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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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륜은 양나라 무제의 아들로,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지만 기행과 불법을 자행하여 여러 차례 파면과 복직을 반복했다. 548년 후경의 난 때 토벌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하고, 이후 551년 서위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사후에는 소릉장무왕으로 추증되었다.
514년 음력 7월 29일 소릉군왕(邵陵郡王)에 봉해졌고 영원장군(寧遠將軍)을 맡았다. 이후 강주자사(江州刺史)가 되었다.[1]
소연과 그의 비(妃) 충화(充華) 정씨(丁氏) 사이에서 소륜이 태어났다.[1] 소통, 소종, 소강, 소적, 소속, 소역, 소기는 소륜의 형제이다.[1] 소륜에게는 소견, 소확, 소질 세 아들이 있었다.[1]
2. 생애
525년 소륜은 섭남서주사(攝南徐州事)를 맡던 중 백성들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한번은 시장에서 생선 장수에게 자신의 통치에 대해 묻자, 생선 장수가 조급하고 포학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분노한 소륜은 생선 장수를 죽였다. 이 일로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나, 소륜은 반성하지 않았다.
소륜은 무제와 비슷한 노인에게 곤룡포를 입혀 조현하고 무죄를 주장하거나, 최회의(崔會意)를 관에 넣고 장례를 흉내 내는 등 패륜적인 기행을 일삼았다. 최회의는 무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무제는 소륜을 체포하려 했다. 황태자 소통의 간청으로 소륜은 죽음을 면했으나, 음력 12월 18일 관직에서 파면되고 작위와 봉토를 삭탈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복직되어 서중랑장(西中郞將)과 남연주(南兗州)자사가 되었다.
526년 음력 4월 17일, 소굉이 사망하자 무제는 소륜을 양주자사로 임명했다.
532년 음력 2월, 소륜은 부하를 시켜 비단을 외상으로 사게 했으나, 시장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소부승(少府丞) 하지통(何智通)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자, 소륜은 무제에게 질책받았다. 앙심을 품은 소륜은 하지통을 살해했고, 음력 2월 15일 파면되고 폐서인이 되었다. 그러나 20일 후 자물쇠가 풀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작이 복구되었다.
546년 음력 7월 무제는 소륜을 단양윤(丹陽尹)으로 삼고, 소역을 강주(江州)에, 소기를 익주(益州)에 있게 했지만 모두 권력이 인주(人主)와 같았다. 황태자 소강은 이를 싫어하여 항상 정예병을 뽑아 동궁을 지키게 했다. 음력 8월 무제는 소륜을 남서주(南徐州)자사로 삼고 그 치소인 경구(京口)로 보냈다.
548년 후경의 난이 발생하자, 소륜은 진압에 실패하고, 이후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후경의 난과 진압 실패, #죽음 문단 참조)
2. 1. 출생과 초기 관직 생활
514년 음력 7월 29일 소릉군왕(邵陵郡王)에 봉해졌고 영원장군(寧遠將軍)을 맡았다. 이후 강주자사(江州刺史)가 되었다.[1]
525년 소륜은 섭남서주사(攝南徐州事)를 맡던 중 백성들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한번은 시장에서 생선 장수에게 자신의 통치에 대해 묻자, 생선 장수가 조급하고 포학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분노한 소륜은 생선 장수를 죽였다. 이 일로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나, 소륜은 반성하지 않았다.
소륜은 무제와 비슷한 노인에게 곤룡포를 입혀 조현하고 무죄를 주장하거나, 최회의(崔會意)를 관에 넣고 장례를 흉내 내는 등 패륜적인 기행을 일삼았다. 최회의는 무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무제는 소륜을 체포하려 했다. 황태자 소통의 간청으로 소륜은 죽음을 면했으나, 음력 12월 18일 관직에서 파면되고 작위와 봉토를 삭탈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복직되어 서중랑장(西中郞將)과 남연주(南兗州)자사가 되었다.
526년 음력 4월 17일, 소굉이 사망하자 무제는 소륜을 양주자사로 임명했다.
532년 음력 2월, 소륜은 부하를 시켜 비단을 외상으로 사게 했으나, 시장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소부승(少府丞) 하지통(何智通)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자, 소륜은 무제에게 질책받았다. 앙심을 품은 소륜은 하지통을 살해했고, 음력 2월 15일 파면되고 폐서인이 되었다. 그러나 20일 후 자물쇠가 풀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작이 복구되었다.
