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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하라 기요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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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사하라 기요시게는 시나노국 사쿠군의 국인이자 시가 성의 성주였다. 그는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침공에 대항하여,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시가 성은 함락되었고, 기요시게는 사망했다. 시가 성 함락 이후, 가사하라 씨는 쇠퇴하고, 다케다 씨의 가혹한 처사에 시나노 국인들은 반발하여, 토이시 성 전투에서 다케다 군이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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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하라 기요시게
기본 정보
가사하라 씨의 가몬
가사하라 씨의 가몬
인물 정보
이름가사하라 기요시게
본명가사하라 야스쓰구 (笠原弥次郎)
별명도라쿠로 (虎蔵)
생몰년도간세이 11년 ~ 게이오 4년 4월 25일 (1799년 ~ 1868년 5월 17일)
출생지일본 무사시국 고다마군 령 가미오노다 (현재의 사이타마현 혼조시)
사망지일본 무사시국 고다마군 령 가미오노다 (현재의 사이타마현 혼조시)
신분고즈케국 누마타 번 가로
씨족가사하라 씨
부모아버지: 가사하라 기요카즈, 어머니: 미상
배우자미상
자녀가사하라 나가타다
가사하라 다쓰지로
가사하라 기요무네
가사하라 쓰네
가사하라 미치
가사하라 요시
가사하라 기요시게
이름笠原 清繁
로마자 표기Kasahara Kiyoshige
다른 이름笠原 弥次郎 (Kasahara Yajirō)
별칭虎蔵 (Torakuro)
생년월일간세이 11년 (1799년)
사망일게이오 4년 4월 25일 (1868년 5월 17일)
출신지무사시국
직업누마타 번 가로
씨족가사하라 씨

2. 생애

가사하라 기요시게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시나노국 사쿠군의 국인이자 시가 성(나가노현 사쿠시 시가)의 성주였다. 그는 요다 가사하라 씨 출신으로, 본래 스와 씨의 일족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이국다케다 신겐(당시 하루노부)이 덴분 10년(1541년) 가독을 계승하고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하자, 기요시게는 이에 맞서 저항했다. 덴분 16년(1547년), 그는 고즈케국 히라이 성(군마현 후지오카시)의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인척 관계였던 다카다 노리요리 등의 원군을 얻어 봉기했다.

그러나 다케다 군은 같은 해 윤7월부터 시가 성을 공격했고, 우에스기 측의 추가 원군마저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격파했다. 외부의 지원이 끊긴 시가 성은 결국 덴분 16년(1547년) 8월 11일에 함락되었고, 기요시게는 성 함락 과정에서 오기와라 마사아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1]

2. 1. 다케다 신겐의 침공과 저항

사쿠군・오가타군 지도


요다 가사하라 씨는 시나노국 사쿠군의 국인으로, 시가 성(나가노현 사쿠시 시가)의 성주였다. 본래 스와 씨의 일족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이국 수호 다케다 하루노부(신겐)는 덴분 10년(1541년)에 가독을 계승한 후 시나노 침공을 개시하여 스와군과 기타사쿠군을 공략했다. 덴분 15년(1546년) 5월에는 사쿠군 우치야마 성(사쿠시 우치야마)의 성주 오이 사다키요를 항복시켰다(『고하쿠사이키』)[1]

덴분 16년(1547년), 기요시게는 고즈케국 히라이 성(군마현 후지오카시)에 거점을 둔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에스기 측 무장이자 기요시게와 인척 관계였던 니시조즈케 스가와라 성 성주 다카다 노리요리의 원군을 얻어 다케다 씨에 맞서 봉기했다. 같은 해 윤7월 24일, 다케다 군은 시가 성 공격을 시작하여 성을 포위했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추가로 가나이 히데카게 등 니시조즈케 무사들을 원군으로 파견했으나, 다케다 측은 오다이하라 전투(나가노현 기타사쿠군 미요타정)에서 이들을 격퇴했다(『고하쿠사이키』, 『가쓰야마키』).

오다이하라 전투 패배로 구원군이 끊긴 시가 성은 결국 8월 11일에 함락되었다(『고하쿠사이키』, 『가쓰야마키』)[1]。 이로써 다케다 측은 니시조즈케 방면을 확보하고 오가타군 공략을 시작하게 된다. 기요시게는 성 함락 시 오기와라 마사아키에게 살해당했으며, 향년 33세였다.

