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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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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천문학자, 물리학자, 공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체 관측에 활용, 목성의 위성, 달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지동설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물체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전 역학의 기초를 다졌다. 갈릴레오는 가톨릭교회와 지동설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으며,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현대 과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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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636년의 초상화
1636년의 초상화 (유스투스 스텔만스 그림)
기본 정보
출생 이름갈릴레오 디 빈첸초 보나이우티 데 갈릴레이
출생일1564년 2월 15일
출생지피사, 피렌체 공국
사망일1642년 1월 8일
사망지아르체트리, 토스카나 대공국
분야천문학
물리학
공학
자연 철학
수학
소속 기관피사 대학교
파도바 대학교
후원자코시모 2세 데 메디치
페데리코 체시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프라 파올로 사르피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교육피사 대학교
학문 지도 교수오스틸리오 리치 다 페르모
주요 제자베네데토 카스텔리
마리오 귀두치
빈첸초 비비아니
알려진 업적해석역학
지동설
운동학
관측 천문학
서명
개인 정보
국적토스카나 대공국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학문적 업적
알려진 업적천체 관측에 망원경을 도입
지동설에 대한 언급
목성위성 발견
금성의 모양 변화 및 크기 변화 발견
자유 낙하, 속도, 관성계, 진자에 대한 개척 연구

2. 생애

갈릴레오 갈릴레이란 이름은 15세기의 갈릴레오의 조상인 갈릴레오 보냐우티(Galileo Bonaiuti, 1370~1450)의 이름에서부터 나왔다. 저명한 내과의사이자 행정장관이었던 그는,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까닭에 가문에서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자신들의 성을 '갈릴레이'로 바꾸기로 결정하게 된다. 당시 갈릴레이가 태어난 피사의 투스카니 지역에서는 맏아들의 이름을 붙일 때 자신의 성을 변형시켜 붙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맏아들이었던 갈릴레오는 부모의 성씨인 빈첸치오 갈릴레이(Vincenzo Galilei)의 Galilei를 남자이름 형태인 -o로 변형해 이름으로 받들어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약간 아이러니로, 한때 유명했던 갈릴레오 보냐우티가 이제는 이름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조상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갈릴레오는 1564년 2월 15일 피사(당시 피렌체 공국의 일부)에서 태어났다.[9] 그는 저명한 류트 연주자,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빈첸초 갈릴레이와 유력한 상인의 딸인 줄리아 아만나티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 중 첫째였다. 그의 부모는 2년 전인 1562년, 빈첸초가 42세, 줄리아가 24세였을 때 결혼했다. 갈릴레오는 뛰어난 류트 연주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로부터 확립된 권위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일찍이 배웠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다섯 남매 중 세 명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막내인 미켈란젤로(또는 미켈란젤로)도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가 되었는데, 그는 갈릴레오의 평생 재정적 부담을 더했다. 미켈란젤로는 아버지가 약속했던 자매들의 지참금을 형제들의 처남들에게 제대로 주지 못했고, 그들은 나중에 미지급금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려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음악 활동과 여행을 위해 갈릴레오에게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갈릴레오가 추가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발명품을 개발하려는 초기 열망에 기여했을 수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여덟 살 때 그의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했지만, 그는 2년 동안 무치오 테달디의 보호 아래 남겨졌다. 갈릴레오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피사를 떠나 피렌체에 있는 가족에게 합류했고, 야코포 보르기니의 지도를 받았다.[9] 그는 1575년부터 1578년까지 피렌체 남동쪽 약 30km에 있는 발롬브로사 수도원에서 특히 논리학 교육을 받았다.[10][11]


  • 1564년 이탈리아 피사 교외에서 음악가이자 옷감 상인인 빈첸초 갈릴레이의 장남으로 태어남(당시 이곳은 토스카나 대공국 영토였다).
  • 1581년 피사 대학교 입학(의학 전공).
  • 1585년 피사 대학교 퇴학.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
  • 1586년 최초의 논문 「작은 저울」 발표.
  • 1587년 처음으로 로마 방문. 당시 석학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를 찾아 교수직 알선을 부탁함.
  • 1589년 피사 대학교 수학 강사(일설에는 교수) 취임(3년 계약).
  • 1591년 아버지 빈첸초 사망.
  • 1592년
  • *피사 대학교 직책 임기 만료.
  • *(조르다노 브루노 체포됨.)
  • *베네치아 공화국(현재 이탈리아의 일부) 파도바 대학교 교수(6년 계약)가 되어 이주. 이 무렵 낙체 연구를 했다고 알려짐.
  • 1597년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동설을 믿고 있다고 기록.
  • 1599년 파도바 대학교 교수 재임. 이 무렵 마리나 암바와 결혼. 1남 2녀를 둠.
  •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 로마 교황청에 의해 화형당함.)
  • 1601년부터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코지모 2세의 가정교사 겸임(대학교 휴가 기간만).
  • (1608년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에서 망원경 발명 특허 분쟁.)
  • 1608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 사망. 갈릴레오의 제자인 코지모 2세가 토스카나 대공이 됨.
  • 1609년 5월 네덜란드의 망원경 소문을 듣고 직접 제작. 이후 천체 관측을 함.
  • 1609년 11월 30일, 달을 관측하고 달이 천체임을 이해함.
  • 1610년
  • *목성의 위성 발견, 「메디치가(토스카나 대공가)의 별」이라고 명명. 이것을 「별들의 전령」( ''Sidereus Nuncius'' )으로 공표. 이 무렵부터 지동설을 언급하는 일이 많아짐.
  • *(케플러가 「별들의 전령과의 대화」를 발간, 갈릴레오를 옹호함.)
  • *피사 대학교 교수 겸 토스카나 대공 첨부 철학자로 임명되어 차녀만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옴.
  • 1611년 4월 25일 린체이 아카데미 가입. 그 이후로 서명 후에 Linceo를 덧붙이게 됨.[109][110]
  • 1613년 「태양 흑점 논문」 출간.
  • 1613년경 마리나와 헤어지고, 그녀의 새로운 배우자를 찾았다고 알려졌으나, 전기의 기록만 있을 뿐 근거가 없다고도 함.
  • 1613년경 두 딸을 수도원에 들여보냄.
  • 1615년 지동설을 둘러싸고 도미니코회 수도사 로리니와 논쟁을 벌임.
  • 1616년 제1회 이단 심문소 심사에서 로마 교황청 검열 성청으로부터 앞으로 지동설을 주장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음.
  •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 목록에 지정됨.
  • (각 시기 상세 불명) 요하네스 케플러의 학술서(1609~1621년 출판)가 모두 금서 목록에 지정됨. (「우주의 조화」제1권은 1619년 2월 28일 금서로 지정됨.)
  • 1623년 「위조 화폐 감정관」이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헌정하여 출판됨.
  • 1631년 딸들이 있는 피렌체 교외 아르체트리 수도원 옆 별장에 거주.
  • 1632년
  • *「두 대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일본어판은 「천문학 대화」)를 피렌체에서 출판.
  • *로마 출두 명령을 받고 로마에 도착.
  • 1633년
  • *제2회 이단 심문소 심사에서 로마 교황청 검열 성청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음(곧 토스카나 대공국 로마 대사관 감금으로 감형됨).
  •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대주교 저택으로 신병이 이송됨.
  • *아르체트리 별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받음(단, 피렌체에 가는 것은 금지됨).
  • 1634년 갈릴레오를 간호하던 장녀 마리아 첼레스테 사망(태어날 때 이름은 비르지니아).
  • 1637년 한쪽 눈이 실명됨. 이듬해 양쪽 눈이 실명됨. 이후 집필은 제자와 아들 빈첸초에 의한 구술 필기가 됨.
  • 1638년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과학 대화」를 발간. 구술 필기는 제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가 담당함.
  • 말년 추시계 발명. 도면을 아들과 비비아니에게 베껴 쓰게 함.
  • 1639년 12월 3일 마지막 편지.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로, 시력을 잃은 갈릴레오 대신 빈첸초 비비아니가 작성함.[111]
  • 1642년 아르체트리에서 사망.

