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 인도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도인 차별에 맞서 싸웠다. 그는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투쟁을 시작했고, 1915년 인도로 돌아와 인도 국민회의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영국의 지배에 저항했으며, 소금 행진 등 굵직한 사건들을 주도하며 인도 독립에 기여했다. 그는 진리(사티아)와 비폭력(아힘사)을 강조하며 종교적 관용을 실천했지만, 카스트 제도에 대한 모순적인 입장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간디는 1948년 암살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비폭력 저항 정신은 인도뿐 아니라 세계 민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마하트마 간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마하트마 |
다른 이름 | 바푸 (아버지) 라슈트라피타 (국가의 아버지) |
출생 이름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
출생일 | 1869년 10월 2일 |
출생지 | 포르반다르, 포르반다르국, 카티아와르 에이전시, 영국령 인도 |
사망일 | 1948년 1월 30일 |
사망지 | 뉴델리, 인도 자치령 |
사망 원인 | 암살 |
기념물 | 라지 가트 간디 스므리티 |
알려진 업적 | 영국 통치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위한 운동 지도 비폭력 저항 |
국적 | 인도 제국 (1947년까지) 인도 자치령 (1947년부터) |
활동 기간 | 1893년–1948년 |
시대 | 영국령 인도 |
배우자 | 카스투르바이 간디 (1883년 결혼, 1944년 사망) |
자녀 | 하릴랄 마닐랄 람다스 데브다스 |
부모 | 카람찬드 간디 푸틀리바이 간디 |
친척 | 간디 가족 |
![]() |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인도 국민 회의 (1920년–1934년) |
대통령 | 인도 국민 회의 |
임기 시작 | 1924년 12월 |
임기 종료 | 1925년 4월 |
이전 | 아불 칼람 아자드 |
다음 | 사로지니 나이두 |
교육 | |
모교 | 사말다스 예술 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인스 오브 코트 법률 학교 |
2. 생애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영국령 인도의 포르반다르 주에서 태어나 라지코트에서 성장했다.[7][8] 바이샤 계급 출신으로,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5][6][10] 어린 시절 지역의 조혼 풍습에 따라 13세의 나이에 카스투르바 간디와 결혼했다.
학창 시절은 평범했으나, 이후 법학 공부를 위해 영국 런던으로 유학하여 이너 템플에서 배리스터 자격을 취득했다.[267] 런던 유학 중 신지학회 회원들과 교류하며 인도 철학과 힌두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얻고 인도로 돌아와 잠시 활동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 식민지로 건너가 인도계 상사의 법률 자문으로 일하며 변호사 활동을 이어갔다.[20] 그곳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극심한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인도인들의 권익 보호와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894년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여 인도인 사회를 조직하고 차별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힘썼다.
남아프리카 활동 시기, 간디는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신약 성서의 산상수훈 등 여러 사상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불복종(사티아그라하)이라는 독자적인 저항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6년 트란스발 식민지 정부의 아시아인 등록법에 반대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끈질긴 비폭력 저항은 결국 남아프리카 정부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약 21년간의 활동과 경험은 1915년 인도로 돌아와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 1. 생애 초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당시 영국령 인도의 카티아와르 에이전시에 속한 작은 토후국이었던 포르반다르 주의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 카람찬드 우탐찬드 간디(1822~1885)는 포르반다르 주의 수상(디완)을 지낸 인물이었다.[3][4] 어머니 푸틀리바이(1844~1891)는 프라나미 바이슈나바 가문 출신으로, 매우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5][6] 간디는 네 명의 자녀 중 막내였으며, 위로는 형 락슈미다스(Laxmidas, 1860년경~1914), 누나 랄리아트베헨(Raliatbehn, 1862~1960), 형 카르산다스(Karsandas, 1866년경~1913)가 있었다. 간디의 가문은 힌두교의 카스트 중 바이샤 계급인 모드 바니아 출신이었다.[10][11][13]간디는 부모에게서 자이나교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매일 기도를 거르지 않고 엄격한 서원을 지켰던 어머니 푸틀리바이의 깊은 신앙심은 어린 간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간디는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을 키워나갔다.
1876년, 아버지가 라지코트 주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8] 간디 가족은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간디는 어린 시절 활발했으며, 개 귀를 비트는 장난을 좋아했다고 누이 라리앗은 회상했다. 한편, 인도 고전인 샤라바나 쿠마라와 하리슈찬드라 왕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 이야기들이 자신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으며, 진리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9]

아홉 살 때 라지코트의 지역 학교에 입학하여 산술, 역사, 구자라트어, 지리 등을 배웠고, 열한 살에는 알프레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 간디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수줍음이 많고 말을 더듬어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과 수업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잠시 방황하여 힌두교 계율로 금지된 육식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하인의 돈을 훔치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주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1. 1. 결혼

간디는 7살 때 이미 약혼을 했으나, 약혼녀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 카스투르바이 고쿨다스 카파디아(Kasturbai Gokuldas Kapadia, 흔히 '카스투르바'로 불림)와 1883년 5월, 13세의 나이에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신부 카스투르바는 14세였으며, 이는 그 지역의 조혼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비용 절감과 체면 유지를 위해 간디의 형, 간디 본인, 그리고 사촌까지 세 쌍의 결혼식이 동시에 진행되었다.[267] 간디는 훗날 결혼식 당시에 대해 "우리는 결혼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저 새 옷을 입고, 과자를 먹고, 친척들과 노는 것을 의미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전통에 따라 어린 신부였던 카스투르바는 결혼 후에도 상당 기간 남편과 떨어져 친정에서 지냈다.[17]
결혼으로 인해 간디는 학교를 1년 동안 쉬어야 했지만, 나중에 학업 속도를 높여 이를 만회했다.[16] 간디는 어린 아내에게 느꼈던 성욕적인 감정과 질투심, 소유욕에 대해 훗날 후회하며 "학교에서도 나는 그녀를 생각하곤 했고, 해가 지고 우리가 만날 생각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고 적었다.
결혼 후 간디는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성욕을 자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정액이 생명력의 근원이며, 정액의 배출은 몸과 정신을 약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1885년 말, 간디의 아버지 카람찬드 우탐찬드 간디가 세상을 떠났다. 간디는 아버지가 임종하기 직전 아내와 함께 있기 위해 아버지 곁을 잠시 떠났는데, 이 일에 대해 평생 깊이 후회하며 "만약 동물적인 욕정이 나를 눈멀게 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 아버지와의 이별이라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18] 아버지의 죽음 직후, 16세의 간디와 17세의 아내 사이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으나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 두 번의 죽음은 간디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후 간디 부부는 네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이름 | 출생 연도 |
---|---|
하릴랄 | 1888년 |
마닐랄 | 1892년 |
람다스 | 1897년 |
데브다스 | 1900년 |
2. 2. 런던 유학
18세에 간디는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으로 가기 전, 보수적인 사람들의 해외 유학 반대에 부딪혔고, 이 때문에 뭄바이에서 카스트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했다.[267] 런던에서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이너 템플(Inner Temple) 법률학교에 초청받아 입학하여 배리스터(Barrister)가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했다.런던 유학 중이던 1888년, 간디는 신지학회 회원들을 만나는 중요한 경험을 했다. 신지학의 창시자 헬레나 P. 블라바츠키와 2대 회장 애니 베산트와의 만남을 통해 인도철학과 힌두교의 정신 및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까지 간디는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산스크리트어나 구자라트어로 읽어본 적이 없었으나, 신지학회 회원들을 통해 영어로 된 신지학회판 『바가바드 기타』를 접하면서 인도의 전통 사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서구를 통해 자국의 문화를 배우는 당시 식민지 엘리트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했으며, 간디가 힌두교와 인도 철학을 인도의 위대한 유산으로 재발견하는 데 신지학회가 큰 역할을 했다.
1891년 간디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 3.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활동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20] 이 시기 백인들에게 교통 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의 현실을 목격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나서기로 결심했다.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 식민지에 부임하여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그곳에서 백인 우위의 인종차별 정책 하에서 인도인들이 겪는 심각한 차별을 직접 경험했다. 영국 신사처럼 차려입었음에도 기차에서 쿨리(인부) 취급을 받으며 쫓겨나는 등 모욕적인 일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간디가 인도인들의 권익 보호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만들고,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며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신지학회와의 관계를 이어가며 힌두교와 인도 철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고, 이는 훗날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신약 성서의 산상수훈 등 예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불복종'(사티아그라하)이라는 독자적인 투쟁 방식을 구상하게 되었다.
1894년 6월, 1년간의 계약이 끝나갈 무렵, 간디는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정치 운동가로 변신하여 1894년 7월 나탈 식민지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비록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했지만, 이 활동을 통해 나탈, 영국, 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들이 겪는 차별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더반에 머물기로 결정한 간디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여 인도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국제 사회에 인도인 차별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힘썼다.

20세기 초,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는 인종차별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특히 1906년 트란스발 식민지 정부가 인도인 이민을 제한하고 신분 확인을 위해 지문 날인을 강제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간디는 이에 맞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08년 처음으로 체포되었고, 1913년에는 트란스발로 행진하는 시위를 기획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간디와 인도인들의 끈질긴 비폭력 저항은 결국 트란스발 정부의 양보를 이끌어내어 해당 법안을 철회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간디의 비폭력 투쟁이 거둔 첫 번째 중요한 승리였다.
간디는 더반 근교에 아슈람(공동체)을 세우고 금욕, 단식, 청빈, 순결 등을 실천하며 정신 수양에 힘썼다.[268]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이러한 경험과 투쟁 방식은 1915년 인도로 돌아간 후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끄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 인도 독립 운동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의 요청으로 C. F. 앤드루스를 통해 전달된 요청에 따라, 간디는 1915년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선도적인 인도 민족주의자이자 이론가, 지역 사회 조직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상태였다.
인도 귀국 후,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에 참여하여 고칼레로부터 인도의 현안, 정치, 국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고칼레는 절제와 온건함, 그리고 제도권 내에서의 활동을 중시하는 국민회의의 핵심 지도자였으며, 간디는 영국 휘그파 전통에 기반한 고칼레의 자유주의적 접근 방식을 수용하여 이를 인도적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에서도 시민 불복종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독립 운동 방식은 민중 봉기나 게릴라전이 아닌, 사티아그라하(सत्याग्रह|사티아그라하sa, 진리의 탐구)라는 독창적인 철학에 기반한 비폭력, 불복종이었다. 이 사상은 인도 독립의 핵심 동력이 되었으며, 영국 제국이 영국 연방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평화주의적 투쟁 방식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과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달라이 라마 14세 등이 간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264]
1920년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간디는 독립 요구의 수위를 점차 높여, 1930년 1월 26일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이끌었다. 영국은 이를 즉각 인정하지 않았지만, 협상을 통해 1930년대 후반에는 국민회의가 주 정부에서 일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총독이 인도 지도자들과의 협의 없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선언하자 간디와 국민회의는 영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942년 간디는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했고, 이에 영국은 간디를 포함한 수만 명의 국민회의 지도자들을 투옥하며 탄압했다.
한편, 무슬림 연맹은 영국과 협력하며 간디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이라는 별도의 이슬람 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아시아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침공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 등 일부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인도국민군을 조직하여 영국에 대항하려 했으나, 인도 내에 머물던 간디는 이러한 군사적 움직임과 연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디는 1939년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했으며,[273] 1942년에는 "모든 일본인에게"라는 성명을 통해 일본의 패권주의적 행태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동맹에 의문을 제기하며 폭력 중단을 호소했다.[273]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인도국민군 출신 장교들에 대한 영국 식민 정부의 '반역죄' 재판은 인도 국민들의 독립 의지를 다시 한번 불태웠다. 간디는 "인도를 위해 싸운 그들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결국 영국은 더 이상 인도를 식민지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독립을 승인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독립을 맞이했지만, 간디의 염원과는 달리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분할 독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274] 간디는 이 분할안을 끝내 승인하지 않았으며, 독립 과정에서 발생한 종교 간 폭력과 갈등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는 독립 후 영국 연방 내 자치령으로 출발하여 1950년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3. 1. 귀국과 초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인도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노동 운동과 민족 해방 독립 운동에 참여하며 인도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초기 몇 년간(1915년-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며 전면적인 정치 활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경험은 그를 본격적인 독립 운동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의 인도 내 첫 주요 활동은 1917년 비하르주 참파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인 농장주들은 현지 농민들에게 식량 작물 대신 쪽 재배를 강요하고 헐값에 수매하고 있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사티아그라하) 원칙에 따라 농민들의 편에 서서 투쟁을 이끌었고, 결국 영국 당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는 구자라트주의 케다 지역이 홍수와 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자, 농민들의 세금 감면 요구 운동을 지원했다. 간디는 발라브바이 파텔과 같은 동료들과 함께 나디아드에 본부를 두고 비협조 운동을 조직했다. 농민들은 토지 몰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세무 공무원에 대한 사회적 불매 운동도 벌였다. 5개월간의 끈질긴 저항 끝에 영국 식민 정부는 세금 납부 조건을 완화하고 수감자들을 석방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전쟁 중 지원을 약속하며 내걸었던 인도의 자치권 부여 약속을 저버렸다. 오히려 1919년에는 반영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탄압하기 위해 재판 없이 인도인을 체포, 투옥할 수 있도록 하는 롤래트 법을 제정했다. 이에 간디는 "우리는 빵을 구했지만 돌을 받았다"고 영국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며 본격적인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선언했다.
