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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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은 1971년 12월 12일,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간주한 흥아관음과 순국칠사지비를 폭파하려 한 사건이다.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 마쓰이 이와네가 건립한 흥아관음과 A급 전범들의 위패를 모신 순국칠사지비가 표적이 되었으며, 철 파이프 폭탄과 소화기 폭탄이 사용되었다. 순국칠사지비 폭파에는 성공했으나 흥아관음 폭파는 실패했고, 이후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체포로 인해 사건이 알려졌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의 첫 테러 시도이자, 이후 일련의 기업 폭탄 테러의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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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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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 |
일본어 명칭 | ・ |
로마자 표기 | Kōa Kannon Junkoku Shichishi no Hi Bakuha Jiken |
발생 위치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지쿠사구 헤이와 공원 내 |
발생일 | 1970년 3월 5일 |
목표 | 흥아관음 및 순국칠사지비 |
공격 유형 | 폭탄 테러 |
원인 |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합사, 기쿠치 히로시의 흥아관음 건립, 박열과의 관계에 대한 반발 |
관련 인물 | |
용의자 | A (사망) B (체포) |
배경 | |
배경 | 흥아관음: 기쿠치 히로시가 태평양 전쟁 당시 전몰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관음상 순국칠사지비: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7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 |
사건 경과 | |
1970년 3월 5일 | A와 B가 헤이와 공원 내 흥아관음 및 순국칠사지비에 폭탄을 설치, 폭파 시도 폭파로 인해 순국칠사지비 일부 파손, 흥아관음은 경미한 피해 |
사건 이후 | 용의자 A는 사건 직후 자살, B는 체포되어 처벌받음 사건 이후 흥아관음과 순국칠사지비는 복원되었으나, 논란은 지속 |
영향 | |
영향 | 일본 사회 내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한 논쟁 재점화 A급 전범 합사에 대한 비판 여론 확산 흥아관음 및 순국칠사지비의 존재에 대한 논란 심화 |
기타 | |
관련 항목 | 기쿠치 히로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 박열 |
2. 사건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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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흥아관음과 순국칠사지비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본격적인 폭탄 테러를 시작하기 전, 자신들의 폭탄 제조 기술을 시험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을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목표로 삼은 '흥아관음'은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이 세운 관음상이었고, '순국칠사지비'는 마쓰이 이와네를 포함한 A급 전범 사형수들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두 상징물은 폭파 대상이 되었다.3. 사건의 경과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본격적인 폭탄 테러에 앞서 폭탄 제조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을 폭파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들이 선택한 '흥아관음'은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이 건립한 관음상이었고, '순국칠사지비'는 마쓰이와 기타 A급 전범 사형수들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1971년 10월경부터 폭파 준비를 시작했으나, 10월 24일 공산주의자 동맹 봉기파가 도내 여러 파출소를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도 폭탄 투쟁을 하는 그룹이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지만, 공안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1971년 12월 12일, 다이도지 마사시, 마스나가 토시아키 등 3명은 철 파이프 폭탄과 소화기 폭탄을 가지고 현장으로 갔다. 이들은 흥아관음에는 철 파이프 폭탄을, 순국칠사지비에는 소화기 폭탄을, 그 사이에 있던 '대동아전 순국전사 일영팔팔 영위 공양비'에도 철 파이프 폭탄을 설치하고 오후 10시에 폭발하도록 설정했다. 순국칠사지비는 파괴되었지만, 흥아관음에 설치한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공양비는 약간 손상되는 데 그쳤다.
사건 직후에는 도내 연쇄 파출소 폭파 사건이 더 주목을 받았고,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 체포되면서 이 사건이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3. 1. 폭탄 제조 및 설치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본격적인 폭탄 테러를 하기 전에, 폭탄 제조 기술을 시험해 볼 겸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을 폭파하기로 했다. 이 사건의 표적이 된 '흥아관음'은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이 건립한 관음상이었고, '순국칠사지비'는 마쓰이와 기타 A급 전범 사형수들을 기리는 기념비였다.1971년 10월경부터 준비를 시작했지만, 10월 24일에 공산주의자 동맹 봉기파가 도내 여러 파출소를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들 외에도 폭탄 투쟁을 하는 그룹이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지만, 공안 경찰이 엄격한 경계 태세를 취하면서 경솔하게 행동하기 어려워졌다.
1971년 12월 12일, 다이도지 마사시, 마스나가 토시아키 등 3명은 철 파이프 폭탄과 소화기 폭탄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서, 흥아관음에는 철 파이프 폭탄을, 순국칠사지비에는 소화기 폭탄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던 '대동아전 순국전사 일영팔팔 영위 공양비'에도 철 파이프 폭탄을 설치하고 오후 10시에 폭발하도록 설정했다. 순국칠사지비는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흥아관음에 설치한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공양비는 약간 손상되는 데 그쳤다.
3. 2. 경찰 수사 및 체포
석비에 금이 가 있고, 콘크리트로 채워 보강된 것은 이 사건으로 폭파되었기 때문이다.]]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본격적인 폭탄 테러를 하기 전에, 폭탄 제조 기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을 폭파하기로 했다. 이 사건의 표적이 된 '흥아관음'은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이 건립한 관음상이었고, '순국칠사지비'는 마쓰이와 다른 A급 전범 사형수들을 기리는 기념비였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1971년 10월경부터 준비를 시작했지만, 10월 24일에 공산주의자 동맹 봉기파가 도내 여러 파출소를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도 폭탄 투쟁을 하는 그룹이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지만, 공안 경찰의 삼엄한 경계 태세로 인해 경솔하게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12월 12일, 다이도지 마사시와 마스나가 토시아키는 철 파이프 폭탄과 소화기 폭탄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서, 흥아관음에는 철 파이프 폭탄을, 순국칠사지비에는 소화기 폭탄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던 '대동아전 순국전사 일영팔팔 영위 공양비'에도 철 파이프 폭탄을 설치하고 오후 10시에 폭발하도록 설정했다. 순국칠사지비는 파괴되었지만, 흥아관음에 설치한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공양비는 약간 손상되는 데 그쳤다.
사건 직후에는 도내 연쇄 파출소 폭파 사건이 더 주목을 받았고,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 체포되면서 이 사건이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4. 사건의 영향 및 평가
이 사건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 처음으로 시도한 테러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폭탄 테러에 앞서 폭탄 제조 기술을 시험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을 폭파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이후 일련의 기업 폭탄 테러의 전조가 되었다.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이 건립한 '흥아관음'과 마쓰이를 비롯한 A급 전범 사형수들을 기리는 '순국칠사지비'가 표적이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극좌 폭력 단체의 테러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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