2. 2. 후경의 난과 진압 실패
548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륜은 군사를 이끌고 종리에 이르렀다. 후경이 이미 채석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두 배의 속도로 달려 건강으로 들어가 구원했다. 장강을 건널 때 중간에서 바람이 일어나 사람과 말 중 물에 빠진 것이 열에 하나둘이었다.
둘째 아들인 소확과 소강의 아들인 소대춘 등 여러 제후들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경구에서 서쪽으로 가게 했다. 후경이 군사를 파견하여 강승에서 소륜의 군사를 막게 했다. 조백초가 황성대로를 따라가지 말고 지름길로 종산을 향하여 광막문을 점거하여 건강의 포위를 풀자고 하니 소륜이 이를 좇았다. 야간에 행군하다가 길을 잃어서 20여 리를 돌아 음력 12월 23일 아침에 장산(종산)에 군영을 마련했다.
후경은 크게 놀라서 석두에서 약탈한 부녀와 재화를 다 배에 싣고 달아나려고 했다.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소륜을 공격했는데 소륜이 싸워서 이를 다 격파했다. 이때 산꼭대기는 춥고 눈이 와서 군사를 이끌고 애경사로 내려왔다. 후경은 건강 북부의 복주산 북쪽에 군사를 늘어놓았는데 28일에 소륜이 군사를 현무호 옆으로 전진시키고 후경과 대진했으나 싸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후경이 다음날에 싸우기로 약속하니 소륜이 이를 허락했다.
소륜 군중에 있던 안남후 소준은 후경 군사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달아나는 것으로 여겨 즉시 장대한 무사들과 더불어 그들을 쫓았다. 후경이 군사를 돌이켜 반격하자 소준은 패하여 달아나고 소륜 군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백초가 멀리서 보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니 후경은 승세를 타고 쫓아가 이들을 공격하여 여러 군사는 모두 무너졌다.
소륜이 나머지 군사를 모으니 천 명 가까이 되자 천보사에 들어갔는데 후경이 그를 쫓아가서 절을 불태웠다. 이에 소륜은 주방으로 달아나는데 병사들은 얼음과 눈을 밟았고 때때로 동상 때문에 발을 절단했다. 이후 소륜은 다시 경구로 퇴각했다. 후경은 소륜의 치중을 다 거두고 소대춘 등 여러 제후들 중 일부를 잡아갔다. 29일에 후경이 붙잡은 소륜이 거느렸던 군사의 수급과 포로, 갑옷과 병장기 및 소대춘 등을 성 아래에 늘어놓고 말을 시켜 소륜은 이미 난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하게 했다.
549년 소륜이 다시 흩어진 병사를 거두어 동양주자사인 소대련, 소대성 등과 더불어 동쪽 길에서 모두 도착했다. 음력 1월 4일 항의 남쪽에 병영을 늘어놓고 류중례를 대도독으로 추대했다. 류중례는 오만하고 제장들을 업신여겼는데, 소륜이 최고 상관을 접견할 때 취하는 예의로 매일 채찍을 쥐고 군문에 도착했으나 역시 시간을 옮기고 보이지 않아서 이로 말미암아 소륜과 소대련은 서로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소대련은 또 소확과 틈이 있었고, 여러 군사들이 서로 시기하고 저지하니 전투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군이 처음에 도착하자 건강의 사인과 백성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그들을 기다렸으나 겨우 회하를 지나자 곧 군사를 풀어서 협박하고 약탈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인과 백성들은 실망하였고 후경 무리 안에서 관군에 호응하려고 꾀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멈췄다.
