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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생 캉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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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고는 카롤루스 대제의 서자 또는 사생아로, 생 캉탱 수도원장이자 대주교였다. 그는 드로고의 형제이자 경건왕 루트비히의 이복형제였다. 818년 삭발 후 여러 수도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834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루트비히 1세 사후 아들들 간의 분쟁에서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다 퐁트누아 전투 이후 카를 2세 편에 섰다. 844년 아키텐의 피피누스 2세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샤루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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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생 캉탱)
기본 정보
생캉탱의 문장
생캉탱의 문장
이름위그
출생연도 미상
사망1140년 11월 13일
직업생캉탱 수도원의 수도원장
생애
설명위그는 생캉탱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으며, 1140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추가 정보
사망 장소생캉탱
활동 기간11세기 ~ 12세기

2. 생애

후고는 카롤루스 대제의 서자로, 첩 레기나 소생이며 이복 형은 경건왕 루트비히이다. 그는 경건왕 루트비히 치세에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어 생캉탱 수도원장을 비롯한 여러 수도원의 원장을 지냈다. 834년에는 대주교이자 제국 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고[3] 같은 해 제국 수상 및 대법관으로도 활동했다.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후고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841년 퐁트누아 전투 이후 대머리 카를 2세의 편에 합류하였다. 그는 대머리 카를 2세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844년 6월 14일 앙구무아에서 아키텐피핀 2세 군대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고[4],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카롤루스 대제의 서자 혹은 혼외관계로 태어난 사생아이며, 그의 첩 레기나 소생이었다. 형으로는 역시 사제가 된 메츠 주교 드로고가 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이복 형이었다.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백작에 임명되었다.

814년부터 이복 형 경건왕 루트비히와 함께 식탁을 함께할 수 있었다. 818년 4월, 후고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계승자인 경건왕 루트비히에 의해 친형 드로고 및 다른 서출 이복형제 테오도리히 등과 함께 아헨의 한 수도원에서 삭발되었다. 이는 그 해 4월 17일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의 베른하르트가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직후였다.[2] 롬바르디아의 베른하르트가 제거된 후 친척들을 불신하게 된 경건왕 루트비히는 베른하르트의 죽음을 계기로 대부분의 친척들을 사제나 성직자로 만들었다.

821년 10월 중순, 경건왕 루트비히는 티옹빌에서 개최한 제국 의회에서 베른하르트의 추종자들을 사면하고, 추방되었던 친척 아달하르트와 왈라를 복권시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는 이복 동생들에게 높은 성직을 맡겼다. 이후 후고는 루트비히 가문의 내부 갈등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고는 여러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했는데, 생캉탱 수도원장(822~823년), 로브 수도원장(836년), 성 베르티노 수도원장(836년) 등이 있다. 한때 이복 형 경건왕 루트비히가 그에게 값비싼 선물을 내렸지만, 후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물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834년 그는 경건왕 루트비히에 의해 대주교이자 제국 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3월 1일, 생드니 수도원에서 다시 황제로 복위한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해 6월 마르무티에의 테오도(Theodo Marmoutier)가 사망하자 후고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시에 제국 대법관으로도 활동했으며, 834년 6월 1일부터 836년 사이에 작성된 성 베르티노, 로브, 노아이유 수도원의 문서에는 그가 대법관으로 명시되어 있다.

840년 6월 20일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은 상속 재산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분쟁이 확산되자 후고는 어느 편을 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841년 9월의 퐁트누아 전투 이후로는 대머리 카를 2세의 편에 합류하였다. 후고는 대머리 카를 2세의 편에 서서 독일인 루트비히 및 로타르 1세와 싸웠다. 842년 대머리 카를 2세는 생캉탱에서 임시 휴전을 맺고, 훗날 서프랑크 왕국이 되는 영토의 동부 국경지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후고의 이러한 활동은 843년 베르덩 조약 당시 영토 분할 과정에서 생캉탱 지역을 확보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머리 카를 2세가 앙굴렘 전투에서 툴루즈를 점령하자[4], 후고는 툴루즈에 있는 대머리 카를 2세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844년 6월 14일 앙구무아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키텐피핀 2세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피핀 2세 군사의 에 찔려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익명의 시구에서 'Rhythmus de obitu Hugonis abbatis' 또는 'Planctus Ugoni abbatis'로 묘사되었다. 그의 시신을 확인한 피핀 2세는 통곡했다고 한다.

