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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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재는 1850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이다. 그는 고려 말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개화 사상에 영향을 받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며 민중 계몽에 힘썼다. 갑신정변 실패 후 관직을 사퇴하고 YMCA 교육부장,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과 청년 계몽에 헌신했다. 1927년 서거했으며, 신간회 회장으로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실력 양성을 강조하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일화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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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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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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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이상재 |
한자 이름 | 李商在 |
히라가나 이름 | りしょうざい |
가타카나 이름 | イ・サンジェ |
로마자 표기 | 이 정보는 제공되지 않음 |
인적 사항 | |
출생일 | 1850년 10월 26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 |
사망일 | 1927년 3월 29일 |
사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재동 셋방 |
사망 원인 | 노환 합병증 |
국적 | 대한제국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 |
배우자 | 초배 장순재(본관은 목천) 계배 강릉 유씨 |
자녀 | 이승간(장남) 이승인(차남) 이승윤(삼남) 이승준(사남) 이세련(차녀) |
아버지 | 이희택(李羲宅) |
어머니 | 밀양 박씨 부인(密陽 朴氏 夫人) |
친인척 | 이희진(백부) 이홍직(손자) 이승우(족질)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한학 수학 |
주요 직책 | 의정부 총무국 국장, 신간회 회장 겸 대표최고위원 |
임기 | 1897년 10월 12일 ~ 1898년 1월 31일 |
정당 | 신간회 |
서훈 | |
훈장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웹사이트 | |
관련 링크 | 이상재 - 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을 접하였다.[1]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이 몰락하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3]
1899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한일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하였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 한 사람이었다.[1]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미련이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고종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의정부 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 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석방된 뒤 김정식, 유성준, 이승만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YMCA 초대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YMCA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미국 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제2의 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운동·학생청년회 운동 등 YMCA 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을 다녔다.
1922년 신흥우, 이대위(李大偉),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등 YMCA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각국 YMCA 대표자들을 설득하고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 YMCA는 단독으로 국제 YMCA에 가입하고 독자적으로 국제 YMCA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한국 YMCA의 국제 YMCA 가입 단초를 마련하였다.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를 결성하자 이상재는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하였다.
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말초신경에 부종 증세로 고생하였으며, 1927년 3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재산이 없던 그는 전셋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29일 경성의 전셋방에서 병사하였고, 당시 나이 78세였다. 그는 전셋방을 전전하며 재산이 없었고, 사망 당시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1] 이 빚은 윤치호, 이승만, 김성수, 안창호, 송진우 등이 모금운동을 하여 갚아주었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넷째 아들 승준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후 거족적인 사회장이 거행되었으며 10만 인파가 몰렸다.[1]
2. 1. 생애 초기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3] 이희택(李羲宅)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전형적인 선비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이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서당을 다녔으며, 1864년 조혼 풍습에 따라 3년 연상인 목천 장씨와 결혼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후,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1]
2. 1. 1. 출생과 가계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3] 이희택(李羲宅)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전형적인 선비 집안 출신이었다.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15대손이었다. 13대 방조 이개(李塏)는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12대 방조 이계전의 후손 중에는 조선 중기의 철학자 토정 이지함과 화가 이산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다가 5대조 이익태(李益泰)는 한성부좌윤, 고조부 이덕한(李德漢)이 사마를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아버지 이희택이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출사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이자 자(字)는 계호(季皓)이고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상재(商在)로 바꾸었으며 아호를 월남이라 하였다.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학문이 있는 선비 집안답게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상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계몽사에서 펴낸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이상재》에 의하면, 장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생활비를 손자의 책값으로 쓰셨다는 일화(에피소드)가 나올 정도로 배움을 존중하는 집안이었다.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 서당을 다니고, 1864년(고종 1년) 조혼 풍습에 따라 3년 연상인 목천 장씨와 결혼하였다. 할아버지 이경만이 별세하여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선산이 참의를 지낸 김씨 집안 선산과 경계 마찰로 아버지 이희택이 투옥되었다. 신혼 기간 중 6촌 형 이경재에게 아버지 희택의 투옥 소식을 듣고 한산군에 달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겠노라 군수에게 청하여 아버지 희택을 석방시키고, 자신이 대신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일이 있을 만큼 이상재는 의리 있는 청년이었다.
