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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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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경은 북위, 동위, 양나라를 거치며 활동한 인물로,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갖춘 장군이었으나, 오만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동위의 고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양나라로 귀순했으나, 이후 양나라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옹립했다. 결국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한나라를 건국했으나, 곧 진패선과 왕승변에게 패하여 도주 중 살해되었다. 그의 반란은 남량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후 진나라 건국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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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경
기본 정보
후경
전체 이름호우 징 (侯景)
가문한 (漢)
존호황제
아버지호우 뱌오 (侯標)
통치
한나라 황제재위 기간: 552년 1월 1일 – 552년 5월 경지초우 날, 다바오 시대의 2년 11월자지통감, vol. 164.
이전샤오 동
이후원제
연호타이시 (太始)
섭정
재위 기간548년 – 551년 12월 31일
양나라의 섭정무제
섭정 유형황제
생애
출생503년
사망552년 5월

2. 생애

후경은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기상을 보였다. 524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자 갈영을 따라 활약했으며, 하음의 변 이후 북위의 실권자 이주영에게 귀부하여 그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528년 부구(滏口)에서 갈영을 공격할 때에는 직접 그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에는 동위의 고환 휘하에서 사도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겸하며 하남 지역의 군사를 지휘했다. 고환은 후경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황하 남쪽 지방을 맡겼다.

고환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고징이 후경을 제거하려 하자, 후경은 이에 반발하여 서위의 우문태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한궤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자 547년 양나라무제에게 귀순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경의 아내와 장남 후화(侯和)는 동위에 남아 있다가 살해되었다.

무제는 후경을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고 대장군, 지절(持節) 등의 직책을 제수하며 후대하였다. 그러나 고징이 모용소종에게 후경 토벌을 명하자, 후경은 정양후(貞陽侯) 소연명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패배하고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양나라와 동위 사이에 화친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소연명과 후경을 교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후경은 이에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다. 548년, 왕위와 소정덕을 끌어들여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공격하였다.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하였고, 549년 내성까지 함락시킨 후에는 무제가 사망하자 간문제를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

이후 후경은 스스로 상국 및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간문제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을 제위에 올렸으며, 후경은 한왕(漢王)을 자칭하였다.

같은 해 소동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漢)이라고 하고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양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소역 등은 여전히 황제 칭호를 거부하며 맞섰다.

552년 소역이 보낸 진패선과 왕승변에게 패하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후경은 도주 중 부하 양곤(羊鵾)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갈기갈기 찢기고, 목은 강릉 성문에 걸렸으며, 두 팔과 다리는 북제문선제에게 보내졌다. 시체는 건강 시장 바닥에 버려져 훼손되었다.

2. 1. 북위와 동위에서의 활동

524년 육진의 난이 발생하자 갈영(葛榮)을 따라 활약했으며, 이후 하음의 변으로 북위이주영(爾朱榮)이 실권을 장악하자 휘하로 들어갔다. 528년 부구(滏口)에서 갈영을 공격할 당시 갈영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의 고환(高歡)의 밑으로 들어갔다.

북위 효명제 재위 기간 동안 북위는 내전 상태에 빠졌고, 국가의 많은 부분이 농민 반란에 의해 휩쓸렸다. 이 시기에 후경은 북위 장군 이자이의 군대에 합류했고, 처음에는 이자이의 부관인 모용소종에게 전술을 배웠지만, 곧 모용소종은 전술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자이가 반란을 진압한 후, 후경은 정주 (대략 현대의 바오딩, 허베이)의 지사가 되었다. 530년, 이자이가 북위 효장제에게 살해된 후, 효장제가 이자이의 친척들에게 차례로 살해되면서 이자이 일족이 황실 정부를 장악했다. 531년, 고환이 이자이에게 대항하여 일어났고, 532년, 고환이 이자이를 물리친 후, 후경은 고환에게 합류했고, 고환은 그를 제주 (대략 현대의 랴오청, 산둥)의 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곧 고환은 후경을 소환하여 그의 부하 중 한 명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534년, 고환은 독립 장군 하발악의 부관인 후모진열을 사주하여 하발악을 암살했을 때, 그는 후경을 보내 하발악의 군대를 장악하려 했지만, 가는 길에 후경은 하발악의 조수인 우문태를 만나 강력하게 시도하지 말 것을 경고했고, 후경은 물러나 우문태가 하발악의 군대를 장악하게 했다. 이는 우문태가 국가의 서부 지방을 장악하게 했고, 같은 해 고환이 532년에 황제로 세운 북위 효무제가 고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문태의 영토로 도망쳤다. 고환은 황실 원씨의 일원인 동위 효정제 원선견을 황제로 세웠고, 이로써 북위는 동위 (고환의 통제 하)와 서위 (우문태의 통제 하)로 분열되었다.