2. 1. 가족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첸초는 류트 연주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다.[9] 빈첸초는 줄리아 아만나티와 1562년에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으며, 갈릴레오는 그중 장남이었다.[9] 갈릴레오는 뛰어난 류트 연주자가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권위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배웠다.[9][103][104] 형제들 중 미켈란젤로도 류트 연주자와 작곡가로 활동했지만, 갈릴레오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기도 했다.[103][104]

갈릴레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105]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인 마리나 갬바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세 명의 혼외자를 두었다.[179] 두 딸 비르지니아(1600년생)와 리비아(1601년생), 아들 빈첸초(1606년생)를 두었다.[14] 갈릴레오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부양해야 했기에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교회에서 인정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105]

갈릴레오는 두 딸이 결혼하기 어렵다고 여겨 아르체트리의 산 마테오 수녀원에 보냈다.[179][180]

장녀 비르지니아는 수녀가 되어 마리아 첼레스테로 개명했는데, 이는 성모 마리아와 천문학을 조합한 이름이다.[15] 그녀는 아버지와 애틋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634년에 사망하여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갈릴레오와 함께 묻혔다. 차녀 리비아는 수녀 아르칸젤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평생 대부분을 병석에서 보냈다. 아들 빈첸초는 1619년에 아버지에게 인정받았고, 세스틸리아 보키네리와 결혼했다.[15]

2. 2. 초기 교육 및 학업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당시 피렌체 공국의 일부)에서 태어났다.[9] 그는 저명한 류트 연주자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빈첸초 갈릴레이와 줄리아 아만나티 사이에서 태어났다.[9] 1520년 피렌체 출생의 아버지 빈첸초는 귀족 출신으로, 옷감 상인을 했지만, 음정 연구가이자 음악가로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99] 어머니는 페샤 출생이었다. 두 사람은 1563년에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갈릴레오를 낳았다. 갈릴레오는 뛰어난 류트 연주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로부터 확립된 권위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일찍이 배웠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다섯 남매 중 세 명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막내인 미켈란젤로는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는데, 갈릴레오의 평생 재정적 부담을 더했다.

갈릴레오가 여덟 살 때 그의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했지만, 그는 2년 동안 무치오 테달디의 보호 아래 남겨졌다. 갈릴레오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피사를 떠나 피렌체에 있는 가족에게 합류했고, 야코포 보르기니의 지도를 받았다.[9] 그는 1575년부터 1578년까지 피렌체 남동쪽 약 30km에 있는 발롬브로사 수도원에서 특히 논리학 교육을 받았다.[10][11]

1581년,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585년에 중퇴했다. 1582년경부터 토스카나 궁정의 수학자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를 배웠다. 1586년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를 바탕으로 저울을 개량하여 최초의 과학 논문인 『소저울(La bilancetta)』을 발표했다. 1589년 피사 대학교 교수직을 얻어 수학을 가르쳤다.[100][101]

아버지 빈첸초는 음향학 연구에서 수량적 기술·분석을 중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이 후에 아들 갈릴레오가 운동 연구에서 취한 수량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운동 연구를 할 때 실험 결과를 수치적으로(수학적으로) 기술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또한, 갈릴레오는 기존 이론 체계나 다수파가 믿는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실험을 수행하여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102]

2. 3. 교수 임용 및 연구 활동

갈릴레오는 피사에서 출생하여 11세에 발롬브로사의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품었다.[172]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사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다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고 맥박계를 고안하였다. 피사 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172]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100][101]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또한 높은 곳에서 무게가 다른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으로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 실험'이나, 이 실험은 실제로 한 게 아니다.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전기 작가이자 신봉자인 비비아니가 갈릴레오를 돋보이게 하고자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사실 갈릴레오는 논리적인 추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다.[172]

갈릴레오는 젊은 시절 성직자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1580년 피사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피렌체의 지롤라모 보로와 프란체스코 부오나미치의 강의에 영향을 받았다.[11] 1581년 의학을 공부하던 중, 그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크고 작은 호를 그리며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발견하였다. 그의 심장 박동과 비교해 보니, 샹들리에가 왔다 갔다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진폭에 상관없이 일정한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길이가 같은 두 개의 진자를 설치하고, 하나는 크게, 다른 하나는 작게 흔들어 보았는데, 두 진자 모두 같은 시간을 유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거의 100년 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연구를 통해서야 진자의 등시성이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16]

그때까지 갈릴레오는 의사가 수학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수학을 피해왔다. 하지만 우연히 기하학 강의를 듣게 된 후, 그는 마지못해 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의학 대신 수학과 자연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16] 그는 온도계의 전신인 온도계를 만들었고, 1586년에는 자신이 발명한 정역학 저울의 설계에 관한 소책자를 출판하여(학계의 주목을 처음 받게 된 계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회화를 포함하는 ''디세뇨(disegno)''를 연구했고, 1588년에는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레 아르티 델 디세뇨에서 원근법과 명암법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얻었다. 같은 해, 피렌체 아카데미의 초청으로 그는 "단테의 지옥의 형태, 위치, 크기"라는 두 차례의 강연을 통해 단테의 지옥에 대한 엄격한 우주론적 모델을 제안하려고 시도했다.[17] 도시의 예술적 전통과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갈릴레오는 미학적 사고방식을 갖추게 되었다. 아카데미아의 젊은 교사였던 그는 피렌체 화가 치골리와 평생 우정을 맺었다.[18][19]

1592년 파도바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1610년까지 기하학, 수학, 천문학을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갈릴레오는 많은 획기적인 발견과 개량을 이루었다.

159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그의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를 돌보게 되었다. 1592년 그는 파도바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610년까지 기하학, 역학 및 천문학을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갈릴레오는 순수 기초 과학(예: 운동의 운동학 및 천문학)과 응용 응용 과학(예: 재료 강도 및 망원경 개척) 모두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그의 다양한 관심 분야에는 점성술이 포함되었는데, 당시 점성술은 수학, 천문학, 의학 연구와 관련된 학문이었다.[20][21]

앞서 언급했듯이 갈릴레오의 아버지는 이미 음향학 분야에서 수학적 방법을 크게 활용했지만, 아들 갈릴레오는 물체의 운동 연구를 할 때 (아버지를 따라) 실험 결과를 수치적으로(수학적으로) 기술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것이 현대 자연과학 분야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오 이전에는 이러한 운동을 수치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이 유럽에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갈릴레오는 천문학적 문제나 물리학적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나 교회가 지지하는 주장과 같은 기존 이론 체계나 다수파가 믿는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실험을 수행하여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102]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현대에는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2. 4. 가톨릭교회와의 갈등

1610년에 갈릴레오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토대로 한 새로운 천문학 발견들을 다룬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출간했다.[191] 그러나 당시 교황청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내용은 이러한 해석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었다.[191]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했지만 교황청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고, 성서의 천동설을 암시하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성서와 꼭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황청 일부는 동조했지만, 일부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지동설)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190] 1614년,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니는 갈릴레오의 이론이 위험하며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1616년에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갈릴레오에게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 것을 경고했다.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었고,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소용이 없었다.[192]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고,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유일한 진리로서 지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1619년, 갈릴레오는 예수회 로마대학(Collegio Romano)의 수학 교수였던 오라치오 그라시(Orazio Grassi) 신부와 혜성의 본질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과학 자체의 본질에 대한 더 광범위한 논쟁으로 번졌고, 1623년 갈릴레오는 『척도론』(Il Saggiatore)을 출판하여 과학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35] 『척도론』은 그라시의 주장을 혹독하게 비판했고, 이는 갈릴레오와 예수회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36]

크리스티아노 반티(Cristiano Banti)의 1857년 작품, 「로마 종교 재판 앞에 선 갈릴레오」


갈릴레오가 교회와 갈등을 빚던 당시, 대다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천동설)이나 티코 브라헤의 수정된 지구 중심설을 받아들였다.[37] 갈릴레오의 태양 중심설(지동설)에 대한 반대는 종교적, 과학적 반대가 결합된 것이었다. 종교적 반대는 성경 구절에 근거했고, 과학적 반대는 연주 시차가 관측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했다.[38] 갈릴레오는 1609년 그의 천문 관측에 기반하여 태양 중심설을 옹호했다.