그는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 불매, 납세 거부, 공직 사퇴 등을 통해 영국 통치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특히 영국산 면제품 대신 카디(인도 전통 면직물)를 직접 만들어 입자는 운동은 차르카(물레)를 돌리는 간디의 모습과 함께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269]
1919년 봄,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 선언과 함께 인도 전역에서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펀자브주 암리차르에서 열린 평화 집회에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수백 명의 비무장 인도인이 학살당하는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참사는 인도 민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2. 비협력 운동과 투옥
간디는 자신의 저서 『힌두스와라지』(1909)에서 영국 통치가 인도인들의 협조로 수립되었고, 이 협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인도인들이 협조를 거부하면 영국 통치는 무너지고 스와라지(인도 독립)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4][69]
1919년 2월, 간디는 영국이 로울랫 법(Rowlatt Act)을 통과시키면 인도인들에게 시민 불복종을 시작하라고 호소할 것이라고 영국 인도 부왕에게 전보로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로울랫 법에 항의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30일, 영국 법무관들은 델리에서 사티아그라하에 참여하며 평화롭게 모인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사람들은 보복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1919년 4월 6일, 힌두교 축제일에 간디는 군중에게 영국인을 해치거나 죽이지 말고, 평화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영국 제품을 불매하고 소유한 영국 의류를 태우라고 요청했다. 그는 상대방이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비폭력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인도 전역의 공동체들이 항의 시위를 계획하자, 정부는 간디에게 델리 진입 금지를 경고했지만, 간디는 이를 무시했고 4월 9일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3일, 암리트사르의 한 공원에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영국 인도군 장교 레지널드 다이어는 군중을 포위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시크교도와 힌두교도 민간인이 사망한 잘리안왈라바그 학살(암리트사르 학살)은 인도 전역에 큰 분노를 일으켰으나, 일부 영국인과 영국 언론은 이를 필요한 조치였다고 옹호했다. 학살 다음 날 아메다바드에 있던 간디는 영국을 직접 비판하기보다, 영국 정부의 '증오'에 '사랑'으로 맞서지 못한 동포들을 비판했다. 그는 인도 국민에게 모든 폭력과 재산 파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폭동을 막기 위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70]
학살과 영국의 미온적인 대응은 간디로 하여금 인도인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고, 그는 스와라지(인도의 정치적 독립) 달성에 집중하게 되었다.[71] 1921년,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국민회의를 재편성했고, 터키의 칼리프 복위를 위한 킬라파트 운동(Khilafat movement)을 지지하며 무슬림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이를 통해 간디는 영국 인도 정부로부터 상당한 정치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62][59]

간디는 비폭력 비협력 운동의 범위를 스와데시 운동(Swadeshi movement), 즉 외국산 제품, 특히 영국산 제품 불매운동으로 확장했다. 그는 모든 인도인이 영국산 직물 대신 카디(khadi, 수공예 직물)를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부유하든 가난하든 남녀 모두 독립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매일 카디를 짜는 시간을 보내라고 촉구했다. 영국 제품 불매 외에도 간디는 영국 교육 기관과 법원 불매, 정부 공직 사퇴, 영국 정부가 수여한 작위와 훈장 포기 등을 촉구하며 영국 인도 정부를 경제적, 정치적, 행정적으로 마비시키려 했다.
"비협조" 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인도 사회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1922년 3월 10일, 간디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6년형을 선고받아 3월 18일부터 복역을 시작했다. 간디가 수감되자 인도 국민회의는 두 파벌로 나뉘었다. 치타 란잔 다스와 모틸랄 네루가 이끄는 파벌은 입법부 참여를 주장했고,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팔라차리와 발라브바이 파텔이 이끄는 파벌은 이에 반대했다. 또한, 터키에서 아타튀르크가 집권하면서 킬라파트 운동이 힘을 잃자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협력도 약화되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국민회의를 떠나 별도의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간디는 맹장염 수술을 위해 2년 만인 1924년 2월에 석방되었다.[72][73]
3. 3. 소금 행진
1924년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조기 출소한 후, 간디는 1920년대 후반에도 '스와라지'(자치)를 추구했다. 그는 1928년 12월 캘커타에서 열린 인도국민회의에서 영국 정부에 인도의 독립국 지위 부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만약 영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비협조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59]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군의 참전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칼리프제 유지를 목표로 한 힐라파트 운동이 실패하면서 무슬림들의 지지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바갓 싱과 같은 인물들은 간디의 비폭력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59] 많은 힌두 지도자들이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했지만, 간디는 자신의 요구 기한을 2년에서 1년으로 수정했다.
영국은 간디의 제안에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버켄헤드 경과 윈스턴 처칠과 같은 영국 정치 지도자들은 인도의 요구에 동정적인 유럽 외교관들과의 논의에서 간디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1929년 12월 31일, 라호르에서 인도 국기가 게양되었고, 간디는 1930년 1월 26일 라호르에서 인도 독립 기념일을 기념하는 인도국민회의를 이끌었다. 이 날은 거의 모든 다른 인도 단체에 의해 기념되었다.
간디는 1930년 3월 영국의 소금세에 대한 새로운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 운동)를 시작했다. 그는 3월 2일 인도 총독인 어윈 경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최후통첩에서 영국 통치를 "저주"라고 비난하며, "점진적인 착취 체제와 파괴적으로 비싼 군사 및 민정 행정을 통해 침묵하는 수백만 명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우리를 농노로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간디는 또한 이 편지에서 총독이 "인도의 평균 소득의 5천 배가 넘는" 봉급을 받는다고 언급하며 비폭력적인 저항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고수를 강조했다.[74]
이는 3월 12일부터 4월 6일까지 단디로 이어진 소금 행진으로 구체화되었다. 간디는 78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아메다바드에서 구자라트주 단디까지 388km를 행진하여 소금법을 위반할 명백한 의도로 직접 소금을 만들었다. 이 행진은 25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간디는 도중에 종종 거대한 군중에게 연설했다.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그와 함께 단디에 합류했다.
간디는 소금세 캠페인과 외국 제품 불매 운동에 여성들을 참여시켰고,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인도 공공 생활의 주류에서 새로운 자신감과 존엄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간디가 여성들이 정치적 방패로 이용된다는 비난을 받을까 우려하여 처음에는 여성들의 참여를 금지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77] 여성들이 운동 참여와 공개 시위를 고집하자, 간디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보호자의 허락을 받고, 아이 돌봄을 준비할 수 있는 여성들만 함께해야 한다고 요청했다.[75] 간디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인도 여성들이 영국의 소금세와 소금 채굴 독점에 맞서 소금 행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0년 5월 5일, 간디는 계획했던 시위를 앞두고 1827년 제정된 규정에 따라 구금되었다. 5월 21일 다라사나 소금 공장에서의 시위는 간디 없이 진행되었다. 현장에 있던 미국 언론인 웹 밀러는 영국의 폭력적인 대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간디 추종자들은 다가가 성채로부터 100야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선발대가 군중에서 나와 도랑을 건너 가시철조망 성채에 접근했다… 명령에 따라 수십 명의 인도 경찰이 다가오는 행진자들에게 달려들어 강철 샷이 박힌 라티(긴 대나무 막대기)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 행진자 중 단 한 명도 타격을 막기 위해 팔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핀볼처럼 쓰러졌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나는 보호받지 못한 두개골에 곤봉이 부딪히는 역겨운 소리를 들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정신을 잃거나 두개골이 골절되거나 어깨가 부러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76]
이러한 폭력 진압은 300명 이상의 시위대가 구타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으며 두 명이 사망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간디가 체포된 후에도 여성들은 스스로 가게에 행진하고 피켓 시위를 벌였으며, 간디가 고취한 방식대로 영국 당국의 폭력과 언어적 학대를 감내했다.[77]
이 운동은 간디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에 도전한 가장 성공적인 운동 중 하나였으며, 영국은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투옥하며 대응했다.[78] 인도국민회의는 투옥된 사람의 수를 9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여기에는 간디의 주요 동지 중 한 명인 자와할랄 네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어윈 경을 대표로 내세워 간디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간디-어윈 협정은 1931년 3월에 체결되었고, 영국 정부는 시민 불복종 운동 중단을 대가로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협정에 따라 간디는 런던에서 열리는 원탁회의에 인도 국민회의의 유일한 대표로 참석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러나 이 회의는 간디와 민족주의자들에게 실망스러웠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논의하기를 기대했지만, 영국 측은 권력 이양보다는 인도의 군주들과 소수 민족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윈 경의 후임인 윌링던 경은 독립 국가로서의 인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통제하고 진압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작했다. 간디는 다시 체포되었고, 정부는 그를 추종자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켜 영향력을 무력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영국에서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으나 후에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이 간디의 계획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반대했다. 처칠은 간디를 자주 조롱했는데, 1931년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이 널리 보도되었다.
:중간 사원의 선동적인 변호사인 간디 씨가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행자처럼 나체에 가까운 차림으로 부왕궁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왕 황제의 대표와 동등한 조건으로 담판을 짓는 것을 보니 놀랍고도 메스껍다.
처칠의 간디에 대한 적개심은 1930년대 내내 커졌다. 그는 간디를 "목표가 선동적인" 인물, "힌두 무솔리니"라고 부르며, 인종 전쟁을 선동하고 라지(Raj)를 브라만 추종자들로 대체하려 하며, 인도 대중의 무지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이득을 취한다고 비난했다. 처칠은 간디를 고립시키려 했고, 그의 비판은 유럽과 미국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이는 처칠에게 일부 지지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유럽인들 사이에서 간디에 대한 지지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인 스스로가 평화주의와 잘못된 양심 때문에 포기할 것"이라는 처칠의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3. 4. 제2차 세계 대전과 인도 독립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전쟁 노력에 동참하는 것을 반대했다. 인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88] 그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판하면서도 영국의 전쟁 수행 지원은 거부했다.
전쟁 중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고 인도 국경에 접근하자, 영국은 1942년 인도를 영국 연방 내 자치령으로 인정하겠다는 크립스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간디는 이를 거부하고 독립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같은 해 8월, 간디는 뭄바이에서 열린 인도 국민회의 총회 연설을 통해 영국에게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인도를 떠나라 운동'(Quit India Movement)을 선언했다. 이는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운동이었다. 간디는 인도 국민들에게 영국 정부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것을 촉구하며, "카로 야 마로"(하라 또는 죽어라)라는 구호 아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독려했다.[92] 한편, 수바스 찬드라 보스 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인도국민군을 조직해 무력 투쟁을 시도했으나, 간디는 이들과 연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비판했다.[273]

영국 정부는 '인도를 떠나라' 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간디를 비롯한 인도 국민회의 지도부 대부분을 체포했다.[89] 이 과정에서 영국 경찰과 군대의 발포로 1,000명 이상의 인도인이 사망했으며,[86] 인도 전역에서 격렬한 저항이 발생했다. 간디는 푸네의 아가 칸 궁전에 2년간 감금되었고, 이 기간 동안 비서 마하데브 데사이와 부인 카스투르바 간디를 잃었으며 자신도 심각한 말라리아를 앓았다. 영국 정부는 간디가 감옥에서 사망할 경우 초래될 파장을 우려하여 1944년 5월 6일 그를 석방했다.

