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발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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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브리엘 발렌시아는 19세기 멕시코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841년 시우다델라 계획을 주도하고, 1845년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가담했다. 그는 또한 1846년 3일 동안 멕시코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콘트레라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지휘했다. 1847년 멕시코시티 방어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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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발렌시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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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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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직책 | 멕시코 대통령 |
임기 시작 | 1845년 12월 30일 |
임기 종료 | 1846년 1월 2일 |
이전 대통령 |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
다음 대통령 | 마리아노 파레데스 |
2. 1841년 시우다델라 계획
1840년과 1841년 멕시코에서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부스타만테는 중앙 집권당을 지지했다. 1840년 7월 15일, 호세 우레아 장군과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가 이끄는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부스타만테를 체포했으나, 이후 석방했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가브리엘 발렌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마리아노 파레데스 이 아리야가는 과달라하라에서, 후안 알바레스는 남부에서, 산타 안나는 페로테에서 부스타만테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1841년 9월 4일, 발렌시아는 '시우다델라 계획(Plan de la Ciudadela)'을 발표하며 반란에 가담했다.[1]
부스타만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군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두 번째로 유럽(이탈리아)으로 망명했다. 부스타만테에 대항했던 장군들은 '타쿠바야 계획(Plan de Tacubaya)'을 통해 정치적 합의를 이루었다. 이 계획에 따라 대통령직이 공석으로 선언되고, 제헌 의회 소집을 위한 선거를 위해 임시 대통령이 임명되었다. 임시 대통령은 산타 안나였으며, 이는 그의 여섯 번째 대통령 임기였다.
2. 1. 부스타만테 정부에 대한 반란
1840년과 1841년에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멕시코 대통령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부스타만테는 중앙 집권당의 지지자였다. 1840년 7월 15일, 호세 우레아 장군과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가 이끄는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부스타만테 대통령을 체포했으나, 이후 석방했다. 가브리엘 발렌시아 장군은 참모총장으로서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1]그 직후 마리아노 파레데스 이 아리야가는 과달라하라에서, 후안 알바레스는 남부에서,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페로테에서 부스타만테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1841년 9월 4일, 발렌시아는 ''Plan de la Ciudadela(시우다델라 계획)''을 발표하며 반란에 가담했다.[1]
2. 2. 시우다델라 계획 주도
1840년과 1841년에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이 있었다. 부스타만테는 중앙 집권당의 지지자였다.[1] 1840년 7월 15일, 호세 우레아 장군과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가 이끄는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부스타만테 대통령을 체포했지만, 이후 그를 석방했다. 참모총장인 가브리엘 발렌시아 장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1]그 직후 마리아노 파레데스 이 아리야가는 과달라하라에서, 후안 알바레스는 남부에서, 그리고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페로테에서 부스타만테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1841년 9월 4일, 발렌시아는 ''Plan de la Ciudadela(시우다델라 계획)''을 발표하며 반란에 가담했다.[1]
부스타만테는 직접 전장에 나서 반군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두 번째로 유럽(이탈리아)으로 망명했다.[1]
2. 3. 타쿠바야 계획과 산타 안나 집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에 대항하는 장군들은 타쿠바야 계획(Plan de Tacubaya)으로 선포된 정치적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계획은 대통령직의 공석을 선언하고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 대통령을 임명했다. 임시 대통령은 로페스 데 산타 안나였으며, 이것은 그의 여섯 번째 대통령 임기였다.3. 1845년 에레라 대통령 축출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대통령은 1844년 12월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가 1845년 9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노 파레데스 이 아릴라가 장군이 에레라 대통령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 에레라 대통령은 북미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하겠다고 발표했고, 파레데스는 이 기회를 틈타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당시 멕시코 시티 수비대를 지휘하던 발렌시아는 파레데스를 지지했고, 결국 에레라는 발렌시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2]
