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팜 덧
1. 개요
R. 팜 덧은 1896년 영국에서 태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저술가였다. 그는 영국 공산당(CPGB)의 창립 멤버였으며, 192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월간 잡지인 '노동 월간'을 창간하고 편집했다. 덧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으며,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CPGB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소련과 스탈린주의 노선을 옹호했으며, 파시즘과 사회 혁명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1946년에는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 공산당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그의 저작들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이름 | 라자니 팔메 덧 |
|---|---|
| 출생명 | 라자니 팔메 덧 |
| 출생일 | 1896년 6월 19일 |
| 출생지 | 케임브리지, 캠브리지셔 |
| 사망일 | 1974년 12월 20일 |
| 사망지 | 하이게이트, 런던 |
| 배우자 | 살메 아네테 무리크 (1922년 결혼, 1964년 사별) |
| 친척 | 올로프 팔메 (5촌 조카) |
| 직업 | 워커스 위클리 편집자 |
|---|
| 소속 정당 | 영국 공산당 |
|---|
| 직위 | 영국 공산당 사무총장 |
|---|---|
| 임기 시작 | 1939년 10월 |
| 임기 종료 | 1941년 6월 |
| 이전 | 해리 폴리트 |
| 이후 | 해리 폴리트 |
| 학교 | 더 퍼스 스쿨 |
|---|---|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볼리올 칼리지 |
| 아버지 | 우펜드라 덧 |
|---|---|
| 어머니 | 안나 팔메 |
-
영국의 당료 -
해리 폴릿 (정치인)
해리 폴릿은 영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로서 노동 운동에 헌신하고 러시아 혁명에 공감하여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내전 지지 등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소련에 거주한 영국인 -
토니 호어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 토니 호어는 퀵 정렬 알고리즘 개발, 호어 논리 연구, CSP 연구 등 프로그래밍 언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 기여하여 튜링상을 수상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교수이자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잉글랜드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 -
제임스 러브록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 가설을 제창하고 여러 과학 기기를 개발한 영국의 독립 과학자이자 발명가, 저술가로서, 환경 문제에 대한 독특한 견해로 주목받았다. -
잉글랜드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 -
프레더릭 생어
프레더릭 생어는 단백질과 DNA의 염기 서열 분석법을 개발하고 인슐린 아미노산 서열 규명과 DNA 염기 서열 분석법 개발에 기여하여 노벨 화학상을 두 번 수상한 영국의 생화학자이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본문 생략)
2.1. 출생 및 가족 배경
라자니 팜 덧은 1896년 영국 케임브리지의 밀 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출신의 외과 의사인 우펜드라 덧 박사였고, 어머니는 스웨덴 출신의 안나 팜이었다. 아버지 우펜드라 덧은 로메쉬 찬더 덧 가문 출신이었다. 어머니 안나 팜은 훗날 스웨덴 총리가 되는 울로프 팔메의 고모할머니였다.
라자니의 여동생 엘나 팜 덧은 통계학자로, 이후 제네바의 국제 노동 기구에서 일했다. 그는 형 클레멘스 팜 덧과 함께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덧은 케임브리지의 퍼스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볼리올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활동하여 잠시 정학을 당했으나, 이후 고전학에서 1등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글은 선동적인 선전물로 여겨졌다.
덧은 1922년 에스토니아 출신의 살메 무릭과 결혼했다. 그녀는 핀란드 작가 헬라 우올리요키의 여동생이었으며, 1920년 코민테른 대표로 영국에 파견된 인물이었다.
2.2. 교육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거부
덧은 케임브리지의 퍼스 스쿨과 볼리올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의 활동으로 인해 한동안 정학을 당한 후 고전학에서 1등 학위를 받았다. 그의 글은 당시 선동적인 선전으로 간주되었다.
3. 정치 경력
R. 팜 덧은 학창 시절인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영국 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사회주의 관련 회의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1919년 노동 연구 부서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노동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20년 해리 폴리트와 함께 영국 공산당(CPGB)을 창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21년에는 월간지 노동 월간(Labour Monthly)을 창간하여 사망할 때까지 편집을 맡았다. 같은 해 인도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1922년에는 당의 주간지 노동자 주간(Workers' Weekly)의 편집인이 되었다.