간디가 석방될 무렵, 인도의 정치 지형은 변화해 있었다. 특히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파키스탄 분리 독립 요구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간디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공존하는 통일 인도를 염원하며 종교에 따른 분할에 강력히 반대했다.[93] 그는 1944년 진나와 만나 통합 독립 방안을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93][94]

무슬림 연맹이 1946년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선포하면서[97][98] 캘커타를 시작으로 인도 전역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대규모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간디는 폭동 지역을 직접 방문하며 폭력 중단과 종교 간 화합을 호소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력이 쇠퇴한 영국은 더 이상 인도를 식민지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전후 인도국민군 장교 재판 등으로 독립 운동이 다시 거세지자 영국은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결정했다. 그러나 간디의 바람과 달리, 영국은 진나의 요구를 수용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하여 독립시키는 안을 최종 확정했다. 간디는 이 분할안을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을 맞이했지만, 분할 과정에서 발생한 종교 폭동으로 최소 50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천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겪었다.[99] 간디는 독립 기념일에도 캘커타에 머물며 단식을 통해 폭력 중단과 평화를 호소했다. 그의 노력은 격렬했던 종교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00][101][102][103][104][105][106][107]
4. 암살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했지만, 이 과정에서 힌두교 지역은 인도로, 이슬람교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나뉘는 민족 분열이 발생했다. 이 분열은 극심한 종교 갈등으로 이어져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간디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평화 노력은 일부 극단적인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행위로 비춰졌고, 결국 비극적인 암살로 이어졌다.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17분, 간디는 뉴델리의 비르라 저택(현재 간디 스미티) 정원에서 열리는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다.[108][109] 이때 힌두 마하사바 및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바크 산그(RSS)와 연관된[115][109][116] 힌두교 민족주의자 나투람 고드세가 가까운 거리에서 권총으로 간디의 가슴에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108][109] 당시 간디의 나이는 78세였다. 간디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는데, 일부는 그가 즉사했다고 전하는 반면,[110][111] 다른 기록에서는 비르라 저택의 침실로 옮겨진 후 약 30분 뒤, 가족들이 힌두교 경전을 낭송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112][113][100]
자와할랄 네루 당시 수상은 전인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 삶의 빛이 사라졌고, 어디에도 어둠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푸라고 불렀던, 국부인 우리의 사랑하는 지도자께서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지 않습니다."라고 발표하며 깊은 슬픔을 표했다.[114] 간디의 죽음은 인도 전역을 큰 슬픔에 잠기게 했다.[113][100]
간디의 장례 행렬은 암살 장소인 비르라 저택에서 라지가트까지 약 8km에 달했으며, 백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행렬에 직접 참여했고 또 다른 백만 명의 시민들이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5시간 이상 이어진 장례 행렬에서 그의 시신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게 개조된 무기 운반 차량에 안치되었으며, 차량은 엔진 대신 50명씩 조를 이룬 사람들이 밧줄로 끌었다.[124] 1948년 1월 31일, 간디는 힌두교 전통에 따라 라지가트에서 화장되었다. 화장식에는 자와할랄 네루, 루이 및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부부, 마울라나 아자드 등 인도의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했으며, 그의 아들 데브다스 간디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125]
간디의 유골은 항아리에 담겨 인도 전역의 추모식 장소로 보내졌다.[126] 대부분의 유골은 1948년 2월 12일 알라하바드의 상감(Sangam at Allahabad)에 뿌려졌지만, 일부는 다른 곳에 보관되거나 나중에 뿌려졌다. 예를 들어, 1997년과 2008년에는 은행 금고 등에서 발견된 유골이 각각 알라하바드와 기르가움 차우파티(Girgaum Chowpatty)에 뿌려졌으며, 우간다 나일강 발원지,[129] 푸네(Pune)의 아가 칸 궁전 (간디가 수감되었던 곳),[127][128]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셀프-리얼라이제이션 펠로우십 레이크 신전(Self-Realization Fellowship Lake Shrine) 등에도 그의 유골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129]
간디가 암살당한 장소인 비르라 저택 부지는 현재 간디 스미티라는 이름의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가 화장된 야무나 강변의 라지가트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130] 이 추모비에는 간디가 총에 맞은 후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알려진 "हे ! राम|헤 람hi"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131]
암살범 나투람 고드세는 범행 직후 현장에서 도주하지 않고 체포되었으며, 다른 공모자들도 곧이어 붙잡혔다. 주요 피고인은 나투람 비나야크 고드세, 나라얀 아프테, 비나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 샹카르 키스타야, 다타트라야 파르추레, 비슈누 카르카레, 마단랄 파와, 고팔 고드세 (나투람 고드세의 형제) 등이었다.[100][119][117][118][119][100][120][121] 재판은 1948년 5월 27일에 시작되어 약 8개월간 진행되었고, 1949년 2월 10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검찰 측은 149명의 증인을 내세웠으나 변호인 측은 증인을 부르지 않았다. 법원은 사바르카르에게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다른 피고인들에게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나투람 고드세와 나라얀 아프테는 살인 및 음모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집행되었고,[122] 고팔 고드세를 포함한 나머지 6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23]
5. 사상과 신념
간디의 사상과 신념은 그의 삶과 정치 활동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종교 사상의 핵심은 아힘사(Ahimsa, 비폭력 또는 무상해)였으며, 그는 인류애에 기반한 폭력 부정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 믿고 이를 정치 활동에 실천했다.[320] 그는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을 통해 속죄했으며, 정액을 생명력의 근원으로 여겨 배출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젊은 시절 친구의 권유로 영국처럼 강해지기 위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으나,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진리(사티아, Satya)를 탐구하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의 자서전 제목이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 이야기''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처음에는 "신은 진리이다"로 요약했지만, 나중에는 "진리가 신이다"로 바꾸며 진리 자체를 궁극적인 가치로 여겼다. 이러한 진리 추구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 파지)라는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으며, 그의 비폭력주의는 인도 내부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이후 인도의 독립 투쟁을 이끌면서 그는 인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이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 칭호를 부담스러워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마하트마 간디'''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9년 미국 뉴욕 타임스는 지난 천 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하기도 했다.[321]뉴욕타임스 1999년 4월 18일자 "Best Revolution; The Peacemaker"
간디의 사상은 자이나교의 다섯 가지 서약과 힌두교 요가 철학의 원칙, 즉 ''사티야(진실)'', ''아힘사(비폭력)'', ''브라마차리아(금욕)'', ''아스테야(절도하지 않음)'', ''아파리그라하(비애착)''에 깊이 기반을 두었다.[132] 그는 이러한 원칙들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32] 또한 인도의 오랜 관습인 카스트 제도의 타파와 불가촉천민(달리트) 해방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는 태도는 사회악에 대한 그의 저항 정신과 정치 활동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320] 그의 첫 주요 성과 중 하나는 1917년 비하르주 참파란에서 영국 농장주들의 착취에 맞서 현지 농민들을 도운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5. 1. 진리 (사티아)
간디는 자신의 삶을 무엇보다도 사티아(Satya, 진리) 탐구라는 목적에 바쳤다. 그는 자신의 실패와 자신을 이용한 실험 등을 통해 배우는 과정에서 이 목적의 달성을 시도했다. 실제로 그는 자서전에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간디는 가장 중요한 싸움은 자신의 악마, 두려움,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38] 간디는 처음에 "신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요약했지만, 나중에는 "진리가 신이다"라는 말로 바꾸었다.[138] 따라서 간디 철학에서 사티아(진리)는 "신"이다.[138] 글린 리차즈(Glyn Richards)에 따르면, 간디는 "신"이라는 용어를 별개의 힘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아드바이타 베단타 전통의 존재(브라흐만, 아트만)로, 모든 것, 각 개인과 모든 생명에 스며드는 비이원적인 보편성으로 묘사했다.[137] 니콜라스 기어(Nicholas Gier)에 따르면, 이것은 간디에게 신과 인간의 통일성, 모든 존재가 동일한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평등하다는 것, 아트만(atman)이 존재하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과 동일하다는 것, 아힘사(비폭력)는 이 아트만의 본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139]

간디는 평생을 사티아(Satya, 진리)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데 헌신했으며, 자신의 운동을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고 불렀는데, 이는 "진리에 대한 호소, 진리에 대한 주장, 또는 진리에 대한 의존"을 의미한다.[134] 사티아그라하가 정치 운동 및 원칙으로 처음 공식화된 것은 1920년으로, 간디는 그해 9월 인도 국민회의 회의에서 "비협조 결의안"으로 제출했다. 데니스 달튼(Dennis Dalton)에 따르면, 바로 이 사티아그라하의 공식화와 그러한 행보가 그의 국민들의 신념과 문화에 깊이 공명하여 대중 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하였고, 그를 마하트마(Mahatma)로 급속히 변모시켰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를 베단타 이상의 자기실현, 아힘사(비폭력), 채식주의, 그리고 보편적 사랑에 기반을 두었다. 윌리엄 보먼(William Borman)은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핵심이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경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인디라 카(Indira Carr)에 따르면, 간디의 아힘사와 사티아그라하에 대한 생각은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철학적 기반에 기초하고 있다.[135] I. 브루스 왓슨(I. Bruce Watson)은 이러한 생각들 중 일부가 힌두교 내의 전통뿐만 아니라 자이나교 또는 불교에서도, 특히 비폭력, 채식주의, 보편적 사랑에 대한 것들이 발견되지만, 간디의 종합은 이러한 생각들을 정치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36] 글린 리차즈는 시민 운동으로서의 사티아(satya) 개념은 힌두교 용어인 다르마(Dharma)와 르타(Ṛta)의 맥락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고 말한다.[137]

사티아그라하의 본질은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영혼의 힘"으로, 억압자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억압자와 피압자 사이의 적대감을 없애고, 억압자를 변화시키거나 "정화"하려는 것이다. 아서 허먼(Arthur Herman)에 따르면, 이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단호한 수동적 저항과 비협조로, "사랑이 증오를 정복한다"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에 대해 때때로 사용되는 완곡어는 "침묵의 힘" 또는 "영혼의 힘"(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그의 "꿈이 있는 연설"에서도 사용한 용어)이다. 그것은 개인에게 육체적 힘이 아닌 도덕적 힘을 부여한다. 사티아그라하는 또한 "보편적 힘"으로 여겨지는데, 본질적으로 "친척과 낯선 사람, 젊은이와 노인, 남성과 여성,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는다."[142][143][144]
간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급함, 야만성, 무례함, 과도한 압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을 기르려면, 불관용을 감당할 여유가 없다. 불관용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다."[145] 사티아그라하에 따라 행해지는 시민 불복종과 비협조는 "고통의 법칙"[146], 즉 "고통의 인내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교리에 기반한다. 이러한 목적은 일반적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도덕적 향상 또는 진보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에서 비협조는 사실 진리와 정의에 따라 상대방의 협조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147]
간디의 사티아그라하가 정치적 수단으로 인도인들에게 널리 퍼진 지지자들을 끌어들였지만, 그 지지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진나와 같은 무슬림 지도자들은 사티아그라하에 반대하고, 간디가 정치 활동을 통해 힌두교를 부활시키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무슬림 민족주의와 무슬림 고국 요구를 통해 간디에 맞서기 시작했다.[148][149][150] 1945년 6월 불교로 개종하기로 결정한 후 현대 인도의 첫 번째 법무부 장관이 된 불가촉천민 지도자 암베드카르(B. R. Ambedkar)는 간디의 생각을 "맹목적인 힌두교 신자들"이 좋아하는 원시적인 것으로,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허술한 혼합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일축하며, "항상 그러한 것을 설교하는 단순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151][152]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간디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교활한 장사꾼", "야망 있는 독재자", "이교도 힌두교의 퇴행적인 대변인"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처칠은 간디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광경이 "그곳영국령 인도에 있는 백인들이 처한 위험을 증가시켰다"고 말했다.
