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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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즈케국은 고대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군마현과 도치기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4세기부터 율령제가 시행되기 전까지 게노국으로 불렸으며, 이후 가미쓰케노국과 시모쓰케노국으로 분할되었다가 713년 고즈케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고즈케국은 811년부터 황족이 통치하는 세 개의 주 중 하나였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말 생산으로 유명했다. 중세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를 받았으며,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 여러 번으로 분할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군마현이 형성되었고, 현재는 군마현의 대부분과 도치기현의 일부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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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의 유래
고대 일본에는 율령제를 실시하기 전, 고분 시대(古墳時代)부터 가토리 해로 흘러들어가는 게노 강(毛野川) 유역 일대를 거점으로 이즈모 신(出雲神)을 섬기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여 '게노 국(毛野國)'을 이루고 있었다.[2] 이들은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豊城入彦命)를 시조로 하는 게누 씨(毛野氏)로, 기비 씨(吉備氏)나 지쿠시 씨(筑紫氏)와 대등한 대호족으로서 고대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權)에 대해서도 강대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게노 국' 또는 '게누 씨'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야마토 왕권으로부터 '에미시(毛人)'가 사는 땅으로서 '털의 나라(毛の國)'라 불리던 것이 두 글자로 '게노(毛野)'로 정리되었다.
- '게(毛)'는 이모작(二毛作)의 '모(毛)'와 같으며, 벼와 같은 곡물을 가리킨다. 이 지역이 옛날 곡물 생산지였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
이 게노 국은 훗날 가미쓰케노쿠니노 미야쓰코(上毛野國造)의 영역과 시모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下毛野国造)로 나뉘는데, 이 중 가미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에서 영제국인 가미쓰케 국(上毛野國)이 성립되었다. 와도(和銅) 6년(713년)에 일본 국내의 여러 행정지명을 두 글자로 된 지명으로 바꾸도록 명한 율령에 따라 시모쓰케 국(下野國)과 짝을 맞추어 고즈케 국(上野國)이라 표기하게 되었다.[2][3][4] 한자로는 上野國이라고 적지만 읽을 때에는 가미노쿠니(かみのくに)가 아니라 가미쓰케노쿠니(かみつけのくに), 또는 고즈케노쿠니(こうずけのくに)로 읽는다.
다이호 율령 제정 당시 가미쓰케노는 '가미쓰케노 국(かみつけの/かみつけぬ)'으로서 령제국 중 하나로 정해졌다.[11] 이후 가미쓰케노 국, 시모쓰케노 국의 국명은 '고즈케 국', '시모쓰케 국'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모(毛)'자는 사라졌지만 '코즈'''케'''노쿠니'로 읽음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모(じょうもう)'라는 별칭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와묘루이주쇼(和名類聚抄)에는 '가산쓰케노', 만엽집(万葉集)에는 '가미쓰케누', '가미쓰케노' 등의 표기가 보인다. 나라 시대 무렵까지는 '가미쓰케누'로 읽다가 후세에 '가미쓰케노'로 읽기가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역사
헤이안 시대인 811년부터 고즈케는 히타치,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인 친왕임국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고즈케노스케(上野介)가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826년에는 좋은 말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칙지목이 설치되었다.
나라 시대 이전의 석비 중 전국에 10여 개 밖에 현존하지 않는 석비 중 3개가 타고군에 있다. 후지와라 궁 목간에는 조게노 국(上毛野国)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쿠가가 있던 고쿠후는 군마군에 있었으며, 현재의 마에바시시 모토소자마치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그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고쿠분지 터, 고쿠분니지 터, 소자 신사가 있다.
덴케이 연간에 간토 동부에서 내란을 일으킨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고즈케국 국부를 함락하고 일시적으로 고즈케국을 지배했지만,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에 의해 토벌되었다. 히데사토의 자손은 고즈케 각지로 진출하여 후치나, 사이, 아즈마, 소노다, 오고, 야마가미 등의 일족으로 나뉘어 유력한 무사단으로 성장했다.
