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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하루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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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마 하루노부(1567년 ~ 1612년)는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다이묘였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덴쇼 소년사절단을 파견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동군으로 전향하여 영지를 지켰지만, 마카오에서의 사건과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에 연루되어 가이 국으로 추방된 후 참수되었다. 그는 남만 무역에 힘썼으며,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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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하루노부
기본 정보
이름아리마 하루노부
원어 이름有馬 晴信
출생1567년
출생 장소히노에 성, 일본
사망일1612년 6월 5일
사망 장소가이 국
다른 이름진순, 진귀, 히사카타, 하루노부
통칭주로(十郎)
관직좌위문대부
계명돈 프로타지오
영명돈 조앙 (주장)
가문
가문아리마 씨
가신류조지 씨, 시마즈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직위
직위히젠 아리마 씨 당주
재임 시작1571년
재임 종료1612년
전임아리마 요시사다
후임아리마 나오즈미
직위2시마바라 다이묘
재임 시작21600년
재임 종료21612년
후임2아리마 나오즈미
가족
아버지아리마 요시사다
어머니야스토미 입도 도쿠엔의 여동생
형제자매요시즈미
마센시아
하타 친
하루노부
치지이와 스미토모
카타리나
소부
사네자네
스미타다 등
배우자아리마 요시즈미 또는 오무라 스미타다의 딸 루치아
나카야마 치카쓰나의 딸 주스타
야마다 스미노리의 딸 다이조
아라키 씨
자녀사이고 스미츠네의 부인
나오즈미
스미사다
사카이 셋쓰노카미의 부인
기쿠테이 스에모치의 부인
아리마 스미타다의 부인
후란
오마쓰
지쓰손 등
군사 활동
참전 전투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
규슈 정벌 (1587년)
임진왜란 (1592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1612년)

2. 생애

1571년 형 요시즈미가 단명하여 가독을 계승했다. 이 무렵 히젠의 다이묘 류조지 다카노부에게 공세를 받아 류조지 가문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1584년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과 협력해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군을 섬멸하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에서는 시마즈 가문과 결별하고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가독을 이을 당시 영내 기독교도를 박해했지만,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영향을 받아 158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582년 오토모 소린, 숙부 오무라 스미타다와 함께 덴쇼 소년사절단을 파견하였다. 1587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반포할 때까지 수만 명의 기독교도를 보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기리시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 속해 종군하여 7년간 조선에서 싸웠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다가 서군 패배 소식을 듣고 동군으로 바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 성을 공격,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

1609년 마카오에서 가신과 주민 간 다툼으로 가신과 영민 48명이 살해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복을 허가받았다. 포르투갈 상선 노사 센호라 다 그라사 호(마드레 데 데우스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선장을 구류하고 상선을 포위했으나, 선장은 선원을 도피시키고 배를 침몰시켰다.

이후 이에야스 측근 혼다 마사즈미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에게 기리시탄 세력 재확장을 위한 자금을 줬으나 발각되어, 다이하치는 화형, 하루노부는 가이국 하지카노로 추방 후 사형당했다.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1612년 기리시탄이라 할복 대신 참수되었다고 하나, 기록에는 할복했다고 적혀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아리마 하루노부는 히젠국 시마바라 지역을 다스렸던 아리마 씨의 히노에 성에서 태어났다. 아리마 요시사다의 차남이었던 그는 1571년 형 요시즈미가 요절하면서 5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1]

가독 상속 당시 하루노부는 영지 내 키리시탄을 박해했다.[1] 그러나 히젠류조지 다카노부가 세력을 확장해 오면서, 예수회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1579년, 하루노부는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프로타시우스(Protasius)였고, 나중에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요한(Joh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하루노부의 개종은 포르투갈이 제공하는 물자와 군사 지원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1] 개종 이후, 하루노부는 포르투갈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아리마 씨의 세력을 강화했다. 또한 영지에 신학교와 수련자 훈련 센터를 설립하여 유럽의 음악, 회화, 조각, 오르간 및 손목시계 제작 기술을 가르쳤다.