1623년, 갈릴레오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했다. 이듬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환대를 받았고, 자신의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 발표해도 좋다고 판단했다. 1630년, 갈릴레오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출간 허가를 받기 위해 다시 로마를 방문했고, 이 책은 1632년 피렌체에서 발간되었다.[192] 그러나 이 책은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우르바노 8세마저 이 책의 발간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결국 우르바노 8세는 이 책의 배포를 금지하고,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교회와의 약속을 어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했다.[192]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192]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가톨릭교회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당시 과학 발전을 저해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갈릴레오가 사제들보다 기독교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했기 때문에 재판이 조작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134]

2. 5. 종교 재판과 가택 연금



유스투스 수스터만스(Justus Sustermans)의 갈릴레오 초상화, 1635년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37] 당시 대다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지구 중심설(geocentric) 견해나,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을 혼합한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였다. 태양 중심설과 갈릴레오의 이에 대한 저술에 대한 반대는 종교적 및 과학적 반대 의견이 결합된 것이었다. 종교적 반대는 지구의 고정된 본성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적 반대는 브라헤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태양 중심설이 사실이라면 연주 시차(annual stellar parallax)가 관측되어야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Tommaso Caccini, 1574년-1648년)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의견을 비난하며, 갈릴레오의 이론들은 위험하며 이단(종교에 거역하는 나쁜 주장) 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고소들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1615년까지 갈릴레오의 태양 중심설에 대한 저술은 니콜로 로리니(Niccolò Lorini) 신부에 의해 로마 종교 재판(Roman Inquisition)에 제출되었는데, 그는 갈릴레오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경을 재해석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616년 초 프란체스코 인골리(Francesco Ingoli)는 갈릴레오와 논쟁을 시작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문을 그에게 보냈다.

1616년 2월, 종교 재판 위원회는 태양 중심설을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불합리하며,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의미에 명백하게 모순되므로 형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 파울 5세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추기경에게 이 판결을 갈릴레오에게 전달하고 그에게 태양 중심설을 버릴 것을 명령하도록 지시했다. 2월 26일,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의 거주지로 소환되어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완전히 버리고, 앞으로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고수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색인성성원(Congregation of the Index)의 법령은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와 다른 태양 중심적 저술을 금지했다.

그 후 10년 동안, 갈릴레오는 논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이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면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책을 쓰는 계획을 다시 시작했다. 1630년에 갈릴레오는 1632년에 피렌체에서 인쇄된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를 출판하기 위한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40] 이 책은 천동설과 지동설을 모두 가설로 다루면서, 각각의 설을 믿는 두 사람과 그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립적인 한 사람, 총 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그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설 것을 명령받았다.

원래 무릴로(Murillo)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초상화. 감옥 벽에 새겨진 "E pur si muove"(''그리고 그것은 움직인다'')라는 글자를 바라보는 갈릴레오(이 이미지에서는 읽을 수 없음).


갈릴레오는 이 책으로 다시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자 과거 자신의 주장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고 겨우 풀려났다.[176] 1633년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설을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이단 맹세문을 낭독했다. 그 후 중얼거렸다고 전해지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유명하지만, 상황으로 보아 실제로 발언했을 가능성은 낮다.[152][153]

1633년에 가톨릭 교회의 단죄에 따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신 징역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행동도 제한되었다. 또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다. 1634년부터 쭉, 그는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물렀다. 갈릴레이는 집필에 몰두하여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1638)을 완성했다. 그는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으며,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때문에 그는 의료적인 차원에서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그는 1642년 발열과 심계 항진을 겪었고 나중에는 실명하기에 이르렀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 손님을 접대했다.[177][178]

2. 6. 말년과 죽음

갈릴레오는 1642년 1월 8일, 77세의 나이로 열병과 심장 두근거림으로 사망할 때까지 방문객들을 계속 받았다.[8][48]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2세는 그를 산타 크로체 성당 본당에 매장하고 그의 명예를 위해 대리석 묘비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의 강력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49] 교황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조카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항의하면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대신 그는 성당 남쪽 횡단면에서 성구실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있는 수련자 예배당 옆 작은 방에 매장되었다.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 후 1737년에 성당 본당으로 이장되었으며,[50] 이때 그의 유골에서 세 손가락과 이빨이 제거되었다. 그 손가락들 중 하나는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갈릴레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51]

당시 (중세) 권력자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면서 점차 적을 늘려가게 되었고,[106] 결국 갈릴레오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에 의해 그가 지지한 지동설을 구실로 종교재판에서 추궁당하거나, 직위를 잃거나, 가택연금 상태에서 생활하게 되었다.[107]

직위를 잃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갈릴레오는 나이가 들어 병약해졌다. 이를 알게 된 르네 데카르트는 자신도 『우주론(세계론)』의 출판을 포기했다. 1634년에는 갈릴레오를 간호해 주던 가장 사랑하는 장녀 비르지니아(마리아 첼레스테)를 병으로 잃었고, 1637년에는 한쪽 눈을, 1638년경에는 두 눈이 실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갈릴레오는 구술 필기로 성과를 남겼다.

갈릴레오의 형은 무기징역이었지만,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153] 그러나 피렌체 자택으로의 귀가는 허용되지 않았고, 이후 일생 감시가 있는 저택에 살면서 산책 외에는 외출이 금지되었다. 모든 직책은 판결과 동시에 박탈되었다. 『천문학 대화』는 금서 목록에 올라 1822년까지 철회되지 않았다.[155]

1638년에 작성된 갈릴레오의 유언장에는 유해를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일족의 묘소에 안장하도록 적혀 있으며, 메디치 가문은 대리석 묘지를 만들 비용을 준비했다. 이 사실이 로마에 보고되자, "갈릴레오는 생전에 증오스러운 학설로 기독교 국가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교황 우르바노 8세와 조카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의견이 토스카나 대공에게 전달되어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156]

이처럼 사후에도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고, 가톨릭 신자로서 장례를 치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갈릴레오의 후원자인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이단자로 매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로마 교황의 허가가 내려질 때까지 갈릴레오의 장례식을 연기했다. 그러나 허가는 이 시대에는 나오지 않았고, 공식적인 허가에 따른 매장은 1737년 3월 12일에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거행되었다.[157]

3. 과학적 업적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만든 3배율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만들었다.[174] 그는 이 망원경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의 반점', '태양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173] 이듬해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망원경 복제품. 그리피스 천문대에 전시되어 있다.




Il Saggiatore 『천칭』(1623년)


1610년 1월,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3개의 별을 발견하고, 며칠 내로 이들이 목성의 위성임을 확인했다. 그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를 발견하고, 1월 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하였다.[185] 이 위성들은 그의 후원자인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형제를 기려 '메디치 항성'으로 명명되었으나, 후에 갈릴레이 위성으로 개명되었다.[185][17] 이 발견은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일치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25]

1610년 9월부터 갈릴레오는 금성이 달과 유사한 완전한 위상 변화를 보이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증거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7세기 초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은 티코 브라헤 체계와 같은 지구 중심 태양계 모델로 전향했다.

갈릴레오는 토성을 관측하고, 토성의 고리를 행성으로 오인하기도 했다.[28] 1612년에는 해왕성을 관측했지만, 행성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29]

갈릴레오는 태양 흑점을 관측하고 연구했다.[30] 흑점의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물리학에서 주장하는 변치 않는 완벽한 천상의 개념에 어려움을 제기했다. 1612년에서 1613년 사이에 관측된 태양 흑점 궤적의 연주 변화는 천동설과 티코 브라헤의 지구 중심 태양계 모델 모두에 대한 강력한 반박 근거를 제공했다.[30]

갈릴레오는 은하수가 무수한 항성의 집합임을 발견했다.[121] 그는 이전에는 성운으로 여겨졌던 은하수를 관측하여, 그곳이 지구에서는 구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밀집한 수많은 별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많은 다른 별들도 찾았습니다. 그는 1617년 큰곰자리의 이중성 미자르를 관측했습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굴절 망원경을 사용하여 1609년 말 달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관측했다.[18]

3. 1. 천문학 연구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만든 3배율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만들었다.[174] 그는 이 망원경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의 반점', '태양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173] 이듬해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1610년 1월,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3개의 별을 발견하고, 며칠 내로 이들이 목성의 위성임을 확인했다. 그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를 발견하고, 1월 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하였다.[185] 이 위성들은 그의 후원자인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형제를 기려 '메디치 항성'으로 명명되었으나, 후에 갈릴레이 위성으로 개명되었다.[185][17] 이 발견은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일치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25]

1610년 9월부터 갈릴레오는 금성이 달과 유사한 완전한 위상 변화를 보이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증거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7세기 초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은 티코 브라헤 체계와 같은 지구 중심 태양계 모델로 전향했다.

