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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피누스 2세 (아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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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피누스 2세는 9세기 아키텐 지역의 왕으로, 아버지 피핀 1세 사후 왕위에 올랐으나, 할아버지 경건왕 루이의 결정으로 삼촌 대머리왕 카를과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그는 바이킹과 협력하여 세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폐위된 후 86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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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피누스 2세 (아키텐)
기본 정보
피핀 2세의 오볼스 은화 (845년 - 848년)
피핀 2세의 오볼스 은화 (845년 - 848년)
군주호아키텐 왕
전체 이름피핀 2세
출생823년
사망864년 이후
왕가카롤링거 가문
왕조카롤링거 왕조
아버지피핀 1세
어머니잉게르트루데
통치
재위838년 - 851/2년, 854년 - 864년
기타
관련 인물피핀 2세 (피핀 가문의 프랑크 왕국 궁재)

2. 생애

838년 아버지 피핀 1세가 사망하자,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며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3] 그러나 할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832년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대머리왕 카를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하여 갈등이 시작되었다.

카바네의 아데마르,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 등 아키텐 귀족들은 대머리왕 카를 2세에 반발, 불복종을 선언했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푸아투 지역을 공격했지만 아키텐 군사들에게 패배하고 계획을 철회했다.

839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피핀 2세의 상속권이 박탈되고, 대머리왕 카를 2세가 아키텐 왕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아키텐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왕 카를 2세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피핀 2세는 삼촌 로타르 1세를 지원하여 대머리왕 카를 2세를 격파했지만, 로타르 1세가 루트비히 2세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은 불리해졌다. 피핀 2세는 아키텐으로 돌아가 대머리왕 카를 2세와의 전쟁을 계속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피핀 2세는 아키텐을 통솔하되 대머리왕 카를 2세를 주군으로 섬겨야 했으나, 피핀 2세는 이에 반발했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가론 강을 따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이는 바이킹에게 약탈하기 좋은 땅을 정찰하게 해 준 피핀 2세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4]

845년 피핀 2세는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서 망명해 온 보르도 공작 세귄을 바스코눔(Wasconum) 공작에 임명하여 가스코뉴의 산초 2세 산시온에게 맞서게 했다.[4]

아키텐의 가장 큰 도시인 보르도847년 야를 오스카의 바이킹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는데, 이는 보르도 시민들의 불만과 유대인 및 피핀 2세 지지파 게릴라들의 도움 덕분이었다.[4]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도 손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4]

피핀 2세는 과음과 다소 나태한 생활에 빠졌고, 848년 무렵 아키텐 귀족들의 지지가 줄어들었다.[4]

852년 피핀 2세는 가스코뉴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체포되어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 넘겨졌다.[4] 피핀 2세는 수아송의 세인트 메다르(Saint Médard) 수도원에 감금되었다.[4]

854년 세인트 메다르 수도원에서 탈출에 성공한 피핀 2세는 바이킹 족 용병을 고용하였다. 피핀은 자신의 옛 영토에 바이킹 족의 정착을 주도했다. 855년 피핀 2세는 자신의 옛 영토인 루아르 계곡푸아티에, 앙굴렘, 페리, 리모,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차례로 회복하였고, 대머리 카를 2세는 피핀 2세를 진압하려고 힘썼다.

864년 무렵 피핀 2세가 바이킹 족에 가입해서 바이킹이 된 것으로 기독교 사회에 확산되었으며, 기독교식 예배 대신, 바이킹 족의 하나로 살며 바이킹의 신을 숭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2] 그는 툴루즈 지역을 공격할 때 바이킹 족에 합류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중, 카를 2세의 추격자에 의해 사로잡혔다. 864년 상 리스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823년 카롤링거 제국 황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피핀 1세와 마들렌 출신 인고베르그(Ingoberge) 또는 인겔트루드(Ingeltrude)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랭스 대주교 아키텐의 샤를이다. 일설에는 피핀 2세의 어머니는 니벨룽 가문 출신 테이베르트 마드리에(Thibert Madrie)의 딸 라이가르트(Ringarde)라는 설도 있다. 서프랑크 왕국의 역사가였던 니타르트에 의하면 피핀 2세는 아버지 피핀 1세의 장남이라 한다.[3]

아버지 피핀 1세는 형 로타르 1세, 동생 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할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에게 반항하여 쿠데타를 기도했다. 피핀 2세가 태어날 무렵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바이에른의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 2세를 얻었고, 상속령을 수정하여 세 아들에게 분배된 영토의 일부를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 알레만니아아키텐을 넘기려 하자, 로타르 1세,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2. 2. 아키텐 왕위 계승 분쟁

838년 아버지 피핀 1세가 정신질환으로 사망하자,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며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3] 그러나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832년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대머리왕 카를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한 것을 근거로, 카를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하여 갈등이 시작되었다.

카바네의 아데마르,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Emenone) 등 아키텐 귀족들은 대머리왕 카를 2세에 반발, 불복종을 선언했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푸아투 지역을 공격했지만 아키텐 군사들에게 패배하고 계획을 철회했다.

839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피핀 2세의 상속권이 박탈되고, 대머리왕 카를 2세가 아키텐 왕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아키텐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왕 카를 2세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피핀 2세는 삼촌 로타르 1세를 지원하여 대머리왕 카를 2세를 격파했지만, 로타르 1세가 루트비히 2세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은 불리해졌다. 피핀 2세는 아키텐으로 돌아가 대머리왕 카를 2세와의 전쟁을 계속했다.

