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공작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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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공작 계획은 1980년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언론을 통제하려던 공작 계획이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초부터 언론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을 구성하고, K-공작 계획을 수립하여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 공작을 펼쳤다. 이 계획은 언론 검열, 언론인 회유 및 통제, 전두환의 이미지 조작을 포함하며,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언론 통제에도 활용되었다. K-공작 계획은 언론인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언론사 간부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신군부 협조를 유도했으며, 언론인 강제 해직 및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 초부터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언론을 활용할 계획을 구상했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1일경부터 보안사에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했다. 1980년 3월에는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그 실행을 위해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인을 받고 별도의 언론조종반(대책반)을 구성했다.[1]
K-공작 계획의 목적은 '단결된 군부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함'에 있었다. 이를 위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하고, 언론계의 호응 유도에 주력하며, 보도 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및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한 회유 공작을 실시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2. 배경
언론반(언론조종반)의 주요 업무는 검열 조종 업무와 공작 업무로 나뉜다. 검열 조종 업무란 시청 검열단에서 매일 실시하는 언론·출판 보도검열 업무를 조종․감독하는 것이고, 공작 업무는 설정된 임무수행을 위해 각 언론기관의 주요인사에 대한 접촉공작을 시행하는 것이다. 언론반의 보도검열단은 외근요원 5명은 각 언론사의 정보를 수집하고, 전○○와 김기철은 수집된 정보를 취합해 문서를 기안했으며, 이상재는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검열 조종 및 언론인 회유 업무를 했다.
언론반장 이상재는 보도검열단을 실질적으로 조종·감독하고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기획했다. K-공작반은 차장급 이상을 회유하기 위한 반장 1명, 중진기자 이상을 상대로 여론을 수집하는 분석관(문공부 직원) 2명, 여론수집 및 언론사 행사일정을 입수하는 수집관 5명 등 모두 14명으로 편성됐다. K-공작계획의 K는 KING을 뜻하는 것으로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으로서 계획됐다는 의견이 있다.[2]
2. 1. 보안사의 언론반 설치
1980년 2월 1일경, 보안사령부는 정보처를 신설하고 그 안에 언론계와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언론반'을 설치했다.[1] 언론반은 검열 조종 및 공작 업무를 담당했으며, 보도검열단은 언론사 정보 수집, 문서 기안, 검열 조종 및 언론인 회유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1][2]
언론반장 이상재는 'K-공작계획'을 기획하여 보도검열단을 조종·감독하고 언론사 간부들을 회유하려 했다.[2] K-공작반은 1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K는 KING을 뜻하는 것으로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으로 계획되었다는 의견이 있다.[2] 1980년 3월에는 언론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이 수립되었고, 4월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별도의 언론조종반(대책반)이 구성되었다.[1]
2. 2. K-공작 계획 수립
1980년 초부터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언론을 활용할 계획을 구상했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1일경부터 보안사에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했다. 1980년 3월에는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그 실행을 위해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인을 받고 별도의 언론조종반(대책반)을 구성했다.[1]
언론반(언론조종반)의 주요 업무는 검열 조종 업무와 공작 업무로 나뉜다. 검열 조종 업무란 시청 검열단에서 매일 실시하는 언론·출판 보도검열 업무를 조종․감독하는 것이고, 공작 업무는 설정된 임무수행을 위해 각 언론기관의 주요인사에 대한 접촉공작을 시행하는 것이다. 언론반의 보도검열단은 외근요원 5명이 각 언론사의 정보를 수집하고, 전○○와 김기철은 수집된 정보를 취합해 문서를 기안했으며, 이상재는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검열 조종 및 언론인 회유 업무를 했다.
언론반장 이상재는 보도검열단을 실질적으로 조종·감독하고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기획했다. K-공작반은 차장급 이상을 회유하기 위한 반장 1명, 중진기자 이상을 상대로 여론을 수집하는 분석관(문공부 직원) 2명, 여론수집 및 언론사 행사일정을 입수하는 수집관 5명 등 모두 14명으로 편성됐다. K-공작계획의 K는 KING을 뜻하는 것으로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으로서 계획됐다는 의견이 있다.[2] K-공작 계획의 목적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함'에 있었다.[2] 이를 위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하고 언론계의 호응 유도에 주력하며, 보도 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및 중진들과 개별 접촉 회유 공작을 실시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2] 본 공작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됨으로 K공작이라 약칭하고, 공작업무 수행 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을 요할 때는 사전 사령관의 재가를 득한 후 실시하도록 하였다.[2]
2. 3. 언론반의 역할
3. K-공작 계획의 주요 내용
현 상황과 목표 달성을 위한 기본 방안으로는 보도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이 제시되었다. 회유공작을 위한 세부계획, 계획 실시를 위한 반 개편, 그리고 소요 예산 등이 포함되었다.
본 공작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므로 'K-공작'이라 약칭되었으며, 공작업무 수행 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할 때는 사전 사령관의 재가를 얻은 후 실시하도록 하였다. 별첨 자료로는 언론반 편성표와 회유공작 대상자 명단이 있었다.
3. 1. 목적 및 방침
K-공작 계획의 목적은 '단결된 군부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함'에 있었다. 이를 위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하고, 언론계의 호응 유도에 주력하며, 보도 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및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한 회유 공작을 실시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본 공작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므로 'K-공작'이라 약칭되었으며, 공작업무 수행 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할 때는 사전 사령관의 재가를 얻은 후 실시하도록 하였다.
