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 지카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타 지카시는 마쓰우라 당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아리마 요시사다의 아들로 태어나 하타 모리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가독 상속 과정에서 오이에 소동이 일어났으며, 류조지 가문과의 관계를 통해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영지를 안도받았지만, 조선 출병 과정에서 갈등을 빚어 영지를 몰수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90년대 사망 - 모하마드 호다반다
모하마드 호다반다는 사파비 왕조의 샤로, 시력이 좋지 않고 정치적 의지가 약하여 재위 기간 동안 왕조가 혼란에 빠졌으며 아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 히젠 아리마씨 - 아리마 하루노부
아리마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당주이자 히노에 번 번주였으며, 가톨릭 개종 후 덴쇼 소년사절단 파견, 임진왜란 참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강화와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 히젠 아리마씨 - 이토이가와번
이토이가와번은 에도 시대 에치고국 이토이가와시에 존재했던 번으로, 여러 가문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특히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메이지 유신까지 통치했으나, 고쿠다카가 낮고 자연재해가 잦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보신 전쟁 이후 폐번치현을 거쳐 니가타현에 병합되었다.
하타 지카시 | |
---|---|
기본 정보 | |
씨명 | 히젠 아리마 씨 → 하타 씨 |
씨족 | 히젠 아리마 씨 → 하타 씨 |
이름 | 하타 지카시 / 하타 노부토키 |
이명 | 진 (시게시), 노부토키, 지카시 |
어릴 적 이름 | 후지도마루 (후지도) |
관위 | 시모쓰케노카미, 미카와노카미 |
주군 | 류조지 다카노부 → 시마즈 요시히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생년 | 불명 |
사망 | 분로쿠 3년 (1594년) 또는 게이초 원년 (1596년) 또는 게이초 2년 (1597년) |
계명 | 다이오 료테쓰 다이코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리마 요시사다(이설 있음), 양아버지: 하타 모리 |
형제 | 아리마 요시즈미, 마센시아 (사이고 스미타카 실), 지카시, 아리마 하루노부, 지치와 준토모, 카타리나 (오무라 요시아키 실), 아리마 소부, 아리마 스미자네, 아리마 스미타다, 외 |
배우자 | 정실: 심게쓰고젠 (아오야마 우네메노쇼의 딸) 계실: 야스코히메 (히데노마에, 묘안니, 류조지 다카노부의 양녀이자 여동생)류조지 마사이에의 자식 |
양자 | 손타로 (손자부로) |
2. 생애
하타 지카시는 아리마 요시사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대 당주 하타 모리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딸과 결혼한 아리마 씨 가문에서 지카시를 양자로 들여 하타 가문의 가독을 잇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2]
1569년(에이로쿠 12년), 오이에 소동에서 류조지 다카노부와 아리마 요시사다의 원군을 얻어 기시타케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지카시는 성인이 되면서 오토모 요시시게로부터 "진(親)" 자를 편휘로 받아 "하타 시모노카미 지카시"라 칭했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공세에 아리마 씨와 결탁하여 화친과 이반을 반복했고, 오토모 씨의 쇠퇴와 함께 지쿠젠 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2]
1583년(덴쇼 11년) 혹은 1577년(덴쇼 5년)에 류조지 다카노부의 정실의 딸과 결혼하여 종속의 뜻을 나타냈다. 1584년(덴쇼 12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출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적인 원한으로 하라다 노부타네의 영내를 공격하여 카노이에 전투를 일으켜 대패했다. 다카노부 사후에는 시마즈 씨와 연합하여 하라다 씨·마쓰우라 씨 등과 항쟁했다.
1587년(덴쇼 1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히데요시를 알현했으나, 시마즈 씨 토벌에 참전하지 않아 히데요시의 불쾌감을 샀다. 그러나 조선 출병을 염두에 두고 있던 히데요시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류조지 씨)의 주선으로 영지를 안도받아 형식상 도요토미 가문의 직신이 되었다.[1]
1588년(덴쇼 16년) 2월부터 3월까지 조라쿠하여 센노 리큐 등과 다과회를 열고, 같은 해 3월 30일, 미카와노카미 관직과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하타 씨는 류조지 가문의 기기 다이묘 취급을 받게 된다.[1]
이후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에 대비해 나고야에 전선 기지(나고야 성)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지만, 자신의 영지가 적합하지 않다고 진언하여 다시 불쾌감을 샀다.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을 앞두고 하카타에 히데요시가 도착했을 때도, 여러 장수들은 즉시 맞이했지만 하타 씨는 늦게 도착하여 히데요시의 인상을 더욱 나쁘게 했다.[1]
임진왜란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기기로서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인 진을 쳤다. 이는 군령 위반으로 간주되어 다시 히데요시의 불쾌감을 샀다.[1] 1593년 5월, 웅천 주둔 중 비겁한 행위가 있었다고 나베시마에게 고소당해 소환 명령을 받았다.[1]
귀국길에 올랐지만, 격노한 히데요시는 나고야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고, 변명도 못한 채 배 위에서 영지를 몰수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맡겨지도록 명령받았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맡겨져 히타치 국쓰쿠바에서 유배 생활 중 병사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야사도 존재한다. 몰년은 불분명하다.
2. 1. 가독 상속
하타 지카시는 아리마 요시사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대 당주 하타 모리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딸과 결혼한 아리마 씨 가문에서 지카시를 양자로 들여 하타 가문의 가독을 잇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2]이 가독 상속 과정에서 하타 모리의 후실과 마호(신호라고도 불리며, 아리마 하루스미의 아들 또는 손자) 일파는 지카시(후지마루)를 옹립하려 했고, 다른 일파는 하타 모리의 동생 하타 시마노카미를 옹립하려 하여 오이에 소동이 일어났다.