5. 2. 비폭력 (아힘사)
간디의 종교 사상과 정치 활동의 근본은 아힘사(비폭력 또는 무상해)였다. 그는 인류애에 기반한 폭력 부정이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하고 이를 정치 활동에 그대로 적용했다.[320] 간디는 비폭력주의의 창시자는 아니었지만, 정치 영역에서 이를 대규모로 적용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받는다.[153][154] 아힘사는 인도 종교 사상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개념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행동, 말, 생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다르마(윤리적 가치/덕목)로 여긴다.[155]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 『자서전: 진리의 실험』에서 비폭력에 대한 철학과 사상을 자세히 설명했다.[156][157][158]간디는 일생 동안 정치적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으며, 그의 비폭력주의는 인도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이후 인도의 독립 투쟁을 이끌면서 그는 인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 칭호를 부담스러워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마하트마 간디'''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9년 미국 뉴욕 타임스는 지난 천 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하기도 했다.[321]

간디는 비폭력 저항을 사티아그라하(진리 추구 또는 진리 고수)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히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을 넘어, 진리를 굳게 지키며 불의에 맞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했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정부가 인도의 자치 약속을 어기고 롤랫 법을 통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를 선언하며 이에 맞섰다. 롤랫 법은 재판 없이 예방적 구금과 투옥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었다. 간디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협력이 영국에 맞서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힐라파트 운동을 지지하며 종교 간 화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간디는 비폭력이 "폭력보다 무한히 우월하다"고 믿었지만, 비겁함보다는 차라리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159][160] 그는 "인도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비겁하게 자신의 불명예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보다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160] 그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인도 독립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영국의 식민 통치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영국의 부당한 소금 독점과 세금에 항의한 소금 행진(1930년)은 비폭력 저항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간디가 제시한 비폭력 운동은 참여자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인내를 요구했다.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려는 세력에 맞서 반격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진정한 강인함과 내면의 극복을 필요로 하는 길이었다. 간디는 "비폭력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의 겁과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간디는 비폭력 사상이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가르침과 통한다고 보았으며, 종교 간의 대화와 이해를 촉구했다.[270] 그의 비폭력 사상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달라이 라마 14세 등 전 세계의 많은 인권 운동가와 평화 운동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264] 간디는 자신의 삶 전체를 진리(Satya) 탐구에 바쳤으며, 처음에는 "신은 진리이다"라고 표현했지만 나중에는 "진리는 신이다"라고 말하며 진리 자체를 궁극적인 가치로 삼았다. 비폭력은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5. 3. 종교관
간디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로, 인류애에 기반한 폭력 부정을 의미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정치 활동에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다.[320] 그는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을 통해 속죄했으며, 인도의 오랜 관습인 카스트 제도의 타파와 불가촉천민 해방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는 태도는 사회악에 대한 그의 저항 정신과 정치 활동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320]간디는 힌두교 신자였지만, 종교적으로 매우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의 친구 중 감리교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가 기독교가 민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묻자,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322]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 제도를 옹호하는 힐라파트 운동을 활용하여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무슬림들의 정치적 협력을 얻고자 했다.[59] 당시 인도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터키의 칼리프를 이슬람 공동체(우마)의 연대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간디의 힐라파트 운동 지지는 초기에 무슬림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내며 종교 간 화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63]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포함한 일부 힌두교 지도자들은 터키 칼리프 지지에 반대하며 간디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힐라파트 운동은 1922년 간디의 체포와 함께 동력을 잃고 붕괴되었고, 이후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파 갈등이 다시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66][67][68]
카스트 제도에 대한 간디의 입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카스트 제도를 직업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며 '힌두교의 근본적인 제도'[285]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그는 카스트가 인간 본성이며 힌두교도들이 이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했다고 보았고,[286] 같은 카스트 내 결혼 제한 역시 '자기 억제를 심화시키는 훌륭한 방법'[287]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스트에 따른 사회적 차별에는 명확히 반대했으며, 이는 불가촉천민 출신 지도자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의 의견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후에 간디는 카스트 제도와 바르나(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4가지 사회 계층)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르나를 부모의 직업을 따르는 유전적 경향[287]으로 보면서도, 바르나 계층 간에는 상하 관계 없이 평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87] 반면, 바르나를 더욱 세분화하는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는 '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원을 알 수 없는 관습에 불과하다'[287]고 비판하며 『카스트는 사라져라』라는 소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간디의 영성은 자이나교의 다섯 가지 서약과 힌두교 요가 철학, 즉 사티야(진실), 아힘사(비폭력), 브라마차리아(금욕), 아스테야(불투도, 훔치지 않음), 아파리그라하(무소유, 비애착)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132] 그는 36세부터 금욕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의 종교적 신념은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저서 『힌드 스와라지』에서 철도, 변호사, 서양 의학 등이 인도를 빈곤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의 자제력과 자립심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293][294]
5. 4. 카스트 제도에 대한 입장
간디는 카스트 제도를 직업 분담이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제도 자체의 폐지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카스트 제도를 "힌두교의 근본적인 제도"[285]라고 옹호하며 "카스트는 인간의 본성이며, 힌두교도들은 그것을 '과학'으로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286] 또한 같은 카스트 내에서만 결혼하는 제한에 대해서도 "자기 억제를 심화시키는 훌륭한 방법"[287]이라고 평가했다. 간디는 카스트 제도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평등하다"[287]는 입장이었다.[288]그러나 간디는 카스트 제도 자체는 용인하면서도, 카스트에 따른 사회적 차별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인도 사회의 오랜 악습이었던 불가촉천민 제도 타파를 위해 노력하고 그들의 해방을 실천하고자 했다.[320] 이러한 간디의 입장은 당시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도 불교 개혁 운동의 지도자였던 B.R. 암베드카르와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디는 자신의 입장에 내재된 모순을 인식하고, 카스트 제도와 바르나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힌두교도를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층으로 나누는 바르나의 법칙을 사람이 부모를 닮는 것과 같은 "유전 문제"[287]로 보았다. 또한 바르나에 따라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는 것이 "정신적인 목적을 위해 전념하는 시간을 늘려"[287]주므로, "행복과 깊은 종교 생활을 위한 최고의 보장"[289]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간디가 바르나를 "신의 창조물 전체에서 절대 평등의 법칙"[287]으로 이해했으며, 바르나 계층 간에는 어떠한 상하 관계도 없이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결국 간디는 바르나를 세분화하는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는 "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원을 알 수 없는 관습에 불과하다"[287]는 입장으로 선회했으며, 후일 『카스트는 사라져라』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카스트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5. 5. 기타
간디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비폭력)였고, 인류애에 기반한 폭력 부정을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다.[320] 그는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했으며, 때로는 금식을 통해 속죄했다.[320]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 대한 철저한 반항은 그의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320] 그의 비폭력주의는 인도 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하였다.[321][https://www.nytimes.com/1999/04/18/magazine/best-revolution-the-peacemaker.html 뉴욕타임스 1999년 4월 18일자 "Best Revolution; The Peacemaker"]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이후, 간디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이러한 명예를 좋아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인도 국민회의는 텔루구어로 된 연극을 제작하여 간디를 메시아나 고대 및 중세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 성인들의 환생으로 묘사하며 안드라프라데시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활동은 간디를 민중 영웅이자 신성한 인물로 만들었다.
데니스 달톤(Dennis Dalton)에 따르면, 간디는 서구 문명을 "무력과 부도덕"에 의해 추진된다고 비판하며, 인도 문명을 "영혼의 힘과 도덕성"에 의해 추진된다고 대조했다. 그는 "증오에 대한 사랑"으로 승리한다는 사상으로 인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남아프리카 시절 인도 계약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던 그의 팸플릿 내용과 일치한다. 간디는 또한 라마야나의 "라마 왕국(Rama-rajya)"이나 프라할라다와 같은 문화적 상징들을 사용하여 인도 국민들의 문화 및 역사적 가치와 깊이 공감대를 형성했다.[79]


간디의 영성은 자이나교의 다섯 가지 큰 서약과 힌두교 요가 철학의 원칙, 즉 ''사티야''(진실), ''아힘사''(비폭력), ''브라마차리아''(금욕), ''아스테야''(절도하지 않음), ''아파리그라하''(비애착)에 깊이 기반을 두었다.[132] 그는 문명 비판의 일환으로 인도를 빈곤하게 만드는 것으로 철도(페스트 확산), 변호사(다툼 조장), 서양 의학(자제력 및 자기 치유력 방해)을 지목하기도 했다.[293][294] 또한, 금욕 생활과 관련하여 친구 헤르만 칼렌바흐(Hermann Kallenbach)가 애용하던 고가의 쌍안경을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리게 한 일화도 있다.[295][296]
간디는 초기에 카스트 제도를 직업 분담이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제도 자체의 폐지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카스트를 "힌두교의 근본적인 제도"[285]이자 "인간의 본성"[286]으로 옹호했고, 같은 카스트 내 결혼 제한을 "자기 억제를 심화시키는 훌륭한 방법"[287]으로 간주했다. 이는 분리되어 있으나 평등하다[287]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었다.[288] 이러한 "카스트 제도는 용인하되, 카스트에 의한 사회적 차별에는 반대한다"는 태도는 당시 일부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났으며, 인도 불교 개혁 운동의 지도자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같은 인물들과 의견 대립을 야기했다. 이후 간디는 카스트 제도와 바르나를 구별하여 바르나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4계층으로 구분되는 바르나가 유전의 문제[287]이며, 부모의 직업을 따르는 것이 "정신적인 목적을 위해 전념하는 시간을 늘려"[287] "행복과 깊은 종교 생활을 위한 최고의 보장"[289]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바르나 계층 간에는 상하 관계가 없고 평등하다고 보았다.[287] 반면,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는 "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원을 알 수 없는 관습에 불과하다"[287]고 인식하게 되어, 후년에는 『카스트는 사라져라』라는 소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간디는 16세 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경험(아버지 병간호 중 아내와 동침하는 사이 부친이 사망)이 그의 금욕주의적 경향, 특히 36세에 시작한 브라마차리아 서약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에릭 에릭슨). 브라마차리아는 힌두교 수행자들 사이에서 행해져 온 것이지만, 간디는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면서 이를 실천했으며,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기초이자 신에게 가까이 가는 수단, 자기 완성을 위한 중요한 토대라고 여겼다. 그는 브라마차리아를 "사상·언어·행위의 억제"라고 정의했다.
말년(78세 암살 직전까지)에 행한 "브라마차리아 실험"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간디의 제자였던 닐마르 쿠마르 보스는 『My days with Gandhi영어』에서 간디가 젊은 여성들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실험에 대해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로베르 드리쥬 등은 이를 인용하며 말년의 간디가 나체의 젊은 여성들을 몸에 붙이고 침대를 함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언급했다.[297] 이러한 지적에 대해 간디는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브라마차리아 실험"이라고 설명하며, 여성의 동의가 있었고 자신에게는 색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스와의 편지 왕래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여성을 만지지 않는 것이 브라마차리아가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실험의 전제에 여성의 열등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색정을 가지거나 상대의 동의 없이 여성을 본다면, 그때 여성은 열등자일 것이다. 나의 아내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었을 때, 열등자였다. 나의 옆에 알몸으로 누나처럼 자게 된 이후로는, 그녀는 더 이상 열등자는 아니었다. 옛날처럼 아내가 아니라 다른 누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옆에 알몸으로 자는 여성에 대해 내가 음란한 것을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한다. A 또는 B(보스에 의한 익명)의 히스테리는 나의 실험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이 실험 전부터 다소 히스테리였다."[301]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된 베드 메타의 저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정치철학자 비쿠 파레크(Bhikhu Parekh)는 메타가 증언자들의 말을 왜곡했다고 지적했으며, 메타에게 인용된 증언자 중 한 명인 피야레랄 나야르(Pyarelal Nayyar)는 메타가 자신의 발언 15개 이상을 왜곡하거나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기술했다고 주장했다.[302] 또한 번역가 별노 미가코는 해당 사건 당시 영국 관헌의 급습 부재, 인도 침실 구조(침대나 문이 없음), 열대 지방에서의 나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실험 자체가 비밀이 아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1] 전해지는 사건 당시에는 영국의 관헌이 간디를 야밤에 급습하는 일이 없었던 것, [2] 인도의 침실 구조에는 침대도 문도 없었던 것, [3] 열대 지방에서는 나체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그리고 [4] 그 사건 전체가 비밀이 아니었던 것”이다.[303] 사회사상사학자 마나가지로는 간디의 브라마차리아 실험에 참여했던 마누의 구자라트어 일기 등 방대한 자료 연구를 통해, 세간에 퍼진 "소문"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며 간디의 사상을 왜소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04] 이 실험의 진실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에릭슨은 이러한 논란이 간디의 다른 막대한 업적보다 먼저 지적되는 것 자체가 "결국 위대한 혼란은 위대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303]
간디는 힌두교의 मौन|모우나gu(침묵)와 शांति|샨티gu(평화) 이념에 따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는 침묵을 지켰다. 침묵하는 날에는 필담으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했다. 또한 37세부터 3년 반 동안 "소란스러운 세계 정세는 마음의 평화가 아닌 혼란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신문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6. 유산과 영향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민권 운동에 참여했던 간디는 인도로 돌아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 대신 "비폭력, 불복종"을 핵심 원칙으로 내세웠다. 간디 자신이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의 파지)"라고 명명한 이 사상은 인도 독립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영국 제국이 영국 연방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평화주의적 방법론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과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달라이 라마 14세 등이 간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264]
간디의 영향력은 당시 영국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보수당의 주요 정치인이자 훗날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간디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처칠은 1931년 간디가 인도 총독과 협상하는 모습을 두고 "중간 사원의 선동적인 변호사인 간디 씨가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행자처럼 나체에 가까운 차림으로 부왕궁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왕 황제의 대표와 동등한 조건으로 담판을 짓는 것을 보니 놀랍고도 메스껍다."라고 발언하며 조롱했다. 그는 간디를 "힌두 무솔리니"에 비유하고 영국 제국을 위협하는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영향력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이러한 비판은 오히려 국제 사회에서 간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오늘날 간디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의 유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런던의 태비 스톡 광장과 의회 광장을 비롯한 세계 여러 도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인도 내에서도 그가 활동했던 사바르마티 아슈람[305]이나 추모 공원인 라지 가트[306] 등이 중요한 기념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간디와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동시에, 그의 경제관이나 사회 개혁 방식이 현대 사회의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308] 특히 인도의 분할 과정에서 보인 그의 이상주의적 태도나[309] 과거 인종 차별적 발언 논란[311] 등은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화 '무나 형, 간디를 만나다'와 같이 대중문화 속에서 간디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310] 역시 이러한 복합적인 평가를 반영한다.
