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쓰야나기 나오이에
1. 개요
히토쓰야나기 나오이에는 1599년에 태어나 1642년에 사망한 인물로,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의 차남이다. 그는 1636년 아버지의 영지 분할로 5,000석을 받았고, 아버지의 사망 후에는 2만 3,600석을 상속받아 총 2만 8,6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나오이에는 에히메현과 효고현에 진야를 건설했지만, 1642년 사망하면서 딸만 남았고, 말기 양자 제도로 인해 영지가 몰수되어 가문의 위기를 맞았다.
| 씨명 | 일류 씨 |
|---|---|
| 이름 | 일류 나오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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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 출생 | 게이초 4년 (1599년) |
| 사망 | 간에이 19년 5월 29일 (1642년 6월 26일) |
| 아명 | 젠몬 |
| 이명 | 해당사항 없음 |
| 시호 | 자성원전 준림종일 대거사 |
| 신호 | 해당사항 없음 |
| 계명 | 해당사항 없음 |
| 묘소 | 도쿄도시부야구 히로오의 상운사 |
| 관위 | 종5위하미마사카노카미 |
| 막부 | 에도 막부 |
| 섬긴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
| 봉록 | 이요가와노에번주 |
| 씨족 | 일류 씨 |
| 부모 | 아버지: 일류 나오모리 |
| 형제자매 | 혼다 다다토모 정실, 나오시게, 나오이에, 나오요리, 나오요시, 나오스미 |
| 배우자 | 다카쿠라 나가요시 딸 |
| 자녀 | 일류 나오쓰구 정실 양자: 나오쓰구 |
| 특기사항 | 해당사항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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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국의 번주 -
마쓰다이라 사다키요
마쓰다이라 사다키요는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의 아들이며, 에도 시대 인물로, 번정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와 관련된 문화재로는 사쿠베 기념비 등이 있다. -
히토쓰야나기씨 -
히토쓰야나기 나오모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히토쓰야나기 나오모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이세 고베 번주를 거쳐 이요 사이조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나 부임지로 가던 중 사망했다. -
히토쓰야나기씨 -
간베번
간베번은 이세국 간베(현재의 미에현 스즈카시)에 위치했던 번으로,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이치야나기 씨가, 이후에는 이시카와 씨와 혼다 씨가 다스렸으며, 특히 혼다 씨는 번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
1642년 사망 -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과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반박하고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으며 지동설을 옹호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근대 과학 발전에 기여하여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
1642년 사망 -
귀도 레니
귀도 레니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화가로, 볼로냐에서 미술을 배워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라파엘로풍의 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켜 《아우로라》, 《무고한 어린이 학살》 등의 대표작을 남기며 당대 "라파엘로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얻었고 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게이초 4년(1599년),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의 차남으로 후시미에서 태어났다. 게이초 10년(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하고, 이후 에도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오사카 전투 등에 참전했다.
간에이 13년 아버지 나오모리가 이요국 사이조로 전봉될 때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으로 하리마국 가토군 내 5000석을 받았다. 같은 해 나오모리가 사망하자 유령 6만 3000석이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나오이에는 2만 3600석을 상속받아 기존의 5000석과 합쳐 2만 86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나오이에는 우마군 가와노에 촌(현재의 에히메현 시코쿠추오시 가와노에정)에 가와노에 진야를, 하리마국에는 시키지 진야(현재의 오노시 시키지정)를 축조했다.
1642년 산킨코타이를 위해 에도로 가던 중 부스럼으로 급사했다. 아자부의 쇼운지에 묻혔다. 아들이 없어 말기 양자를 들이려 했으나, 당시 금지되어 1643년 이요국 내 영지가 몰수되고 오노번은 하리마국 1만 석만 남게 되었다.
2.1. 출생과 초기 이력
게이초 4년(1599년),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의 차남으로 후시미에서 태어났다.
게이초 10년(1605년), 7세 때 순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도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각각 알현했다. 이후 에도에서 아버지의 증인(인질)으로서 살며, 막부로부터 "여비"를 지급받았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상경이나, 오사카 전투 등에 수행했다. 게이초 14년(1609년), 종5위하 미사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간에이 13년(1636년) 6월 1일, 이치야나기 나오모리는 1만 8000석의 가증을 받아 이요국 사이조로 전봉되었다. 이때 나오이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에 따라 가증분 중에서 하리마국 가토군 내 5000석을 분여받았다. 같은 해 8월 19일, 사이조로 향하던 중 오사카에서 나오모리가 사망했다.
같은 해 11월, 나오모리의 유령 6만 3000석은 3명의 아들(이치야나기 나오시게, 나오이에, 이치야나기 나오요리)에게 분할되었다. 나오이에는 아버지의 유령 중 2만 3600석을 상속받고, 앞서 주어진 5000석을 합하여 하리마국 가토군, 이요국 우마군·슈후군의 3군에서 2만 86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2.2. 가독 상속과 영지 분할
게이초 10년(1605년), 7세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했다. 이후 에도에서 아버지의 증인(인질)으로 살며 오사카 전투 등에 수행했고, 게이초 14년(1609년)에는 종5위하 미사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간에이 13년 아버지 나오모리가 이요국 사이조로 전봉될 때,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에 따라 하리마국 가토군 내 5000석을 분여받았다. 같은 해 나오모리가 사망하면서, 나오모리의 유령 6만 3000석은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히토쓰야나기 나오이에는 이 중 2만 3600석을 상속받고, 앞서 받은 5000석을 합쳐 하리마국 가토군, 이요국 우마군·슈후군의 3군에서 2만 86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나오이에는 우마군 가와노에 촌(현재의 에히메현 시코쿠추오시 가와노에정)에 가와노에 진야를 설치하고, 하리마국의 분령 지배 거점으로 시키지 진야(현재의 오노시 시키지정)를 축조했다.
2.3. 사망과 가문의 위기
히토쓰야나기 나오이에일본어는 1636년 아버지 나오모리가 사망하면서 가문을 상속받았으나, 상속 과정에서 영지가 분할되고 말기 양자 금지 원칙에 의해 영지가 몰수되는 위기를 겪었다.
같은 해 11월, 나오모리의 유령 6만 3000석은 세 아들(나오시게, 나오이에, 나오요리)에게 분할되었다. 나오이에는 아버지의 유령 중 2만 3600석을 상속받고, 이전에 주어진 5000석을 합쳐 하리마국 가토군, 이요국 우마군·슈후군 3군에 걸쳐 2만 86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듬해인 1637년에는 처음으로 영지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나오이에는 우마군 가와노에 촌(현재의 에히메현 시코쿠추오시 가와노에정)에 진야를 설치했다. 또한, 하리마국의 분령 지배 거점으로 시키지 진야(현재의 오노시 시키지정)를 축조했다.
1642년 5월 29일, 나오이에는 향년 44세로 사망했다. 산킨코타이를 위해 에도로 가던 중 부스럼을 앓아 에도에서 급사했다는 설도 있다. 아자부의 쇼운지에 묻혔다.
나오이에게는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족인 고데 요시치카의 차남 나오쓰구를 양자로 삼아 딸과 결혼시켜 가문을 상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말기 양자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1643년 가독 상속은 인정되었지만 이요국 내의 1만 8600석이 몰수되었다. 이에 따라 오노번의 소령은 하리마국 내의 1만 석만 남게 되었다.
3. 통치 및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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