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속초항 입구해상 조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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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속초항 입구해상 조난 사고는 1962년 1월 2일, 명태잡이를 위해 속초항에서 출항한 어선들이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해 침몰하거나 표류하여 발생한 사고이다. 당시 244척의 어선에 1,600명의 어부가 조업 중이었으며, 5척의 배가 침몰하고 24명이 사망했다. 사고 이후 해군, 공군, 육군이 투입되어 구조 및 수색 작업이 진행되었고, 정부와 사회단체는 유가족 지원 및 구호 활동을 펼쳤다. 사고 원인으로는 예측하지 못한 기상 상황, 통신 장비 미비, 선원들의 미숙한 대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62년 1월 2일, 명태가 잘 잡힌다는 소식을 듣고 속초항에서 어부 1,600명이 244척의 어선으로 명태잡이를 하던 중, 8시경부터 갑자기 파도가 일기 시작하였다. 어선단은 조업을 그만두고 귀항을 서둘렀으나, 13시 30분경부터 20시까지 여러 척의 배가 전복되었다.[1] 큰 파도에 당황한 어선들이 항구에 모여 있다가 몇몇 배들이 입항하는 것을 보고 모여들게 되었다고 하였다.[3]
사고 직후, 최고회의는 한국함대 동해경비분대 소속 함정 7척을 투입하여 표류 선박을 구조하였다.[5] 공군은 1월 2일 오후부터 헬리콥터를, 1월 3일에는 육군 및 공군 비행기를 동원하여 수색 작업을 지원하였다.[3] [6]
2. 사고 경위
2. 1. 출항 및 조업 상황
1962년 1월 2일, 명태가 잘 잡힌다는 소식을 듣고 속초항에서 1,600명의 어부들이 244척의 어선을 이용해 명태잡이를 하던 중, 오전 8시경부터 갑자기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어선단은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을 서둘렀다.[1]
2. 2. 기상 악화 및 조난
1962년 1월 2일 명태잡이 어선들이 강원도 속초항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중, 오전 8시경부터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선들은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을 서둘렀으나,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8시 사이에 여러 척의 배가 전복되거나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1]
특히, 오후 1시 40분부터 오후 5시 30분 사이에는 육지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파제 앞에서 높은 파도로 인해 배들이 전복되거나 침몰했다. 큰 파도에 당황한 어선들이 항구로 몰려들었고, 일부 배들이 입항하는 것을 보고 다른 배들도 따라 들어오려다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3] 이 사고로 5척의 배가 침몰하고 24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4]
2. 3. 피해 상황
배들은 사람들이 육지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13시 40분부터 17시 30분 사이에 발생한 파도로 속초항 방파제 앞에서 전복, 침몰되었으며, 침몰한 배는 5척, 희생자는 24명으로 파악되었다.[1][4]
3. 구조 및 수색 작업
1월 3일, 농림수산부는 현지 군 당국과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10] 농림부장관, 치안국 과장, 해군 함대 사령관을 속초에 파견하였다.[5] [11] 농림부장관은 유가족에게 어구를 갖춘 공용 어선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12]
1월 4일, 전국재해대책위원회는 위원장을 현장에 파견하고, 사망자 1인당 20000KRW의 긴급구호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13] 대한적십자사는 사망자 가족에게 조위금과 광목을 전달하였고,[14] 재해대책위원회는 구호금을 모금하였다.[15] 강원도 당국은 도내 공무원들로부터 의연금을 걷었다.[16]
3. 1. 초기 대응
2일 밤까지 65척이 귀항하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어선들의 승무원들은 선실에 있었고, 선장은 선체에 밧줄로 몸을 묶었기에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3]
사고 당시 구호선 1척이 있었으나, 사람들의 요구에도 출항하지 않았다. 19시에 해군 61함과 PT 보트가 출동하여 어선들을 조도 부근에 집결시키고 입항을 막았다. 어선들은 파도가 잔잔해진 3일 아침부터 15시까지 입항하였다.[3]
3. 2. 해군 및 공군 지원
사고 당일 19시에 해군 61함과 PT 보트가 출동하여, 조난된 어선들을 조도 부근에 집결시키고 입항을 통제하였다. 어선들은 파도가 잠잠해진 다음 날인 3일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속초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3] 당시 구호선 1척이 있었으나, 어민들의 구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출항하지 못했다.[3]
3. 3. 시신 수습