참고로, 인도의 유명 정치 가문인 "네루-간디 가문"(인디라 간디 등)은 마하트마 간디와 혈연 관계가 없다.[265]
6. 1. 인도에서의 영향
간디는 인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1920년대 인도 국민회의는 텔루구어 연극을 통해 안드라프라데시 농민들에게 다가갔다. 이 연극들은 인도 신화와 전설을 간디의 사상과 연결하며, 그를 메시아나 고대 영웅들의 환생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힌두 문화에 익숙한 농민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어 간디를 민중 영웅이자 신성한 인물로 만들었다.
데니스 달톤(Dennis Dalton)에 따르면, 간디의 인기는 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서구 문명을 "무력과 부도덕"에 기반한 것으로 비판하고, 인도 문명을 "영혼의 힘과 도덕성"에 기반한 것으로 강조했다. "증오에 대한 사랑"으로 승리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인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1890년대 남아프리카 시절 그의 팸플릿에서도 나타났으며, 인도 계약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인도로 돌아온 후, 그의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간디는 라마야나의 "라마 왕국(람 라지야)"이나 프라할라다와 같은 문화적 상징을 활용하여 스와라지(자치)와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지)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그의 사상은 인도 문화와 역사적 가치에 깊이 공감하며 인도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79]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열린 인도 원탁 회의에서 간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 종식을 위한 헌법 개혁과 인도인의 자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영국 측은 인도를 식민지로 유지하려 했으며, 종교 및 사회적 분열에 기반한 별도의 선거인단을 제안하며 인도 국민회의와 간디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영국은 무슬림, 시크교 지도자들과 함께 불가촉천민 대표로 B. R. 암베드카르를 초청했다. 간디는 이러한 공동체 분할 시도가 인도인들을 분열시키고 독립 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라 우려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제2차 원탁 회의 참석차 런던을 방문했을 때(이는 1914년부터 1948년 사망 시까지 유일한 해외 방문이었다), 간디는 정부가 제공한 고급 호텔 대신 런던 이스트엔드의 노동자 거주 지역에 머물기를 원했다.[80] 그는 킹즐리 홀의 작은 방에 머물며 3개월간 지역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81]
회의 후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새로운 사티아그라하를 시작했고, 곧 체포되어 푸네의 예르와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된 동안 영국 정부는 불가촉천민에게 별도의 선거인단을 부여하는 공동체 수여(Communal Award)를 발표했다. 간디는 이에 항의하며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82] 이로 인해 여론이 들끓자 영국 정부는 암베드카르와 협의하여 공동체 수여를 푸나 협정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83]
사후 평가와 기념

간디는 영국 통치에 맞선 성공적인 인도 독립 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현대 인도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169][170][171][172][173][174] 미국 역사가 스탠리 울퍼트는 그를 "인도 최고의 혁명적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부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평가했다. 1999년 아시아위크는 그를 "세기의 아시아인"으로,[175] 2000년 BBC 여론 조사에서는 "밀레니엄 최고의 인물"로 선정했다.[176][177]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명예 칭호로, 1914년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되었다.[179][180]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1915년경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181] 간디 자신은 이 칭호를 부담스러워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184]


간디를 기리는 움직임은 인도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국가 기념일: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인 간디 자얀티로 지정되어 있다. 사망일인 1월 30일은 순국자의 날로 기념된다.[254]
- 화폐: 그의 초상은 인도 준비은행이 발행하는 인도 루피의 모든 지폐(1루피 지폐 제외)에 사용된다.[253]
- 지명: 인도 내 수많은 거리, 도로, 지역이 그의 이름을 땄다. 대표적으로 여러 도시의 중심가인 M.G. 로드와 구자라트주의 주도인 간디나가르가 있다.[186]
- 기념 우표: 150개국 이상에서 간디 기념 우표를 발행했으며,[187] 2019년 탄생 150주년에는 약 87개국이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188][189][190][191]
- 동상: 런던(태비스톡 스퀘어, 팔리아먼트 스퀘어), 브리즈번, 아스타나, 뉴욕 유엔 본부 등 세계 주요 도시에 간디 동상이 세워졌다.[192][193][195][196]
- 기념 시설: 인도에는 오디샤주 삼발푸르, 카르나타카주 니다갓타 마을, 텔랑가나주 치티얄에 간디 사원이 있다.[255][256] 카냐쿠마리에는 간디 기념관이,[257] 아메다바드에는 그가 활동했던 사바르마티 아슈람이 남아 있다.[305] 뉴델리의 화장터에는 라지 가트라는 추모 공원이 조성되었다.[306]
현대 인도에서의 위상 변화독립 후 반세기가 넘으면서 간디와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변화하고 있다. 인도는 급속한 경제 현대화와 도시화를 겪으며 간디의 경제 사상[251]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의 농촌 중심 경제 비전은 생전에도 낭만적 이상으로 여겨졌고, 금욕과 비폭력 정신은 경제 및 군사 강국을 지향하는 현대 인도의 목표와 상충된다는 지적이 있다.[252]
독립 직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간디가 반대했던 산업 기계화와 공업화를 적극 추진하는 네루주의 개발 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이 때문에 인도 사회에서는 간디를 표면적으로는 "국부"로 칭송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308] 네루 자신도 당시 영국 고위 관료에게 종교 갈등 해결에 있어 간디의 중도적 입장이 비현실적이 되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간디의 화해 정책이 현실의 복잡한 갈등을 외면했다는 비판과 함께, 그의 암살범 고드세를 영웅시하는 힌두 민족주의자들도 존재한다.[309]
한편, 영화 '무나 형, 간디를 만나다'(2006)는 간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에서 사용된 "간디기리(Gandhigiri)"라는 용어는 기존의 "간디주의(Gandhism)"가 가진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벗고 대중적인 유행어가 되었다.[310]
그러나 2018년에는 간디가 과거 흑인에 대해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아프리카 가나 대학교에 설치되었던 간디 동상이 철거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311]
이처럼 간디는 인도 독립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평화의 아이콘으로 존경받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재평가와 비판 역시 현대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이고 세속적인 민주주의라는 인도의 정치적 정체성 확립에 대한 그의 기여는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252]
6. 2. 국제적인 영향
간디는 영국 통치에 맞선 성공적인 인도 독립 운동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으며, 현대 인도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다. 미국의 역사가 스탠리 울퍼트는 간디를 "인도 최고의 혁명적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부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묘사했다. 1999년, 간디는 ''아시아위크''에 의해 "세기의 아시아인"으로 선정되었고,[175] 2000년 BBC 여론 조사에서는 밀레니엄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다.[176][177]간디의 영향력은 인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08년 기준으로 150개국 이상이 간디 기념 우표를 발행했으며,[187] 2019년 간디 탄생 150주년에는 터키, 미국, 러시아, 이란, 우즈베키스탄, 팔레스타인 등 약 87개국이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188][189][190][191] 세계 여러 도시에는 간디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2014년 호주 브리즈번의 로마 스트리트 파크랜드,[192][193] 2022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조정 운하 제방,[195] 2022년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등지에 간디 동상이 건립되었다.[196] 영국 런던의 태비 스톡 광장(1968년)과 웨스트민스터 의회 광장(2015년)에도 간디 동상이 있다. 소행성 120461 간디는 2020년 9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94]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인 사티아그라하는 전 세계의 중요한 지도자들과 정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58] 미국의 민권 운동 지도자들, 특히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제임스 로슨, 제임스 베벨 등은 비폭력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간디의 저술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197][198][199] 킹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목표를 주셨고, 마하트마 간디가 전술을 주셨다"고 말했으며,[200] 때때로 간디를 "작은 갈색 성자"라고 불렀다.[20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역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철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202] 일부 학자들은 "간디는 백인 지배 종식을 추구하는 남아프리카 활동가들의 후대 세대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유산은 그를 넬슨 만델라와 연결시키며...어떤 의미에서 만델라는 간디가 시작한 것을 완성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스티브 비코, 바츨라프 하벨,[203] 아웅산 수치 등이 간디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꼽힌다.[204]
간디의 삶과 가르침은 그를 멘토로 삼거나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헌신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유럽에서는 로맹 롤랑이 1924년 저서 『마하트마 간디』를 통해 간디를 소개했고, 브라질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라세르다 드 무라는 평화주의 저술에서 간디를 언급했다. 1931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간디와 서신을 교환하며 그를 "다가올 세대를 위한 귀감"이라고 칭송했다.[205] 아인슈타인은 간디의 업적이 정치사에서 독보적이며, 그의 도덕적 영향력이 폭력의 힘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말릴란드의 정치 활동가 파라 오마르는 1930년 인도를 방문하여 간디를 만난 후 그의 비폭력 철학을 영국령 소말릴란드에서의 운동에 적용했다.[206] 프랑스 출신의 란차 델 바스토는 1936년 간디와 함께 생활한 후 유럽으로 돌아가 간디 철학을 전파하고 방주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영국 해군 제독의 딸인 마들렌 슬레이드(미라벤)는 평생을 인도에서 간디의 제자로 살았다.[207][208] 영국의 음악가 존 레논은 비폭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간디를 언급했고,[209] 미국의 전 부통령 앨 고어는 2007년 기후 변화 연설에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를 인용했다.[210]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09년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로 간디를 꼽으며 "그의 윤리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말했다.[211]
타임지는 14대 달라이 라마, 레흐 바웬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세사르 차베스, 아웅산 수치,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 데즈먼드 투투, 그리고 넬슨 만델라를 "간디의 자녀들"이자 비폭력 정신의 계승자로 지목했다.[212]
간디 사상은 20세기 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로맹 롤랑, 마르틴 부버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모리스 블랑쇼, 한나 아렌트, 에티엔 발리바르, 슬라보예 지젝 등 여러 철학자들이 정치에서 도덕성을 논의할 때 간디를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았다.[214] 미국의 정치학자 진 샤프는 『간디를 정치 전략가로서』라는 저서를 통해 비폭력 사회 변혁을 위한 간디 사상의 중요성을 분석했다. 최근에는 기후 변화 문제와 관련하여 간디의 기술관이 환경 철학 및 기술 철학 분야에서 재조명받고 있다.[214]



2007년 유엔 총회는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을 국제 비폭력의 날로 지정했다.[215] 또한, 1948년 유네스코가 제안한 비폭력과 평화의 학교의 날(DENIP)은 간디의 기일인 1월 30일에 많은 국가의 학교에서 기념되고 있다[216][217] (남반구 학교에서는 3월 30일).[217]
간디는 1937년부터 1948년까지 5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223] 노벨 위원회는 수십 년 후 이 누락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며, 당시의 분열된 민족주의적 여론이 수상 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224] 1948년에는 후보 지명 마감 전에 암살당했으며, 그해 위원회는 "적합한 생존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평화상을 수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간디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해석된다.[224] 2006년 노벨 위원회 사무총장 예이르 룬데스타는 간디가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한 것이 위원회 역사상 "가장 큰 누락"이라고 말했다.[225] 1989년 14대 달라이 라마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위원회 위원장은 이 수상이 "부분적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라고 밝혔다.[224]
그러나 현대에 들어 간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2018년에는 간디가 젊은 시절 흑인에 대해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항의가 일어났고,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 설치되었던 간디 동상이 2년 만에 철거되기도 했다.[311]
7. 비판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로서 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비판 또한 존재한다. 주요 비판 지점으로는 사회 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적인 모습, 인종 차별에 대한 논란,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서의 언행 불일치 등이 거론된다.