534년 말, 고환은 당시 남부 지방을 통제하고 우문태와 느슨하게 동맹을 맺었던 허바 셩(賀拔勝, 허바 위에의 형제)을 공격하기 위해 후경을 보냈다. 후경은 허바 셩을 격파하여 허바 셩이 양나라로 도망가게 하고 그 지방을 동위로 가져왔다. 536년 겨울, 그는 추저우(楚州)를 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12월 9일에 감찰(刺史) 환허(桓和)를 죽이는 등 초반에 성공을 거두었고, 유명한 양나라 장군 천칭즈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후경은 나중에 천칭즈에게 패배했고, 천칭즈의 군대는 후경의 군대가 후퇴 중에 버린 물품을 회수했다.[4]

537년, 고환이 서위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후경도 함께 했고, 단일 대규모 군대로 진격하는 것을 반대하며 군대를 서로 거리를 두고 지원하는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옹호했다. 고환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원 전투(沙苑, 현대 산시성웨이난)에서 우문태에게 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부분적으로는 후경이 고환에게 우문태의 군대를 상대로 불을 지르지 말라고 잘못된 전술적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패배 후, 후경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우문태를 기습 공격하겠다고 제안하며, 우문태가 그러한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것이고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환이 부인 러우 자오쥔 공주와 상의했을 때, 러우 자오쥔은 만약 후경이 실제로 우문태를 사로잡는다면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상기시켰다(즉, 그는 스스로 권력을 잡으려 할 것이다). 이에 고환은 후경의 계획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538년, 후경은 사원에서 동위가 패배한 것을 틈타 서위로 전향한 여러 남부 지방을 재탈환했다. 그는 이어서 옛 북위 수도인 뤄양을 포위했는데, 당시 두구 신 서위 장군이 지키고 있었고, 동위와 서위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는 대규모 전투를 촉발했다. 결국 우문태 휘하의 서위 군대가 철수해야 했고, 뤄양 지역은 다시 동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43년, 동위 장군 고중미(高仲密)가 자신이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호라오(虎牢, 현대 허난성정저우)와 함께 서위로 전향했을 때, 후경은 고환 휘하에서 호라오를 포위하고 호라오를 구출하려는 우문태 휘하의 서위 군대와 싸우는 데 복무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서위 군대는 패배하여 철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라오는 함락되지 않았고, 우문태는 비밀 사신을 보내 수비수 웨이 광(魏光)에게 진지를 지키고 구원군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후경은 사신을 사로잡았고, 요새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사신의 메시지를 "호라오에서 철수하라"로 변경한 후 사신이 웨이 광에게 도달하도록 허용했다. 웨이 광은 즉시 호라오에서 철수했고, 호라오는 다시 동위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공적으로 후경은 명예직인 ''사공'' (司空)으로 승진했다.

그 뒤 고환이 사망하자 아들인 고징(高澄)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였고, 이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의 우문태(宇文泰)를 의지하였다. 하지만 반란이 한궤(韓軌)에 의해 토벌되자 547년 양나라무제(武帝)에게로 귀순하였고, 아내 및 장남 후화(侯和) 등은 동위에 의해 살해되었다.

2. 1. 1. 고환과의 관계

후경은 528년 북위의 이주영 휘하로 들어가 갈영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정주자사가 되었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에는 동위의 고환 밑으로 들어가 사도 및 하남대행대를 더해 하남 방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고환 사후, 아들 고징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의 우문태를 의지하였다. 하지만 반란이 한궤에 의해 토벌되자 547년 양나라무제에게 귀순하였고, 아내와 장남은 살해되었다.[11]

후경은 젊은 시절 고환과 어울리던 친구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고환은 종종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며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다. 후경은 고환 휘하에서 복무하면서 뛰어난 전술가이자 강인한 전사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다리를 절며 짧은 다리로 걷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고환은 그의 능력을 알고 적절하게 그를 존경했다. 536년, 고환은 그에게 황하 남쪽의 지방을 맡겼고, 그때부터 그 지방은 그의 지휘하에 있었다.[4]

2. 2. 양나라로의 귀순과 반란

후경은 524년 육진의 난에 가담하여 갈영을 따랐다. 이후 북위의 실권자 이주영에게 귀부하여 하음의 변 이후 그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528년 부구(滏口)에서 갈영을 공격할 때에는 직접 그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에는 동위의 고환 휘하에서 사도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겸하며 하남 지역의 군사를 지휘했다.

고환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고징이 후경을 제거하려 하자, 후경은 이에 반발하여 서위의 우문태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한궤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자 547년 양나라무제에게 귀순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경의 아내와 장남 후화(侯和)는 동위에 남아 있다가 살해되었다.

