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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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정원일기는 조선 시대 승정원에서 매일 기록한 일기이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고, 여러 번의 개수를 거쳤다.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함께 조선 시대 국정의 결과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실록을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다. 현재는 전산화 사업을 통해 접근성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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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일반 정보 | |
유형 | 역사적 기록 |
언어 | 한국어 (한자 혼용) |
시대 | 조선 시대, 대한제국 시대 |
보관 장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지정 번호 | 국보 303호 |
지정 날짜 | 1999년 4월 9일 |
상세 정보 | |
내용 | 조선 시대의 역사적 기록 |
기록 대상 | 승정원의 일상 업무 |
기록 범위 | 조선 건국 초기 ~ 고종 시대 |
전체 권수 | 3,243책 |
설명 | |
설명 | 승정원에서 매일 처리한 국왕 관련 업무를 기록한 일기.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담고 있어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 |
관련 정보 | |
관련 문화재 | 조선왕조실록 |
2. 역사
2. 1. 편찬 및 기록 방식
2. 2. 소실과 복원
승정원의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는 날마다 승정원의 일기를 썼는데, 매월의 일기는 다음 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되었다.[7] 임진왜란 때(1592년, 선조 25년) 불탔고,[7] 1623년(인조 1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졌다.[7] 그 후 임진왜란 이후의 일기를 개수했으나, 1744년(영조 20년) 승정원의 화재로 인해 임진왜란 직후부터 1721년(경종 1년)의 기록이 소실되어 1746년(영조 22년)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해 개수했으나 본래 책수의 3분의 1도 안 되는 양만 개수할 수 있었다.[7] 또 영조 때의 승정원 일기 중 임오년의 일(임오화변)과 관련한 내용들은 세손의 청으로 인해 세초[12]되었다.[13] [7] [8] 그리고 1888년(고종 25년)에 또다시 화재로 1851년(철종 2년)에서 1888년(고종 25년)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개수했다.[7] 그밖에 수많은 분실과 화재를 당하고 개수하기를 반복하였고, 개수 때 원본의 내용을 어느 정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7]3. 가치와 의의
이 책은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의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 1. 학술적 가치
이 책은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의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 2. 국제적 위상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4. 현대의 활용
4. 1. 전산화 사업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 『일성록』과 함께 드물게 존재하는 이씨 조선 시대 국정의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4. 2. 접근성 확대
5. 보존 및 관리
승정원의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는 날마다 승정원의 일기를 썼는데, 매월의 일기는 다음 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 이래의 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1592년, 선조 25년) 불탔고, 1623년(인조 1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졌다.[7] [8] 그 후 임진왜란 이후의 일기를 개수했으나, 1744년(영조 20년) 승정원의 화재로 인해 임진왜란 직후부터 1721년(경종 1년)의 기록이 소실되어 1746년(영조 22년)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해 개수했으나 본래 책수의 3분의 1도 안 되는 양만 개수할 수 있었다. 또 영조 때의 승정원 일기 중 임오년의 일(임오화변)과 관련한 내용들은 세손의 청으로 인해 세초[12]되었다.[13] 그리고 1888년(고종 25년)에 또다시 화재로 1851년(철종 2년)에서 1888년(고종 25년)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개수했다. 그밖에 수많은 분실과 화재를 당하고 개수하기를 반복하였고, 개수 때 원본의 내용을 어느 정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조
[1]
서적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
서적
New Insights From Recent Studies in Historical Astronomy: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F. Richard Stephenson
Springer
[3]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http://100.empas.com[...]
Empas/EncyKorea
[4]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http://100.empas.com[...]
Empas/Britannica
[5]
문서
この時期の日記とは、単語は今日の公務記録に該当する日誌にほぼ近い。
[6]
링크
한국고전종합 승정원일기 고종 44년
http://db.itkc.or.kr[...]
[7]
문서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를 기록한 종이들을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8]
문서
영조 127권, 52년(1776년) 2월 4일 3번째기사 / 영조 127권, 52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2월 6일(무신) 2번째기사
[9]
문서
이 시기의 일기(日記)라는 낱말은 오늘날에 공무기록에 해당하는 일지(日誌)에 더 가깝다.
[10]
웹인용
한국고전종합 승정원일기 고종 44년
https://web.archive.[...]
2013-08-14
[11]
링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
[12]
문서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를 기록한 종이들을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13]
문서
영조 127권, 52년(1776년) 2월 4일 3번째기사 / 영조 127권, 52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2월 6일(무신)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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