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덕현황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효덕현황후는 도광제의 넷째 아들인 이주(奕詝, 함풍제)의 정실 부인이자, 함풍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된 인물이다. 태상사 소경 부타이의 딸로, 1847년 이주와 결혼하여 적복진이 되었으나, 1850년에 사망했다. 함풍제가 즉위한 후 '효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후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효덕온혜성순자장각신휘의공천찬성현황후'로 추존되었다. 그녀의 본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정람기 출신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추존황후 - 서태후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를 낳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청나라 말기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양무 운동 추진 및 의화단 지원 등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청나라의 추존황후 - 효강장황후
효강장황후는 청나라 순치제의 후궁이자 강희제의 어머니이며, 강희제를 낳은 후 황태후가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효릉에 부장되었다. - 만주 양황기인 - 서태후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를 낳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청나라 말기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양무 운동 추진 및 의화단 지원 등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만주 양황기인 - 각혜황귀비
각혜황귀비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효의인황후의 여동생이자 효강장황후의 조카이며, 귀비에 책봉된 후 황귀비, 황조수기황귀태비로 추존되었고, 숙혜라는 시호를 받았다. - 1850년 사망 - 호세 데 산마르틴
호세 데 산마르틴은 남아메리카 독립을 이끈 아르헨티나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스페인 군 복무 후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칠레와 페루의 독립을 쟁취했으며, 과야킬 회담 이후 은퇴하여 프랑스에서 사망했지만 남미에서 그의 공헌을 기리고 있다. - 1850년 사망 - 도광제
도광제는 청나라의 제8대 황제로, 아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제를 심화시키며 청나라의 쇠퇴를 초래했다.
효덕현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831년 4월 12일 (도광 11년 3월 1일) |
사망일 | 1850년 1월 24일 (도광 29년 12월 12일) |
묻힌 곳 | 동릉, 정릉 |
아버지 | 부태(富泰)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부인 |
씨족 | 삭다 (薩克達; 출생 시) 아이신 교로 (결혼 후) |
시호 | 효덕온혜성순자장각신휘의공천찬성현황후(孝德溫惠誠順慈莊恪愼徽懿恭天贊聖顯皇后) |
배우자 | |
배우자 | 함풍제(1848년 결혼 - 1850년 사망) |
자녀 | 슬하에 자녀 없음 |
기타 |
2. 생애
태상사 소경 부타이(富泰)의 딸로, 도광제 27년(1847년) 함풍제(奕詝)에게 시집가 적복진(正室)이 되었다. 도광제 29년 12월 을해(1850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자녀는 없었다.[1]
함풍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시호는 '''효덕온혜성순자장각신휘의공천찬성현황후'''이다.
2. 1. 가계와 출신
효덕현황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집안은 원래 정람기 출신이었다.항목 | 내용 |
---|---|
아버지 | 태상사 소경(少卿)을 지냈으며, 공(公)의 작위를 받은 푸타이(富泰) |
조부 | 치창(祺昌) |
조모 | 나라 부인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씨 |
외조부 | 울궁아(1778–1846), 1794년부터 1846년까지 정친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지르갈랑의 5대손이다. |
외삼촌 | 단화 (1807–1861), 1846년부터 1861년까지 정친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효철의황후 (1854–1875)의 외조부이다. |
기타 | 누이 1명, 남동생 1명 |
태상사 소경 푸타이(富泰)의 딸로, 도광제 27년(1847년) 함풍제(奕詝)에게 시집가 적복진(正室)이 되었다. 도광제 29년 12월 을해(1850년 1월 24일)에 훙거했다. 자녀는 없었다.[1]
2. 2. 황후 이전
미래의 효덕현황후는 도광제 치세 11년째인 음력 3월 1일(1831년 4월 12일, 그레고리력)에 태어났다. 태상사 소경 부타이(富泰)의 딸이다.[1]1847년, 사극달씨(薩克達氏)는 도광제의 넷째 아들인 이주(奕詝, 훗날의 함풍제)와 결혼하여 그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1][2] 그녀는 1850년 1월에 사망했는데,[1] 도광제 29년 12월 을해(1850년 1월 24일)에 훙거했다.[2] 자녀는 없었다.[2]
2. 3. 추존 황후
도광 27년(1847년)에 황자 이주(후의 함풍제)의 적복진(嫡福晉, 정실부인)으로 책봉되었으나, 함풍제가 즉위하기 전인 도광 29년(1850년) 12월에 사망하여 정식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1] 함풍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시호는 '''효덕온혜성순자장각신휘의공천찬성현황후'''(孝德溫惠誠順慈莊恪愼徽懿恭天贊聖顯皇后)이다.[1] 슬하에 자녀는 없으며, 청 동릉의 정릉에 안장되었다.[1]3. 시호
도광제 27년(1847년)에 함풍제의 적복진(嫡福晉)으로 책봉되었으며, 함풍제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정식 황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함풍제가 즉위한 뒤 황후로 추존되었다.[1] 사후 시호는 '''효덕온예성순자장각신휘의공천찬골현황후'''(孝德溫惠誠順慈莊恪愼徽懿恭天贊聖顯皇后)이다.[2] 슬하에 자식은 없다.
4. 기타
- 청사고
- 청 황실 사보
참조
[1]
날짜
1848-03-31
[2]
날짜
1850-12-01
[3]
날짜
1862-01-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