개종 직후, 하루노부와 예수회는 영지 내 40개 이상의 불교 및 신토 사찰과 신사를 파괴하고 불교 승려들을 강제 추방했다. 파괴된 사찰과 신사들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곳 중 일부였다고 한다.[1]

2. 2. 가톨릭 개종과 덴쇼 소년사절단

1580년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1] 세례명은 프로타시우스(Protasius)였고, 나중에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요한(Joh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개종 후, 하루노부는 포르투갈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아리마 씨의 세력을 강화했다. 또한 영지에 신학교와 수련자 훈련 센터를 설립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을 가르쳤다.[1]

1582년 하루노부는 오토모 소린, 오무라 스미타다와 함께 덴쇼 소년사절단교황에게 파견하였다.[1] 이 사절단은 이토 만시오를 대표로 하여 발리냐노가 이끌었으며, 로마로 파견되었다.

개종 직후, 하루노부와 예수회는 영지 내의 40개 이상의 불교 및 신토 사찰과 신사를 파괴하고 불교 승려들을 강제 추방했다.[1] 파괴된 사찰과 신사들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곳 중 일부였다고 한다.[1]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바테렌 추방령을 반포할 때까지 하루노부는 수만 명의 기독교도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금교령 이후에도 하루노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지켰다.

2. 3. 류조지 가문과의 대립과 오키타나와테 전투

1571년 형 요시즈미가 요절하여 가독을 계승했다. 이 무렵 히젠의 다이묘 류조지 다카노부의 공세에 시달려 아리마 가문은 류조지 가문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1584년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과 협력하여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군을 섬멸하고, 이 전투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사망했다.[1]

2. 4.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리마 하루노부는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고니시 유키나가 군에 소속되어 조선으로 출병했다.[1] 분로쿠의 역에서 아리마 하루노부는 동생 유마 나오마사(후의 스미타다)에게 히노에 성 수비를 맡기고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모 등과 함께 제1군으로 부산을 공격했으며, 1597년 철병하여 귀국할 때까지 6년 동안 조선에서 전투를 치렀다.[1]

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에는 서군에 가담했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군으로 돌아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 성을 공격했다.[1] 이 공으로 자신의 영지를 지킬 수 있었다. 이때 아리마 하루노부는 안질 때문에 출진할 수 없어, 아들인 나오즈미가 대신 출진하였다.

2. 6. 마카오 분쟁과 노사 센호라 다 그라사 호 사건

1609년, 마카오에서 아리마 하루노부의 가신과 현지 주민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가신과 영민 48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하루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복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포르투갈 상선 노사 센호라 다 그라사 호(옛 명칭은 마드레 데 데우스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하루노부는 선장을 구류하고 상선을 포위했다. 그러나 선장은 선원들을 도피시키고 배를 침몰시켰다.[1]

2. 7.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과 죽음

1609년 마카오에서 아리마 하루노부의 가신과 마카오 주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가신과 영민 48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하루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복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포르투갈 상선 노사 세뇨라 데 그라사 호(옛 명칭은 마드레 데 데우스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하루노부는 선장을 구류하고 상선을 포위했다. 하지만 선장은 선원을 도피시키고 배를 침몰시켰다.[1]

이 사건 이후, 이에야스의 측근 혼다 마사즈미의 가신이자 가톨릭 신자인 오카모토 다이하치에게 기리시탄 세력 재확장을 위한 자금을 건넸으나, 이후 발각되어 이에야스의 격노를 샀다. 이 일로 다이하치는 화형에 처해졌고, 하루노부는 가이국 하지카노로 추방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1612년 하루노부는 기리시탄이었기 때문에 할복을 할 수 없어 참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는 할복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3. 가계


  • 아리마 요시사다(父)
  • 아스토미 도쿠엔의 여동생(母)


'''정실, 계실'''

  • 아리마 요시즈미의 딸 - 세례명 도나 루치아, 1593년 또는 1597년 조선에서 사망(정실)
  • 나카야마 치카쓰나의 딸 - 기쿠테이 스에모치의 미망인(1577년-?) 세례명 주스타(계실)


'''측실'''

  • 대상 - 아리마 가신 야마다 스미노리의 딸
  • 아라키씨 - 전 아라키 이가노카미의 아내


'''자녀'''