『가쓰야마키』에 따르면, 기요시게의 후실은 다케다 가신이자 가이 쓰루군 영주인 오야마다 노부아리(데와노카미)의 측실이 되어 쓰루군 고마하시(야마나시현 오츠키시)로 보내졌다[2]。 에도 시대 후기의 『가이코쿠시』에는 기요시게 후실에 관한 고마하시의 전승이나 동요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쓰야마키』는 다케다 군이 사쿠군에서 란보토리(약탈 및 인신매매)를 자행했으며, 시가 성에서 농성하던 남녀를 생포하여 노예로 가이국으로 끌고 가 2칸몬에서 10칸몬의 몸값으로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다[3]

2. 2. 시가 성 전투와 최후



요다 카사하라 씨는 시나노국 사쿠군의 국인으로, 시가 성(나가노현 사쿠시 시가)의 성주였다. 본래 스와 씨의 일족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이국의 수호 다케다 하루노부(신겐)는 덴분 10년(1541년)에 가문을 계승한 뒤 시나노 침공을 개시하여 스와군과 기타사쿠군을 공략했다. 덴분 15년(1546년) 5월에는 사쿠군 우치야마 성(사쿠시 우치야마)의 성주 오이 사다키요를 항복시켰다(『고하쿠사이키』)[1]

덴분 16년(1547년), 기요시게는 고즈케국 히라이 성(군마현 후지오카시)에 거점을 둔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에스기 가문의 무장이자 기요시게와 인척 관계였던 니시조즈케 스가와라 성 성주 다카다 노리요리의 원군을 얻어 다케다 씨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다케다 군은 같은 해 윤7월 24일에 시가 성 공격을 시작했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카나이 히데카게 등 니시조즈케 무사들을 추가 원군으로 파견했지만, 다케다 측은 오다이하라 전투(나가노현 기타사쿠군 미요타정)에서 이 원군을 격퇴했다(『고하쿠사이키』『가쓰야마키』).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원군이 패배하면서 외부의 지원이 끊긴 시가 성은 결국 덴분 16년(1547년) 8월 11일에 함락되었다(『고하쿠사이키』『가쓰야마키』)[1]。 기요시게는 성이 함락될 때 오기와라 마사아키에게 살해당했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시가 성 함락 이후 다케다 측은 니시조즈케 방면으로 세력을 확보하고 오가타군 공략을 시작했다. 『가쓰야마키』에 따르면, 기요시게의 후처는 다케다 가신인 오야마다 노부아리(데와노카미)에게 보내져 그의 측실이 되었고, 가이국 쓰루군 코마하시(야마나시현 오츠키시)로 보내졌다고 한다[2]。 에도 시대 후기에 편찬된 『가이코쿠시』에는 코마하시 지역에 전해지는 기요시게 후처에 관한 전승이나 동요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쓰야마키』는 다케다 군이 사쿠군에서 란보토리(乱妨取り, 인신매매)를 자행하여, 시가 성에서 농성하다 생포된 남녀를 노예로 삼아 가이국으로 끌고 가 2칸몬에서 10칸몬의 몸값을 받고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다[3]。 이는 당시 전쟁의 참혹한 일면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3. 시가 성 함락 이후

덴분 16년(1546년) 시가 성 함락으로 시나노 가사하라씨는 사실상 궤멸했으며, 일족인 가사하라 미쓰사다는 고호조씨에게 망명했다. 다케다씨의 이러한 가혹한 처사는 시나노 국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이후 다케다씨와 무라카미 요시키요 세력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특히 덴분 19년(1549년) 토이시 성 전투에서는 시가 성 함락에 원한을 품은 병사들의 저항 끝에 다케다군이 무라카미군에게 대패하는 토이시 붕괴가 일어나기도 했다.[1]

3. 1. 가사하라 가문의 몰락과 시나노 국인들의 반발

덴분 16년(1546년) 시가 성 함락의 결과, 시나노 가사하라씨는 거의 궤멸 상태가 되었다. 일족인 가사하라 미쓰사다(노토노카미)는 도망쳐 고호조씨에게 의탁했다.

다케다씨 측의 이러한 가혹한 처사에 시나노의 국인들은 반발을 강화했고, 이는 이후 다케다 측과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덴분 19년(1549년), 다케다 측이 무라카미 측의 토이시 성을 공격했을 때, 성을 지키던 병사들 중에는 시가 성 함락 건으로 다케다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다케다 측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피폐해진 다케다군은 토이시 성을 구원하러 온 무라카미군 본대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배했는데, 이를 토이시 붕괴라고 한다.

3. 2. 토이시 성 전투

덴분 16년(1546년) 시가 성이 함락되면서 시나노 가사하라씨는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일족인 가사하라 미쓰사다(노토노카미)는 고호조씨에게 도망쳐 몸을 의탁했다.

다케다씨의 이러한 가혹한 처사에 대해 시나노의 국인들은 반발심을 키웠고, 이는 이후 다케다 측과 무라카미 요시키요 세력 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덴분 19년(1549년), 다케다 측이 무라카미 측의 토이시 성을 공격했을 때, 성을 지키던 병사들 중에는 과거 시가 성 함락 건으로 다케다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다케다 측은 예상보다 훨씬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공격으로 지친 다케다군은 토이시 성을 구원하러 온 무라카미군 본대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배했는데, 이를 토이시 붕괴라고 부른다.

참조

[1] 서적 山梨県史 資料編6上(県内記録)
[2] 논문 2013
[3] 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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