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도시시게
1. 개요
호리 도시시게는 게이초 4년(1599년) 조카 호리 히데하루에 의해 도쿠가와 씨에게 인질로 보내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타다 군에 속해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쿠보 타다치카의 개역에 연좌되어 영지를 잃었으나,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겐와 8년(1622년)에 사면되어 히타치 니하리군에 1만 석을 받아 다이묘로 복귀했으며, 오반가시라, 쇼인반가시라, 지샤 부교 등을 역임했다. 1638년 마쓰에성 인수 도중 오사카에서 사망했으며, 장남 호리 토시나가에게 가독이 상속되었다.
| 씨명 | 호리 씨 |
|---|---|
| 이름 | 호리 도시시게 |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 출생 | 덴쇼 9년 (1581년) |
| 사망 | 간에이 15년 4월 24일 (1638년6월 6일) |
| 계명 | 입방원전계봉정산대거사 |
| 묘소 | 와카야마현이토군고야정의 고야산 삼보원 |
| 관위 | 종5위 하, 이세 수, 시 정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이에미쓰 |
| 번 | 히타치다마토리 번 번주 |
| 씨족 | 호리 씨 |
| 부모 | 아버지: 호리 히데시게, 어머니: 니시쇼 씨 |
| 형제자매 | 호리 히데마사, 다가 히데타네, 도시시게, 미쓰마사 |
| 배우자 | 정실: 혼다 야스시게의 딸 |
| 자녀 | 도시나가, 도시나오 (차남), 딸 (아마카타 미치나오 실), 딸 (다가 마사타케 실), 딸 (아사오카 구니타카 실) |
| 다마토리 번 번주 | 재임 기간: 1622년 ~ 1638년 대수: 1 후임: 호리 도시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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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 출생 -
헨드릭 브라우어르
헨드릭 브라우어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장이자 총독으로서 브라우어르 항로 개척, 일본과의 관계 개선, 아유타야 왕국과의 무역 관계 확립,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분쟁 해결 노력, 태평양 탐험 지원, 칠레 발디비아 재점령 원정 등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 제국 확장에 기여했다. -
1581년 출생 -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1605년부터 1623년까지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으로 재임하며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고 막부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으며, 쇄국정책을 추진하고 강력한 반기독교 정책을 시행했다. -
1638년 사망 -
하치스카 이에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하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시코쿠 정벌 이후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참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지를 보전하고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무장이다. -
1638년 사망 -
장유 (조선)
장유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작가로서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절친했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으로 신풍군에 봉해졌고,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고 신흠, 이정구, 이식과 함께 월상계택 4대가로 불린 인물이다. -
에도 막부 하타모토 -
마쓰다이라 지카사다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가)
마쓰다이라 지카사다는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으로, 마쓰다이라 노부카즈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아 마쓰다이라 종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1713년 사망 후 아들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뒤를 이었다. -
에도 막부 하타모토 -
야규 미쓰요시
야규 미쓰요시는 도쿠가와 쇼군을 섬긴 야규 무네노리의 아들이자 신음류 검술의 대가로, 쇼군의 검술 사범을 지냈으며 해임 후 12년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츠키노쇼"를 저술했고 복직 후 감찰관으로 활동하다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삶과 검술은 대중문화에서 다양하게 재해석되었다.
2. 생애
1599년 조카 히데하루의 명으로 도쿠가와 씨의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타다 군 소속으로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이후 8000석을 받았으나, 1614년 오쿠보 다다치카의 개역에 연좌되어 영지를 잃고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군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22년 정식으로 죄를 용서받고 히타치 니하리군에 1만 석을 받아 다마토리에 진야를 짓고 다이묘로 복귀했다. 어린 우쓰노미야 번주 오쿠다이라 다다마사를 보좌하라는 명을 받았다. 1628년 오반가시라에 임명되었고, 이후 쇼인반가시라, 지샤부교 등을 역임하며 1633년 오미, 아와, 가즈사에서 4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1638년 이즈모 마쓰에번 교고쿠 가문의 개역으로 마쓰에성 인수 임무를 위해 오사카로 가던 중 4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58세. 장남 도시나가가 뒤를 이었다.
2.1. 초기 생애와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4년(1599년), 조카 히데하루에 의해 도쿠가와 씨에게 인질로 보내져 에도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타다 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이후 8000석을 받았으나, 게이초 19년(1614년) 오쿠보 다다치카의 개역에 연좌되어 개역되었고,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보살핌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2.2. 개역과 오사카 전투
1614년 오쿠보 다다치카의 개역에 연좌되어 영지를 잃고,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다다아키의 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