  • 아리마 나오즈미(장남) - 생모는 대상(측실)
  • 아리마 스미사다 - 우쿄노스케, 고려조사(차남) - 생모는 아라키씨(측실)
  • 부란 - 생모는 계실
  • 오마츠 - 생모는 계실
  • 오미 지쓰타카 - 고노에가 양자
  • 딸 - 시집감(적녀) - 생모는 정실
  • 딸 - 사카이 셋쓰노카미의 아내(차녀) - 생모는 대상(측실)
  • 딸 - 기쿠테이 스에모치 후 아리마 시게쓰네의 아내(삼녀) - 생모는 아라키씨(측실)
  • 딸 - 아리마 스미타다의 아내(사녀) - 생모는 아라키씨(측실)
  • 딸 - 가이슈 지시타 유가 젠자에몬의 아내(오녀) - 생모는 계실
  • 딸 - 사이고 스미쓰네의 아내 - 생모는 대상(측실)


'''양녀'''

4. 평가와 유산

하루노부는 남만 무역에 적극적이었으며, 슈인센 파견 횟수는 시마즈씨, 마쓰우라씨와 함께 규슈 다이묘 중에서도 가장 많았다. 아리마 씨의 영지는 류조지 씨의 침공과 국인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남만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또한, 선교사와 기리시탄들의 협력을 얻어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많은 철포와 병량 지원을 받았다.[10]

선교사 조앙 로드리게스의 요구에 따라 영지 백성, 특히 소년 소녀들을 징집하여 포르투갈령 인도부왕에게 노예로 보내려 했다. 이로 인해 "아리마의 땅 전체가 고뇌에 휩싸였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10]

열렬한 기리시탄이었던 하루노부는 히데요시이에야스가 기독교를 금지하고 처벌한 후에도 영지에 많은 기리시탄을 숨겨 주었다. 적남인 나오즈미가 이에야스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한 점, 남만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막부에 공헌한 점 덕분에 아리마 영지는 비교적 엄격한 감찰을 받지 않았고, 많은 숨은 기리시탄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에서 하루노부와 다이하치가 기리시탄이었던 것이 밝혀지면서 아리마 씨는 영지를 옮기게 되었고, 이전 아리마 영지에서는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여 시마바라번의 기반을 다진 공적이 있지만, 신앙심이 지나쳐 파괴한 사찰의 자재로 기독교 교육 시설을 영지에 짓게 하는 등의 일화도 남아 있다.

5. 관련 사적

야마나시현 고슈시 야마토마치하쓰시카노1924에는 아리마 하루노부의 좌천지가 있다.[1] 근처 고슈시 야마토마치키소쿠에 있는 세운사에는 "하루노부 생전의 모습을 비춘" 것이라고 전해지는 "공허창보살(虚空蔵菩薩) 영상"이라는 족자가 현존한다.[1] 하지만 불상이라는 전승에도 불구하고 왼손에 십자가 모양의 것을 받들고 있어, 실제로는 인물상이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여겨진다.[1] 이 그림은 중국 원대 불화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원나라 시대 강남지방(江南地方)에서 유포되었던 네스토리우스파(ネストリウス派) 그리스도교(キリスト教)(경교(景教))의 성상이라는 설이나, 마니교(マニ教) 교주상이라는 설 등이 있다.[1]

6. 대중문화


  • 이마무라 쇼고의 소설 『바다와 하늘의 전사』(PHP연구소, 2023년)에 등장한다. 이 소설은 『전국무장전 서일본편』에 수록되어 있다.
  • 1959년 대영에서 제작한 영화 『장 유마의 습격』에서 이치카와 라이조가 아리마 하루노부 역을 연기했다.
  • 1989년 NHK 대하드라마 『가스가노쓰보네』에서는 배우 사토 히데오가 아리마 하루노부 역을 맡았다.
  • 2000년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쇼군 가문』에서는 배우 가사이 카즈오가 아리마 하루노부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논문 The Many Meanings of Iconoclasm: Warrior and Christian Temple-Shrine Destruction in Late Sixteenth Century Japan https://brill.com/vi[...] 2020-11-18
[2] 서적 Victories of the Martyrs
[3] 서적 The Victories of the Martyrs
[4] harvnb
[5] harvnb
[6] 서적 キリシタンになった大名 キリシタン文化研究会
[7]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8] 서적 『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書』 同朋舎
[9] 서적 『フロイス日本史』 中央公論社
[10] 서적 島原の乱―キリシタン信仰と武装蜂起―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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