사회 운동과 관련해서는, 간디가 비폭력주의를 핵심 원칙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의 전쟁 참여를 지지했던 점이 모순으로 지적된다. 또한 노동 운동에서는 일부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며, 힌두교의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불가촉천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카스트 제도 자체의 폐지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활동 시기를 중심으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논란은 현대에 이르러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간디 동상이 철거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비판이 따른다. 스스로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려 했으나, 말년에는 젊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있으며, 이는 그의 성윤리에 대한 모순으로 지적된다. 또한 서양 의학을 불신하며 아내의 치료를 거부했지만, 정작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는 서양 의술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구이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간디라는 인물이 가진 복잡하고 다면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7. 1. 사회 운동의 모순
간디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쳤지만,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는 1917년 구자라트 주에서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 결성 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안하여 해당 지역의 노동 운동을 침체시켰다. 이는 활발한 노동 운동으로 노동 인권을 개선해 나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에는 가족 중 한 명이 실직하면 다른 가족의 임금을 올려주는 '가족임금제도'를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힘없는 여성과 노인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는 결과를 낳았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이 전쟁 협력을 대가로 인도의 독립을 약속하자, 이에 동조하여 인도의 전쟁 참여를 지지했다.[56][57] 이는 간디가 내세운 비폭력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지점이다. 간디는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전쟁 후 영국이 독립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반영 운동 탄압을 강화하는 롤래트 법을 제정하자, 간디는 다시 영국에 반기를 들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는 분노했지만,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카스트 제도를 뒷받침하는 힌두교를 옹호하는 데 힘썼다.[323]
또한 간디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2018년 아프리카 가나의 가나 대학교에서는 캠퍼스 내에 설치되었던 간디의 동상이 철거되기도 했다.[324] 반면, 2019년 대한민국의 연세대학교는 인도로부터 간디 동상을 선물받아 송도 국제캠퍼스에 세웠다.[325]
7. 2. 인종 차별 논란
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 식민지에 변호사로 부임한 간디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백인들에게 교통 시설 이용, 취업 등 여러 면에서 심각한 차별을 당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깊이 체험했다. 이는 간디가 동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나아가 인도 독립 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겪는 차별에 맞서기 위해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했다. 또한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후 그의 독립운동의 핵심 원칙이 되는 '비폭력 저항'(사티아그라하)의 기초를 다졌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을 제한하기 위해 지문 등록을 강제하려 했을 때, 간디는 이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으나, 결국 정부의 방침 철회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894년 6월, 간디는 1년간의 변호사 계약이 끝나갈 무렵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4년 7월, 간디는 나탈 식민지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제출할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비록 법안 통과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이 활동을 통해 나탈 지역 인도인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인도 본국과 영국 사회, 그리고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간디는 더반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여 인도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차별의 부당함을 국제 여론에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7. 3. 모순된 행동
간디는 힌두교의 교리를 따르며 성욕을 자제하려 노력했고, 정액을 생명력의 근원으로 여겨 배출을 경계했다. 그는 보어 전쟁과 아프리카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여성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직접적인 성행위나 사정은 피했다고 전해진다.[316]
'''성윤리의 모순'''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간디의 사생활 중 일부 부적절한 측면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간디 스스로도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환갑이 넘어서도 끊이지 않는 몽정을 속죄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명의 벌거벗은 여성들과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또한 젊은 여성에게 알몸으로 자신의 몸을 데워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이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지만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평소 고백하기도 했지만, 일각에서는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증손녀뻘 되는 친족인 마누 간디와도 동침하였는데, 작가 월리엄 샤일러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동성 연인으로 알려진 칼렌바흐와 지내기 위해 부인 곁을 떠나 지내기도 했다.[326]
'''일구이언'''
간디의 아내 카스투르바이가 폐에 염증이 생겨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받았을 때, 영국인 의사는 항생제를 주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간디는 서양 의술을 불신하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328] 하지만 아내가 죽고 며칠 뒤 자신이 학질을 앓게 되자, 그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또한 이전에 장염에 걸렸을 때에도 영국인 의사의 시술을 받은 적이 있어[329], 그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8. 저서
- 《간디 자서전》(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2007)
- 《날마다 한 생각》(함석헌 역, 출판사 호미, 2001)
- 《힌두 스와라지》(Hind Swarajeng)(안찬수 역, 출판사 강, 2002)
참조
[1]
웹사이트
Gandhi
http://dictionary.re[...]
2015-01-14
[2]
서적
Mahatma Gandhi A Chronology
https://archive.org/[...]
Publications Division
1971
[3]
서적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https://books.google[...]
The Floating Press
2024-03-29
[4]
서적
Rethinking Gandhi and Nonviolent Relationality: Global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9-07-21
[5]
서적
Identity and Religion: Foundations of anti-Islamism in India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6]
서적
Lawyer to Mahatma: Life, Work and Transformation of M. K. Gandhi
https://books.google[...]
Deep & Deep Publications
2024-03-29
[7]
서적
Mohandas Gandhi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24-03-29
[8]
뉴스
Know Your City: Gandhi's family house which witnessed his transformation from 'Mohan to Mahatma'
https://indianexpres[...]
2024-07-14
[9]
서적
Gandhi: The Traditional Roots of Charism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3-03-19
[10]
서적
The subcaste the Gandhis belonged to was known as Modh Bania, the prefix apparently referring to the town of Modhera, in Southern Gujarat.
https://books.google[...]
[11]
서적
Responses to 101 Questions on Hinduism
https://archive.org/[...]
Paulist Press
2020-08-16
[12]
서적
Gandhi: A Spiritual Biography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13]
서적
Gandhi: The Traditional Roots of Charism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4-03-29
[14]
서적
Public Hinduisms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15]
서적
Gandhi, his life and message for the world
https://books.google[...]
New American Library
[16]
웹사이트
At the High School
http://wikilivres.or[...]
Wikilivres
2023-02-20
[17]
웹사이트
Playing the Husband
http://wikilivres.or[...]
Wikilivres
2023-02-20
[18]
서적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https://books.google[...]
The Floating Press
2020-06-04
[19]
서적
Gandhi Before India
https://books.google[...]
Alfred A. Knopf
2014
[20]
웹사이트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http://wikilivres.ca[...]
[21]
백과사전
Mahatma Gandhi
https://www.britanni[...]
2017-06-03
[22]
서적
Gandhi Before India
https://books.google[...]
Alfred A. Knopf
2014
[23]
서적
Gandhi Before India
https://books.google[...]
Alfred A. Knopf
2014
[24]
뉴스
My Experiment with Truth
https://indiacurrent[...]
2014-10-12
[25]
서적
Gandhi as Disciple and Mentor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6]
웹사이트
Narayan Hemchandra | Gandhi Autobiography or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https://www.mkgandhi[...]
2023-02-20
[27]
서적
Mahatma: 1920-1929
Vithalbhai K. Javeri & D.G. Tendulkar, 1951
2008-09-02
[28]
웹사이트
Shyness my shield
https://www.mkgandhi[...]
2019-08-11
[29]
웹사이트
International Vegetarian Union – Mohandas K. Gandhi (1869–1948)
https://ivu.org/hist[...]
2020-09-26
[30]
서적
New History of South Africa
Tafelberg
[31]
학술지
Gandhi in South Africa
[32]
서적
Into that Heaven of Freedom: The Impact of Apartheid on an Indian Family's Diasporic History
https://books.google[...]
Mawenzi House Publishers Limited
2023-03-17
[33]
웹사이트
High Commission of India, Pretoria, South Africa : Mahatma Gandhi in South Africa
https://www.hcipreto[...]
2024-09-17
[34]
서적
Sleeping with Strangers: A Vagabond's Journey Tramping the Globe
https://books.google[...]
Other Places Publishing
2024-03-29
[35]
위키소스
The Collected Works of Mahatma Gandhi
[36]
웹사이트
South African Medals that Mahatma Returned Put on View at Gandhi Mandap Exhibition
http://pibarchive.ni[...]
1949-03-05
[37]
서적
Gandhian Satyagraha: An Analytical And Critical Approach
https://books.google[...]
Concept Publishing Company
2000
[38]
웹사이트
A Letter to A Hindu: The Subjection of India-Its Cause and Cure
http://www.online-li[...]
1908-12-14
[39]
서적
Meditations on Gandhi : a Ravindra Varma festschrift
https://books.google[...]
Concept
2002
[40]
서적
M.K. Gandhi, Attorney at Law: The Man before the Mahatma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13
[41]
서적
Encyclopedia of Hinduism
https://books.google[...]
Facts On File
2007
[42]
서적
M.K. Gandhi, Attorney at Law: The Man Before the Mahatm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43]
웹사이트
Some of Gandhi's Early Views on Africans Were Racist. But That Was Before He Became Mahatma
https://thewire.in/h[...]
2016-10-18
[44]
서적
Minorities and the State in Africa
https://books.google[...]
Cambria Press
2010
[45]
서적
Gandhi Before India
https://books.google[...]
Alfred A. Knopf
2014
[46]
웹사이트
Setting the Record Straight on Gandhi and Race
https://thewire.in/h[...]
2018-12-23
[47]
뉴스
For Gandhi, Kallenbach was a friend and guide
https://timesofindia[...]
2011-03-31
[48]
간행물
Satuagraha § A Medium for Truth
http://philosophynow[...]
2014
[49]
논문
Gandhi's Decisive South African 1913 Campaign: A Personal Perspective from the Letters of Betty Molteno
2014
[50]
위키소스
Chronology of Mahatma Gandhi's Life:India 1918
s:Chronology of Maha[...]
[51]
웹아카이브
Appeal for enlistment
http://www.gandhiser[...]
1918-06-22
[52]
웹아카이브
Letter to J. L. Maffey
http://www.gandhiser[...]
1918-04-30
[53]
웹사이트
Gandhi and War: The Mahatma Gandhi / Bart de Ligt Correspondence
https://www.satyagra[...]
2013-08-22
[54]
서적
Indian Soldiers in World War I: Race and Representation in an Imperial Wa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ebraska
2021
[55]
웹사이트
Satyagraha Laboratories of Mahatma Gandhi
http://www.aicc.org.[...]
All India Congress Committee
2004
[56]
서적
Gandhi and King: The Power of Nonviolent Resistance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2004
[57]
서적
The First World War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58]
서적
A Glob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Legacies and Lessons from Six National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7
[59]
서적
Nation Building, State Building, and Economic Development: Case Studies and Comparison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
[60]
서적
Jinnah vs. Gandhi
https://books.google[...]
Hachette
2012
[61]
논문
The All-India Muslim Conference and the Origin of the Khilafat Movement in India
1990
[62]
논문
A Review of the Gandhi Movement in India
1923
[63]
서적
Modern South History, Culture, Political Economy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04
[64]
서적
Jinnah, Pakistan and Islamic Identity: The Search for Saladin
https://archive.org/[...]
Routledge
1997
[65]
웹사이트
Gandhi and Islam
https://www.islamici[...]
2010-08-17
[66]
서적
From Plassey to Partition: A History of Modern India
https://books.google[...]
Orient Blackswan
2004
[67]
서적
Modern India: the origins of an Asian democrac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68]
서적
Modern India: 1885–1947
https://archive.org/[...]
Macmillan
1983
[69]
서적
In an Inescapable Network of Mutuality: Martin Luther King, Jr. and the Globalization of an Ethical Ideal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3-08-30
[70]
서적
An Autobiography or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https://archive.org/[...]
Navajivan Publishing House
1940
[71]
서적
Indian Politics and Society since Independence: events, processes and ideolog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04-04
[72]
뉴스
Gandhi Freed on Government Order; Aged Indian Leader is Ill and Must Go to Coast to Convalesce
Montreal Gazette
1924-02-05
[73]
서적
The Encyclopaedia of Indian Literature (Volume Two) (Devraj To Jyoti)
https://books.google[...]