덧은 1923년부터 1965년까지 오랫동안 CPGB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의 핵심 이론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코민테른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1923년 처음 소련을 방문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논의에 참여했고, 1924년에는 ECCI 간부회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코민테른 대표로 벨기에, 스웨덴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인도 공산당의 활동을 지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팜 덧은 소련과 스탈린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를 놓고 당 사무총장 해리 폴리트와 의견 대립을 보였을 때, 요제프 스탈린의 입장을 옹호하며 폴리트의 일시적 사퇴를 이끌어냈고, 1941년까지 임시로 당 사무총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저서 파시즘과 사회 혁명은 파시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시즘을 폭력적 권위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비합리주의로 규정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도 덧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스탈린을 옹호했다. 그는 당내 강경파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지 않았고, 1970년대 유로공산주의 노선에도 반대했다. 당직에서는 물러났으나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당원으로 활동했다.
3.1. 영국 공산당 창립 및 초기 활동
R. 팜 덧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학창 시절부터 영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10월, 사회주의 관련 회의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1919년 좌파 성향의 통계 연구 기관인 노동 연구 부서에 합류하며 영국 노동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0년, 덧은 해리 폴리트와 함께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듬해인 1921년에는 월간지 노동 월간(Labour Monthly)을 창간하여 평생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인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당의 주간지인 노동자 주간(Workers' Weekly)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다.
덧은 1923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 공산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오랫동안 당의 핵심 이론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1923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영국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의 논의에 참여했다. 1924년에는 ECCI 간부회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건강 문제로 노동자 주간 편집장직에서 물러난 후, 덧은 코민테른 대표 자격으로 벨기에와 스웨덴에서 수년간 활동했다. 또한 인도 공산당의 활동을 지도하며 코민테른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팜 덧은 소련과 스탈린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1939년, 영국 공산당 사무총장이었던 해리 폴리트가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팜 덧은 요제프 스탈린의 입장을 옹호하며 폴리트의 일시적 사퇴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그는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당의 전쟁 관련 입장이 바뀔 때까지 임시로 당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의 저서 파시즘과 사회 혁명은 파시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을 담고 있으며,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즘이 부상한 배경을 탐구한다. 그는 파시즘을 폭력적 권위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비합리적 이념으로 규정하며 "파시즘은 자유주의 전통 내의 실질적인 모든 것과 정반대"라고 평가했다.
3.2. 코민테른과의 관계
덧은 1923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영국 운동과 관련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ECCI)의 심의에 참석했다. 그는 1924년 ECCI 간부회 대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질병으로 인해 노동자 주간의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덧은 코민테른의 대표로 벨기에와 스웨덴에서 몇 년을 보냈다. 그는 또한 인도 공산당을 몇 년 동안 감독함으로써 코민테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팜 덧은 소련과 스탈린주의 노선에 충실했다. 1939년 영국 공산당(CPGB) 사무총장 해리 폴리트가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팜 덧은 요제프 스탈린의 노선을 옹호했고 폴리트의 일시적인 사임을 강요했다. 그 결과, 그는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전쟁에 대한 당의 태도가 바뀌기 전인 1941년 폴리트가 재임명될 때까지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팜 덧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에 대한 반응으로 그 중요성을 축소했으며, 덧은 스탈린의 "태양"이 놀랍게도 몇몇 "얼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의 강경파인 그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 침공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고 1970년대에 점점 더 유로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했다. 역사학자 제프 앤드류스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은 1970년대에도 CPGB에 "연금"으로 연간 약 15를 지불했으며, 수령자 중에는 "라자니 팜 덧"이 포함되었다.
3.3. 스탈린주의 옹호
팜 덧은 소련과 스탈린주의 노선에 충실한 입장을 보였다. 1939년, 당시 영국 공산당(CPGB) 사무총장이었던 해리 폴리트가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팜 덧은 요제프 스탈린의 노선을 내세워 이를 반대했고, 결국 폴리트의 일시적인 사임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팜 덧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당의 전쟁에 대한 입장이 바뀔 때까지 당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이후 폴리트가 사무총장으로 복귀했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의 입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비밀 연설을 통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했을 때, 팜 덧은 스탈린의 "태양"에 몇몇 "얼룩"이 있을 뿐이라며 연설의 중요성을 축소하려 했다. 그는 당내 강경파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1970년대에는 점차 확산되던 유로공산주의 노선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역사학자 제프 앤드류스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은 1970년대에도 CPGB에 연간 약 15의 "연금"을 지급했으며, 팜 덧도 수령자 중 한 명이었다.