무제는 후경을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고 대장군, 지절(持節) 등의 직책을 제수하며 후대하였다. 그러나 고징이 모용소종에게 후경 토벌을 명하자, 후경은 정양후(貞陽侯) 소연명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패배하고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양나라와 동위 사이에 화친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소연명과 후경을 교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후경은 이에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다. 548년, 왕위와 소정덕을 끌어들여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공격하였다.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하였고, 549년 내성까지 함락시킨 후에는 무제가 사망하자 간문제를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

이후 후경은 스스로 상국 및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 2. 1. 후경의 난

후경은 524년 육진의 난 당시 갈영을 따라 활약했으며, 하음의 변 이후 북위 이주영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11]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에는 동위 고환의 밑으로 들어가 사도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더해 하남(河南) 방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11]

고환 사후, 그의 아들 고징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 우문태를 의지하였다.[11] 그러나 한궤에 의해 반란이 토벌되자 547년 양나라 무제에게 귀순하였고, 이 과정에서 아내와 장남 후화 등이 살해되었다.[11]

무제의 후원으로 하남왕(河南王) · 대장군 · 지절(持節)을 제수받았으나, 고징이 모용소종에게 후경 토벌을 명하자 소연명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으나 패배,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11]

이후 양과 동위 간 화친으로 소연명과 후경의 맞교환이 추진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13] 548년 왕위, 소정덕을 끌어들여 양나라 수도 건강을 공격하였다.[11] 외성 함락 후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 549년 내성까지 함락 후 무제가 분사(憤死)하자 간문제를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11]

스스로 상국,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16] 간문제의 딸 율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551년 간문제를 시해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을 옹립, 한왕(漢王)을 자칭하였다.[11] 같은 해 소동에게 선양받아 즉위, 국호를 (漢),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했다.[11]

552년 소역이 보낸 진패선, 왕승변에게 패해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자식들을 익사시킨 뒤 도주하다 부하 양곤에게 살해되었다.[11]

2. 3. 한(漢)나라 건국과 몰락

551년 후경이 소동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에 즉위하며 漢중국어나라가 건국되었다. 후경은 국호를 漢중국어,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했다.[11] 그러나 이 정권은 양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소역 등은 여전히 황제 칭호를 거부하며 맞섰다.[11]

후경의 漢중국어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552년 소역이 보낸 진패선과 왕승변에게 패하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후경은 도주 중 부하 양곤(羊鵾)에게 살해되었다.[6] 그의 유해는 갈기갈기 찢기고, 목은 강릉 성문에 걸렸으며, 두 팔과 다리는 북제문선제에게 보내졌다. 시체는 건강 시장 바닥에 버려져 훼손되었다.[6]

3. 평가

후경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권모술수를 가진 인물로 평가된다. 육진의 난 진압과 갈영 생포 등 초기에는 북위와 동위에서 공을 세웠으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자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꾸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은 뒤 시신이 찢기고 훼손되는 등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이러한 후경의 죽음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3. 1. 부정적 평가

후경의 난은 남량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후경이 죽은 지 약 5년 후, 양나라 장군 진패선은 양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건국했다.

3. 2. 긍정적 평가

육진의 난이 발생하자 갈영을 따라 활약하였으며, 이후 하음의 변으로 북위이주영이 실권을 장악하자 휘하로 들어가 여러 공을 세웠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의 고환의 밑으로 들어갔으며, 사도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더해 하남(河南) 방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 뒤 고환이 사망하자 아들인 고징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였고, 이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의 우문태를 의지하였다. 하지만 반란이 한궤에 의해 토벌되자 547년 양나라무제에게로 귀순하였다.[1]

무제의 후원을 받아 하남왕(河南王) · 대장군 · 지절(持節)을 제수받았으며, 고징이 모용소종에게 후경의 토벌을 지시하자 정양후(貞陽侯) 소연명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 양나라와 동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소연명과 후경의 맞교환이 추진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548년 왕위와 소정덕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양나라의 수도인 건강을 공격하였다.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하였고, 549년 건강의 내성까지 함락된 이후 무제가 분사(憤死)하자 후경은 태자였던 간문제을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1]

스스로 상국(相國) ·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간문제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을 제위에 올렸으며, 후경은 한왕(漢王)을 자칭하였다. 같은 해 소동을 핍박해 구석을 누렸으며, 다시 같은 해 선양을 받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漢)이라고 하고 연호를 태시로 정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1]

552년 상동왕(湘東王) 소역이 보낸 진패선과 왕승변에게 패해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후경은 자기 자식들을 익사시킨 뒤 한 척의 배를 타고 도주하였으나 부하인 양곤(羊鵾)에 의해 살해되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후표(侯標)원황제(元皇帝)로 추존
부인미상547년 또는 548년 고징에 의해 처형됨
부인소씨(蕭氏)소정덕의 딸, 548년 결혼
부인율양공주양나라 간문제의 딸, 550년 결혼
주요 후궁양비(羊妃)양나라 장군 양간(羊侃)의 딸
장남미상고징에 의해 547년 또는 548년 처형됨
아들미상 (4명)북제 문선제 재위 기간 중 처형됨[17]
아들미상 (2명)양나라 영토에서 태어남, 552년 후경에 의해 살해됨


5. 대중문화 속의 후경

다나카 요시키일본어의 소설 《장강낙일부》의 무대로 후경이 등장한다.[1]

참조

[1] 문서 jichou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Dabao era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Liang Shu
[4] 서적 Wei Shu
[5] 서적 Liang Shu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Nan Shi
[8] 서적 梁書
[9] 서적 南史
[10] 서적 陳書
[11] 서적 1956
[12] 문서 孝文帝
[13] 서적 資治通鑑
[14] 서적 資治通鑑
[15] 서적 世界の歴史 4 唐とインド
[16] 문서 宇宙
[17] 문서 文宣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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