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 (조선)
1. 개요
장유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교류하며 사우정으로 불렸다. 1609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이 되었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주자학의 편향성을 비판하고 다양한 학문을 강조했으며, 기자조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장에도 능하여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사후 신풍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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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 장씨 -
인선왕후
인선왕후는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로, 효종의 북벌 정책을 지지하고 검소한 생활로 재정을 절약하여 북벌에 기여했으며, 그녀의 사망 후에는 예송 논쟁이 발생했다. -
덕수 장씨 -
귀인 장씨 (인조)
귀인 장씨는 조선 인조의 후궁으로, 1635년 숙의로 입궁하여 장렬왕후 책봉 후 귀인에 봉해졌으나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고 1671년 사망 후 예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
서인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서인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병자호란 관련자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병자호란 관련자 -
김만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은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암행어사,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며 숙종의 궁녀 장씨 총애를 비판하다 유배 생활을 했고, 어머니를 위해 지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비롯한 저서를 통해 국어 문학 발전에 기여하며 주자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사상을 융합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2. 생애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어려서부터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절친하여 사우정(四友情)으로 불렸다. 김상용의 사위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했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승문원 등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김직재의 옥에 매제 황상이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자,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이후 12년 동안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고, 《묵소고》를 엮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으로 신풍군에 봉해졌고, 이조좌랑,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모시던 국왕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당했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후 외아들 장선징의 처인 며느리 한씨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속환되어 돌아오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들과 한씨를 이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등이 남아 있다.
2.2. 관료 생활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했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 승문원 등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면서 매제 황상이 김직재 옥사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자, 그는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이후 12년 동안 장유는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다.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으며, 저서 《묵소고》를 엮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으로 신풍군에 봉해졌고, 이조좌랑,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시던 국왕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당하기도 했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후 외아들 장선징의 처인 며느리 한씨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속환되어 돌아오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들과 한씨를 이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3. 생애 후반
1637년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등이 남아 있다.
3. 사상과 평가
장유는 조선 학자들이 주자학에만 얽매여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풍토를 비판하고, 중국처럼 다양한 학문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장유의 문장과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높이 평가했다.
3.1. 주자학 비판과 다양한 학문 강조
그는 조선시대의 사상이 편협함을 지적하며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 이정구,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혔다.
장유는 이씨 조선의 궁정은 주자학의 여러 학설을 둘러싸고 사대부들이 권력을 얻으려 정쟁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학자들은 정쟁이 일어날 때마다 개입하여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 행동 패턴이 되어 있다고 자기 비판하였다. 즉, "중국에는 학자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없다. 중국 인재의 기개는 매우 뛰어나다. 기개 있는 사대부라면 마음으로 학문에 몰두하고, 좋아하는 바 배우는 바가 같지 않다. 그래서 각자가 대개는 실력을 얻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몹시 구속받고, 아직 모두 기개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장유는 조선을 정복한 후,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殷나라)의 정치가 기자에 대해 "단군이 개국하고, 기자가 교화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기자에 의한 조선인 교화를 칭찬하고, 기자의 공적을 찬미하며, 조선에서 기자의 존재를 자랑하고, 기자의 공적을 반복하여 칭찬하고 있다.
3.2. 기자조선 긍정적 평가
장유는 이씨 조선의 사대부들이 주자학 학설을 둘러싸고 권력 쟁탈전을 벌였으며, 학자들이 정쟁에 개입하여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행태를 보였다고 비판한다. 그는 "중국에는 학자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없다. 중국 인재의 기개는 매우 뛰어나다. … 우리나라는 다르다. 몹시 구속받고, 아직 모두 기개가 없다"라며 자성적인 평가를 내렸다.
장유는 기자가 조선을 정복하고 기자조선을 건국한 것에 대해 "단군이 개국하고, 기자가 교화하였다"고 주장하며, 기자가 조선인을 교화한 것을 칭찬하고 기자의 공적을 찬미하며, 조선에서 기자의 존재와 공적을 반복하여 칭찬하며 자랑하였다.
3.3. 문학적 업적
그는 조선 시대의 사상이 편협하다고 지적하며,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한결같지 않은데, 우리나라는 유식하든 무식하든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사람은 모두 정주(程朱)를 외워 다른 학문이 있음을 듣지 못하니,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해서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 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선학(禪學)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변론하고 반박하였으며, 천문, 지리, 의술, 병서, 그림, 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 이정구,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