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1. 개요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1781–1858)는 멕시코의 정치인으로, 과달라하라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33년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가톨릭 교회와 군대를 겨냥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보수파의 반발과 산타 안나의 배신으로 실각했다.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 중 두 번째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교회 재산 국유화를 시도했으나 폴코 반란으로 물러났다. 말년에는 자유주의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며, 1857년 헌법 제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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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Valentín Gómez Farías |
|---|---|
| 출생일 | 1781년 2월 14일 |
| 출생지 | 과달라하라, 신 갈리시아 왕국, 누에바에스파냐(현재 할리스코 주, 멕시코) |
| 사망일 | 1858년 7월 5일 |
| 사망지 | 멕시코 시티, 멕시코 |
| 모교 | 과달라하라 왕립 대학교 |
| 정당 | 자유주의 |
| 서명 | Firma de Valentín Gómez Farías.png |
| 로마자 표기 | Balentín Gomes Farias |
| 멕시코 대통령 | 제7대 |
|---|---|
| 임기 시작 1 | 1833년 4월 1일 |
| 임기 종료 1 | 1833년 5월 16일 |
| 부통령 1 | 본인 |
| 전임자 1 |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
| 후임자 1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임기 시작 2 | 1833년 6월 3일 |
| 임기 종료 2 | 1833년 6월 18일 |
| 부통령 2 | 본인 |
| 전임자 2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후임자 2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임기 시작 3 | 1833년 7월 5일 |
| 임기 종료 3 | 1833년 10월 27일 |
| 부통령 3 | 본인 |
| 전임자 3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후임자 3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임기 시작 4 | 1833년 12월 16일 |
| 임기 종료 4 | 1834년 4월 24일 |
| 부통령 4 | 본인 |
| 전임자 4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후임자 4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임기 시작 5 | 1846년 12월 23일 |
| 임기 종료 5 | 1847년 3월 21일 |
| 부통령 5 | 본인 |
| 전임자 5 |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 |
| 후임자 5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멕시코 부통령 | 제3대 및 제5대 |
| 임기 시작 6 | 1833년 4월 1일 |
| 임기 종료 6 | 1835년 1월 26일 |
| 부통령 6 | 본인 (3회)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3회) |
| 전임자 6 |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
| 후임자 6 | 니콜라스 브라보 |
| 임기 시작 7 | 1846년 12월 23일 |
| 임기 종료 7 | 1847년 4월 1일 |
| 부통령 7 | 본인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 전임자 7 | 니콜라스 브라보 |
| 후임자 7 | 직위 폐지 라몬 코랄(직위 재설정) |
| 멕시코 상원 의장 | 제8대 |
| 임기 시작 8 | 1825년 1월 1일 |
| 임기 종료 8 | 1825년 1월 31일 |
| 전임자 8 | '직위 신설' |
| 후임자 8 | 시몬 데 라 가르사 |
| 멕시코 재무부 장관 | 제18대 |
|---|---|
| 임기 시작 9 | 1833년 2월 2일 |
| 임기 종료 9 | 1833년 3월 31일 |
| 대통령 9 |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
| 전임자 9 |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
| 후임자 9 | 호세 마리아 보카네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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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스코주 출신 -
이사크 브리수엘라
이사크 브리수엘라는 엘살바도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2019년, 2021년, 2023년 CONCACAF 골드컵에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참가했다. -
할리스코주 출신 -
에스메랄다 피멘텔
에스메랄다 피멘텔은 멕시코의 배우이자 모델로, 의류 브랜드 모델 활동과 텔레비전 광고 출연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누에스트라 벨레자 할리스코' 우승 후 텔레비사 예술 교육 센터에서 연기 훈련을 받고 2009년 텔레노벨라 '베라노 데 아모르'로 데뷔하여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활동하고 있다. -
멕시코의 부통령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1794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활동하며 멕시코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여러 차례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하며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텍사스 혁명과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패배하며 멕시코의 영토 손실을 초래했다. -
멕시코의 부통령 -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멕시코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하며 보수적인 정책을 펼쳐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텍사스 독립 문제와 과자 전쟁 등에 직면했으며, 잦은 반란으로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
멕시코의 자유주의 -
비센테 게레로
비센테 게레로는 멕시코 독립 전쟁에서 활약한 독립 영웅이자 정치 지도자로, 1829년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하며 노예제 폐지 등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반란으로 해임 후 처형되었고, 사후 멕시코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
멕시코의 자유주의 -
베니토 후아레스
베니토 후아레스는 1806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변호사,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멕시코 공화국을 수호하고 개혁 정책을 펼쳤으며, 멕시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1781년 2월 14일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일부였던 할리스코 주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인 과달라하라에 있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프랑스어를 익혔고, 당시 누에바에스파냐 사회에 퍼지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어 멕시코 종교 재판소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별다른 법적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과달라하라에서 의사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17년 10월 17일, 그는 아구아스칼리엔테스에서 이사벨 로페스와 결혼했다.