3. 1. 파레데스의 반란과 발렌시아의 가담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는 여러 차례 대통령직 변동(산타 안나의 두 번의 추가 임시 집권 포함) 이후, 1844년 12월 17일 임시 대통령이 되었고, 1845년 9월 16일 헌법에 따른 대통령이 되었다. 이틀 전, 마리아노 파레데스 이 아릴라가 장군은 에레라에 반대하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1845년 12월 에레라는 살티요에 도착한 북미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출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파레데스 장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했고, 1845년 12월 30일, 당시 멕시코 시티 수비대를 지휘하던 발렌시아 장군은 파레데스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에레라는 발렌시아에게 권력을 넘겼다.[2]
4. 멕시코 임시 대통령 재임 (1846)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대통령이 사임하자, 법에 따라 정부 위원회 의장이었던 가브리엘 발렌시아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발렌시아의 임기는 1846년 1월 2일부터 1월 4일까지 3일간이었다.[1]
4. 1. 군사 정부 구성과 파레데스 대통령 선출
법에 따라, 정부 위원회 의장인 가브리엘 발렌시아는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대통령의 사임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다. 이는 권력 이양을 위해서만 임시로 임명된 직책이었다. 멕시코시티 대주교 마누엘 포사다가 이끄는 군사 정부가 소집되었다. 1846년 1월 2일, 이 군사 정부는 마리아노 파레데스 장군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1] 발렌시아의 임기는 3일 동안 지속되었다.5. 미국-멕시코 전쟁 참전 (1847-1848)
1847년, 발렌시아 장군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 맞서 멕시코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미군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4]
산타 안나와의 갈등으로 인해 발렌시아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콘트레라스 전투에서 발렌시아는 자신의 위치를 넘어 진격했고, 산타 안나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멕시코군은 큰 패배를 당했다. 이후 발렌시아의 군대는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산타 안나 군대와 합류했지만, 미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멕시코군은 차풀테펙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멕시코시티가 함락되었다.
5. 1. 콘트레라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가브리엘 발렌시아 장군은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윈필드 스콧 장군의 미군에 맞선 멕시코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847년 8월 19일, 스콧의 군대는 멕시코시티 근처 콘트레라스 전투에서 발렌시아 군대를 공격했다. 발렌시아는 로페스 데 산타 안나와의 경쟁 때문에 자신의 지정된 위치를 넘어 진격했고, 산타 안나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멕시코군은 8월 20일에 크게 패배했다.[4]이후 발렌시아 군대의 잔여 병력은 추루부스코 전투로 후퇴하여 산타 안나의 군대에 합류했다. 스콧은 진격을 계속했고, 멕시코군은 차풀테펙(9월 13일)에서 다시 패배하여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이 열렸다. 마침내 9월 16일에 멕시코시티는 점령되었다.
5. 2. 차풀테펙 전투와 멕시코시티 함락
1847년, 가브리엘 발렌시아 장군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윈필드 스콧 장군의 미군에 맞서는 멕시코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847년 8월 19일, 스콧의 군대는 멕시코시티 근처 콘트레라스 전투에서 발렌시아 군대를 공격했다. 발렌시아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사이의 경쟁 때문에 발렌시아는 자신의 지정된 위치를 넘어 진격했고, 산타 안나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멕시코군은 8월 20일에 크게 패배했다.[4]발렌시아 군대의 잔여 병력은 추루부스코 전투로 후퇴하여 산타 안나의 군대에 합류했다. 스콧은 진격을 계속했고, 멕시코군은 차풀테펙 전투(9월 13일)에서 다시 패배하여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이 열렸고, 마침내 9월 16일에 멕시코시티가 함락되었다.
6. 죽음
발렌시아는 미국 군에 포위된 멕시코시티 국립궁전을 방어하다가 전투 중 사망했다.[5]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ies: Gabriel Valencia | A Continent Divided: The U.S.-Mexico War
https://library.uta.[...]
[2]
서적
Enciclopedia Política de México 9 Tomo V.
http://www.senado.go[...]
Senado de la República - Instituto Belisario Domínguez
2010
[3]
웹사이트
BHMI16
http://www.geocities[...]
2009-10-26
[4]
웹사이트
PBS Video Database: U.S.-Mexican War: Episode 4: Chapter 1
http://videoindex.pb[...]
2006-09-30
[5]
웹사이트
Gral. Gabriel Valencia (1799-1848)
http://www.chihuahua[...]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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