1564년(에이로쿠 7년) 8월 7일, 마호는 하타 시마노카미 옹립파의 우두머리였던 히다카 스케에게 차를 대접하여 독살했다. 이에 분노한 히다카 스케의 아들 히다카 요시는 그해 12월 29일, 세밑의 축원 기도를 위해 성에 들어갔을 때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 불을 지르고 후실 일파를 죽이려 했으며, 혼란을 틈타 성을 점령했다. 후실과 지카시는 시녀였던 히다카 요시의 딸을 인질로 삼아 겨우 도망쳐 마쓰우라 군오무라의 쿠사노 씨에게 의지했다. 이후 후실 일파는 거울성으로 도망쳐 류조지 씨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복권을 꾀했다. 한편, 히다카 일파는 하타 마사(하타 모리의 조카 하타 타카의 막내 동생)를 옹립하여 이키 육인중과 대립했고, 마쓰우라 당의 마쓰우라 타카노부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마쓰우라 다카노부는 자신의 막내 아들 마쓰우라 노부자네와 히다카 요시의 딸을 혼인시켜 노부자네를 대장으로 삼아 이키 국에서 싸우게 했다.
1569년(에이로쿠 12년) 12월, 후실 일파는 류조지 타카노부와 아리마 요시사다의 원군을 얻어 기시타케 성을 공격했다. 히다카는 마쓰우라 다카노부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마쓰우라 군의 도착이 늦어져 성을 포기하고 이키로 도망쳤다. 그 후, 히다카 요시는 하타 마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이키 수호를 자칭하며 마쓰우라 씨의 휘하에서 자주 다퉜지만, 마쓰우라 다카노부는 양자를 화해시켰다.
지카시는 성인이 되면서 오토모 요시시게로부터 "진(親)" 자를 편휘로 받아 "하타 시모노카미 지카시"라 칭했다.
2. 2. 류조지 가문과의 관계
류조지 다카노부의 공세에 아리마 씨와 결탁하여 화친과 이반을 반복했다. 오토모 씨의 쇠퇴와 함께 지쿠젠 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2]1583년(덴쇼 11년) 혹은 1577년(덴쇼 5년)에 류조지 다카노부의 정실의 딸 오야스(아버지는 류조지 다네히데)와 결혼하여 종속의 뜻을 나타냈다. 이 여성은 후세에 "히데노마에"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버지의 별명으로 여겨지는 '''노부토키'''도 이 무렵에 칭한 것으로 보인다.
1584년(덴쇼 12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는 아리마 씨와 류조지 씨 모두 친족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여를 피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출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적인 원한으로 하라다 노부타네의 영내를 공격하여 1584년(덴쇼 12년) 3월 13일에 카노이에 전투를 일으켜 대패했다. 다카노부 사후에는 시마즈 씨와 연합하여 하라다 씨·마쓰우라 씨 등과 항쟁했다.
2. 3. 도요토미 정권 하
1587년(덴쇼 1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히데요시를 알현했으나, 시마즈 씨 토벌에 참전하지 않아 히데요시의 불쾌감을 샀다. 그러나 조선 출병을 염두에 두고 있던 히데요시는 거점 지역(히젠 나고야) 지배자인 하타 씨의 이용 가치를 인정했고, 나베시마 나오시게 (류조지 씨)의 주선으로 영지를 안도받아 형식상 도요토미 가문의 직신이 되었다.[1]덴쇼 16년(1588년) 2월부터 3월까지 조라쿠하여 센노 리큐, 쓰다 소큐 등과 다과회를 열고 명물도 몇 가지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도(茶道)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해 3월 30일, 미카와노카미 관직과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이는 하타 가문과 같은 고쿠진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이후 하타 씨는 류조지 가문의 기기 다이묘 취급을 받게 된다.[1]
이후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에 대비해 나고야에 전선 기지(나고야 성)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때 자신의 영지인 이곳은 대군을 주둔시킬 본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진언하여 다시 불쾌감을 샀다. 분로쿠의 역(임진왜란)을 앞두고 하카타에 히데요시가 도착했을 때도, 여러 장수들은 즉시 맞이했지만 하타 씨는 늦게 도착하여 히데요시의 인상을 더욱 나쁘게 했다.[1]
분로쿠의 역에서는 류조지 씨의 명을 대신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기기로서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자신은 나오시게의 부하가 아니라 독립된 다이묘라고 주장하며 출발일도 마음대로 바꾸고 나베시마의 진영을 떠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인 진을 쳤다. 이는 군령 위반으로 간주되어 다시 히데요시의 불쾌감을 샀다.[1] 1593년 5월, 웅천 주둔 중 비겁한 행위가 있었다고 나베시마에게 고소당해 소환 명령을 받았다.[1]
귀국길에 올랐지만, 격노한 히데요시는 나고야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고, 변명도 못한 채 배 위에서 지금까지의 과실을 책망하는 서장을 받고 영지를 몰수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맡겨지도록 명령받았다.[1]
2. 4. 최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맡겨져 히타치 국쓰쿠바에서 유배 생활 중 병사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오명을 씻기 위해 정유재란(게이초의 역)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야사도 존재한다. 몰년은 불분명하다.참조
[1]
문서
龍造寺政家の子
[2]
서적
[3]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