음력 2월 15일 무제가 소륜을 사공으로 삼았다. 당시 후경은 조정과 강화하려고 했는데, 16일에 후경이 무제에게 계문을 올려 소륜 원군이 남쪽 언덕에 있는 것을 핑계로 경구에서 장강을 건너야겠다고 했다. 24일에 후경이 또 계문을 올려 소확 등이 끝내는 자신을 깨뜨려야겠다고 하니 그들을 들여보낼 것을 청했고 무제는 소확 등을 불러들였다. 소확이 다른 사람은 궁성에 들여보내고 이어서 자신은 남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니 소륜이 울면서 소확에게 말하여 들어가게 하려고 했는데, 소확이 여전히 굳게 거부하자 크게 노하여 조백초를 시켜 소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대신 들어가라고 하자 소확이 마침내 울면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후경이 물러가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나 무리의 마음은 아직도 외부에서 원조해주기를 바랐다. 류중례는 기생첩을 모으고 즐겼으며 장수들이 매일 싸울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안남후 소준이 소륜에게 유세하여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적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한 류중례의 아버지 류진이 성에 올라 류중례를 책망하는 말을 했지만 류중례 역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무제가 류진에게 계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폐하에겐 소릉왕이 있고 신하로는 류중례가 있지만 충성과 효도를 하지 않으니 도적이 어찌 평정되겠느냐고 했다. 12일에 마침내 건강성이 함락되었고 14일에 후경이 소대관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려 밖의 원군을 해산하도록 했다. 류중례가 장수들과 이를 의논하니 소륜이 오늘의 명령은 장군에게 맡긴다고 했다. 결국 군사들은 각기 자기가 온 방향으로 흩어졌다. 소륜은 회계로 달아났고 류중례 등은 진영을 열고 항복하여 성 안에 들어갔다.
2. 3. 죽음
548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륜은 군사를 이끌고 가다가 후경이 이미 채석(采石)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두 배의 속도로 달려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구원했다. 장강을 건널 때 바람이 일어나 사람과 말 중 물에 빠진 것이 열에 하나둘이었다. 둘째 아들 소확과 소강의 아들 소대춘 등 여러 제후들을 보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경구(京口)에서 서쪽으로 올라갔다. 후경이 군사를 파견하여 소륜의 군사를 막았으나, 조백초(趙伯超)의 진언을 따라 황성(黃城)대로를 피하고 지름길로 종산(鍾山)을 향하여 광막문(廣莫門)을 점거하여 건강의 포위를 풀었다. 야간 행군 중 길을 잃어 음력 12월 23일 아침에 장산(蔣山, 종산)에 군영을 마련했다.[1]
후경은 크게 놀라 석두(石頭)에서 약탈한 부녀와 재화를 배에 싣고 달아나려 했고,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소륜을 공격했으나 소륜이 싸워서 격파했다. 산꼭대기는 춥고 눈이 와서 군사를 이끌고 애경사(愛敬寺)로 내려왔다. 28일에 소륜이 군사를 현무호(玄武湖) 옆으로 전진시키고 후경과 대진했으나 싸우지 않았다. 저녁에 후경이 다음날에 싸우기로 약속하여 소륜이 허락했다. 소륜의 군중에 있던 안남후(安南侯) 소준(蕭駿)은 후경의 군사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달아나는 것으로 여겨 쫓았는데, 후경이 반격하여 소준은 패하고 소륜의 군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백초가 멀리서 보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니 후경은 승세를 타고 쫓아가 공격하여 여러 군사는 모두 무너졌다.[1]
소륜은 나머지 군사 천 명 가까이 모아 천보사(天保寺)에 들어갔는데 후경이 쫓아가서 절을 불태웠다. 소륜은 주방(朱方)으로 달아났고, 병사들은 얼음과 눈을 밟았으며 때때로 동상 때문에 발을 절단했다. 이후 소륜은 다시 경구로 퇴각했다. 후경은 소륜의 치중을 다 거두고 소대춘 등 여러 제후들 중 일부를 잡아갔다. 29일에 후경이 붙잡은 소륜이 거느렸던 군사의 수급과 포로, 갑옷과 병장기 및 소대춘 등을 성 아래에 늘어놓고 소륜이 이미 난군에게 피살되었다고 말했다.[1]
549년 음력 1월 4일, 소륜은 흩어진 병사를 거두어 동양주(東揚州) 자사인 소대련과 소대성 등과 함께 동쪽 길에서 도착, 항(桁)의 남쪽에 병영을 늘어놓고 류중례(柳仲禮)를 대도독으로 추대했다. 류중례는 오만하고 삐뚤어져 제장들을 업신여겼는데, 소륜은 매일 채찍을 쥐고 군문에 도착했으나 시간을 넘기고 보이지 않아 소륜과 소대련은 서로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소대련은 소확과 틈이 있었고, 여러 군사들이 서로 시기하고 저지하여 전투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군이 처음에 도착하자 건강의 사인(士人)과 백성은 그들을 기다렸으나, 회하를 지나자 곧 군사를 풀어서 협박하고 약탈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인과 백성들은 실망하였고, 후경의 무리 안에서 관군에 호응하려고 꾀하던 사람도 그 소식을 듣고 멈췄다.[1]
