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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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은 1632년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어려서 단바 국으로 보내졌고, 야마시로 국 니시진에서 대장장이 도제로 지내다가, 1654년 후시미노미야 궁가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 1660년 친왕 선하를 받았으며, 이후 황족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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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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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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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사다유키 친왕 |
가문/작위 | 후시미노미야 |
신분 | 친왕 |
경칭 | 전하 |
휘장 | 미상 |
어릴 적 이름 | 미네마쓰기미(峯松君) |
통칭 | 초쿠로(長九郎) |
법명 | 엔짓쇼인(円実照院) |
아버지 |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 |
어머니 | 쇼나곤노츠보네 (안도 사다코, 안도 사다모토 또는 안도 사다요시의 딸) |
배우자 | 요시키미 (고노에 히사쓰구의 딸) 가뇨보 (오카모토 쇼겐의 여동생) 가뇨보・아제치 가뇨보 (상세 불명) |
자녀 | 후시미노미야 구니나가 친왕 마코노미야 마사코 여왕 외 |
출생일 | 간에이 9년 5월 27일 (1632년 7월 14일) |
사망일 | 겐로쿠 7년 5월 18일 (1694년 6월 10일) |
관직 | 시키부쿄 |
칭호 | 엔짓쇼인 |
종교 | 미상 |
능묘 | 미상 |
가계 | |
족보 |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의 둘째 아들 스고 천황의 남계 10세손 |
2. 생애
1632년 간에이 9년에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도 사다코이며, 후시미노미야 쿠니시게 왕의 자손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미네마츠 군이라고 불렸다.[2]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는 역대 당주의 실명의 첫 글자를 '사다'와 '쿠니'를 번갈아 사용했기 때문에, 쿠니미치 친왕은 쿠니나오 친왕이 아닌 사다키요 친왕의 후계자로 생각되었다. 게이안 2년(1649년)에 쿠니미치 친왕이 친왕 선하를 받고 계승자가 되었지만, 쿠니나오 친왕 측은 가문에 돌아온 사다유키 친왕을 내세워 반전을 꾀하려 했다. 아카사카 쓰네아키는 쿠니나오 친왕 측이 사다유키를 아들이 없는 쿠니나오 친왕의 계승자로 칭함으로써 쿠니미치 친왕 측의 대두를 억제하려 했으며, 이것이 『후시미노미야 계보』 등에서 사다유키 친왕이 원래는 이복 형인 쿠니나오 친왕의 아들로 여겨진 배경이라고 설명한다.[2]
쇼오 3년(1654년)에 사다키요 친왕, 쿠니나오 친왕, 쿠니미치 친왕이 잇달아 붕어하면서 후시미노미야 가는 단절의 위기에 직면했다. 쿠니미치 친왕 측의 쇼다이후들은 사다유키 친왕의 가독 계승을 막기 위해 고미즈노오 법황의 황자를 후시미노미야 가문에 맞이하고 사다유키 친왕을 출가시킬 계획을 세웠으며, 법황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았다. 안도 사다타메는 니와타 마사즈미와 미키 후유나카와 상담했고, 무가 전주였던 세이칸지 도모후사와 노노미야 사다미치가 에도 막부에 호소하자, 막부의 명령에 따라 교토 쇼시다이인 이타쿠라 시게무네가 정밀 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시미노미야의 사생아로 인정받아 코가 히로미치의 후견 아래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 만지 3년(1660년) 10월 17일에 친왕 선하, 27일에 원복하고, 고미즈노오 원과 도후쿠몬인의 유자가 되었으며, 탄정윤에 임명되었다. 간분 5년 2월 18일에 이품에 서임되었고, 병부경 및 식부경에 임명되었다.[3]
2. 1. 출생과 성장
1632년 간에이 9년에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도 사다코이며, 후시미노미야 쿠니시게 왕의 자손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미네마츠 군이라고 불렸다.[2]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단바 국에 양자로 보내졌다. 야마시로국 니시진의 대장간 (원래는 공가가 겸업하던 도공(刀工)의 가계)의 도제(徒弟)가 되어 나가쿠로(長九郎)라고 불렸다.[2]
『충리숙네기』에 따르면 12~13세(1643년~쇼호 원년(1644년))에 단바 국에서 상경하여 교토 니시진의 칼 장인인 우메타다(묘친이라고도 함)의 제자가 되었으며, 18세(1649년)까지 조큐로라고 칭했다. 『츠다 장서 안도 가계』에 따르면, 사다유키의 어머니의 여동생은 우메타다 묘친의 아내였다고 한다. 게이안 2년(1649년)에는 묘친의 제자를 그만두고 단바 국의 백부인 안도 사다자네(안도 사다쓰구라고도 함)의 저택으로 돌아갔다.[2]
1651년에는 안도 사다아키의 아들이자 안도 일문의 본가인 안도 사다타메가 분가 출신인 사촌 누이 안도 사다코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사다유키 친왕을 맡고 있었다. 『안도 략계』 "초마쓰켄 이오덴"에 따르면, 사다코는 사다아키의 양자가 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 시기라고 생각된다. 쇼오 원년(1652년) 21세의 나이로 단바의 타메아키 저택에 있던 사다유키 친왕은 아버지 사다키요 친왕의 초청을 받아 귀경했다.[2]
