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대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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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천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군 매봉산 정상에 위치한 흙과 돌로 쌓은 성이다.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선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으며, 이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가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했다.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했다. 대야성 전투는 삼국 통일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검일의 배신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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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대야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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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합천 대야성 |
로마자 표기 | Hapcheon Daeyaseong |
한자 표기 | 陜川 大耶城 |
위치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72-5 (합천리) |
상세 정보 | |
종류 | 경상남도 기념물 |
지정 번호 | 133호 |
지정일 | 1993년 12월 7일 |
면적 | 42,050m2 |
2. 역사
대야성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후에는 후백제) 사이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며, 이후 여러 차례 양국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642년 백제 윤충의 공격과 920년 후백제 견훤의 공격으로 함락된 기록이 있다.
현재 성벽은 약 300m 정도 남아 있으나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건물터와 방어 시설인 울타리 흔적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2. 1. 축성 및 초기 역사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에 위치한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의 서부 국경 지역으로, 신라 진흥왕 25년(565년)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축성하였다.선덕여왕 11년(642년)에는 백제 장수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신라의 대야성 도독이었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경명왕 4년(920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다시 한번 함락되기도 하였다.
2. 2. 대야성 전투 (642년)
선덕여왕 11년(642년), 백제 장군 윤충이 이끄는 군대가 대야성을 공격했다.[1] 당시 신라 대야성의 성주였던 김품석은 부하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빼앗는 잘못을 저질렀다.[1] 이에 앙심을 품은 검일은 백제군이 침공하자 성의 내부 정보를 넘겨주며 내응했고, 이는 대야성 함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1] 성이 함락되자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이기도 한 자신의 부인 고타소를 직접 죽이고 자결했다.[1] 이 사건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백제에 깊은 원한을 품고 멸망을 추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백제로 넘어가 18년간 살았던 검일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군에 붙잡혔다. 그는 김춘추 앞으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1]2. 3. 후백제 시대
경명왕 4년(920년)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3. 검일의 배신과 최후
신라 대야성의 성주였던 김품석은 부하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탐내 강제로 빼앗는 잘못을 저질렀다.[1] 이에 원한을 품은 검일은 642년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오자, 성 내부에서 몰래 협력하여 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주 김품석은 성이 함락되기 직전 자신의 아내 고타소(김춘추의 딸)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이후 검일은 백제로 넘어가 18년 동안 살았으나,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하자 결국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에게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1]
4. 성의 구조 및 현재 상태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다.[1] 성벽의 길이는 약 300m 정도인데, 현재는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웠던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1]
5. 역사적 의의
대야성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간 치열한 영토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중요한 성이다. 신라 진흥왕 25년(565년)에 신라가 서쪽 국경 지역에서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축조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11년(642년)에 벌어진 대야성 전투는 삼국 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백제의 장수 윤충이 이끄는 군대가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성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백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하였고, 훗날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루려는 강력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후삼국 시대인 경명왕 4년(920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다시 함락되는 등, 대야성은 한반도 역사의 주요 길목에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참조
[1]
뉴스
백제 멸망, 김춘추 사위의 치정이 부른 복수극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6-08-21
[2]
보고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85번지 일원 내 梁山 架山里遺蹟 Ⅴ. 고찰
https://www.cha.go.k[...]
2015-09-01
[2]
보고서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양산석산지구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http://www.feaci.or.[...]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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