갈릴레오는 토성을 관측하고, 토성의 고리를 행성으로 오인하기도 했다.[28] 1612년에는 해왕성을 관측했지만, 행성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29]

갈릴레오는 태양 흑점을 관측하고 연구했다.[30] 흑점의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물리학에서 주장하는 변치 않는 완벽한 천상의 개념에 어려움을 제기했다. 1612년에서 1613년 사이에 관측된 태양 흑점 궤적의 연주 변화는 천동설과 티코 브라헤의 지구 중심 태양계 모델 모두에 대한 강력한 반박 근거를 제공했다.[30]

갈릴레오는 은하수가 무수한 항성의 집합임을 발견했다.[121] 그는 이전에는 성운으로 여겨졌던 은하수를 관측하여, 그곳이 지구에서는 구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밀집한 수많은 별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많은 다른 별들도 찾았습니다. 그는 1617년 큰곰자리의 이중성 미자르를 관측했습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굴절 망원경을 사용하여 1609년 말 달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관측했다.[18]

3. 2. 물리학 연구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조석 이론을 통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증거를 제시하려 했다.[31] 그는 조석이 지구 자전과 공전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1616년 알레산드로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설명했다.[31] 그의 이론은 조석의 크기와 시기에 대한 해양 분지의 형태의 중요성을 제시했지만, 하루에 두 번 만조가 발생하는 베네치아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31] 그는 이러한 현상을 바다의 형태, 깊이 등 이차적 원인으로 설명했다.[31][32][33]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가 지구 운동의 물리적 증거를 찾기 위해 이 이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평가했다.[34]

티토 레시(Tito Lessi)의 ''갈릴레오와 비비아니(Galileo e Viviani)'', 1892년


피사 대성당(Cathedral of Pisa)의 돔과 갈릴레오의 등


갈릴레오의 물체 운동 연구는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진자의 등시성을 주장했는데, 이는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에 의해 근사치임이 밝혀졌다. 또한 진자의 주기의 제곱이 길이에 비례함을 발견했다. 그는 소리굽쇠를 긁어 소리의 진동수를 이해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61][62]

17세기에는 물 펌프 설계 개선으로 진공 측정이 가능해졌으나, 흡입 펌프가 특정 높이(약 10.3m) 이상 물을 끌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갈릴레오는 1638년 저서에서 물기둥이 자체 무게로 끊어지는 것이라고 잘못 제안했다.[63]

1638년, 갈릴레오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려 했으나, 빛이 너무 빨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1667년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 회원들이 실험을 반복했으나 마찬가지였다.[64][65]

갈릴레오는 상대성 원리를 제시하여, 물리 법칙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계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뉴턴 운동 법칙과 특수 상대성 이론의 기본 틀이 되었다.[71]

그는 물체가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으면 속도를 유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설과 모순되었다.[71] 장 부리당등이 제시한 관성 개념과 관련하여, 갈릴레오는 "마찰이 없는 수평면을 따라 움직이는 입자는 균일하고 영원한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72][73]

피사 대성당의 샹들리에 흔들림을 보고 단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후세의 일화이며 실제 상황은 불명이다.[122] 그는 이 법칙으로 추시계를 고안했으나 제작하지는 않았다.

갈릴레오는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낙하 시간은 질량과 무관하며, 낙하 거리는 시간 제곱에 비례한다는 낙체의 법칙을 발견했다.[123][124] 피사의 사탑 실험은 빈첸초 비비아니의 창작이며, 실제로는 시몬 스테빈의 실험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125][126][127] 갈릴레오는 비스듬한 레일 실험으로 무게와 낙하 속도의 무관함을 증명했다.[123]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그는 물체를 묶어 낙하시키는 반론을 제시했다.[128]

1638년 출판된 『신과학대화』는 역학, 재료 강도, 유체, 열팽창, 음향진동, 광속 측정, 자기 현상 등을 다루었다.[129]

3. 3. 수학 연구

갈릴레오는 피사에서 출생하여 11세에 피렌체 근처 발롬브로사(Vallombrosa)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다.[172] 피사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고 맥박계를 고안하였다.[172] 피사 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172]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172]

갈릴레오의 물리 실험에 대한 수학 적용은 헌신적이었지만, 그의 수학적 방법은 당시에는 평범하였다.[74] 분석과 증명은 유클리드 원론 5권에 제시된 에우독소스의 비례 이론에 크게 의존했다.[74] 이 이론은 타르탈리아 등의 번역 덕분에 한 세기 전에 이용 가능해졌지만, 갈릴레오의 생애 말년에는 데카르트의 대수적 방법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다.[74] 갈릴레이의 역설은 무한대를 비교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더 이상 유용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74]

4. 종교와의 관계

교황청에서는 갈릴레오를 우호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주장의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갈릴레오는 소환될 때까지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 진리임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환되어 재판을 받기 전에는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 버렸다.[188] 흔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립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루터와 같은 개신교 신학자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구약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을 근거로 갈릴레오를 비난했다.[188]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에서 정복전쟁을 벌일때에 하루동안 태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여호수아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지동설에 반대한 것이다[189].

4. 1. 가톨릭교회와의 대립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가톨릭교회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매우 유명하다. 이로 인해 당시 지동설을 주장하는 자는 모두 이단으로 간주되어, 그로 인해 과학 발전이 저해되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갈릴레오가 사제들보다 기독교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과학적인 언어로 그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았고, 조작된 허위 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134]

갈릴레오가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빚던 시기,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이나, 천동설과 지동설을 혼합한 티코 브라헤의 절충형 체계를 받아들였다.[37] 갈릴레오의 지동설 옹호에 대한 반대는 종교적, 과학적 반론이 결합된 것이었다. 종교적 반대는 지구의 고정된 본성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적 반대는 브라헤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지동설이 사실이라면 연주 시차가 관측되어야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8]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Tommaso Caccini, 1574년-1648년)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의견을 비난하며, 갈릴레오의 이론들은 위험하며 이단 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고소들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1616년에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면서 그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분부하였다.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었고 이것을 알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방문은 별 소용이 없었다.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지정된 금서 목록에 올랐고,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유일한 진리로서 지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1619년, 갈릴레오는 예수회 로마대학(Collegio Romano)의 수학 교수였던 오라치오 그라시(Orazio Grassi) 신부와 혜성의 본질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1623년에 출판된 『척도론』(Il Saggiatore)은 과학 자체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과학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갈릴레오의 사상을 담고 있어 그의 과학적 선언문으로 여겨진다.[35]

피렌체에서 지내던 1623년, 갈릴레오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환대를 받았고, 자신의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라면 발표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1630년에 이 책의 출간 허가를 받기 위해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이 책은 우여곡절은 겪은 끝에 1632년 피렌체에서 발간되었는데, 곧이어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다. 우르바노 8세마저 이 책의 발간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결국 우르바노 8세는 이 책의 배포를 금지하고,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교회와의 약속을 어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한다.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서 궐석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바로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192]

1633년에 가톨릭 교회의 단죄에 따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신 징역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행동도 제한되었다. 또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다. 1634년부터 쭉, 그는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물렀다. 갈릴레이는 집필에 몰두하여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1638)을 완성했다. 그는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으며,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때문에 그는 의료적인 차원에서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그는 1642년 발열과 심계 항진을 겪었고 나중에는 실명하기에 이르렀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 손님을 접대했다.[177][178]

종교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나서면서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And yet it moves)”[193]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그의 과학적 진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갈릴레오가 진짜 그러한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근거는 없다.[194]

4. 2. 종교 재판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지동설)에 대한 반대가 표면화되었다.[176]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도미니코 수도회원 토마소 카치니(Tommaso Caccini, 1574년-1648년)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비난하며, 그의 이론이 위험하고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고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176]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천동설)이나,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을 혼합한 티코 브라헤의 절충형 우주관을 받아들였다.[37] 태양 중심설에 대한 반대는 종교적, 과학적 반론이 결합된 것이었다. 종교적 반대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성경 구절에 근거했다. 과학적 반대는 브라헤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태양 중심설이 사실이라면 연주 시차가 관측되어야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8]

갈릴레오는 1609년 자신의 천문 관측을 바탕으로 태양 중심설을 옹호했다. 1613년 12월, 로렌의 크리스티나 대공비는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추종자인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지구의 운동에 대한 성경적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양 중심설이 성경 본문과 모순되지 않으며, 성경은 과학이 아닌 신앙과 도덕에 대한 권위라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널리 유포되었다.