그러나 곧 사다유키 친왕의 후원자인 이복 형 후시미노미야 쿠니나오 친왕이 사망하면서 사다유키의 입장도 위태로워졌고, 쇼오 2년(1653년)에는 다시 참언으로 인해 출분했다. 이때, 사다유키 친왕을 데려간 것은 과거의 스승인 묘친이었으며, 쇼오 2년(1653년)부터 만지 3년(1660년)에 친왕 선하를 받을 때까지 묘친은 사다유키 친왕을 보호했다.[2]
2. 2. 후시미노미야 계승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단바에 양자로 보내졌다. 야마시로국 니시진의 대장간 (원래는 공가가 겸업하던 도공(刀工)의 가계)의 도제(徒弟)가 되어 나가쿠로(長九郎)라고 불렸다.[2]1651년, 참언(讒言)으로 외가로 도망치지만, 사다키요 친왕의 초청으로 이듬해 돌아갔으나, 1653년 다시 참언으로 도망쳤다.[4] 조오 3년(1654년) 사다키요 친왕, 쿠니나리 친왕, 쿠니미치 친왕이 잇달아 사망하여 후시미노미야 궁가가 단절될 위기에 처했으나, 안도가의 움직임으로 교토 쇼시다이가 조사한 결과 후시미노미야의 사생아로 인정되어 코가 히로미치의 후견 아래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3] 만지 3년(1660년) 친왕 선하와 원복을 했다.[3]
1653년부터 1660년 친왕 선하를 받을 때까지 묘친이 사다유키 친왕을 보호했다.[2]
1662년 4월 25일 와카회를 열었으며, 하치조노미야 지타다 친왕도 "가구야마나 아마노이와토도 봄에 밝아오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봉우리의 진사카키"라는 사다유키 친왕을 황족으로 대우하는 노래를 보낸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사다유키 친왕은 황족들로부터 황족(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자손)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5]
2. 3. 활동
1651년, 사다유키 친왕은 참언(讒言)으로 외가로 도망쳤으나, 사다키요 친왕의 초청으로 이듬해 돌아왔다. 그러나 1653년에 다시 참언으로 도망쳤다.[2]조오 3년 (1654년), 사다키요 친왕, 쿠니나리 친왕, 쿠니미치 친왕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후시미노미야 궁가는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안도가의 움직임으로 교토 쇼시다이가 조사한 결과, 후시미노미야의 사생아로 인정받아 코가 히로미치의 후견 아래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 만지 3년 (1660년)에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했다.[3]
사다유키 친왕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탄바국에 양자로 보내졌다. 야마시로국 니시진의 대장간 (원래는 공가가 겸업하던 도공(刀工) 가계)의 도제(徒弟)가 되어 나가쿠로(長九郎)라고 불렸다.[2]
게이안 4년(1651년), 안도 사다아키의 아들이자 안도 일문의 본가인 안도 사다타메가 사촌 누이 안도 사다코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사다유키 친왕을 맡았다. 쇼오 원년(1652년), 사다유키 친왕은 아버지 사다키요 친왕의 초청을 받아 교토로 돌아왔다.[2]
그러나 이복 형 쿠니나오 친왕이 사망하면서 후원자를 잃었고, 쇼오 2년(1653년)에 다시 참언으로 인해 출분했다. 이때 사다유키 친왕을 보호한 것은 과거의 스승인 묘친이었다.[2]
쇼오 3년(1654년), 후시미노미야 가문 당주들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안도 사다타메는 에도 막부에 호소했다. 막부의 명령에 따라 교토 쇼시다이인 이타쿠라 시게무네가 정밀 조사를 한 결과, 후시미노미야의 사생아로 인정받아 쿠가 히로미치의 후견 아래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 만지 3년(1660년) 친왕 선하, 원복하고, 고미즈노오 원과 도후쿠몬인의 유자가 되었으며, 탄정윤에 임명되었다. 간분 5년 2월 18일에 이품에 서임되었고, 병부경 및 식부경에 임명되었다.[3]
간분 2년(1662년) 4월 25일에는 와카회를 열었으며, 하치조노미야 지타다 친왕도 사다유키 친왕을 황족으로 대우하는 노래를 보냈다.[5]
3. 어머니
안도 사다코는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가신이었던 안도 사다모토의 딸로, 게이초 8년(1603년)에 태어났다. 후시미노미야 쿠니히사 친왕 또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을 섬겼으며, 출가 후에는 센주인(仙寿院)이라는 호를 얻었다. 간에이 13년(1636년) 5월 3일에 사망했으며, 법명은 자안원심화광청대자(慈眼院心和光清大姉)이고 교토 센본 조코지(京千本浄光寺)에 묘가 있다.[6]
『충리숙네기』에는 사다유키 친왕이 "하척복(身分이 낮은 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시미노미야 계보』 및 "쓰다 장서 안도가 계"에는 "가녀방(소나곤 츠보네 안도씨, 명사다코)", "후시미 전 여러 다이후 산카와노카미 안도 후지와라 사다모토의 딸 사다코"가 어머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카사카 츠네아키는 "안도 사다코"라는 이름이 사다유키 친왕이 후시미노미야 가문을 계승한 후에 소급하여 붙여진 것이며, 『후시미노미야 계보』에서 "가녀방"이라고 한 것도 후세의 소급이라고 주장한다.[2]
『충리숙네기』에 따르면, 사다유키 친왕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가인 단바 국 오구치 촌의 안도 씨 저택에서 태어났으나,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 사생아로 취급되어 단바 국에서 자랐다.[2]
4. 자녀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은 고노에 히사쓰구의 딸인 친왕비 요시기미 외에 집안의 시녀, 그리고 생모 불명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