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유재란은 1597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임진왜란 이후 휴전 상태에서 재개되었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침략하여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양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철수했고,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일본군의 철수를 막지 못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문화재 손실을 입었으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정권 교체의 혼란을 겪었다. 명나라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임진왜란이 명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요토미 정권 - 태합검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의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통일된 조세 시스템 구축, 효율적인 세수 확보 및 징병을 위해 일본 전국의 토지를 조사한 사업이 태합검지이다. - 도요토미 정권 - 오대로
오대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보좌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5명의 유력 다이묘가 임명되어 구성된 합의제 최고 권력 기구로서, 도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권력 다툼으로 붕괴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개창에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분쟁 - 울산성 전투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한 전투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에 패배했으며, 이는 정유재란의 전황과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분쟁 - 절이도 해전
절이도 해전은 1598년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거금도 북방 해역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여 고흥반도 서쪽 제해권을 장악한 해전이다. - 1597년 분쟁 - 벽파진 해전
- 1597년 분쟁 - 어란포 해전
어란포 해전은 1597년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이며,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명량 해전 승리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정유재란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 정유재란 |
전체 | 임진왜란 |
날짜 | 1597년 8월 27일 ~ 1598년 12월 16일 |
장소 | 한반도 하삼도 일대 |
결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조명연합군이 전략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쌍방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음. |
교전 세력 | |
![]() | |
![]() | |
지휘관 | |
조선군 | 내용: | * [[파일:File1.svg|19px]] 국왕 선조 |
명군 | 내용: | * [[파일:Left-facing dragon pattern on Wanli Emperor's imperial robe.svg|19px]] 병부상서 겸 총독 형개 |
일본군 | 내용: | * [[파일:Taiko Giri.svg|20px]] 태합 겸 태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 [[파일:Kaga Umebachi(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18px]] 대로 마에다 도시이에 * [[파일:Mitsubaaoi.svg|18px]]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 [[파일:Japanese Crest Uesugi Sasa of Kenmonshokamon.svg|18px]] 대로 우에스기 가게카쓰 * [[파일:大一大万大吉.svg|18px]] 봉행 이시다 미쓰나리 * [[파일:Alex K Hiroshima Asano (color).svg|18px]] 봉행 아사노 나가마사 * [[파일:Masegiku.jpg|18px]] 봉행 마시타 나가모리 * [[파일:Japanese crest Hana Hisi.svg|18px]] 봉행 나쓰카 마사이에 * [[파일:Japanese crest Tachibana.svg|18px]] 봉행 마에다 겐이 * [[파일:Japanese Crest Ikoma kuruma.svg|18px]] 중로 이코마 지카마사 * [[파일:Horio Yoshiharu.svg|20px]] 중로 호리오 요시하루 * [[파일:Hidari mitsudomoe.svg|18px]] 중로 나카무라 가즈우지 * [[파일:Hidari mitsudomoe.svg|18px]] 총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파일:Jimonji.svg|18px]] 좌군 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 [[파일:Japanese crest Hana Kurusu.svg|18px]] 고니시 유키나가 * [[파일: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18px]] 시마즈 요시히로 * [[파일:Japanese Crest Nagato mitu Hosi.svg|18px]] 우군 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 [[파일:Jyanome (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18px]] 가토 기요마사 * [[파일:Kuroda Fuji(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18px]] 구로다 나가마사 |
병력 규모 | |
조선군 | 175,000여 명 |
명군 | 100,000여 명 |
일본군 | 약 141,000여 명 |
2. 전쟁의 경과
명나라와 일본은 각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이끌어가려 했다. 일본은 명나라 황녀를 일본 후비로 맞이하고, 한반도 남부 4개 도를 할양하며, 감합 무역을 재개하고,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간의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으나, 임해군의 두 자녀는 끝내 돌려주지 않았다.[1]
1597년, 일본군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정유재란)
2. 1. 명나라의 참전과 전황의 변화
일본군은 보급 문제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를 제안했다. 명군 또한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기 때문에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삼국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화의를 반대했지만,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수하여 왜성을 쌓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하였다.[1]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각자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이끌어가려 했다. 일본군은 명나라 황녀를 일본 후비로 맞이할 것, 한반도 남부 4개 도를 할양할 것, 감합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나라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다만 협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임해군의 두 자녀는 끝내 돌려주지 않았다.[1]
2. 2. 강화 협상과 정유재란
일본군은 보급 문제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여 종전을 원해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전쟁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화의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하는 등 방비를 강화했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왜성을 쌓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하였다.명과 일본 양측은 서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으려 했다. 일본군은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한반도 남부 4도를 넘겨줄 것, 감합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명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으나, 임해군의 두 자녀는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1597년, 일본군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정유재란)
2. 2. 1.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 시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한 후, 일본 육군은 임진년 침공 때와 달리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양(서울)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 수군은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와 전주성에서 조명연합군을 격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였다.[1]
또한, 일본군은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으며(→귀무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 서양에서 온 노예상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1]
2. 2. 2. 직산 전투와 명량 해전
일본 육군은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전라도를 점령한 뒤,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이후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대치하며 몇 차례 직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르자, 보급로가 끊길 것을 걱정한 일본 육군은 직산을 넘어 더는 북상하지 못했다.[1]2. 2. 3.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6][7][8] 당시 일본 육군은 군량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힘겹게 싸웠다.2. 3. 종전과 노량 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1]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가 함대를 크게 격파하여 승리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1] 왜군은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종결되었다.[1] 다만, 일반 병사들 중에는 철수에 실패한 인원도 많았다.[1]