2. 3. 시민 전쟁과 베르됭 조약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피핀 2세는 로타르 1세를 지원하여 대머리왕 카를 2세와 싸웠으나 패배했다.[3] 이후 로타르 1세와 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 2세를 지원하여 퐁트누아 전투에서 대머리 카를 2세를 꺾고, 피핀 2세는 아키텐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피핀 2세에게 아키텐이 반환되자 대머리 카를 2세는 반발하여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하였다. 피핀 2세의 실질적인 통치는 848년 또는 852년까지였다.

841년부터 843년까지 카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가 로타르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피핀 2세는 로타르 1세의 휘하 장수로 참전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군대가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꺾었는데, 이때 대머리 카를 2세는 가스코뉴에 있는 피핀 2세에게 사자를 보냈으나, 피핀 2세는 사자를 구타하였다. 피핀 2세는 아키텐으로 돌아가 대머리 카를 2세가 파견한 툴루즈 백작 베른하르트 드 셉티마니아(Bernhart de Septimania)를 몰아냈다.

842년 또는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 툴루즈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툴루즈와 라우구에(Rouergue)의 백작 툴루즈의 프레도론(Frédolon)가 대머리 카를 2세 편에 가담하였다. 843년 피핀 2세는 대머리 카를 2세와 사로나 섬(Saona)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피핀 2세는 아키텐을 통솔하되 대머리왕 카를 2세를 주군으로 섬겨야 했으나, 피핀 2세는 이에 반발했다.

2. 4. 바이킹과의 협력과 몰락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핀 2세는 야를 오스카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땅을 약탈해서 정복하면 정착지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들은 가론 강을 따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이는 바이킹에게 약탈하기 좋은 땅을 정찰하게 해 준 피핀 2세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4]

845년 피핀 2세는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서 망명해 온 보르도 공작 세귄을 바스코눔(Wasconum) 공작에 임명하여 가스코뉴의 산초 2세 산시온에게 맞서게 했다.[4] 그러나 세귄은 1년 만인 846년에 사망했다. 한편 산초 2세 산시온은 피핀 2세의 아버지 피핀 1세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상대로 전쟁할 때 도운 인물이었으나,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피핀 2세의 요청을 거절했다.[4]

아키텐의 가장 큰 도시인 보르도847년 야를 오스카의 바이킹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는데, 이는 보르도 시민들의 불만과 유대인 및 피핀 2세 지지파 게릴라들의 도움 덕분이었다.[4]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도 손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4]

피핀 2세는 과음과 다소 나태한 생활에 빠졌고, 848년 무렵 아키텐 귀족들의 지지가 줄어들었다.[4] 같은 해 6월 6일 대머리왕 카를 2세는 다시 자신이 아키텐 왕국의 왕임을 선언했고, 피핀 2세의 동생 아키텐의 샤를이 아키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4]

852년 피핀 2세는 가스코뉴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체포되어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 넘겨졌다.[4]

2. 5. 투옥, 탈출, 그리고 죽음

852년 9월 피핀 2세는 가스코뉴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체포되어 동생 샤를과 함께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에게 넘겨졌다.[4] 피핀 2세는 수아송의 세인트 메다르(Saint Médard) 수도원에 감금되었다.[4] 피핀 2세를 체포한 공로로 카를 2세는 산초 2세 산시온을 공작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 2세와 전쟁을 벌였고, 청년 루트비히를 보내 대머리 카를 2세와 교전하였다. 전쟁은 855년 청년 루트비히가 청년 루트비히를 아키텐으로 보내 피핀 2세와 샤를을 탈출시켰다. 청년 루트비히는 피핀 2세의 탈출 소식을 확인한 후에 바이에른으로 퇴각하였다.

854년 형제 샤를과 함께 세인트 메다르 수도원에서 탈출에 성공한 피핀 2세는 대머리 카를 2세에 맞서 싸울 바이킹 족 용병을 고용하였다. 피핀은 자신의 옛 영토에 바이킹 족의 정착을 주도했다. 대머리 카를 2세의 아들 유아왕 샤를은 군사를 이끌고 푸아티에 지역을 공격하였다. 855년 10월 라모에서 열린 아키텐의 귀족회의에서 유아왕 샤를을 아키텐 왕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피핀 2세는 자신의 옛 영토인 루아르 계곡푸아티에, 앙굴렘, 페리, 리모,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차례로 회복하였고, 대머리 카를 2세는 피핀 2세를 진압하려고 힘썼다.

859년 피핀 2세는 로베르 강철공 및 브리튼의 주교 솔로몬 등과 동맹을 맺었다.[4] 다시 카를과의 전투를 시작했으나 작은 승리를 몇번 거두었다. 이후 그는 바이킹 족에게 의탁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864년 무렵 피핀 2세가 바이킹 족에 가입해서 바이킹이 된 것으로 기독교 사회에 확산되었으며, 기독교식 예배 대신, 바이킹 족의 하나로 살며 바이킹의 신을 숭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2] 그는 툴루즈 지역을 공격할 때 바이킹 족에 합류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중, 카를 2세의 추격자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는 864년 황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명의의 파이스트레스의 칙령에 의해 면직되고, 곧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등급 감하여 상 리스 감옥에 수감되었다. 864년 피핀은 상 리스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3.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피핀 1세
어머니인고베르그 또는 인겔트루드
형제아키텐의 샤를
부인미상[1]
아바 (베네딕토 수녀원 원장)



랭스의 주교 힝크마르는 피핀 2세의 부인이 피핀 2세의 가까운 친척으로 근친혼이었다고 비판했다.[1]

참조

[1] 문서 Also called Engelberga, Rigarde, Hringard, or Ringart.
[2] 서적 Pepin II of Aquitain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4
[3] 웹사이트 Nithardus, Historiae, liber I: par. 8 http://www.thelatinl[...]
[4] 웹사이트 Annales de Saint-Bertin , Pag 99 http://gallica.bn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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