 성 조르주"()를 그렸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에 물이 스며들어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복원되었다. 그는 이 그림을 위해 많은 수의 드로잉을 준비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6. 초상화와 메달 제작
1435년부터 피사넬로는 초상화와 메달 제작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3] 그는 페라라의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를 만났으며,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에스테 공주 초상화''를 제작했다.[3]
피사넬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메달 제작가 중 한 명이었으며, 어쩌면 최고였을 것이다. 페데리코 체리와 같은 미술사학자들의 증언이 이를 증명한다.[3] 그는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이해하는 장르를 재창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 앞면에는 초상화를, 뒷면에는 상징적인 장면을 새겼다.[4]
1439년, 피렌체 공의회는 비잔틴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을 벌였다. 이때 피사넬로는 황제의 기념 메달을 제작했는데, 이는 고전 시대 이후 최초의 초상 메달이었다.
따라서 피사넬로는 초상 메달과 관련 메달 예술 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피사넬로는 생전에 메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후대에 여러 번 모방되었다. 메달 예술은 피사넬로의 예술에서 벗어났을 때 쇠퇴했다. 그 이전에는 소수의 메달들이 주화처럼 주조되었다. 반면 피사넬로는 청동 저부조와 같은 방식으로 메달을 제작하여 화가이자 조형가의 작품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메달에 ''Opus Pisani pictoris'' (피사노 화가가 제작)라고 서명하기도 했다. 그의 견해로는 메달의 초상화가 그림의 초상화와 같았다. 그는 심지어 체칠리아 곤자가 메달의 뒷면에 유니콘과 같은 우화를 추가하여 공주의 고귀한 성격을 강조했다.
6. 1. 레오넬로 데스테와의 만남
1435년부터 피사넬로는 초상화와 메달 제작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3] 그는 페라라의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를 만났으며,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에스테 공주 초상화''를 제작했다.[3] 공주 초상화''는 나비와 매발톱꽃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옆모습을 담고 있으며, 모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마르게리타 곤자가 데스테, 지네브라 데스테 또는 체칠리아 곤자가라고 추측되고 있다.피사넬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메달 제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그는 앞면에는 초상화를, 뒷면에는 상징적인 장면을 새기는 메달 장르를 재창조했다.[4] 곤자가, 에스테, 말라테스타, 아라곤 왕관 등 이탈리아 궁정 영주들의 메달은 이상화와 현실주의의 완벽한 조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3] 당대 권력자들은 로마 시대 주화처럼 앞면에 측면상으로 묘사되었고, 뒷면에는 우화적 장면이나 상징적 인물들이 새겨졌다.[3]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비잔틴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할 때, 피사넬로는 황제의 기념 메달을 제작했는데, 이는 고전 시대 이후 최초의 초상 메달이었다. 그는 또한 황제와 그의 수행원들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루브르 박물관과 시카고)을 남겼다.
피사넬로는 초상 메달과 관련 메달 예술 분야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생전에 메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3] 그는 자신의 메달에 ''Opus Pisani pictoris'' (피사노 화가가 제작)라고 서명하기도 했다. 그의 견해로는 메달의 초상화가 그림의 초상화와 같았다. 그는 체칠리아 곤자가 메달의 뒷면에 유니콘과 같은 우화를 추가하여 공주의 고귀한 성격을 강조했다.
6. 2. 초상 메달의 창시자
피사넬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메달 제작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초상 메달이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창시했다.[3] 그는 앞면에 인물의 측면 초상화를, 뒷면에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장면을 새겨 넣은 메달을 제작했다.[4] 곤자가, 에스테, 말라테스타, 아라곤 왕관 등 이탈리아 유력 가문들의 메달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대의 권력자들은 로마 시대의 주화처럼 앞면에 측면상으로 묘사되었고, 뒷면에는 우화적인 장면이나 매우 흥미로운 상징적 인물들이 새겨졌다.[3]1435년부터 피사넬로는 초상화와 메달 제작에 관심을 가졌으며, 레오넬로 데스테를 만나 그의 유명한 ''에스테 공주 초상화''를 제작했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의 기념 메달을 제작했는데, 이는 고전 시대 이후 최초의 초상 메달이었다. 그는 황제와 그의 수행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피사넬로는 초상 메달과 관련 메달 예술 분야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생전에 메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피사넬로는 청동 저부조와 같은 방식으로 메달을 제작하여 화가이자 조형가의 작품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메달에 ''Opus Pisani pictoris'' (피사노 화가가 제작)라고 서명하기도 했다. 그는 체칠리아 곤자가 메달의 뒷면에 유니콘과 같은 우화를 추가하여 공주의 고귀한 성격을 강조했다.