2. 1. 3. 과거 낙방과 개화 사상
과거에 낙방한 후,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 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1]2. 2. 청년 시절
이상재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이 몰락하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2. 2. 1. 일본 유학과 귀국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시찰 목적으로 조선 조정에서 구성한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김옥균, 홍영식, 조준영, 어윤중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이 사귀었다.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지식인인 유길준, 윤치호, 고영희, 안종수 등 26명이 이상재와 함께 따라갔다.[5]저녁에 한가한 시간에 일본의 도심 번화가를 다니며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 사회 역시 개항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함께 유학생으로 파견된 홍영식 등과 사귀어 친분관계를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때 그는 홍영식, 윤치호 등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특히 홍영식 등과의 친분관계는 그의 관료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主事)에 발령받아 인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해 10월 11일에는 우정국 사사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직전 그는 정변을 도왔으나, 3일만에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는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게 된다.
2. 2. 2. 갑신 정변 이후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 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2. 2. 3.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3]1899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했다.[3]
2. 2. 4. 공직 사퇴와 기독교청년회 활동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만찬이 개최되었고, 이상재 역시 이 만찬에 참석했다.[11] 주빈은 앨리스 루스벨트였고, 배빈은 앨리스 양을 수행한 해군 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에서는 민영환,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서 항일 필봉을 휘두르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11] 이들은 앨리스 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 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11]YMCA 지도자이며 기독교, 개화파와 친분을 쌓았던 이상재는 바다 건너 해양 문명국이 대한제국의 자유와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인 이승만, 친구 윤치호 등으로부터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듣자 미국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품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미련이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고종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의정부 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 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 유성준, 이승만 등과 그밖에 윤치호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YMCA 초대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2. 3. 일제강점기 이후
1905년 이후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의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1] 1920년대에는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하며 청년 계몽과 교육에 힘썼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어 전셋방을 전전했으며,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했다.2. 3. 1. 사회 참여 활동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1]1899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한일 병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했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했고, 1919년 3·1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관련 인물로 지목되어 연행되었다. 이후 교육과 청년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했다.[1]
2. 3. 2. 교육, 강연 활동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 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14]1899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한일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에 선출되었고,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제2의 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을 다녔다.
2. 4. 생애 후반
1899년 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한일 병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했으며,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이었다.2. 4. 1. 민립대학 기성회와 선교 활동
1920년대 초 이상재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한규설, 윤치소 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18] 이후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하였고, 1922년 3월 이상재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2년 이상재는 이승훈,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주도하여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고 모금활동을 벌였다.[18]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1922년 이상재는 신흥우, 이대위(李大偉),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등 YMCA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각국 YMCA 대표자들을 설득하고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 YMCA는 단독으로 국제 YMCA에 가입하고 독자적으로 국제 YMCA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한국 YMCA의 국제 YMCA 가입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25년 2월 손자 홍직이 졸업하는 감리교 고등학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조선총독부 총독과 일본인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대신 낭독한 한국인 직원들의 낭독 이후, 내빈 대표로 축사를 낭독할 때 그는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19]"라며 한글로 축사를 낭독하였다.
2. 4. 2. 신간회 회장 추대와 임종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를 결성하자 이상재는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하였다.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말초신경에 부종 증세로 고생하였으며, 1927년 3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재산이 없던 그는 전셋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29일 경성의 전셋방에서 병사하였고, 당시 나이 78세였다. 전세로 전전하던 그는 재산도 없었으며, 사망 당시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1] 이 빚은 윤치호, 이승만, 김성수, 안창호, 송진우 등이 모금운동을 하여 그의 빚을 갚아주었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넷째 아들 승준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후 거족적인 사회장이 거행되었으며 10만 인파가 몰렸다.[1] 선영인 충청남도 한산군의 선영에 장사되었고, 1957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묘비문을 썼다.
