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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레네 추 발데크운트피르몬트는 발데크-피르몬트 공국의 공녀로,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882년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으나, 1884년 레오폴드가 사망하면서 사별했다. 헬레네는 지적이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뎁트퍼드 기금, 올버니 연구소 설립 등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선 사업을 조직했으며, 1922년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증조모이다.
헬레네, 1882년 결혼식 레오폴드와 헬레네(1882년) 헬레네는 발데크 공 게오르크 빅토르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헬레네 폰 나사우 (룩셈부르크 대공 아돌프의 이복 여동생, 스웨덴 왕비 조피의 친언니)의 다섯째 딸로, 독일 발데크-피르몬트 공국의 수도인 아롤젠(현재 독일 헤센 주의 도시 바트 아롤젠)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형제자매로는 마지막으로 발데크-피르몬트 공국을 통치한 프리드리히 공작, 마리 공주(뷔르템베르크 빌헬름 2세의 첫 번째 부인), 네덜란드 왕비 엠마(네덜란드 빌럼 3세의 왕비, 빌헬미나 여왕의 어머니), 그리고 파울리네 공주가 있었다. 언니 파울리네, 엠마와 함께 헬레네는 빌럼 3세의 후처 후보로 여겨졌다.
헬레네는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제안으로 영국 왕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와 만났고, 1881년 11월에 약혼했다. 1882년 4월 27일, 두 사람은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 부부는 클레어몬트 하우스에서 거주했다. 헬레네와 레오폴드는 짧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나, 1884년 3월 혈우병 환자였던 레오폴드가 프랑스 칸에서 낙상 사고로 사망하면서 결혼 생활은 끝났다. 레오폴드의 사망 당시 헬레네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남편 사후, 헬레네는 아이들과 함께 클레어몬트 하우스에 계속 거주했다.
두 사람은 두 자녀를 두었다. * 앨리스 (1883년–1981년), 이후 애슬론 백작 알렉산더 케임브리지(조지 5세의 아내 메리 왕비의 남동생) 부인 * 카를 에두아르트 (1884년–1954년),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1900년, 남편의 형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알프레트가 급사했다. 그의 외아들이자 공위 계승자였던 켄트 백작 알프레드는 1899년에 자살했고, 다음 계승권을 가진 코노트 공작 부자가 계승을 사퇴했기 때문에, 헬레네의 16세 장남 카를 에두아르트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헬레네는 아이들과 함께 독일코부르크로 이주했다. 만년에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1922년 9월, 아들 카를 에두아르트를 방문했던 헬레나는 티롤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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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품 및 사회 활동
칼 루돌프 존의 초상화 헬레네의 딸인 앨리스 공주는 회고록에서 어머니 헬레네가 매우 지적이고 강한 의무감을 가졌으며, 복지 사업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 헬레네가 전형적인 냉담한 독일 공주일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지만, 자신의 맏딸인 독일 황태자비 빅토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헬레네가 "사람들 속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 기쁨을 나타냈다. 여왕은 곧 젊은 며느리를 매우 존경하고 아끼게 되었는데, 이는 헬레네가 공주로서는 드물게 학식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가졌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변화였다. 결혼 전, 헬레네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공국 내 유아 학교의 감독관으로 임명했고, 이 자리에서 헬레네는 학생들의 교육 과정을 직접 고안했다. 그녀는 특히 수학 문제를 풀고 철학 서적을 읽는 것을 즐겼다. 짧았던 결혼 생활 동안, 레오폴드 왕자는 아내 헬레네를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사귄 학자들과의 모임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으며, 헬레네는 이들과의 우정을 평생 이어갔다.
1894년, 헬레네는 뎁트퍼드 지역 사회를 돕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한 뎁트퍼드 기금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다. 1899년에는 올버니 연구소를 열었는데, 이 연구소는 나중에 올버니 엠파이어로 알려진 극장 시설을 갖춘 지역 사회 및 공연 센터로 확장되었다. 1970년대 반파시즘 운동과 인종 차별 반대 록(Rock Against Racism)의 중심지였던 엠파이어와 연구소 건물은 안타깝게도 1978년 방화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새로운 올버니 극장이 1982년 다이애나, 웨일스 공비에 의해 개관되었다.
헬레네는 또한 여러 병원 자선 단체와 인신매매 종식을 위한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신의 자선 사업 대부분을 시누이인 베아트리스 공주, 조카인 마리 루이즈 공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당시 흔히 발생했던 왕실 전쟁 관련 사업 프로젝트 간의 충돌이나 비효율 문제를 피하고자 노력했다.
4. 말년
레오폴트와 헬레네(1882년) 남편 레오폴드가 1884년 사망한 후, 헬레네는 두 자녀 앨리스와 찰스 에드워드와 함께 클레어몬트 하우스에 계속 거주했다.
1899년 조카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프레트 세습공이 사망하고, 이듬해 남편의 형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알프레트마저 세상을 떠났다. 알프레트의 유일한 아들이자 공위 계승자였던 알프레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이미 1899년에 자살했고, 다음 계승권을 가진 코노트 공작 부자가 계승을 사양함에 따라, 헬레네의 16세 아들 찰스 에드워드(카를 에두아르트)가 새로운 공작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이로 인해 찰스 에드워드는 독일로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누이와 떨어져 살게 되었고, 헬레네 역시 아들과 함께 코부르크로 이주하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들 찰스 에드워드는 독일군으로 참전했고, 그 결과 1917년 칭호 박탈법에 따라 영국의 모든 칭호를 박탈당했다. 반면, 딸 앨리스는 영국에 남아 1904년 테크의 알렉산더 공과 결혼하여 메리 왕비의 시누이가 되었다.
헬레네는 1922년 9월 1일, 아들 찰스 에드워드를 방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티롤의 힌터리스에 머물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는 아들을 통해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증조모가 된다.
사망 당시 그녀의 유산은 177312GBP(재선서 183053GBP, 2022년 기준 약 7.2에 해당)로 평가되었다. 런던 치즈윅의 월데크 로드(Waldeck Road)와 피르몬트 로드(Pyrmont Road)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