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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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형평사 운동은 일제강점기 시대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인권 향상을 목표로 전개된 사회 운동이다. 조선 시대부터 도살업에 종사하며 차별받던 백정들은 갑오개혁 이후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다. 1923년 진주에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백정 출신 지식인들이 형평사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형평사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백정의 차별 철폐, 교육 장려, 상호 친목 도모를 목표로 했으나, 내부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며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형평운동은 백정의 신분 해방과 인권 회복을 위한 투쟁이자 민족 해방 운동의 일부로 평가받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한계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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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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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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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명칭 | 조선형평사 |
한자 명칭 | 朝鮮衡平社 |
영문 명칭 | Joseon Hyeongpyeongsa |
설립일 | 1923년 4월 25일 |
해산일 | 1935년 |
설립 목적 | 피차 별의 없이 동정하고 교육을 장려하며 실업을 권장하여 자활자립을 도모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이학찬 신현수 장지필 백정기 이춘성 강상호 서정기 김사철 진상헌 박문호 장효근 최평곤 신분현 정의길 김중완 조봉제 박서양 김윤필 정두옥 옥만공 김약수 윤병한 |
조직 | |
본부 위치 | 경성부 |
지부 | 전국 각지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백정 자제 교육 장려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 운동 형평 운동 |
기타 | |
관련 단체 | 형평 운동 대동사상 |
2. 역사적 배경
형평사 운동은 1923년 4월 24일 조선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부유한 백정 출신인 이학찬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회원은 백정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일반 지식인도 포함되었으나,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정 외의 형평사 회원을 "신백정"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5]
2. 1. 조선시대 백정의 지위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 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3][4]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5]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2. 2. 일제강점기 백정에 대한 차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책 때문에 백정들은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5]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5]3. 형평운동의 전개
1923년 형평사 창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지사와 분사가 활발하게 설치되면서 형평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운동의 방향성을 두고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열린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에서 장지필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는 본사를 경성부로 이전하고 사회주의 노선에 기반한 계급 해방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반면, 강상호와 신현수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유지하고 인권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러한 갈등은 1924년 4월, 혁신파가 천안에서 '형평사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고, 보수파가 진주에서 '형평사전국대회'를 개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양측은 같은 해 7월 간담회와 8월 대전에서의 '형평사통일대회'를 통해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사를 두기로 합의하며 갈등을 봉합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내분이 발생하여 진주 본사 측에서 대전대회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갈등은 계속되었다.
1925년 4월, 경성부에서 양 파가 합동으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면서 형평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평청년회와 형평학우동맹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강화되었고, 형평청년회는 조선형평청년총동맹으로 발전하였다.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신년간친회'에서 형평 운동의 조직 강화와 무산 운동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1926년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 장지필 등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형평 운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1927년 4월,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변경하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와의 제휴를 결정했다. 이때부터 다른 사회 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 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져 나왔고,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고, 이는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1934년에는 사회 운동 전반이 침체된 가운데 형평사 지부의 재정비가 이루어지고 활동이 공제 활동 정도로 축소되었다. 1935년 형평사는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인 사회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다.[6]
1930년 4월 24일 제8회 전국 대회에서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했고, 1931년 제9회 전국 대회에서 형평사 해소론이 나왔다. 193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회원 및 관계자 다수가 투옥되었고, 1935년 치안유지법으로 인해 형평사는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대동사로 명칭을 바꾸어 백정의 전통적 산업의 이익 단체로 활동하며 군국주의에 협력하여 1938년에는 일본군에 국방헌금으로 기관총과 군용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에는 대동사도 해산되었다.
3. 1. 형평사 창립 (1923년)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 이학찬 등 백정 출신 지식인들이 형평사를 설립했다.[6] 이들은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사칙을 통해 진주의 본사(형평사 연맹 총본부, 5월 13일 조직)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할 것을 선언했다. 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와 교육 장려,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6]이학찬의 후원을 받아 1923년 4월 24일 조선 경상남도 진주시의 진주 극장(현재의 상업 빌딩)에서 결성되었다. 회원은 공칭 40여만 명이었다. 백정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일반 지식인도 포함된 조직이었지만,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정 외의 형평사 회원을 "신백정"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3. 2. 형평사 내부 갈등과 통합 노력
1924년 2월, 전국 각지의 형평사 지사·분사 대표 3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장지필 등 혁신파는 본사를 경성부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강상호, 신현수 등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하며 내부 대립이 표출되었다. 혁신파는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지만, 보수파는 형평운동을 인권운동으로서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두 파의 노선 차이는 컸다.[6]혁신파가 부산 임시총회 후 천안에서 '형평사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어 본사의 서울 이전, 잡지 〈형평〉의 발간, 피혁공장 설립 등을 결의하자, 보수파는 그해 4월 진주에서 '형평사전국대회'를 따로 열었다. 이러한 양 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양 파 간부들이 간담회를 열어 형평사 통일을 논의하고,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열었다. 양 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고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서울에 본사를 두기로 했으나, 다시 내분이 발생해 진주 본사 측에서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기도 했다.[6]
3. 3. 형평운동의 확대와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
1925년 4월 양측 합동으로 경성부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면서 이후 형평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6] 1924년부터 조직된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 확대에 힘입어 형평청년회는 조선형평청년총동맹으로 발전되었다.[6]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신년간친회'에서 형평운동 부분을 보고하고, 조직 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6]3. 4. 일제의 탄압과 형평운동의 변화
1926년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 장지필 등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형평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했다.[6]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명칭을 바꾸었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와의 제휴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며, 해소론을 둘러싼 대립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1934년 일반 사회운동의 저조 속에서 형평사 지부의 재정리가 단행되고 활동도 공제활동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4. 형평운동의 의의와 한계
형평운동은 봉건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반(反) 형평운동과,[7]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는[6] 등 여러 시련에 직면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평운동은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형평운동 내부적으로는 양반 출신 강상호와 백정 출신 장지필 두 지도자가 운동 방침을 놓고 대립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장지필은 경성에서 형평사 혁신 동맹을 결성하여 조선 형평사에 대항했고, 같은 해 8월 대전 회의를 통해 두 조직이 일시적으로 통합되었으나 곧 결렬되었다.
1927년 1월, 장지필이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일본 관헌에 체포된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1930년 4월 24일 제8회 전국 대회에서는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했고, 1931년 제9회 전국 대회에서는 형평사 해소론이 나오기도 했다.
형평사는 이후 후신 조직인 '''대동사'''로 명칭을 바꾸어 백정의 전통적 산업인 피혁업, 축산업 등의 이익 단체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군국주의에 협력하여 일본군에 국방헌금으로 기관총과 군용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대동사마저 해산되면서 백정 해방 운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4. 1. 긍정적 측면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인권 회복을 위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된 민족 해방 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6] 형평운동은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6]4. 2. 부정적 측면
형평사 운동은 초기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봉건적 신분 관습에 익숙한 일반 농민들은 형평사 운동에 반감을 가졌다.[7] 또한, 형평 운동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른 사회 운동과 연대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6] 193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다수의 회원 및 관계자가 투옥되었고, 1935년 치안유지법에 의해 비합법화되어 결국 활동을 중단했다.5. 형평운동에 대한 비판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형평사 운동에 대한 비판 내용을 작성할 수 없으므로, 이전 결과물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백과사전
형평운동 [衡平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백과사전
형평사운동 (衡平社運動)
[3]
백과사전
형평운동 [衡平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백과사전
형평운동 [衡平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5]
백과사전
형평운동 [衡平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
서적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6-08-29
[7]
백과사전
반형평운동 [反衡平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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