1615년, 도미니코회 수도사 니콜로 로리니는 갈릴레오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경을 재해석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 종교 재판에 갈릴레오의 저술을 제출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1616년 초, 프란체스코 인골리는 갈릴레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문을 보냈다. 인골리는 종교 재판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 논쟁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작성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수 있으며, 이 논문은 종교 재판의 행동의 기초를 제공했다.

1616년 2월, 종교 재판 위원회는 태양 중심설을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불합리하며, … 성경의 의미에 명백하게 모순되므로 형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 지구 운동에 대한 생각은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 진리에 관해서 동일한 판단을 받으며,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39] 파울 5세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이 판결을 갈릴레오에게 전달하고 태양 중심설을 버릴 것을 명령하도록 지시했다. 2월 26일,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에게 소환되어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완전히 버리고, 앞으로 …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고수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갈릴레오는 논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623년 우르바누스 8세가 선출되면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책을 쓰는 계획을 다시 시작했다.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숭배자였으며 1616년 갈릴레오에 대한 훈계에 반대했다. 갈릴레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는 1632년에 종교 재판의 공식 허가와 교황의 허가를 받아 출판되었다.[40]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오에게 책에서 태양 중심설에 대한 찬반 주장을 제시하고 태양 중심설을 옹호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개인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시오는 자신의 실수에 자주 빠지고 때로는 바보처럼 보였다. 이러한 묘사는 이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에 대한 공격이자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옹호로 보이게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교황을 멀리했고, 1632년 9월 그의 저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41] 1633년 2월, 그는 종교 재판관 빈첸초 마쿨라니 앞에 기소되었다. 재판 내내 갈릴레오는 1616년 이후 비난받은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대화》를 읽은 독자가 그것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의도였던 인상을 받았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설득당했다.

1633년 6월 22일, 종교 재판의 판결은 세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갈릴레오는 "이단의 혐의를 강하게 받았다".[42] 둘째, 그는 종교 재판의 재량에 따라 공식적으로 투옥되었다가 다음 날 가택 연금으로 감형되어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머물렀다.[43] 셋째, 그의 《대화》는 금지되었고, 그의 모든 작품의 출판이 금지되었다.

널리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이론을 철회한 후 갈릴레오는 "그리고 그것은 움직인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그의 사후 1세기 후에 나온 것이다.[44]

갈릴레오는 1634년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가택 연금 생활을 했다. 그는 「새로운 두 과학」에 전념하여 40년 전에 한 운동학과 재료 강도에 대한 연구를 요약했으며,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다. 이 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높은 찬사를 받았다.[46] 그는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고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을 앓았기 때문에 의학적 조언을 받기 위해 피렌체로 여행할 수 있었다.[8]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가톨릭 교회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과학 발전이 저해되었다는 오해를 낳았지만, 현재는 갈릴레오가 사제들보다 기독교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했기 때문에 조작된 허위 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134]

1차 재판 직후인 1616년, 로마 교황청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고,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금서 목록에 지정되었다.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지동설이 교회 교리의 비판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히 하는 단서를 붙여 열람이 재허가되었다.

1630년,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설명하는 책 『천문학 대화』를 저술했다. 이 책은 천동설과 지동설을 모두 가설로 다루면서, 각각의 설을 믿는 두 사람과 그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립적인 한 사람, 총 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소개하더라도 그 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쓰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출판 허가를 받았고, 로마 교황청도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출판 허가를 내렸다.[139] 『천문학 대화』는 1632년 2월 22일 피렌체에서 인쇄, 발행되었다.

이듬해 1633년,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 교황청의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혐의는 1616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지동설을 다시는 주장하지 않겠다고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기고 『천문학 대화』를 발간했다는 것이었다.[140]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작성한 "갈릴레오는 1차 재판에서 지동설의 포기를 맹세하지 않았고, 회개를 강요받은 적도 없다"는 증명서를 제출하여 반론했다.[143]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를 유죄로 하는 재판 기록을 제시하여 재반론했다. 이 재판 기록에는 재판관의 서명이 없었는데, 이는 종교재판소 자체가 정한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144] 그러나 재판에서는 유죄의 재판 기록을 유효하게 하고, 갈릴레오가 소지하고 있던 증명서는 무효로 했다. 1차 재판 담당 판사 벨라르미노는 162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무효의 근거를 뒤집을 수 없었다.[140]

유죄가 선고된 갈릴레오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설을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이단 맹세문을 낭독했다.[150] 그 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유명하지만, 상황으로 보아 실제로 발언했을 가능성은 낮고, 갈릴레오의 주장을 신봉하는 제자들이 나중에 덧붙인 설이 유력하다.[152][153]

이 재판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아 19세기 후반부터 재검토가 이루어졌다.[160]

4. 3. 로마 교황청의 사후 평가

1965년 바오로 6세가 갈릴레이 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163] 1744년에 갈릴레오의 “대화”는 교회의 금지 도서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다.[164] 이는 갈릴레이 사후 350년 만의 일이었다.[164]

교황청은 갈릴레이 이전에도 꾸준히 천문학 연구에 투자해 왔으며, 지금도 천문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2003년 9월에는 로마 교황청 교리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가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갈릴레오 사건은 갈릴레오 사후 대부분 잊혀졌고, 종교재판의 갈릴레오 저작 재인쇄 금지는 1718년에 해제되었다. 1741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약간 검열된 『대화』를 포함한 갈릴레오의 완전한 과학 저작의 판본 출판을 승인했다. 1758년,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작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령이 금서 목록에서 삭제되었으나, 『대화』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검열되지 않은 버전에 대한 특정 금지는 유지되었다. 교회의 지동설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의 모든 흔적은 1835년 이러한 저작들이 금서 목록에서 삭제되면서 사라졌다.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은 갈릴레오를 "연구의 가장 대담한 영웅들 중 하나... 길 위의 걸림돌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송곡 기념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했다.[75] 1990년,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일부 견해들을 언급하며, 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의 "갈릴레오 시대의 교회는 갈릴레오 자신보다 이성에 훨씬 더 충실했고, 갈릴레오 가르침의 윤리적, 사회적 결과도 고려했다. 갈릴레오에 대한 그들의 판결은 합리적이고 정당했으며, 이 판결의 수정은 정치적으로 적절한 것에 근거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2008년,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의 수장은 바티칸 성벽 안에 갈릴레오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에 대한 공헌을 칭찬했다.[78] 그러나 한 달 후, 갈릴레오 동상을 세우는 계획은 중단되었다.

5. 저서

갈릴레오의 초기 작품은 과학 기구들을 설명했다. 1586년에는 공기와 물속에서 물체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저울에 대한 소논문인 《작은 천칭》()[198][82]을 썼고, 1606년에는 《기하학적 및 군사적 컴퍼스의 작동》()[83]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기하학과 군사 분야에서의 컴퍼스 사용법을 설명했다.