3. 사상과 신념
이상재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하였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 한 사람이었다.
3. 1. 맹목적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그는 한국 사람들이 서로를 부를 때 김 씨, 박 씨라 부르거나, 미국식으로 미스터 김(Mr. Kim), 미스터 박(Mr. Park) 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왜 자기 나라 고유의 말이나 습관대로 부르지 않고 일본인이나 미국인을 흉내 내느냐고 지적했다.[20]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외국 풍조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재는 갑자기 "요즘 웬일인지 상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20]
김상(金さん)일본어이나 박상(朴さん)일본어은 일본어로 김 씨, 박 씨를 뜻하는 말이다. 이상재는 일본 말이나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스스로 김상, 박상 하더니, 미국 풍조가 들어와서는 어떤 사람들이 미쳤다 김(Mr. Kim), 미쳤다 박(Mr. Park) 한다고 비판했다.[20]
그제야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깨닫고 크게 웃었다.[20] 개화파 출신이었던 그는 맹목적인 현상 유지를 반대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원인을 신문물을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단행한 데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 것을 지키되 좋은 것은 지키면서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펼쳤다.
3. 2. 실력 양성론
1899년 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했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했고, 1919년 3·1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관련 인물로 지목되어 연행되었다. 이후 교육과 청년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했다.4. 평가
그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 개화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1899년 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의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 활동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하였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계몽사에서 만든 이상재 전기에는 이상재 선생이 풍자와 경구로써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재담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이상재 선생은 신사유람단에 따라갔을 때 일제가 총과 칼을 보여주며 힘을 자랑하자 "칼로 일어서면 칼로 망한다."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군국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한 말(마태복음서 26:52)을 인용했고, 을사오적들에게는 "대감들, 일본에 가시지요. 당신들 나라 망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 말이오"라고 독설을 보여주었다.
서재필은 월남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21]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는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은 동방삭을 앞섰고, 슬플 때는 굴원을 생각하게 한다"며,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평하였다. 윤치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인 분"이라고 평하였다.
교육자 겸 정치인 김동길(金東吉)은 "솔직함과 가식이 없음[22]"을 높이 평가했다. 김동길에 의하면 "월남 이상재가 한 시대에 우뚝 선 거물인 까닭은 범사에 솔직하고 가식이 없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신 어른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22]"고 평하였다.
5. 일화
이상재는 청년들과 어울려 경주를 하거나 바둑, 장기를 두는 것을 즐겼다. 독립운동가 이원순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끼리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훈수하는 것을 좋아했고, 훈수대로 두지 않아 질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비키게 하여 대신 이겨주고는 즐거운 듯 크게 웃는 모습이 마치 홍안소년(紅顔少年)처럼 보였다고 한다.[23]
이상재가 강연회와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할 때,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헌병과 순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강연 내용을 주시했다. 어느 겨울 강연에서 그는 개나리꽃이 활짝 폈다고 외쳤는데, 이는 황색 제복을 입은 순사와 헌병을 개나리에 빗대어 조롱한 것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어떤 저명 인사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이토(伊東)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재는 그 인사의 집 대문에 가서 용변을 보았다. 그 인사가 항의하자, 이상재는 "너는 이 똥과 같은 놈이다"라고 조롱하고 떠났다.