Sahitya Akademi
2012-04-04
[74]
서적
Gandhi and Gandhi and the Mass Movement
New Delhi
[75]
서적
Women in the Indian National Movement: Unseen Faces and Unheard Voices, 1930–42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76]
서적
Gandhi and the Mass Movement
[77]
서적
From Eve to Dawn, A History of Women in the World, Volume IV: Revolutions and Struggles for Justice in the 20th Century
https://books.googl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78]
서적
Mahatma Gandhi
https://books.google[...]
Evans Brothers
2022-01-05
[79]
서적
Encyclopedia of Group Processes and Intergroup Relations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80]
웹사이트
Mahatma Gandhi | Philosopher & Teacher | Blue Plaques
https://www.english-[...]
2020-09-26
[81]
웹사이트
Gandhi visits the poor people of England in 1931 – Gandhi Video Footage
https://www.youtube.[...]
2020-09-26
[82]
서적
Castes of Mind: Colonialism and the Making of Modern India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06-04
[83]
서적
Gandhi's Coolie: Life & Times of Ramkrishna Bajaj
https://books.google[...]
Allied Publishers
2020-06-03
[84]
서적
Jawaharlal Nehru, A Biography
https://books.google[...]
Allied Publishers
2023-05-27
[85]
웹사이트
Gandhi and Subhas Chandra Bose
http://orissa.gov.in[...]
2012-04-12
[86]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Inclusive Leadership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2-12-08
[87]
서적
Policing and Decolonisation: Politics, Nationalism, and the Police, 1917-65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22-12-08
[88]
서적
India's Struggle for Independence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89]
서적
A Fine Family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90]
서적
The Mahatma and mother India: essays on Gandhiʼs nonviolence and nationalism
https://books.google[...]
Navajivan Publishing House
[91]
서적
Mahatma Gandhi and Jawaharlal Nehru: a historic partnership
https://books.google[...]
B.R. Publishing Corporation
2024-03-29
[92]
서적
India's Road to Nationhood: A Political History of the Subcontinent
https://books.google[...]
Allied Publishers
2024-03-29
[93]
서적
The Great Partition: The Making of India and Pakistan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2013-09-01
[94]
뉴스
Gandhi, Jinnah Meet First Time Since '44; Disagree on Pakistan, but Will Push Peace
https://www.nytimes.[...]
2012-03-25
[95]
서적
Propaganda and information in Eastern India, 1939–45: a necessary weapon of war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24-03-29
[96]
서적
The Great Partition: The Making of India and Pakistan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2013-09-01
[97]
서적
A History of In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6-06
[98]
서적
Divide and Qui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9]
서적
A concise history of modern Indi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4-03-29
[100]
서적
[101]
서적
A History of Modern South Asia, Politics, States, Diasporas
Yale University Press
[102]
서적
Violence: A History of the British Empire
Alfred A. Knopf
[103]
서적
India-Pakistan: The History of Unsolved Conflicts: Volume I
Lindhardt og Ringhof
[104]
서적
Modern India: 1885–1947
Pearson Education
[105]
서적
Scorching Love: Letters from Mohandas Karamchand Gandhi to his son, Devadas
Oxford University Press
[106]
서적
Sikh Nationalism: From a Dominant Minority to an Ethno-Religious Diaspor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7]
서적
A History of India
Wiley-Blackwell
[108]
서적
Pakistan Factor and the Competing Perspectives in India: Party Centric View
Palgrave Macmillan
[109]
서적
Encyclopedia of Hinduism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3-08-31
[110]
서적
The Collected Works of Mahatma Gandhi
https://books.google[...]
Publications Division, Ministry of Information and Broadcasting, Government of India
[111]
서적
"Let's Kill Gandhi !": A Chronicle of His Last Days, the Conspiracy, Murder, Investigation, and Trial
https://books.google[...]
Rupa & Company
[112]
서적
Empirical Foundations of Psychology
https://books.google[...]
Routledge
[113]
서적
History of India, Volume 2: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ieth century
https://archive.org/[...]
Penguin
[114]
서적
Commissions and Omissions by Indian Prime Ministers
https://books.google[...]
Regency Publications
2002-07-00
[115]
서적
Religion in India: Past and Present
Dunedin Academic Press
[116]
서적
Modern India: 1885–1947
Pearson Education
[117]
서적
Assassin: Theory and Practice of Political Violence
Routledge
[118]
서적
Delhi Reborn: Partition and Nation Building in India's Capital
Stanford University Press
[119]
서적
The Partition of Indi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12-02
[120]
서적
Gandhi, the Forgotten Mahatma
https://books.google[...]
Mittal Publications
[121]
서적
Almanac of World Crim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122]
웹사이트
Yakub Memon first to be hanged in Maharashtra after Ajmal Kasab
http://indianexpress[...]
2015-07-30
[123]
뉴스
Revealed: The secret room where Godse was kept after killing Gandh
http://www.mid-day.c[...]
Mid-Day
2014-01-30
[124]
서적
The Gandhi Reader: A Sourcebook of His Life and Writings
https://archive.org/[...]
Grove Press
[125]
웹사이트
Cremation of Gandhi's body
https://www.upi.com/[...]
1948-01-31
[126]
서적
Life
https://books.google[...]
1948-03-15
[127]
서적
Books Behind Bars: Mahatma Gandhi's Community of Captive Readers
https://doi.org/10.1[...]
Palgrave Macmillan UK
2011
[128]
학술지
Gandhi and Bhagat Singh
1982
[129]
웹사이트
The Mahatma – Life Chronology
https://gandhiashram[...]
[130]
서적
Delhi
https://archive.org/[...]
Avalon
[131]
서적
Rediscovering Gandhi
https://books.google[...]
Concept Publishing Company in collaboration with Gandhi Smriti & Darshan Samiti
[132]
서적
Asian Spiritualities and Social Transformation
Springer Nature
2023
[133]
서적
[134]
서적
Gandhi Wields the Weapon of Moral Power: Three Case Histories
https://archive.org/[...]
Navajivan
[13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Twentieth-Century Philosophers
https://books.google[...]
Routledge
[136]
학술지
Satyagraha: The Gandhian Synthesis
[137]
학술지
Gandhi's Concept of Truth and the Advaita Tradition
1986
[138]
서적
Gandhi's Philosophy and the Quest for Harmon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9]
서적
The Virtue of Nonviolence: From Gautama to Gandhi
https://books.googl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40]
웹사이트
Salt March | Definition, Causes, History, & Facts
https://www.britanni[...]
[141]
서적
Women in India: A Social and Cultural History
https://books.google[...]
ABC-CLIO
[142]
서적
The Collected Works of Mahatma Gandhi
[143]
웹사이트
Mahatma Gandhi's Rules for Satyagraha
https://www.lokvani.[...]
2024-07-05
[144]
웹사이트
Some Rules of Satyagraha
https://gandhiking.n[...]
2013-01-09
[145]
서적
The Mind of Mahatma Gandhi
Navajivan Mudranalaya
[146]
서적
Collected Works of Mahatma Gandhi
Publications Division, Ministry of Information and Broadcasting, Govt. of India
[147]
서적
Satyagraha: Gandhi's approach to conflict resolution
https://books.google[...]
Concept Publishing Company
[148]
서적
Liberal and Illiberal Nationalisms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149]
서적
The Great Partition: The Making of India and Pakistan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150]
서적
The Man who Divided India
https://books.google[...]
Popular Prakashan
[151]
학술지
Touching space: Ambedkar on the spatial features of untouchability
Taylor & Francis
2014-01-02
[152]
서적
What Congress and Gandhi have done to the Untouchables
https://archive.org/[...]
Thacker & Co. Editions
[153]
서적
Political Theory
S.chand
[154]
서적
Pax Gandhiana: The Political Philosophy of Mahatma Gandhi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55]
서적
Nonviolence to Animals, Earth, and Self in Asian Traditions
https://books.googl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56]
학술지
The Doctrine of the Sword
https://www.gandhihe[...]
M. K. Gandhi
1920-08-11
[157]
서적
The Impossible Indian: Gandhi and the Temptation of Violenc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158]
서적
A History of Ind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159]
웹사이트
Gandhi Jayanti: Why non-violent Mahatma Gandhi preferred violence to cowardice
https://www.indiatod[...]
2013-10-02
[160]
서적
Mahatma Gandhi: A Nonviolent Perspective on Peac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161]
웹사이트
M.K. Gandhi as a Author {{!}} M.K. Gandhi: Author, Journalist, Printer-Publisher {{!}} Journalist Gandhi
https://www.mkgandhi[...]
[162]
뉴스
Would Gandhi have been a Wikipedian?
http://www.indianexp[...]
2012-01-17
[163]
간행물
Peerless Communicator
https://web.archive.[...]
Life Positive Plus
2002-10-12
[164]
서적
Unto this Last: A paraphrase
http://wikilivres.ca[...]
Navajivan Publishing House
[165]
서적
Gandhi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66]
서적
Songs From Prison
http://archive.org/d[...]
1934
[167]
뉴스
Revised edition of Bapu's works to be withdrawn
https://timesofindia[...]
2005-11-16
[168]
웹사이트
Collected Works of Mahatma Gandhi (CWMG) Controversy
http://www.gandhiser[...]
Gandhiserve.org
[169]
서적
Mass Communication In India: A Sociological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170]
서적
The Times Illustrated History of the World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171]
서적
The World War 1939–1945: The Cartoonists' Vis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172]
서적
Writings on Nehru: Some Reflections on Indian Thoughts and Related Essays
https://books.google[...]
Northern Book Centre
[173]
서적
Imaginations of Death and the Beyond in India and Europe
https://books.google[...]
Springer Nature Singapore
[174]
서적
The Autobiography of Martin Luther King, Jr.
https://books.google[...]
Grand Central Publishing
[175]
웹사이트
Indira 'woman of millennium', Mahatma 'Asian of century'
https://www.tribunei[...]
1999-12-02
[176]
웹사이트
Mahatma Gandhi 'greatest man'
http://news.bbc.co.u[...]
BBC News
2000-01-01
[177]
웹사이트
Mahatma Gandhi Biography
https://sjsa.maharas[...]
[178]
서적
The Oxford Hindi-English Dictiona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79]
서적
India-China Relations
Pt. Sunderlal Institute of Asian Studies
[180]
서적
Mahatma Gandhi: A Chronology
https://books.google[...]
Ministry of Information and Broadcasting (India)
[181]
서적
Rabindranath Tagore: an anthology
Macmillan
[182]
서적
[183]
문서
Pranjivan Mehta to G. K. Gokhale
1909-11-08
[184]
서적
Rabindranath Tagore: The Poet of India
Indus Publishing
[185]
웹사이트
Champion of Liberty Issue
https://postalmuseum[...]
Smithsonian National Postal Museum
[186]
서적
India After Gandhi: The History of the World's Largest Democracy
https://archive.org/[...]
Ecco Press
[187]
웹사이트
Stamps on Mahatma Gandhi in 150 countries
https://www.indiatod[...]
2008-10-02
[188]
웹사이트
Palestine, Turkey and Uzbekistan Issue Commemorative Gandhi Stamps
https://thewire.in/w[...]
2019-10-02
[189]
뉴스
Memorial stamp marking Mahatma Gandhi unveiled in Iran
https://en.irna.ir/n[...]
Islamic Republic News Agency
2019-10-02
[190]
서적
Yojana October 2020 (English) (Special Edition): A Development Monthly
Public Division
[191]
웹사이트
Russia marks 150th year of Mahatma Gandhi with series of events
https://economictime[...]
2019-10-02
[192]
웹사이트
Indian PM Narendra Modi unveils Gandhi statue
https://www.brisbane[...]
2014-11-16
[193]
웹사이트
Mohandas Karamchand (Mahatma) Gandhi
https://monumentaust[...]
[194]
간행물
The Minor Planet Circular 125471
https://minorplanetc[...]
Minor Planet Center
2020-09-24
[195]
웹사이트
Statue of Mahatma Gandhi erected in Astana
https://jjtv.kz/en/n[...]
2022-10-14
[196]
웹사이트
Mahatma Gandhi's bust at UN, a reminder of values he upheld: UN Chief
https://www.business[...]
2022-12-15
[197]
웹사이트
King's Trip to India
http://mlk-kpp01.sta[...]
Mlk-kpp01.stanford.edu
[198]
뉴스
King moved, as father was, on trip to Gandhi's memorial
http://edition.cnn.c[...]
CNN
2009-02-17
[199]
뉴스
Commemorating Martin Luther King Jr.: Gandhi's influence on King
http://www.sfgate.co[...]
2003-01-20
[200]
서적
Birmingham 1963: How a Photograph Rallied Civil Rights Support
https://books.google[...]