그의 초기 저술에는 운동과 역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1590년 피사에서 집필된 《운동에 관하여》(, )[90]와 1600년경 파도바에서 집필된 《역학》(, date=December 2020/''Mechanics''}})가 있다.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아르키메데스의 유체역학에 근거하여, 유체 매질에서의 중력에 의한 낙하 속도는 물체의 비중과 매질의 비중 차이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 힘이 자체적으로 소멸될 수 있다는 히파르쿠스-필로포누스의 충격 역학(impetus dynamics)을 따라, 진공 상태에서의 자유낙하에서는 초기 가속 기간 후 비중에 따른 종단 속도를 갖는다는 주장에 동의했다.{{citation needed영어

1610년 갈릴레오는 망원경 관측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과학 논문인 《시데레우스 눈치우스》()[89]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 달 표면의 요철, 은하수(Milky Way)를 구성하는 별들, 그리고 행성과 항성의 모양 차이 등을 보고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의견을 구했고, 케플러는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를 통해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케플러가 달에 대한 망원경 관측을 담은 《목성의 위성에 대한 해설》을 출판했을 때 갈릴레오는 반응하지 않아 케플러를 실망시켰다.[199]

1613년 갈릴레오는 태양과 천체가 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Letters on Sunspots)》()[84]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1610년 망원경으로 관측한 금성의 모든 위상과 토성의 "부속물"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1615년에는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85]라는 원고를 작성했는데, 이는 1636년에 출판되었다. 이 편지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여 종교 재판소에 고발된 《》의 개정판이었다. 1616년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이후 《()》[86]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식 지구를 기반으로 한 조석 현상을 설명했다. 1619년에는 그의 제자 마리오 귀두치(Mario Guiducci)가 《혜성에 관한 논설》()[87]을 출간하여 혜성에 대한 예수회의 해석에 반박했다.

1623년 갈릴레오는 《천칭》(, )[89]를 출판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비판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 상층부에서도 지지를 받았다.[88] 1632년에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89]를 출판하여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고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38년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문과 수학적 증명》(, )[89]를 출판했다.

피렌체(Florence) 우피치 미술관(Uffizi) 외부의 동상


피오 페디(Pio Fedi)가 제작한 갈릴레오 동상. 벨파스트 퀸즈 대학교(Queen's University Belfast) 래니언 빌딩 내부에 있으며, 윌리엄 휘틀라 경(Sir William Whitla)이 기증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주요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89]

  • ''작은 저울'' (1586; 이탈리아어: ''La Bilancetta'')
  • ''운동에 관하여'' (약 1590년; 라틴어: ''De Motu Antiquiora'')[90]
  • ''역학'' (약 1600년; 이탈리아어: ''Le Meccaniche'')
  • ''기하학 및 군사용 컴퍼스의 작동'' (1606; 이탈리아어: ''Le operazioni del compasso geometrico et militare'')
  • ''별의 전령'' (1610; 라틴어: ''Sidereus Nuncius'')
  • ''부력에 관한 논고'' (1612; 이탈리아어: ''Discorso intorno alle cose che stanno in su l'acqua, o che in quella si muovono'', "물 위에 떠 있거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에 관한 논고")
  • ''태양 흑점에 관한 역사와 증명'' (1613; 이탈리아어: ''Istoria e dimostrazioni intorno alle macchie solari''; ''태양 흑점에 관한 세 편지'', ''Tre lettere sulle macchie solari'', 1612를 바탕으로 한 저술)
  •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낸 편지'' (1615; 1636년 출판)
  • ''조수에 관한 논고'' (1616; 이탈리아어: ''Discorso del flusso e reflusso del mare'')
  • ''혜성에 관한 논고'' (1619; 이탈리아어: ''Discorso delle Comete'')
  • ''천칭'' (1623; 이탈리아어: ''Il Saggiatore'')
  • ''두 주요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 (1632; 이탈리아어: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고와 수학적 증명'' (1638; 이탈리아어: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 『별들의 전령』(Sidereus Nuncius, 1610년)
  • * 야마다 케이지・타니 야스시 역, 이와나미 문고, 1976년
  • * 이토 카즈유키 역, 고단샤 학술문고, 2017년
  • 『태양 흑점 논』(1613년)
  • * 위 이와나미판에 수록, 역명은 「태양 흑점에 관한 두 번째 서간」
  • 『위조 화폐 감정관』(1623년)
  • * 야마다 케이지・타니 야스시 역 『세계의 명저 갈릴레이』추오공론샤/추오공론 클래식스(개정판), 2009년
  • 『천문학 대화』 또는 『두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1632년)
  • * 아오키 야스조 역, 이와나미 문고(상하), 여러 차례 재판
  • 『새로운 과학 대화』(1638년)
  • *『정역학에 관하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두 개의 새로운 과학 대화」』 가토 벤 역, 가시마 출판회, 2007년
  • *『새로운 과학 논의』타나카 이치로 역, 이와나미 문고(상하), 2024년
  • 『레 메카니케』(집필: 1599년경, 불어 번역 출판: 1634년, 원본 출판: 1649년)
  • * 토요다 도시유키 해설·역 『세계의 명저 갈릴레이』추오공론샤
  • 『갈릴레이 서간집 천문학적 발견에서 성서 해석까지』 고바야시 미치루 역, 스이세이샤, 2022년
  • {{Cite book|和書

|author= 토마소 캄파넬라 (Tonmazo Campanella)|authorlink=토마소 캄파넬라

|others = 澤井繁男 역

|year = 2002

|title = 갈릴레오의 변명

|publisher = ちくま学芸文庫

}}

  • {{Cite book|和書

|author = 스틸먼 드레이크 (Stillman Drake)|others = 다나카 이치로 역

|year = 1984

|title = 갈릴레오의 생애 1

|publisher = 共立出版

|isbn = 4320008189

}}

  • {{Cite book|和書

|author = 스틸먼 드레이크 (Stillman Drake)|others = 다나카 이치로 역

|year = 1984-85

|title = 갈릴레오의 생애 2

|publisher = 共立出版

|isbn = 432000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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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te book|和書

|author = 스틸먼 드레이크 (Stillman Drake)|others = 다나카 이치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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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갈릴레오의 생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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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432000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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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te book|和書

|author= 다나카 이치로 (田中一郎) |authorlink=다나카 이치로 (과학사학자)

|year = 1995

|title = 갈릴레오: 보호자들의 그물 속에서

|publisher = 中公新書

|isbn = 41210125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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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te book|和書

|author = 다나카 이치로 (田中一郎)

|year = 2015

|title = 갈릴레오 재판: 400년 후의 진실

|publisher = 岩波新書

|isbn = 4004315697

}}

  • {{Cite book|和書

|author= 이토 카즈유키 (伊藤和行)|authorlink=이토 카즈유키

|year = 2013

|title = 갈릴레오: 망원경이 발견한 우주

|publisher = 중공신서(中公新書)

|isbn = 4121022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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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te book|和書

|author= 다카하시 켄이치 (高橋憲一)|authorlink=다카하시 켄이치 (과학사학자)

|year = 2006

|title = 갈릴레오의 미궁: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는가?

|publisher = 共立出版

|isbn = 4320005694

}}

  • {{Cite book|和書

|author= 이토 슌타로 (伊東俊太郎)|authorlink=이토 슌타로

|year = 1985

|title = 인류의 지적 유산 31 갈릴레오

|publisher = 講談社

}} 후반부에 저서 편역을 수록.

  • {{Cite book|和書

|author = 알렉산드르 코이레 (Alexandre Koyré)|authorlink=알렉산드르 코이레

|others = 스가야 아키라 역

|year = 1988

|title = 갈릴레오 연구

|series = 叢書ウニベルシタス

|publisher = 法政大学出版局

}}

  • {{Cite book|和書

|author = 조르주 미노아 (Georges Minois)

|others = 코우다 레이가 역

|year = 2011

|title = 갈릴레오: 전설을 배격한 실체

|series = 文庫クセジュ

|publisher = 白水社

}}

  • {{Cite book|和書

|author = 장-피에르 모리 (Jean-Pierre Maury)

|others = 다나카 이치로 감수, 엔도 유카리 역

|year = 2008

|title = 갈릴레오: 처음으로 "우주"를 본 남자

|series = 「知の再発見」双書 140

|publisher = 創元社

}}

  • {{Cite book|和書

|author = 데바 소벨 (Dava Sobel)

|others = 다나카 이치로 감수, 다나카 카츠히코 역

|year = 2002

|title = 갈릴레오의 딸: 과학과 신앙과 사랑에 관한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publisher = DHC

|isbn = 4887242646

}}

  • {{Cite book|和書

|author = 알프레드 엔겔베르트비치 시테크리 (Alfred Engelbertvich Shitekuri)

|others = 마츠노 타케시 역

|year = 1977(신판 1986)

|title = 갈릴레오의 생애

|publisher = 도쿄도서(東京図書)