후고가 죽기 직전 남긴 요청에 따라, 피핀 2세는 그의 시신을 샤루 수도원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2. 2. 수도원장 및 대주교

818년 4월, 이복 형인 경건왕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의 베른하르트 반란 진압 직후, 후고를 친형 드로고 및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아헨의 한 수도원에서 삭발시켰다.[2] 이는 베른하르트 제거 후 친족들을 불신하게 된 루트비히가 그들을 성직자로 만들어 권력에서 배제하려는 조치의 일환이었다.

821년 10월 티옹빌 제국 의회에서 루트비히가 베른하르트 추종자들을 사면하고 추방했던 친척들을 복권시킨 후, 후고를 포함한 이복 동생들에게 높은 영적 직분을 보장하였다. 이후 후고는 루트비히 가족 간의 갈등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여러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다. 생캉탱 수도원장(822년~823년), 로브(Lobbes) 수도원장(836년), 성 베르티노(Saint-Bertin) 수도원장(836년)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경건왕 루트비히가 값비싼 선물을 내렸으나, 후고는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834년 후고는 경건왕 루트비히에 의해 대주교이자 제국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6월, 루트비히가 황제로 복위한 직후 마르무티에의 테오도(Theodo of Marmoutier)가 사망하자 후고를 제국의 수상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시에 제국의 대법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는 834년 6월 1일부터 836년 사이에 작성된 성 베르티노, 로브, 노아이르(Noaillé) 수도원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상속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후고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841년 9월 퐁트누아 전투 이후 대머리 카를 2세의 편에 합류하였다. 그는 카를 2세를 도와 독일인 루트비히 및 로타르 1세와 맞서 싸웠다. 842년 카를 2세가 생캉탱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후고가 함께 있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843년 베르덩 조약 당시 생캉탱 지역이 서프랑크 왕국 영토로 편입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3. 왕위 계승 분쟁과 죽음

840년 6월 20일 이복 형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상속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다. 분쟁이 격화되면서 후고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841년 9월에 벌어진 퐁트누아의 전투 (841년) 이후, 그는 대머리 카를 2세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후고는 대머리 카를 2세를 도와 독일인 루트비히 및 로타르 1세와 맞서 싸웠다.

842년 대머리 카를 2세는 생캉탱에서 임시 휴전을 맺고, 훗날 서프랑크 왕국이 되는 영토의 동부 국경 지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후고의 이러한 활동은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영토가 분할될 때, 생캉탱 지역을 대머리 카를 2세의 영토로 확보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머리 카를 2세가 앙굴렘 전투에서 승리하여 툴루즈를 점령하자[4], 후고는 툴루즈에 있는 대머리 카를 2세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844년 6월 14일, Angoumois|앙고무아프랑스어 지역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키텐아키텐인 피핀 2세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후고는 아키텐인 피핀 2세 군사의 에 찔려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익명의 기록에서 Rhythmus de obitu Hugonis abbatisla 또는 Planctus Ugoni abbatisla라는 구절로 묘사되었다. 아키텐인 피핀 2세는 후고의 시신을 확인하고 크게 슬퍼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후고가 죽기 전에 남긴 요청에 따라, 아키텐인 피핀 2세는 그의 시신을 Charroux Abbey|샤루 수도원프랑스어으로 옮겨 안치했다.

참조

[1] 간행물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Poetae II, p. 139 http://www.mgh.de/dm[...] MGH
[2] 서적 The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751–987 Longman 1983
[3] 서적 The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751–987 Longman 1983
[4] 서적 Les comtes de Poitou, ducs d'Aquitaine : 778-1204 Geste éd.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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