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울산 지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643년 울산 지진은 1643년 음력 6월 9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경상감사의 보고에 따르면 안동, 동해, 영덕, 김천 등 경상도 좌도 지역에 성벽 붕괴 등의 피해가 있었으며, 울산에서는 관아가 무너지고 지진해일이 발생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울산군관읍지》 등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진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43년 한국 - 1643년 합천 지진
1643년 합천 지진은 조선 인조 시대에 합천에서 발생하여 민가 붕괴와 인명 피해를 일으켰으며, 승정원일기와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당시 지진 관측 및 기록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조선시대 지진 재해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 1643년 과학 - 기압계
기압계는 대기압을 측정하는 기구로, 17세기 중반 토리첼리에 의해 최초의 수은 기압계가 발명되었으며, 일기 예보, 고도 측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수은, 아네로이드, 전기식 등 여러 종류가 현대에 개발되어 사용된다. - 1643년 과학 - 1643년 합천 지진
1643년 합천 지진은 조선 인조 시대에 합천에서 발생하여 민가 붕괴와 인명 피해를 일으켰으며, 승정원일기와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당시 지진 관측 및 기록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조선시대 지진 재해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643년 울산 지진 | |
---|---|
지도 정보 | |
지진 정보 | |
이름 | 1643년 울산 지진 |
현지일 | 1643년 7월 24일 |
현지시간 | 15~16시 |
규모종류 | 릭터 규모 |
규모 | 6.7 |
규모2 | -7.4 |
규모기타 | 모멘트 규모 6.5 |
진도종류 |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 |
진도 | VIII~X |
해일 | 있음 |
2. 역사적 기록
1643년 울산 지진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의 공식 기록과 향토 사료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경상감사의 보고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643년(인조 21년) 음력 6월 9일 신시(오후 3시-5시)와 10일 진시(오전 7시-9시)에 경상도 좌도 지역인 안동, 동해, 영덕, 김천 등지에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이 무너졌다. 울산에서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지진이 발생하여, 울산부 동쪽 13리 지점에서 바닷물이 끓어오르고, 건답이 무너지고 물이 솟구치는 현상이 나타났다.[1]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양과 경상도의 대구, 안동, 김해, 영덕 등 여러 고을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연대와 성첩이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산부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쳤으며, 전라도에도 지진이 있었다.[1]
《울산군관읍지》에는 울산 도호부 관아가 무너지고, 도호부 남쪽 황룡연의 물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병영에서는 우물이 넘치고 개울이 요동치는 등의 현상이 발생했으며, 병영 내외의 가옥 140여 호가 무너지고 읍내에 먼지가 자욱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지진의 피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염포 포구에는 물이 들어찼다.
2. 1. 《승정원일기》 기록
경상감사 장계(狀啓) 내용에 따르면, 안동에서부터 동해·영덕을 거쳐 김천에 이르는 경상도 좌도 지역에 1643년(인조 21년) 6월 9일(음력) 신시(오후 3시-5시)와 6월 10일(음력) 진시(오전 7시-9시)에 두 차례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이 무너진 곳이 많았다.[1] 울산에서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울산부 동쪽 13리 지점에 있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에서 바닷물이 끓어올랐다. 이는 마치 바다 가운데 큰 파도가 육지로 1, 2보 나왔다가 되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으며, 건답(乾畓, 물을 대지 않고 경작하는 논) 6곳이 무너지고 물이 샘처럼 솟았다가 구멍이 다시 합쳐졌다. 물이 솟아난 곳에는 흰 모래 1, 2두(斗) 가량이 나와 쌓였다.[1]2. 2.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한양과 경상도의 대구, 안동, 김해, 영덕 등 여러 고을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연대(烟臺)와 성첩(城堞)이 많이 무너졌다. 울산부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으며, 전라도 지역에도 지진이 있었다.[1] 화순현에서는 벼락으로 인해 부자(父子)가 사망했고, 영광군에서는 형제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가 말과 함께 벼락 맞아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1]2. 3. 《울산군관읍지》 기록
《승정원일기》 6월 21일 기록에는 경상감사의 장계 내용이 실려 있다. 장계에서는 좌도 안동에서부터 동해, 영덕을 거쳐 김천 각 읍에 이르기까지 음력 7월 9일(辛未) 신시(오후 3시-5시)와 7월 10일 진시(오전 7시-9시)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진 곳이 많았으며, 울산 역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울산부 동쪽 13리 지점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물이 끓어올랐는데, 마치 바다 가운데 큰 파도가 육지로 1, 2보 나왔다가 되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건답 6곳이 무너졌고, 물이 샘처럼 솟았으며, 물이 넘치자 구멍이 다시 합쳐졌다. 물이 솟아난 곳에는 각각 흰 모래 1, 2두가 나와 쌓였다고 한다.[1]《울산군관읍지》에는 신시(申時)에 땅이 흔들리더니 울산 도호부의 관아가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땅이 흔들리며 도호부 남쪽 황룡연의 물이 갑작스레 줄었다. 병영에서는 초기에는 흔들거림이 있다가 갑작스레 우물이 넘쳐나고 개울이 요동치니 천지가 흔들리는 듯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흔들림이 멈추었다가 갑자기 더욱 땅이 요동치며 황룡연의 용이 승천하는 듯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 이후 병영의 외성과 문루가 무너져 내리고 병영 내외의 가옥들이 돌에 깔리거나 주저앉았으며 멀리 병영의 남문과 관아가 쓰러지며 커다란 구름이 생기었다. 병영에서는 백성들의 가옥 140여 호가 무너져 내렸다. 읍내에는 먼지가 자욱하여 백성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염포 포구에는 물이 들어찼다.
3. 지진의 과학적 분석
이전 출력물이 없으므로, 주어진 지시사항과 빈 원본 소스를 바탕으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가 제공되면 지침에 따라 위키텍스트를 작성하고, 그 결과물을 다시 검토 및 수정하겠습니다.
4. 사회적 영향
(참조할 원본 소스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