음력 2월 15일, 무제는 소륜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16일에 후경이 무제에게 계문을 올려 소륜의 원군이 남쪽 언덕에 있는 것을 핑계로 경구에서 장강을 건너야겠다고 했다. 24일에 후경이 또 계문을 올려 소확 등이 자신을 깨뜨려야겠다고 하니 그들을 들여보낼 것을 청했고, 무제는 소확 등을 불러들였다. 소확이 다른 사람은 궁성에 들여보내고 자신은 남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니, 소륜이 울면서 소확에게 말하여 들어가게 하려고 했다. 소확이 여전히 거부하자 크게 노하여 조백초를 시켜 소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대신 들어가라고 하자 소확이 마침내 울면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1]
이후 후경이 물러가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나 무리의 마음은 아직도 외부에서 원조해주기를 바랐다. 류중례는 기생첩을 모으고 솔을 놓고 즐겼으며 장수들이 매일 가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안남후 소준이 소륜에게 유세하여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적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류중례의 아버지 류진(柳津)이 성에 올라 류중례를 책망하는 말을 했지만 류중례 역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무제가 류진에게 계책을 물으니, 소릉왕(소륜)이 있지만 충성과 효도를 하지 않으니 도적이 어찌 평정되겠느냐고 했다. 12일에 건강성이 함락되었고, 14일에 후경이 소대관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려 밖의 원군을 해산하도록 했다. 류중례가 장수들과 의논하니 소륜이 오늘의 명령은 장군에게 맡긴다고 했다. 결국 군사들은 각기 자기가 온 방향으로 흩어졌다. 소륜은 회계(會稽)로 달아났고 류중례 등은 진영을 열고 항복하여 성 안에 들어갔다.[1]
무제가 죽은 뒤 후경은 소확의 용맹을 아껴 항상 좌우에 두었고, 음력 6월에 소륜이 몰래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는데, 기회를 얻어 후경을 죽이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소확은 후경과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 활을 당겨 후경을 죽이려고 했지만 줄이 끊어져 불발했고 후경이 알아채고 그를 죽였다. 이후 후경의 무리 중 하나인 송자선(宋子仙)이 남은 정부군의 잔당을 토멸하기 위해서 먼저 소륜을 노리고 진군, 음력 11월에 전당(錢塘)을 패배시키고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에 이르렀다. 소륜은 전당이 이미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서 파양(鄱陽)으로 달아났는데 파양의 내사 개건후(開建侯) 소번(蕭蕃)이 군사로 그를 막자 소륜이 나아가서 그를 쳐서 격파했다.[1]
550년 음력 1월 20일, 소륜이 강하(江夏)에 도착하니 영주(郢州) 자사 남평왕(南平王) 소각(蕭恪)이 교외까지 영접하며 영주를 소륜에게 양보했지만 소륜이 받지 않았다. 소각이 소륜을 추천하여 가황월(假黃鉞),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하고 승제(承制)하여 백관을 두었다. 음력 4월에 소륜이 영주에 있으면서 청사(廳舍)를 정양전(正陽殿)이라고 하고 안팎에 있는 재합(齋閤)에 모두 명칭을 달았다. 소륜의 부하가 군부(軍府)를 업신여기고 포학한 짓을 하자 영주의 장수들과 병사 중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자의참군(諮議參軍) 강중거(江仲擧)는 남평왕 소각의 모주(謀主)였는데 소각에게 유세하여 소륜을 도모하자고 하자 소각이 놀라서 거절하였다.[1]
강중거가 따르지 않고 제장들을 부대로 나누고 날을 정하여 곧 출발하려고 했지만 모의가 누설되어 소륜이 그를 눌러 죽였다. 소각이 낭패하여 가서 사과하니 소륜이 말하기를 소인들이 한 것이지 형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1]
음력 7월, 소륜은 후경의 무리 중 하나인 임약(任約)이 장차 군사를 이끌고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장사안(蔣思安)을 시켜 정예병 5천을 이끌고 기습, 임약의 군사는 무너졌는데, 장사안이 다시 대비를 하지 않아서 임약이 군사를 거두어 기습하자 장사안은 패하여 달아났다.[1]
이후 형주자사 소역이 조카인 강주자사 하동왕 소예를 공격하자 소륜은 소예의 동생인 옹주자사 악양왕 소찰과 함께 소역에게 사자를 보내 설득하고 소예를 지원해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은 소예가 죽으면 다음은 소륜이라는 뉘앙스의 편지로 회답했고, 소예가 살해되고 소역이 강주를 얻게 되자 그 힘에 밀린 소찰은 임지인 양양을 가지고 서위에 투항했으며 소륜도 군사를 거두어 임지로 다시 돌아갔다. 소역은 소륜이 여전히 강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꺼려하여 장수와 군대를 보내 위협했다. 마침 후경도 군사를 이끌고 소륜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패하고 옛 부하인 이소(李素)가 지키고 있던 여남(汝南)으로 달아났다. 서위에서 연이어 공격해와 대패하고 성이 함락되었으나 굽히지 않다가 살해되었고 시신이 강기슭에 버려졌다. 조카인 악양왕 소찰이 거두어서 장사지냈고, 소역은 소륜을 소릉휴왕(邵陵携王)으로 추시했다.[1]