Capstone Press
[201]
서적
Martin & Malcolm & America: A Dream Or a Nightmare
https://archive.org/[...]
Orbis Books
[202]
잡지
The Sacred Warrior
https://content.time[...]
1999-12-31
[203]
웹사이트
Commemorative Soirée: Relevance of Václav Havel Today
https://www.mzv.cz/n[...]
Embassy of the Czech Republic in Delhi
[204]
웹사이트
An alternative Gandhi
http://www.tribunein[...]
2004-02-22
[205]
웹사이트
Einstein on Gandhi (Einstein's letter to Gandhi – Courtesy:Saraswati Albano-Müller & Notes by Einstein on Gandhi – Source: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http://www.gandhiser[...]
Gandhiserve.org
1931-10-18
[206]
서적
Makers of Modern Africa: Profiles in History
https://books.google[...]
Published by Africa Journal Ltd. for Africa Books Ltd.
1981
[207]
서적
Gandhi's prisoner?: the life of Gandhi's son Manilal
https://books.google[...]
Permanent Black
[208]
웹사이트
In the company of Bapu
http://www.telegraph[...]
2004-10-03
[209]
잡지
Lennon Lives Forever
https://www.rollings[...]
2005-12-05
[210]
뉴스
Applying Gandhi's Ideas to Climate Change
https://www.nytimes.[...]
2008-03-30
[211]
뉴스
Obama steers clear of politics in school pep talk
https://www.nbcnews.[...]
MSNBC
2009-09-08
[212]
간행물
The Children of Gandhi
http://content.time.[...]
1999-12-31
[213]
뉴스
Houston community celebrates district named for Gandhi
http://www.chron.com[...]
2010-01-16
[214]
서적
Gandhi and Philosophy: On Theological Anti-Politics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15]
웹사이트
UN declares 2 October, Gandhi's birthday, as International Day of Nonviolence
https://www.un.org/a[...]
UN News Centre
2007-06-15
[216]
웹사이트
School Day of Nonviolence And Peace
http://www.cartadela[...]
cartadelapaz.org
2009-01-30
[217]
웹사이트
DENIP: School Day of Nonviolence and Peace
http://denip.webcind[...]
1983-01-31
[218]
서적
Einstein: The Life and Times
https://books.google[...]
A&C Black
2011
[219]
간행물
University and Educational Intelligence
http://www.currentsc[...]
1937-12-01
[220]
웹사이트
Peace Laureates – livinghumanity
https://livinghumani[...]
LivingHumanity
[221]
서적
South Africa Yearbook 2002/03
https://books.google[...]
Government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System
[222]
뉴스
Top 25 Political Icons
https://content.time[...]
2011-02-04
[223]
웹사이트
Nobel Peace Prize Nominations
http://www.afsc.org/[...]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2010-04-14
[224]
웹사이트
Mahatma Gandhi, the Missing Laureate
https://www.nobelpri[...]
Nobel Foundation
1999-12-01
[225]
웹사이트
Relevance of Gandhian Philosophy in the 21st Century
https://web.archive.[...]
2011-09-15
[226]
웹사이트
Vegetarian Hall of Fame
https://navs-online.[...]
[227]
서적
The Endurance of National Constitu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8]
뉴스
Gandhi not formally conferred 'Father of the Nation' title: Govt
http://archive.india[...]
2012-07-11
[229]
뉴스
Constitution doesn't permit 'Father of the Nation' title: Government
http://timesofindia.[...]
2012-10-26
[230]
뉴스
Crusade with arms
http://www.thehindu.[...]
2000-02-01
[231]
뉴스
Father of the Nation RTI
http://www.ndtv.com/[...]
NDTV
[232]
뉴스
Constitution does not permit any titles
http://timesofindia.[...]
[233]
서적
An Autobiography
Bodley Head
[234]
웹사이트
Mahatma: Life of Gandhi, 1869–1948 (1968 – 5hrs 10min)
https://www.youtube.[...]
Channel of GandhiServe Foundation
[235]
웹사이트
Vithalbhai Jhaveri
http://www.gandhiser[...]
GandhiServe Foundatiom
[236]
간행물
The Case of the Missing Mahatma:Gandhi and the Hindi Cinema
http://jan.ucc.nau.e[...]
Duke University Press
[237]
서적
The Life of Mahatma Gandhi
http://archive.org/d[...]
Johnathan Cape
1957
[238]
웹사이트
Making of the Mahatma
http://www.hinduismt[...]
1997-02-01
[239]
웹사이트
Movies – Maine Gandhi Ko Nahin Mara (I Did Not Kill Gandhi) (2005)
https://www.bbc.co.u[...]
BBC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240]
웹사이트
Moving Images of Gandhi
http://www.vinaylal.[...]
[241]
서적
The MacKenzie Moment and Imperial History: Essays in Honour of John M. MacKenzie
https://books.google[...]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42]
서적
Writings on Glass: Essays, Interviews, Criticism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43]
서적
Words Without Music: A Memoir
https://books.google[...]
Liveright
[244]
웹사이트
It's fashionable to be anti-Gandhi
http://www.dnaindia.[...]
DNA
2005-10-01
[245]
뉴스
Drama king
http://www.livemint.[...]
2009-02-20
[246]
뉴스
Appreciating Gandhi Through His Human Side
https://www.nytimes.[...]
2011-03-29
[247]
뉴스
US author slams Gandhi gay claim
http://www.theaustra[...]
2011-03-29
[248]
뉴스
A Welcome Effort
http://www.thehindu.[...]
2011-02-28
[249]
웹사이트
Bharat Bhagya Vidhata' captivates the audience
https://thelivenagpu[...]
2019-03-05
[250]
뉴스
NEW YORK; Cole Porter's Lyrics Depend On the Music, But Even Solo They're So Easy to Love
https://www.nytimes.[...]
1987-11-01
[251]
서적
Contemporary issues in development economics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52]
뉴스
Obama Invokes Gandhi, Whose Ideal Eludes India
https://www.nytimes.[...]
2010-11-06
[253]
웹사이트
Reserve Bank of India – Bank Notes
http://www.rbi.org.i[...]
Rbi.org.in
[254]
웹사이트
Martyrs' Day
http://pib.nic.in/fe[...]
Press Information Bureau
[255]
웹사이트
Here, Gandhi is God
https://bangaloremir[...]
BangaloreMirror.com
2010-10-02
[256]
웹사이트
Mahatma Gandhi Temple
http://www.mahatmaga[...]
[257]
서적
The Rough Guide to South India
https://books.google[...]
Rough Guides
[258]
뉴스
Lodged in old age home in Delhi, Gandhi's grandson looks to Rajkot
https://www.hindusta[...]
2016-06-22
[259]
뉴스
Kanu Gandhi, Gandhiji's grandson and ex-Nasa scientist, dies
https://www.hindusta[...]
2016-11-08
[260]
문서
現地の発音に近づけるため、近年ではガンディーと呼ぶのが主流。
[261]
웹사이트
Nobel Prize Nomination Archive Search
https://www.nobelpri[...]
[262]
웹사이트
Mahatma Gandhi, the Missing Laureate
https://www.nobelpri[...]
[263]
웹사이트
RSS was opposed to India’s freedom struggle, its flag
https://gulfnews.com[...]
2020-08-17
[264]
문서
間 2023
[265]
웹사이트
ネール・ガンジー家
https://www.jiji.com[...]
[266]
서적
世界伝記大事典 3
株式会社ほるぷ出版
1980-12-20
[267]
서적
ガンジー 人と思想28
株式会社清水書院
1969-09-30
[268]
서적
ラルース 図説 世界史人物百科
原書房
[269]
문서
ライフ誌のマーガレット・バーク=ホワイトによるガンディー撮影エピソード
[270]
문서
キリスト教に関する記述
[271]
문서
長崎 1989
[272]
서적
ラルース 図説 世界史人物百科
原書房
[273]
서적
ガンジーとネルー -インド思想の現代における再生
中央公論社
1967-04-10
[274]
문서
インド独立時のパキスタンに関する記述
[275]
서적
Memory, Nationalism, and Narrative in Contemporary South Asia
https://www.google.c[...]
Palgrave Macmillan
2012-09-25
[276]
서적
Last Glimpses of Bapu
https://archive.org/[...]
Dehli ,SL Agarwala
[277]
뉴스
ガンジー没後70年 くすぶる暗殺者崇拝 非暴力「消えつつある」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8-02-01
[278]
서적
バングラデシュ・パキスタン・スリランカの投資・会社法・会計税務・労務
https://books.google[...]
出版文化社
[279]
서적
Mahatma Gandhi and His Apostles
https://books.google[...]
Penguin UK
2013-12-15
[280]
웹사이트
インド独立の父ガンジーが 荼毘に付された神聖なる場所
https://crea.bunshun[...]
[281]
뉴스
世界の11の暗殺現場
https://www.cnn.co.j[...]
CNN.co.jp
2018-09-08
[282]
서적
The life of Mahatma Gandhi
https://books.google[...]
Harper
1950
[283]
서적
新装版 オーウェル評論集2 水晶の精神
平凡社
2009
[284]
문서
間 2023
[285]
문서
ドリージュ 2002
[286]
문서
ヒンドゥー・ダルマ
[287]
문서
ドリージュ 2002
[288]
문서
分離すれど平等
[289]
문서
ヒンドゥー・ダルマ
[290]
서적
食べ物と健康おもしろ雑学
梧桐書院
1991
[291]
서적
食べ物と健康おもしろ雑学
梧桐書院
1991
[292]
문서
インド・パキスタン分離独立
[293]
서적
NHK 知るを楽しむ 私のこだわり人物伝 '08 12 '09 1月
[294]
웹사이트
Hind Swaraj (1938 edition)
s:en:Hind Swaraj (19[...]
[295]
서적
ガーンディー自叙伝
[296]
서적
ガンジー自叙伝
[297]
문서
ドリージュ 2002
[298]
문서
ガンディーと使徒たち
[299]
문서
ドリージュ 2002
[300]
문서
ガンディーと使徒たち
[301]
문서
メータ 2004
[302]
문서
Parekh 1999
[303]
문서
エリクソン 2002b
[304]
문서
間 2019, 間 2023
[305]
뉴스
インド/ガンジーの道場 今も活気
日経産業新聞
2018-03-15
[306]
뉴스
暗殺70年 ガンジーの「寛容」今こそ/インド イスラムを襲撃 増加
読売新聞
2018-01-31
[307]
뉴스
両陛下、ガンジー廟に53年ぶり供花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3-12-03
[308]
문서
なし
[309]
뉴스
ガンジー 没後70年/インド 根強い差別/暗殺者「復権」広がる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8-01-29
[310]
문서
ムンバイヤー・ヒンディー
[311]
뉴스
マハトマ・ガンジーが黒人差別? 抗議受けガーナの大学が像を撤去
https://web.archive.[...]
AFPBB
2018-12-15
[312]
웹사이트
Gandhi (Civ5)
https://civilization[...]
[313]
웹사이트
Nuclear Gandhi
https://joke-battles[...]
[314]
Youtube
Dropping the Bomb in Civilization 6
https://www.youtube.[...]
[315]
웹사이트
Civilization6 Wiki - 用語集
https://civ6wiki.inf[...]
[316]
웹사이트
간디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317]
뉴스
인촌 김성수 선생이 일제강점기 1926년 ‘인도 독립의 횃불’ 간디에게 보낸 편지 발견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0-07-07
[318]
뉴스
횡설수설/정성희 올해의 인물 ‘You’
http://www.donga.com[...]
donga.com
2006-12-18
[319]
뉴스
노벨평화상의 위선을 밝힌다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7-10-23
[320]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321]
서적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 오류사전
지원북클럽
2003
[322]
웹사이트
간디와 기독교
http://www.dabia.net[...]
[323]
뉴스
간디와 맞서 싸운 불가촉천민, 암베드카르
https://www.hankooki[...]
한국일보
2019-03-06
[324]
뉴스
가나, ‘인종차별 논란’ 간디 동상 철거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18-12-17
[325]
뉴스
인도가 연세대에 '간디 흉상'을 기증한 이유는?
https://news.mt.co.k[...]
머니투데이
2019-02-21
[326]
뉴스
‘비폭력’간디, 동성애 연인과 살기위해 부인 버렸다?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1-03-29
[327]
뉴스
아버지 그늘에서 ‘망가진 자식들’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28]
서적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 오류사전
지원북클럽
2003
[329]
서적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 오류사전
지원북클럽
2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