거센 파도로 인해 시신 인양이 지연되다가, 1962년 1월 5일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7] 1월 9일까지 시신 2구를 발견하였고,[8] 1월 26일에는 표류하던 시신 1구를 추가로 발견하였다.[9]
4. 사고 처리 및 지원
최고회의는 한국함대 동해경비분대에서 함정 7척을 동원해 표류 선박 구조 작업을 벌였다고 발표하였다.[5] 공군 헬리콥터 2대와 육군 및 공군 비행기들이 수색 작업을 지원하였다.[3][6] 파도가 거세어 시신 인양은 1월 5일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는데,[7] 1월 9일까지 2구, 1월 26일에는 표류하는 시신 1구를 발견하였다.[8][9]
농림수산부는 현지 군 당국과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10] 농림부장관, 치안국 과장, 해군 함대 사령관이 속초에 파견되었다.[5][11] 농림부장관은 유가족에게 어구를 갖춘 공용 어선을 제공하겠다고 하였다.[12]
전국재해대책위원회는 위원장을 현장에 파견하고 사망자 1인당 2만원의 긴급구호금을 지급하였다.[13] 적십자사는 사망자 가족에게 조위금과 광목을 전달하였고,[14] 재해대책위원회는 구호금을 모금했으며,[15] 강원도 당국은 도내 공무원들로부터 의연금을 걷었다.[16]
4. 1. 정부 및 지자체 지원
최고회의에서는 1월 2일 밤부터 한국함대 동해경비분대 소속 함정 7척을 동원해 표류 선박 구조 작업을 벌였다고 발표하였다.[5] 1월 3일 오전에는 공군 헬리콥터 2대가 수색 작업을 지원했다.[3] 육군과 공군 비행기도 1월 3일 오전부터 수색에 동원되었고, 헬리콥터는 1월 2일 오후부터 투입되었다.[6]1월 3일, 농림수산부는 현지 군 당국과 함께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하였다.[10] 같은 날 오전, 농림부장관과 치안국 과장이 현장에 파견되었으며,[5] 해군은 함대 사령관을 속초에 파견하였다.[11] 농림부장관은 유가족에게 어구를 갖춘 공용 어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2]
1월 4일 오전, 전국재해대책위원회는 위원장을 현장에 급파하고, 사망자 1인당 2만원의 긴급구호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13] 적십자사는 사망자 가족에게 조위금과 광목을 전달했다.[14] 재해대책위원회는 구호금을 모금했으며,[15] 강원도 당국은 도내 공무원들로부터 의연금을 걷었다.[16]
4. 2. 사회단체 지원
전국재해대책위원회에서는 1962년 1월 4일 오전에 위원장을 현장에 파견하고, 긴급구호금으로 사망자 1인당 2만 圜|환중국어씩 지급하겠다고 발표하였다.[13] 적십자사에서는 사망한 가족들에게 조위금과 광목을 전달하였다.[14] 재해대책위원회는 구호금을 모금하였고,[15] 강원도당국은 도내 공무원으로부터 의연금을 걷었다.[16]5. 원인 분석 및 논란
사고 원인으로는 기상 예측 실패, 통신 장비 미비, 선원들의 운영 미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바람을 동반한 10m 높이의 해일이 발생하여 항구 진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연락을 받지 못한 배들이 무리하게 내항으로 진입하려다 암초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2]
5. 1. 기상 예측 실패
사고 원인으로는 일기예보에서 예측하지 못한 기상 상황, 선내 레이다 등 통신 시설 미비, 선원들의 운영 미숙 등이 거론되었다. 바람을 동반한 10m 높이의 해일이 있었고, 해일로 항구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연락을 받지 못한 배들이 내항으로 진입하려다가 암초에 부딪혔다고 한다.[2]5. 2. 통신 장비 미비
사고 원인으로 선내 레이다 등 통신 시설 미비가 거론되었다. 바람을 동반한 10m 높이의 해일이 있었고, 해일로 항구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연락을 받지 못한 배들이 내항으로 진입하려다가 암초에 부딪혔다는 것이다.[2]5. 3. 구조 및 대응 미흡
사고 원인으로는 기상청 예보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 선박 내 레이더 등 통신 시설 미비, 선원들의 운항 미숙 등이 거론되었다. 바람을 동반한 10m 높이의 해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항구에 진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락을 받지 못한 배들이 내항으로 들어오려다 암초에 부딪혔다는 것이다.[2]6. 묵호 어선단 조난 사고
같은 날 묵호에서 출항한 어선 250척 중 17척이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배에는 모두 226명이 타고 있었다.[17] 이 사고로 9명이 사망하였다.[19]
6. 1. 피해 상황
묵호에서 출항한 어선 250척 중 17척이 풍랑으로 귀환하지 못했으며, 이들 어선에는 226명이 승선해 있었다.[17] 미귀환 어선들은 동해 주변 각지로 흩어졌고, 1월 10일에 마지막 1척이 귀환하였음이 12일에 확인되었다.[18] 이 사고로 모두 9명이 사망하였다.[19]6. 2. 구조 및 수색
풍랑으로 묵호에서 출항한 어선 250척 중 17척이 다음날까지 돌아오지 못했고, 이 어선들에는 226명이 타고 있었다.[17] 이들은 동해 주변 각지로 흩어졌다가, 1월 12일에 1월 10일에 마지막 1척이 귀환했음이 확인되었다.[18] 이 사고로 모두 9명이 사망했다.[1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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