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1. 개요
경명왕은 신라의 54대 왕으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에 재위했다. 그는 917년에 즉위하여 후당과의 외교를 추진했지만, 신라는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세력에 잠식되어 쇠퇴했다. 재위 기간 동안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의 성장과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으로 신라는 혼란을 겪었으며, 920년에는 왕건과 친분을 맺어 후백제에 대항했다. 경명왕 시대에는 여러 변괴가 나타났다는 기록과 함께, 7년 만에 사망하여 황복사 북쪽에 장사되었다. 경주 배동 배일산에 있는 능이 경명왕의 능으로 전해지며, 밀양 박씨 등 여러 성씨의 시조를 자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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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년 사망 -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
베렌가리우스 1세는 9세기 후반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마자르족 침입과 경쟁자들의 반란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암살당했으며, 외손자인 베렌가리오 2세가 그의 지위를 주장했다. -
10세기 한국의 군주 -
궁예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인물이며, 말년에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게 축출되어 사망했다. -
10세기 한국의 군주 -
태조 (고려)
고려의 초대 국왕인 태조 왕건은 후고구려 장군으로 군사적 공을 세운 후 신하들에 의해 고려를 건국, 후삼국 통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하고 왕권 강화와 호족 통합에 힘썼으며 고구려 계승을 이념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 훈요십조를 남겼다. -
신라의 불교 신자 -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신라 경문왕의 딸로, 정강왕 사후 887년에 즉위하여 음란한 행실과 국정 문란, 민란 발생으로 혼란을 겪다가 897년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사망했다. -
신라의 불교 신자 -
진덕여왕
진덕여왕은 647년 신라의 제28대 왕으로 즉위하여 김유신과 함께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나당동맹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에 대응하다 654년에 사망했다.
2.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의 등장
경명왕 때 신라는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와 그 주변 지역만을 다스렸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같은 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암살되었다. 이후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안동이나 합천 지역에서 이들의 패권 다툼이 치열하였으나,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경명왕 때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한다.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설화는 당시 신라의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920년, 경명왕은 왕건과 친분을 맺어 후백제에 대항했다.
2.2. 후삼국 간의 세력 다툼과 외교적 노력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경주)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 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암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 지역에서 이들의 패권전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 기사의 이면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917년에 즉위하여 후당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이미 신라는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세력에 잠식되어 쇠퇴하고 있었다. 918년,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920년, 경명왕은 왕건과 친분을 맺어 후백제에 대항했지만, 924년에 사망했다.
2.3. 여러 가지 변괴와 죽음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 황룡사 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러한 설화 기사의 이면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4. 가계
| 관계 | 이름 | 생몰년 |
|---|---|---|
| 부왕 | 신덕왕 | ? ~ 917년 |
| 모후 | 의성왕후 김씨 | ? ~ ? |
| 왕비 | 장사택 | ? ~ ? |
| 장인 | 김대존 | ? ~ ? |
| 사위 | 백창직 | ? ~ ? |
경명왕은 신덕왕과 의성왕후 김씨의 아들이며, 왕비는 각간 김대존의 딸 장사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