3. 전쟁의 여파
정유재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민간인을 포함하여 18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17][18] 경작지의 66%가 파괴되었다.[19] 경복궁을 비롯한 수많은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史庫)가 불타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가 사라졌다.[20] 광해군은 즉위 후에도 궁궐이 없어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해야 했다.[20] 민가, 포도청, 서원 등도 파괴되어 한국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21]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에도 막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출병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 다이묘들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일본 내에 주둔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1]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를 거쳐 도요토미 정권은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섰다.[1]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했고, 국가 재정이 문란해졌다.[1] 만력제의 과도한 원정과 사치로 재정이 고갈되었고, 세금이 늘어나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1]
3. 1. 조선에 끼친 영향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17][18] 또한, 경작지의 66%가 파괴되었다.[19]문화재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용했다.[20]
이외에도 민가, 포도청, 서원 등이 많이 파괴되어 한국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였다.[21] 한편, 조선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는 원래 무기인 궁시, 창검, 총통, 완구, 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한, 백성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 개선이 이루어졌고, 명(明)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전란 중 명군이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 포로가 된 홍호연의 일본인 후손과 한국인 후손이 400년 만에 경상남도 진주국립박물관에서 만났다.[22]
3. 2. 일본에 끼친 영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교체하기 쉬워졌다. 히데요시에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협력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다이묘들은 불참하는 등 불협화음 속에서 7년을 끌다가, 히데요시 사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몇 년 후 도요토미 정권은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오사카 전투(1615년)에서 전복되고 에도 막부(1603년)가 들어섰다.[1]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었고, 히데요시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다이묘들은 나고야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선에 출병한 부재 다이묘들의 영지는 관료 집단이 관리하게 되면서 이들의 힘이 커졌다. 조선에 출병했던 다이묘들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나고야 성에는 히데요시에게 소집된 다이묘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 국내에 주둔 중이던 다이묘들 중 가장 유력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1]
대로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장을 발표하고, 가게카쓰는 가네쓰구에 호응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하려 아이즈의 병력을 일으켰다. 이에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선언했고, 이 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대로 모리 데루모토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서군)과 함께 이에야스(동군)에 대항했다. 결국 이들은 일본 대부분의 병력이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격돌했으나, 전투 시작 3시간 만에 동군 측이 압승했다. 패배한 서군 측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는 참수당했고,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는 영지의 75%를 삭감당했다.[1]
일본이 이 전쟁을 통해 가져간 조선의 문물 중 대표적인 것은 도자기 기술이다.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후대하며 도자기를 제작하게끔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며, 활자를 가져가 일본 활자 기술 발전을 이롭게 하고 서적을 가져가 문화 발달에 기여했다.[1]
3. 3. 명나라에 끼친 영향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했고,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이 문란해졌다.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조선 출병을 포함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재정이 고갈되었다. 만력제는 자신의 무덤 건설에 만력3정에 소요된 경비보다 많은 은자 800만위안을 사용하여 세금은 늘어났지만 명나라의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1]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또는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는 해석은 일본 중심 사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졌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1]
참조
[1]
서적
Korea and East Asia: The Story of a Phoenix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1997-01-01
[2]
웹사이트
History of the Ming chapter 322
http://zh.wikisource[...]
[3]
서적
Samurai Invasions of Korea 1592–1598
[4]
문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후 임명
[5]
서적
2002
[6]
웹사이트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0日(丙申) 3번째기사 접반사 윤형, 충청 절도사 [[이시언 (조선)|이시언]]이 적과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다
http://sillok.histor[...]
[7]
웹사이트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2번째기사 [[이시언 (조선)|이시언]]•성윤문이 적과 한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http://sillok.histor[...]
[8]
웹사이트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3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http://sillok.histor[...]
[9]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6번째 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명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http://sillok.histor[...]
[10]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2日(甲寅) 3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
[11]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
[12]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8日(庚申) 7번째 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
http://sillok.histor[...]
[13]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6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명군의 퇴각을 다룬 치계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
[14]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6日(戊辰) 3번째 기사 동 제독이 전투에 관한 게첩을 올리다
http://sillok.histor[...]
[15]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7日(己巳) 1번째기사 감찰 어사 진효의 일본군과 한 전투에 관한 제본
http://sillok.histor[...]
[16]
웹사이트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http://sillok.histor[...]
[17]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18]
간행물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 1592"
China Mail Office
1899
[19]
웹인용
Early Joseon Period
http://www.opm.go.kr[...]
Office of the Prime Minister
2007-03-30
[20]
웹사이트
덕수궁 공간분석
http://mybox.happyca[...]
[21]
문서
이것을 지금으로 따진다면 청와대와 정부건물과 지방자치제도가 붕괴되고 교육시설과 공장등의 생산시설이 없어지고, 토지문서등의 문서의 소실들로 물적피해만 따저도 수십조원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22]
뉴스
임란 때 생이별한 형제 후손들 400여 년 만에 상봉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0-11-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