7. 후기 생애
7. 1. 베네치아와의 갈등
1438년, 밀라노의 통치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피사넬로는 잔프란체스코 곤차가와 함께 만토바에 있었으며, 베로나 점령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 정부는 피사넬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엄중한 처벌을 위협했으나, 강력한 친구의 중재로 처벌을 면했다.7. 2. 밀라노, 페라라, 만토바에서의 활동
그는 1440년부터 1441년까지 밀라노에 머문 후, 1441년 페라라로 돌아가 『레오넬로 데스테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성모자와 성 안토니우스, 성 게오르기우스』[2]도 아마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일 것이다. 만토바의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에 있는 인상적인 프레스코화인 『기마 전투도』는 1447년 이후의 작품이다.[2]7. 3. 나폴리에서의 말년
1448년 12월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나폴리에서 아라곤 왕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2] 시인 포르첼리오(잔안토니오 디 판도니, Gian Antonio di Pandoni)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송가를 지었다.[2] 그 후 5~6년 더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2]8. 유산
피사넬로는 15세기 국제 고딕 양식의 마지막이자 가장 훌륭한 예술가인 동시에 르네상스 미술의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자신만의 화파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짧게 빛났고, 사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이고 고전적인 문화가 부상하면서 빠르게 잊혀졌다.
피사넬로의 작품은 로마, 베네치아, 베로나, 피스토이아 등지에서 볼 수 있으며, 런던 국립미술관에는 ''성 유스타키우스의 환시''와 ''성 조르주와 성 안토니우스 수도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 두 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많은 그림은 현재 밀라노의 암브로지아나 도서관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 주요 작품
피사넬로의 회화 작품은 소묘와 메달을 제외하면 진작이 10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 계절의 성모(1420년경) 베로나 카스텔베키오 미술관
- 수태고지(1424-1426년) 베로나, 산 페르모 마조레 성당
-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1436-1438년) 베로나, 산타나스타지아 성당
- 성 유스타키우스의 환시(1436-143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공주 초상(1438년경)
- 기마 전투도(1440년대) 만토바, 팔라초 두칼레
- 레오넬로 데스테의 초상(1441년경) 베르가모, 아카데미아 카라라
- 성모자와 성 안토니우스와 성 게오르기우스(1445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9. 1. 회화
피사넬로의 회화 작품은 소묘와 메달을 제외하면 진작이 10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계절의 성모(1420년경) 베로나 카스텔베키오 미술관
- 수태고지(1424-1426년) 베로나, 산 페르모 마조레 성당
-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1436-1438년) 베로나, 산타나스타지아 성당
- 성 유스타키우스의 환시(1436-143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공주 초상(1438년경)
- 기마 전투도(1440년대) 만토바, 팔라초 두칼레
- 레오넬로 데스테의 초상(1441년경) 베르가모, 아카데미아 카라라
- 성모자와 성 안토니우스와 성 게오르기우스(1445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9. 2. 메달 (일부)
소묘와 메달을 제외한 회화 작품의 진작은 10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 계절의 성모(1420년경) 베로나, 카스텔베키오 미술관
- 수태고지(1424-1426년) 베로나, 산 페르모 마조레 성당
-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1436-1438년) 베로나, 산타나스타지아 성당
- 성 유스타키우스의 환시(1436-143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공주 초상(1438년경)
- 기마 전투도(1440년대) 만토바, 팔라초 두칼레
- 레오넬로 데스테의 초상(1441년경) 베르가모, 아카데미아 카라라
- 성모자와 성 안토니우스와 성 게오르기우스(1445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9. 3. 소묘
피사넬로는 여러 권의 스케치북을 편집했는데, 우아한 의상이나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된 동식물 등을 세밀하게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동시대 화가들과 달리, 그의 스케치는 완성 그림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15세기 당시 그의 스케치는 보석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으며, 당시 우아한 복장(눈길을 끄는 모자 등)의 지표였다.피사넬로는 1438년 동로마 제국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을 때 황제와 시종들의 초상 스케치(루브르 박물관 소장)를 여러 점 제작했다.
10.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medal-leonello-deste
https://collections.[...]
[2]
백과사전
Pisano, Vittore
[3]
논문
1999
[4]
웹사이트
Italian painter Antonio Pisano
https://www.digitalj[...]
2020-11-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