3. 2. 목표 달성 방안
4. 언론인 회유 및 통제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 분석했다.[3] 신군부는 언론인 간담회를 개최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하도록 요구했다.[3] 간담회에서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 및 평가를 수집 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역시 보고했다.[3]
공작계획서에 첨부된 회유공작 결과 분석표를 살펴보면, 중진 언론인을 접촉해 언론인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책 주장을 분석하고 비고란에 접촉 회수와 ‘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등으로 평가 구분했다.[3]
신군부는 '확고한 시국관을 정립토록 순화 유도’한다는 목적 아래 중진 언론인 접촉했다.[3]「중진언론인 접촉순화 계획」의 ‘전두환의 이미지 부각’의 세부내용에 따르면 신군부는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우국충정에 불타는 사심 없고 청렴결백한 전형적인 군인', '농촌출신으로 서민적이고 소박 인자한 범국민적 인물, '해외유학, 시찰 등 문무 겸비한 민주주의 신봉자',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애국자' 등으로 전두환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주력했다.[3]
보안사는 5.18 등 주요 사건 발생시에도 간담회를 열어 언론 협조를 유도했다.[3]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현지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광주일원 소요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동사태의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시켜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목적으로,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3]
이러한 언론인 접촉 공작은 1980년 8월 하순까지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3] 파악된 언론인들의 동정, 작성된 언론사 강제 통폐합 관련 시안들은 각각 언론인 강제 해직,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3]
4. 1. 언론인 성향 분석 및 회유
신군부는 K-공작 계획의 하나로 보안사령관이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를 직접 면담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을 수집, 분석하였다.[3] 언론인 간담회를 통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파악하고 신군부에 협조하도록 유도했다.[3] 간담회에서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 및 평가를 수집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도 보고되었다.[3]공작 계획서에 첨부된 회유 공작 결과 분석표에 따르면, 중진 언론인을 접촉하여 정치적 성향과 정책 주장을 분석하고, '양호', '협조 희망', '적극', '경계', '소극' 등으로 평가했다.[3]
신군부는 '확고한 시국관을 정립'시키기 위해 중진 언론인을 접촉했다.[3] 「중진언론인 접촉순화 계획」에 따르면,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우국충정에 불타는 사심 없고 청렴결백한 전형적인 군인' 등으로 전두환의 이미지를 부각하려 했다.[3]
5.18 등 주요 사건 발생 시에도 간담회를 열어 언론 협조를 유도했다.[3] 1980년 5월 24일, 기자 49명을 인솔하여 광주 현장을 취재하게 하고, 4일에 걸쳐 언론사 간부 64명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졌다.[3]
이러한 언론인 접촉 공작은 1980년 8월 하순까지 추진되었으며, 파악된 언론인들의 동향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 관련 시안들은 언론인 강제 해직 및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3]
4. 2. 전두환 이미지 조작
신군부는 K-공작 계획의 하나로, 또는 그 연장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 분석했다.[3] 언론인 간담회를 통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파악하고 신군부에 협조하도록 요구했다.[3] 간담회에서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과 평가를 수집 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의 기사 반영 여부도 보고했다.[3]중진 언론인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책 주장을 분석하고, 접촉 횟수와 반응('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 등)을 평가했다.[3] 신군부는 '확고한 시국관을 정립토록 순화 유도'하기 위해 중진 언론인을 접촉했다.[3]
「중진언론인 접촉순화 계획」의 ‘전두환의 이미지 부각’ 항목을 보면, 신군부는 전두환을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우국충정에 불타는 사심 없고 청렴결백한 전형적인 군인', '농촌 출신으로 서민적이고 소박 인자한 범국민적 인물', '해외 유학, 시찰 등 문무 겸비한 민주주의 신봉자',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애국자' 등으로 묘사하려 했다.[3]
5.18 등 주요 사건 발생 시에도 간담회를 열어 언론 협조를 유도했다.[3] 1980년 5월 24일,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과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총 49명이 광주 소요 현장을 취재했다.[3] 또한,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총 64명을 호텔로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3]
이러한 언론인 접촉 공작은 1980년 8월 하순까지 추진되었으며, 파악된 언론인들의 동정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 관련 시안들은 언론인 강제 해직 및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3]
4. 3. 5.18 민주화운동 관련 언론 통제
보안사는 1980년 5월 24일, 5.18 민주화운동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 회복을 위해 중진 언론인을 초청하여 현장 취재를 유도하고 국민 계도를 촉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3]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과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총 49명이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의 인솔 하에 광주 일원의 소요 현장을 취재했다.[3] 또한,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총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로 초청하여 간담회를 개최하고,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시켜 국민 계도를 촉구하도록 유도했다.[3]신군부는 K-공작 계획의 일환으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 분석했다.[3] 언론인 간담회를 통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하도록 요구했으며, 간담회에서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 및 평가를 수집 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도 보고했다.[3]
중진 언론인을 접촉하여 언론인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책 주장을 분석하고, '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 등으로 평가를 구분했다.[3] 신군부는 '확고한 시국관을 정립토록 순화 유도'한다는 목적 아래 중진 언론인을 접촉했으며,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우국충정에 불타는 사심 없고 청렴결백한 전형적인 군인' 등으로 전두환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주력했다.[3]
이러한 언론인 접촉 공작은 1980년 8월 하순까지 추진되었으며, 파악된 언론인들의 동정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 관련 시안들은 각각 언론인 강제 해직,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3]
5.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참조
[1]
뉴스
군사작전 같은 ‘K-공작계획’ 전두환 ‘언론조종반’에 서명
https://news.naver.c[...]
[2]
간행물
국방부 과거사위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보고서
[3]
간행물
국방부 과거사위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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