}}

6. 평가 및 비판

갈릴레이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하던 평소의 연구 태도와는 다르게 지동설에 대한 완벽한 과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 등,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갈릴레이는 동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을 지지해 줌으로써,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대한 비판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케플러를 무례하게 무시했고,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195]

독일의 저널리스트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흔히 교회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케플러에게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달리 과학의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교와 대립을 피하려고 애썼다.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에 대한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96][197]

갈릴레오가 발표한 이론에는 큰 오류가 있는 것도 많았지만, 근대 과학 발생 초기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는 당연하다는 지적도 있다. 동시대의 케플러나 약간 후대의 뉴턴도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케플러의 법칙이 발표되어도 "모든 천체는 완전한 원을 그리며 운동한다"고 주장하며, "타원 운동을 할 리가 없다"는 식으로 케플러를 암묵적으로 비판하는 글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에 아직 얽매여 있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케플러의 『루돌프 표』이 발표되어 타원 궤도를 기반으로 행성의 위치 예보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어도 철회하지 않았다.[132]

지동설의 증거로 조석을 들었다. 실제로는 달과 태양의 중력이 원인이며, 갈릴레오 시대의 과학으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갈릴레오 자신은 조석이야말로 지동설의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이 주장은 당시 알려진 과학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고,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만약 갈릴레오의 설이 옳다면, 만조는 하루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보통 약 두 번 일어난다. 갈릴레오는 두 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형 등이 가져오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속의 측정을 시도했지만, 스케일을 잘못 판단했다.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서, 먼저 a가 램프의 덮개를 열고, a의 램프가 밝아진 것을 본 b가 램프의 덮개를 연다. a가 램프의 덮개를 열 때부터 b의 램프가 밝아질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광속이 너무 빨라서 실패했다.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칼비노의 문학 강의 - 새로운 천년을 위한 여섯 개의 메모』에서 갈릴레오의 글쓰기 문체를 칭찬하며, 갈릴레오를 문인(시인)으로 보고 있다.[166][167]

6. 1.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기여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실험과 수학의 혁신적인 조합을 통해 운동에 관한 과학에 기여했다.[181] 당시 일반적이었던 과학은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와 전기에 관한 정성적 연구였다. 갈릴레오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는 팽팽하게 당겨진 현의 음높이가 장력의 제곱근에 비례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182]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음악에 대한 기초에 근거하며, 제한된 양의 수학만이 음악과 물리학을 연관지어왔고, 젊은 갈릴레오는 그 전통의 확장에 따른 그의 아버지의 관찰을 볼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자연 법칙이 수학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한 최초의 근대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천문사절''에서 "철학은 이 위대한 책, 우주에 쓰여 있다…그것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문자들은 삼각형, 원, 그리고 다른 기하학적 도형들이다…"라고 썼다. 그의 수학적 분석은 갈릴레오가 철학을 공부할 때 배운 후기 스콜라 자연 철학자들이 사용한 전통의 추가적인 발전이다. 그의 업적은 과학을 철학과 종교 모두로부터 분리하는 데 이르는 또 다른 단계를 의미했으며, 인간 사상의 주요 발전이었다. 그는 종종 관찰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을 기꺼이 했다.

갈릴레오는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길이와 시간의 표준을 설정해야 했다. 그래야 서로 다른 날짜와 서로 다른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측정을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귀납적 추론을 사용하여 수학적 법칙을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갈릴레오는 수학, 이론 물리학 및 실험 물리학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보여주었다. 그는 포물선원뿔 곡선의 관점과 종좌(y)가 횡좌(x)의 제곱에 비례하는 관점 모두에서 이해했다. 갈릴레오는 또한 포물선이 공기 저항이나 다른 방해가 없는 균일하게 가속되는 발사체의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이론의 타당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지구와 크기가 비슷한 발사체 궤적은 포물선이 될 수 없다는 이론적 근거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포병의 사정거리까지의 거리에서는 발사체 궤적이 포물선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매우 미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티븐 호킹은 갈릴레오가 누구보다도 현대 과학의 탄생에 책임이 많다고 말했으며,[183]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했다.[184]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과 함께 과학혁명의 중심 인물로 여겨진다. 독자에게 동일한 실험을 제안하여 검증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방법을 취한 초기 과학자 중 한 명이다.[130] 또한 실험 결과를 적극적으로 공표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이며, 낙체 운동에 대한 정량적 연구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연구를 촉진했다.[130]

시력을 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제자인 빈첸초 비비아니에게 대필을 시켜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철학에서의 의심은 발명의 아버지이며, 진리 발견의 길을 여는 것임은 너무나 명백합니다."라고 하여, 의심하는 것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있다.[111][131]

6. 2. 지동설 옹호와 종교적 갈등

갈릴레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 등,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갈릴레이는 동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을 지지해 줌으로써,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대한 비판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케플러를 무례하게 무시했고,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195]

독일의 저널리스트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흔히 교회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잘못된 것이며, 그런 이미지는 오히려 케플러에게 더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에 대한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96][197]

갈릴레오가 교회와 갈등을 빚던 당시, 대다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geocentric) 견해나,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을 혼합한 티코 브라헤의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였다.[37] 태양 중심설에 대한 종교적 반대는 지구의 고정된 본성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적 반대는 브라헤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태양 중심설이 사실이라면 연주 시차(annual stellar parallax)가 관측되어야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8] 아리스타르쿠스와 코페르니쿠스는 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차가 무시할 만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정했다. 그러나 브라헤는 별이 측정 가능한 각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별이 그렇게 멀리 있다면 태양보다 훨씬 크거나 심지어 지구의 궤도보다 커야 한다고 반박했다. 천문학자들이 별의 겉보기 등급이 에어리 디스크(airy disk)라고 불리는 광학 현상으로 인한 것이며 실제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밝기에 따른 함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갈릴레오는 1609년 그의 천문 관측에 기반하여 태양 중심설을 옹호했다. 1615년까지 갈릴레오의 태양 중심설에 대한 저술은 니콜로 로리니 신부에 의해 로마 종교 재판에 제출되었는데, 그는 갈릴레오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경을 재해석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위반으로 간주되었고 위험하게도 프로테스탄티즘과 유사해 보였다. 갈릴레오는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1616년 초 프란체스코 인골리는 갈릴레오와 논쟁을 시작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문을 그에게 보냈다. 갈릴레오는 나중에 이 논문이 그 후에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조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인골리는 종교 재판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 논쟁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작성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수 있으며, 이 논문은 종교 재판의 행동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 논문은 태양 중심설에 대한 18가지의 물리적 및 수학적 주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주로 티코 브라헤의 주장, 특히 태양 중심설은 별이 보이는 것처럼 태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요구한다는 주장을 빌려왔다.

1616년 2월, 종교 재판 위원회는 태양 중심설을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불합리하며,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의미에 명백하게 모순되므로 형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 파울 5세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이 판결을 갈릴레오에게 전달하고 그에게 태양 중심설을 버릴 것을 명령하도록 지시했다. 2월 26일,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의 거주지로 소환되어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완전히 버리고, 앞으로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고수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색인성성원(Congregation of the Index)의 법령은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와 다른 태양 중심적 저술을 금지했다.

갈릴레오는 그 후 10년 동안 논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면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책을 쓰는 계획을 다시 시작했다. 바르베리니는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숭배자였으며 1616년 갈릴레오에 대한 훈계에 반대했다. 갈릴레오의 결과물인 「두 주요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는 1632년에 종교 재판의 공식 허가와 교황의 허가를 받아 출판되었다.[40]

이전에 우르반 8세는 갈릴레오에게 책에서 태양 중심설에 대한 찬반 주장을 제시하고 태양 중심설을 옹호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개인적으로 요청했다. 「두 주요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시오(Simplicio)는 알고 있었든 몰랐든 자신의 실수에 자주 빠지고 때로는 바보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갈릴레오가 악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의 책에 대한 반응에 놀랐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교황은 의심되는 공개적 조롱이나 코페르니쿠스 옹호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인 교황을 멀리했고, 1632년 9월 그의 저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41] 그는 마침내 1633년 2월에 도착하여 종교 재판관 빈첸초 마쿨라니 앞에 기소되었다. 재판 내내 갈릴레오는 1616년 이후로 비난받은 의견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는 약속을 지켰으며, 처음에는 그것을 옹호하지도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대화」를 읽은 독자가 그것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의도였던 인상을 받았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설득당했다.