555년에 소찰이 황제로 즉위한 뒤 소륜에게 태재(太宰)를 추증했고 소릉장무왕(邵陵壯武王)으로 추시했다.[1]
3. 가족 관계
3. 1. 부모
소연과 그의 비(妃) 충화(充華) 정씨(丁氏) 사이에서 소륜이 태어났다.[1]
3. 2. 형제
소통, 소종, 소강, 소적, 소속, 소역, 소기[1]
3. 3. 자녀
邵陵王|소릉왕중국어 소륜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소견 | ? ~ ? | 자는 장백(長白). 후경의 난 때 여남후(汝南侯)로 살해됨. |
소확 | ? ~ ? | 소륜의 둘째 아들. 자세한 내용은 소확 문서 참조. |
소질 | ? ~ ? | 소륜과 함께 무창으로 도망침.[1] |
4. 평가
소륜은 그 성품과 행동, 정치적·군사적 능력 등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잔혹함과 기행은 백성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고, 이는 양나라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소륜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포학한 행동을 일삼았다.[1] 또한, 무제를 모욕하는 패륜적인 행동을 하거나, 신하를 괴롭히는 등 상식 밖의 행동을 했다.[1]
정치적으로도 소륜은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외상값을 갚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자신을 고발한 관리를 살해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1] 후경의 난 진압 과정에서도 전략적 판단 실수와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며, 결국 양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소륜의 행적은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잔혹함, 무능함, 그리고 패륜적인 행동은 양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역사적으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4. 1. 비판적 시각
소륜은 백성들에게 조급하고 포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州)를 다스릴 때, 그는 기쁨과 분노를 일정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불법을 자행했다.[1] 시장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묻고는, 자신을 비판한 생선 장수를 생선을 삼키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1] 이러한 폭정으로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길에서는 눈짓만 할 뿐이었다.[1] 또한 상여에서 상복을 빼앗아 입고 곡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1]그의 패역함은 더욱 심해져, 무제와 닮은 노인에게 곤룡포를 입혀 조현하고, 무죄를 진술한 뒤 옷을 찢고 매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 또한 신하 최회의를 관에 넣고 상여와 만가로 장례를 치르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1] 이러한 행동은 결국 무제에게 보고되었고, 소륜은 체포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황태자 소통의 간청으로 목숨을 건졌다.[1] 그러나 무제는 소륜을 파면하고 작위와 봉토를 삭탈했다.[1]
이후 소륜은 복직되었으나, 532년에는 외상값을 갚지 않아 무제에게 질책을 받고, 자신을 고발한 소부승 하지통을 창으로 찔러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1] 이 사건으로 다시 파면되고 폐서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되었다.[1]
548년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소륜은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전략적 판단 부족과 군사적 무능으로 실패했다.[1] 장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바람으로 인해 많은 병력을 잃었고,[1] 조백초의 계책을 따라 종산으로 진격했으나 길을 잃고 헤매는 실수를 저질렀다.[1] 후경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경구로 퇴각해야 했다.[1]
건강성 함락 이후, 소륜은 회계로 도망쳤고, 이후 영주에서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신과 내분으로 실패했다.[1] 결국 서위의 공격을 받아 여남에서 사로잡혀 죽음을 맞이했다.[1] 그의 죽음은 양나라 멸망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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