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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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사토 에이사쿠의 임기 만료에 따라 치러졌으며, 사토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노다 우이치 등이 후보로 나섰다. 선거 결과 사토 에이사쿠가 60%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하여 재선에 성공했으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또한 89표를 얻으며 반(反) 사토 진영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입후보제 도입 전까지는 자민당 소속 의원에게 투표된 모든 표가 유효표로 처리되었다.
자유민주당 휘장
| 선거 유형 | 총재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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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여부 | 아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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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선거 | 이케다 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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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선거 연도 | 1964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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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선거 | 196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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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선거 연도 | 19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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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일 | 1966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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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제도 | 결선 투표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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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권자 수 | 당 소속 중의원 의원: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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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 소속 참의원 의원: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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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방 대의원 표: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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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합계: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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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
| 선거 전 총재 | 사토 에이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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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후 총재 | 사토 에이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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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과정
사토 에이사쿠의 총재 임기가 만료되자 히비야 공회당에서 총재 선거가 진행되었다.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재선에 도전하는 사토의 대항마로 나섰다.
2.1. 후보자
입후보제가 아니었기에 선거 활동을 한 의원들을 모두 표시했다. 주요 후보는 다음과 같다.
3. 선거 결과
사토 에이사쿠일본어가 60%가 넘는 득표율을 올리면서 압승했지만 반사토의 기치를 내걸었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일본어가 나카소네파·마쓰무라 겐조일본어의 지원을 받아 89표를, 마찬가지로 반사토를 내세운 노다 우이치일본어가 9표를 얻었다. 마에오파는 자주 투표를 결의했지만 실제론 반사토 성향이던 오히라 마사요시의 주도하에 파벌 영수인 마에오 시게사부로에게 투표하여 마에오도 47표를 받았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입후보제가 도입된 건 1970년대의 일로 이 당시엔 입후보 표명 여부와 무관하게 자민당 소속 의원에 대한 표는 모두 유효표로 산정되었다.
4. 선거 이후
사토 에이사쿠가 60%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지만, 반(反)사토 진영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는 나카소네파·마쓰무라파의 지원을 받아 89표를 얻었다. 반사토를 내세운 노다 우이치도 9표를 획득했다. 마에오파는 자주 투표를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반사토 성향이던 오히라 마사요시의 주도로 파벌 영수인 마에오에게 투표하여 마에오도 47표를 받았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입후보제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의 일로, 이 당시에는 입후보 표명 여부와 관계없이 자민당 소속 의원에 대한 표는 모두 유효표로 인정되었다.
이 선거 결과는 사토의 재선을 확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자민당 내 보수 세력의 결집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후 사토 내각의 정책 방향, 특히 대한(對韓)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