5. 1. 일본 YMCA 사건
1911년 초봄, 일본 YMCA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한일 양국 교인간 친목을 표방하였으나 그 내막에는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게 하려는 정치적 흉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월남 선생 일행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명승고적을 두루 시찰하고 어느날 저녁, 총리대신이 베푸는 만찬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만찬회에는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대신이 참석했는데 만찬이 끝날 무렵, 총리대신이 가장 평범하고 서민적인 월남에게 소신을 듣기를 청하였다.[24] 이에 응한 월남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24]여러분! 日本人들은 日本이 가장 强한 나라 中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네들은 원하는 모든 것이 成事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하나의 强力한 王國이 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銘心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임금께서 怒하시게 되면 日本의 陸海軍은 눈깜짝하는 사이에 滅亡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日本 사람들이 이것을 銘心하여 그 임금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日本은 偉大한 國家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임금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임금이십니다.|여러분! 일본인들은 일본이 가장 강한 나라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네들은 원하는 모든 것이 성사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하나의 강력한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임금께서 노하시게 되면 일본의 육해군은 눈깜짝하는 사이에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이것을 명심하여 그 임금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일본은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임금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임금이십니다.일본어[24]
5. 2. 변정상 씨
1918년 무렵 YMCA 중학부에 재학 중이던 수주 변영로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지 않고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변정상(卞鼎常) 씨, 변정상 씨" 하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니 이상재가 그렇게 부르면서 따라오고 있었다.[20] 변영로는 불쾌하게 여기며 이상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20]변영로는 "선생님. 노망이 아니세요? 아버지와 아들을 분별하지 못하시니,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선생님의 친구이기로 노상에서[20] 이름을 부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25]"라며 항의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상재는 "이놈아. 그러면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 기백이 그만하면 됐다.[25]"고 하였다.
이는 변씨 가문의 씨답게 체통을 지켜야 하며, 한국인의 씨이니 씨알머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농담조로 가르친 것이다.[25]
5. 3. 기타
월탄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이상재에게 바쳤다.[2]어질고 굳센 기상 조찰코 깨끗한 정기
부귀도 임의 마음 흔들지 못했고
총칼도 임의 뜻을 빼앗지 못했네
해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들 청년의 길은 험악도 하였어라
모두다 헤맸네.
호걸은 망명하고 지도자는 없었네
이중에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었네
오오 당신은 이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었네|어질고 굳센 기상 조찰코 깨끗한 정기
부귀도 임의 마음 흔들지 못했고
총칼도 임의 뜻을 빼앗지 못했네
해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들 청년의 길은 험악도 하였어라
모두다 헤맸네.
호걸은 망명하고 지도자는 없었네
이중에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었네
오오 당신은 이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었네한국어
이상재는 과거에 낙방한 후, 1881년 박정양의 비서로 일본을 시찰하며 개화 사상에 접했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퇴했고, 정치적 지도자였던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 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외교에 개입하려던 청나라 사절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2]
1899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했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했고, 1919년 3·1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관련 인물로 지목되어 연행되었다. 이후 교육과 청년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개인적인 재산욕이 없어 셋방을 전전했다.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사후에는 일본 경찰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사회장이 치러졌으며,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2]
한국 병합 직후, 당사자였던 이완용 등에게 “병합이 된 지금, 당신들은 도쿄로 이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그 이유를 묻자 “당신들은 나라를 망칠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일본으로 이주해 준다면 일본도 망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2]
6. 이상재를 연기한 배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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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韓山 이씨
https://www.segye.co[...]
201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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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민족주의·사회주의 생각 달라도… '독립' 위해 뭉쳤죠
http://newsteacher.c[...]
朝鮮日報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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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충청시대:역사다큐 이상재 일대기
http://ccsidae.com/d[...]
201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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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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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계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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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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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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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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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1]
뉴스
(이규태 역사에세이) 앨리스-헐버트 이야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9-06-10
[12]
뉴스
개화창구 봉사 소비자.환경운동/YMCA 창립 90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3-10-14
[13]
간행물
무엇이 이 시대의 복음이고 선교인가:선교의 반성과 오늘의 방향성 모색
대한기독교서회
2005-09
[14]
뉴스
경향신문
1979-10-09
[15]
서적
이상재 평전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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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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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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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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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library.n[...]
199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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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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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장열전/①월남 이상재 선생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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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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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新太陽社
198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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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新太陽社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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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평전
범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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