종교 재판의 판결은 6월 22일에 내려졌다. 그것은 세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갈릴레오는 "이단의 혐의를 강하게 받았다".[42] 즉,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가 중심에 있지 않고 움직이며, 성경에 반대한다고 선언된 후에도 의견을 가능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옹호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의견을 "파문하고, 저주하고, 혐오하도록" 요구받았다.
  • 그는 종교 재판의 재량에 따라 공식적으로 투옥되었다. 다음 날, 이것은 가택 연금으로 감형되었고, 그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머물렀다.[43]
  • 그의 문제가 된 「대화」는 금지되었고, 재판에서 발표되지 않은 조치로 그의 미래 저작을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의 출판이 금지되었다.


널리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이론을 철회한 후 갈릴레오는 "그리고 그것은 움직인다"라는 반항적인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친절한 아스카니오 2세 피콜로미니(Ascanio II Piccolomini)(시에나 대주교)와 함께한 기간 후, 갈릴레오는 1634년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Arcetri)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가택 연금 생활의 일부를 보냈다.

갈릴레오는 가택 연금 중에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인 「새로운 두 과학」(Two New Sciences)에 전념했다. 여기서 그는 40년 전에 한 운동학(kinematics)과 재료역학(strength of materials)이라고 불리는 두 과학에 대한 연구를 요약했으며, 검열을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다. 이 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높은 찬사를 받았다.[46] 이러한 업적으로 갈릴레오는 종종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는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고 고통스러운 탈장(hernia)과 불면증(insomnia)을 앓았기 때문에 의학적 조언을 받기 위해 피렌체로 여행할 수 있었다.[8]

6. 3. 현대 과학에 미친 영향

스티븐 호킹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누구보다도 현대 과학의 탄생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하며,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79]

갈릴레오가 베네치아 총독에게 망원경 사용법을 보여주는 모습 (주세페 베르티니의 1858년 프레스코화)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연구는 그가 발견한 목성의 네 개의 큰 위성(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을 갈릴레이 위성으로 분류하는 것을 포함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갈릴레오 탐사선을 포함한 다른 과학적 노력과 원리들도 갈릴레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80]

2009년은 갈릴레오가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 관측을 기록한 지 400주년이었기 때문에, 유엔은 그 해를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했다.[81]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과 함께 과학혁명의 중심 인물로 여겨진다.

갈릴레오는 독자에게 동일한 실험을 제안하여 검증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방법을 취한 초기 과학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과학자는 갈릴레오 이전에도 이븐 알하이삼(라틴명 알하젠), 윌리엄 하비, 윌리엄 길버트 등이 있다. 또한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번 길버트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실험 결과를 적극적으로 공표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이며, 낙체 운동에 대한 정량적 연구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연구를 촉진했다. 더 나아가 인공적으로 설정된 상황에서의 물체 운동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30]

시력을 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제자인 빈첸초 비비아니에게 대필을 시켜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철학에서의 의심은 발명의 아버지이며, 진리 발견의 길을 여는 것임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하여, 의심하는 것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있다.[111][131]

6. 4. 비판

갈릴레이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하던 평소의 연구 태도와는 다르게 지동설에 대한 완벽한 과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 등,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갈릴레이는 동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을 지지해 줌으로써,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대한 비판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케플러를 무례하게 무시했고,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195]

독일의 저널리스트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흔히 교회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케플러에게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달리 과학의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교와 대립을 피하려고 애썼다.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에 대한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96][197]

갈릴레오가 발표한 이론에는 큰 오류가 있는 것도 많았지만, 근대 과학 발생 초기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는 당연하다는 지적도 있다. 동시대의 케플러나 약간 후대의 뉴턴도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케플러의 법칙이 발표되어도 "모든 천체는 완전한 원을 그리며 운동한다"고 주장하며, "타원 운동을 할 리가 없다"는 식으로 케플러를 암묵적으로 비판하는 글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에 아직 얽매여 있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케플러의 『루돌프 표』이 발표되어 타원 궤도를 기반으로 행성의 위치 예보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어도 철회하지 않았다.[132]

지동설의 증거로 조석을 들었다. 실제로는 달과 태양의 중력이 원인이며, 갈릴레오 시대의 과학으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갈릴레오 자신은 조석이야말로 지동설의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이 주장은 당시 알려진 과학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고,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만약 갈릴레오의 설이 옳다면, 만조는 하루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보통 약 두 번 일어난다. 갈릴레오는 두 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형 등이 가져오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속의 측정을 시도했지만, 스케일을 잘못 판단했다.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서, 먼저 a가 램프의 덮개를 열고, a의 램프가 밝아진 것을 본 b가 램프의 덮개를 연다. a가 램프의 덮개를 열 때부터 b의 램프가 밝아질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광속이 너무 빨라서 실패했다.

7. 후세에 미친 영향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천문학적 발견과 연구들은 그가 발견한 목성의 네 개의 큰 위성(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을 갈릴레이 위성으로 분류하는 것을 포함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갈릴레오 우주선은 목성 궤도로 들어선 첫 번째 우주선으로 갈릴레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국제기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행한 첫 번째 천문학적 관측들을 기리기 위해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20세기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오의 삶을 극화하였다.(1943)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1947년에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썼다. 피렌체에는 갈릴레오 박물관이 있으며, 갈릴레오가 남긴 노트류와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다양한 도구의 실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1973년부터 1983년까지 발행되었던 2,000 이탈리아 리라(lira) 지폐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상이 사용되었다.

7. 1. 과학, 문화적 영향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천문학적 발견과 연구들은 그가 발견한 목성의 네 개의 큰 위성(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을 갈릴레이 위성으로 분류하는 것을 포함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80]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누구보다도 현대 과학의 탄생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하며,[79]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79]

다른 과학적 노력들과 원리들은 갈릴레오의 이름을 따서 갈릴레오 탐사선-목성 궤도로 들어선 첫 번째 우주선-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다.[80] 유엔(United Nations)은 갈릴레오가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 관측을 기록한 지 400주년이 되는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했다.[81]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1947년에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썼다. 피렌체에는 갈릴레오 박물관이 있으며, 갈릴레오가 남긴 노트류와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다양한 도구의 실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7. 2. 교황청의 입장 변화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이 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163] 1744년에 갈릴레오의 “대화”는 교회의 금지 도서 목록에서 삭제되었으며, 1992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하였다.[164] 이는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 후의 일이었다.

교황청은 갈릴레이 이전에도 꾸준히 천문학 연구에 투자를 해왔으며, 지금도 해오고 있다고 주장하며 천문대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2003년 9월,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재판의 갈릴레오 저작 재인쇄 금지는 1718년 그의 저작(단죄된 『대화』 제외)의 판본 출판 허가가 피렌체에서 허락되면서 해제되었다. 1741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약간 검열된 『대화』를 포함한 갈릴레오의 완전한 과학 저작의 판본 출판을 승인했다. 1758년,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작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령이 금서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대화』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검열되지 않은 버전에 대한 특정 금지는 유지되었다. 교회의 지동설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의 모든 흔적은 1835년 이러한 저작들이 마침내 금서 목록에서 삭제되면서 사라졌다.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몇 달 만에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에 대한 그의 첫 연설에서 갈릴레오를 "연구의 가장 대담한 영웅들 중 하나... 길 위의 걸림돌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송곡 기념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했다.[75]

1990년,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일부 현재의 견해들을 언급했다. 그는 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의 "갈릴레오 시대의 교회는 갈릴레오 자신보다 이성에 훨씬 더 충실했고, 갈릴레오 가르침의 윤리적, 사회적 결과도 고려했다. 갈릴레오에 대한 그들의 판결은 합리적이고 정당했으며, 이 판결의 수정은 정치적으로 적절한 것에 근거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견해를 인용했지만, 동의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2008년 3월,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의 수장인 니콜라 카비보는 바티칸 성벽 안에 갈릴레오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에 대한 공헌을 칭찬했다.[78] 그러나 한 달 후, 교황청 문화평의회의 수장인 지안프랑코 라바시는 바티칸 부지에 갈릴레오 동상을 세우는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밝혔다.

7. 3.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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