3.4. 파시즘 비판
팜 덧은 그의 저서 파시즘과 사회 혁명에서 파시즘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분석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독일,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파시즘이 어떻게 부상했는지 연구했다. 팜 덧은 파시즘을 폭력적인 권위주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초국가주의), 그리고 비합리적인 이론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파시즘은 자유주의 전통 내의 실질적인 모든 것과 정반대이다."라고 지적하며 파시즘의 반자유주의적 성격을 명확히 했다.
3.5. 탈스탈린화 이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비밀 연설을 통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자, 팜 덧은 스탈린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흐름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이라는 "태양"에 놀랍게도 몇몇 "얼룩"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기존의 평가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영국 공산당(CPGB) 내 강경파로서의 입장을 고수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하는 당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970년대에는 서유럽 공산당들 사이에서 확산되던 유로공산주의 노선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팜 덧은 당직에서는 물러났으나,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당원 자격을 유지했다. 역사학자 제프 앤드류스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은 1970년대에도 CPGB에 연간 약 15의 "연금"을 지급했는데, 라자니 팜 덧 역시 수령자 중 한 명이었다.
4. 인도 방문
1946년, 영국령 인도 정부는 R. 팜 덧이 1921년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조국인 인도를 방문하는 것을 허가했다. 당시 그는 데일리 워커의 특별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이 방문은 4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그 기간 동안 그는 인도 공산당이 주최한 여러 인도 도시의 집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또한 이 기간 동안 PC 조시를 비롯한 당의 여러 간부들과 당원들과 교류했다. 이 방문 동안 그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발라브바이 파텔, 무하마드 알리 진나 및 스태퍼드 크립스를 포함한 여러 중요한 인도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또한 신설된 전인도 라디오로부터 방송 초청을 받았다.
그의 방문은 인도 공산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56년에서 1958년 사이에 델리의 잔데왈란에 “인민 출판사(PPH)” 본부를 설립했을 때, RPD의 이름을 따서 그 건물을 “R. 팜 덧 바완(Bhawan은 건물을 의미)”이라고 명명했다. 그 건물의 2층 계단에는 1946년 인도 방문 중에 찍힌 RPD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최근까지 그곳에 걸려 있었다. 현재는 아마도 아조이 바완의 당 본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저작
| 연도 | 제목 | 비고 |
|---|---|---|
| 1920 | 유럽의 사보타주 | |
| 1920 | 두 개의 인터내셔널 | |
| 1921 | 플로티누스로의 복귀, 쇼의 메투셀라로의 귀환: 형이상학적 오경에 대한 비평 | |
| 1921 | 볼셰비키의 정신 분석, 콜나이의 정신 분석과 사회학에 대한 비평 | |
| 1922 | 간디의 종말 | |
| 1923 | 대영 제국 | |
| 1923 | 유럽의 쟁점 | |
| 1925 | 제국 사회주의 | (소책자) |
| 1926 | 총파업의 의미 | (소책자) |
| 1926 | 트로츠키와 그의 영국 비평가들 | |
| 1928 | 인도의 각성 | |
| 1931 | 인도 | |
| 1931 | 영국에서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 (소책자) |
| 1933 | 민주주의와 파시즘 | (소책자) |
| 1933 | 엥겔스의 "마르크스의 '프랑스 계급 투쟁'" 서문에 대한 위조에 관한 노트 | |
| 1934 | 파시즘과 사회 혁명 | |
| 1935 | 파시즘과 자본주의 쇠퇴의 문제 | |
| 1935 | 영국의 정책과 나치 독일 | |
| 1935 | 공개된 영국-독일 동맹 | |
| 1935 | 통일 공산당을 위하여: I.L.P 당원들과 모든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 | |
| 1936 | 샤푸르지 사클라트바라를 기억하며 | |
| 1936 | 인도 반제국주의 인민 전선 | 벤 브래들리와 공동 집필 |
| 1936 | 인도 좌익 민족주의 | |
| 1938 | 인도 국민 회의 전야에 | 해리 폴리트 및 벤 브래들리와 공동 집필 |
| 1938 | 미국 남북 전쟁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평 | |
| 1939 | 왜 이 전쟁인가? | (소책자) |
| 1940 | 영국 공산당 창당 20주년 | |
| 1940 | 오늘의 인도 | |
| 1947 | 1947년 2월 26일부터 3월 3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제국 공산당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선언 | |
| 1949 | 선거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보고서 | |
| 1953 | 스탈린과 미래 | |
| 1953 | 영국의 위기와 대영 제국 | (1957년 개정판) |
| 1955 | 오늘의 인도와 내일의 인도 | |
| 1963 | 현대사의 문제 | |
| 1964 | 인터내셔널 | |
| 1967 | 중국은 어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