3. 멕시코 독립과 정치 입문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이구알라 계획을 통해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주도로 성공하면서 멕시코는 군주국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때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고, 고메스 파리아스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스페인 왕족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이투르비데 지지자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고메스 파리아스 역시 이 시기 이투르비데를 지지하며, 의회에서 그를 황제로 선출하는 것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자유주의자였던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가 입헌 군주로서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지만, 이투르비데는 점차 의회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여기며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대파로 돌아섰다.
1823년 멕시코 제국이 무너진 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 초대 대통령이 된 과달루페 빅토리아를 지지했다.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시기에는 로렌조 데 사발라가 재무장관직을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4. 첫 번째 대통령 재임 (1833-1834)
1833년 3월 선거에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각각 부통령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직위를 공유하며 번갈아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로 했으나, 전임 대통령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의 임기가 법적으로 끝나는 4월 1일에 산타 안나가 수도에 없었기 때문에 고메스 파리아스가 먼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는 고메스 파리아스를 통해 가톨릭 교회와 군대를 겨냥한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여론을 떠보려는 산타 안나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4.1. 반성직자 정책과 개혁
고메스 파리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언론은 점차 반성직자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위선자로 비난받았으며, 성경은 무지한 시대의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받았다. 교황의 권위 또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멕시코의 독립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선언하며, 성직자들이 외세에 복종한다고 비판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아즈텍의 우이칠로포치틀리(인간 제물을 받았던 신) 사제, 바리새인, 귀족 등으로 모욕당했다. 반성직자 작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의회의 연설을 인용하기도 했다.
사제들은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장관은 교황 칙서 및 기타 교황의 포고령이 정부의 승인 없이는 멕시코에서 발행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33년 성주간 동안 국회가 휴회하지 않도록 하는 제안이 있었으나, 통과되지는 못했다.
당시 로렌조 데 자발라가 주지사로 있던 멕시코주는 십일조 납부의 법적 의무를 폐지했다. 베라크루스 의회와 다른 주 의회들도 종교 공동체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베라크루스 주는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부가 모든 종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우려를 낳았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그러한 의도가 없다는 해명 메시지를 발표해야 했다.
1833년 10월 27일, 전국적으로 십일조 납부의 법적 의무를 폐지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하원 위원회는 모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는 법으로 제정되지는 못했다. 1833년 11월 6일에는 수도원 서약을 이행할 법적 의무가 폐지되었으며, 1833년 12월 17일에는 멕시코 정부가 교회 고위직을 임명할 권한, 즉 "파트로나토 레알"을 갖는다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정부 승인 없이 이루어진 이전의 임명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개혁가들은 십일조 납부 의무 폐지로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계속해서 십일조를 납부했다.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수도원을 떠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수도사와 수녀들은 공동체에 남았다.
1833년 10월에는 성직자들의 교육 활동이 금지되었고, 교회가 운영한다는 이유로 멕시코 대학교가 폐쇄되었다. 대학교의 예배당은 양조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1834년에는 반성직자 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종교 축제와 관련 행사가 전국적으로 금지되었고, 성직자들은 정부 허가 없이 형제회를 조직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원과 교회가 압수되었으며, 일부 교회는 극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4.2. 보수파 탄압과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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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스 파리아스가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전 행정부의 각료들은 대부분 잠적했으며,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라파엘 망기노 이 멘디빌만이 예외였다. 부스타만테 행정부 인사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833년 6월 23일, 전국적으로 봉기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의회는 소위 사건의 법(Ley del Caso스페인어)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정부의 적으로 간주된 51명에 대한 체포와 6년간의 추방을 승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추방 대상에는 전 대통령 부스타만테를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