1108년, 아사마산 분화로 고즈케국 일원의 농경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황폐해진 경작지는 재지 영주의 대규모 재개발로 사령이 되었고, 그 권익을 지키기 위해 중앙 귀족에게 기진되어 장원이 성립되었다. 고즈케국의 장원으로는 하치만 장원, 후치나 장원, 도이데카사시나 장원, 사누키 장원, 아즈마 장원, 닛타 장원과 이세 신궁의 미쿠리야인 다마무라 미쿠리야, 호소이 미쿠리야, 오라쿠 미쿠리야가 있었다. 이러한 장원 개발에 성공한 것은 히데사토류 후지와라 씨와, 신세력으로 진출한 미나모토노 요시시게에서 시작된 닛타 씨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하에, 고즈케 국의 슈고(守護)로 임명된 것은 우에스기 씨였다. 야와타 장원이 슈고령으로 지정되었고, 슈고쇼는 이타하나에 설치되었다. 다만, 우에스기 씨는 간토 간레이를 겸임하여 가마쿠라에 있었고, 현지 지배는 슈고다이인 나가오 씨에게 위임되었다. 나가오 씨는 소샤(惣社)와 시라이(白井)의 두 가문으로 나뉘어 각각 고즈케 국부, 시라이 성에 거점을 구축했다.
센고쿠 시대 동안, 고즈케는 후호조씨, 다케다씨, 우에스기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누마타번, 마에바시번, 안나카번, 다카사키번, 이세사키번, 나노카이치번, 요시이번, 오바타번, 다테바야시번이 설치되었다. 이 외에 메이지 유신까지 실질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번으로 소자번, 나바번, 이타하나번, 야다번, 고즈케 도요오카번, 오고번, 시라이번, 아오야기번, 가미사토미번, 시노즈카번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된 후, 주의 상당 부분이 여러 번에 할당되었다. 나카센도와 미쿠니 가이도 고속도로가 이 주를 통과했으며, 수많은 역참 마을이 건설되었다.
고즈케 국에 설치되었던 번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여러 번이 현이 되었다. 이 여러 현은 1876년에 합쳐져 군마현을 형성했다. 그 후 이 지역은 양잠업과 실 방적 산업의 발달로 번영했다.[2]
3. 1. 고대
율령제를 실시하기 전의 고대 일본에는 고분 시대부터 가토리 해로 흘러들어가는 게노 강(毛野川) 유역 일대를 거점으로 이즈모 신을 섬기는 호족들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 일종의 '게노 국(毛野國)'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를 시조로 하는 이들 게누 씨(毛野氏)는 기비 씨(吉備氏)나 지쿠시 씨(筑紫氏)와도 대등한 대호족으로서 고대 야마토 왕권에 대해서도 강대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문화권역은 지금의 일본 군마현 가부라 강(鏑川) 유역과 이노 강(井野川) 유역에 걸치는 폭넓은 것이었다.게노 국 또는 게누 씨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 일찍이 야마토 왕권으로부터 '에미시(毛人)'가 사는 땅으로서 '털의 나라(毛の國)'라 불리던 것이 두 글자로 '게노(毛野)'로 정리되었다.
- 게노국의 '게(毛)'란 이모작의 '모(毛)'와 같으며, 즉 벼와 같은 곡물을 가리킨다. 이 지역이 옛날 곡물 생산지였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게노 국은 훗날 가미쓰케노쿠니노 미야쓰코(上毛野國造)의 영역과 시모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下毛野国造)로 나뉘는데, 이 중 가미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에서 영제국의 가미쓰케 국(上毛野國)이 성립되었다(일본의 고대 사료에서는 두 구니가 원래 하나의 '게노 국'이었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그 나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 뒤 와도(和銅) 6년(713년)에 일본 국내의 여러 행정지명을 두 글자로 된 지명으로 바꾸도록 명한 율령에 따라 시모쓰케 국(下野國)과 짝을 맞추어 고즈케 국(上野國)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한자로는 上野國이라고 적지만 읽을 때에는 가미노쿠니(かみのくに)가 아니라 가미쓰케노쿠니(かみつけのくに), 또는 고즈케노쿠니(こうずけのくに)로 읽는다.
4세기 경(고분 시대) 오늘날의 군마현과 도치기현 지역은 문자 그대로 "털이 많은 들판"을 의미하는 게노 또는 케누|毛野|일본어로 알려졌지만, 황실 농업 지역을 지칭하는 식야|食野|일본어 또는 "식량 들판"의 아테지로 사용되었다.[2] 5세기 어느 시점에 이 지역은 기누가와 강을 기준으로 가미쓰케노|上毛野|일본어 ("상부 게노")와 시모쓰케노|下毛野|일본어 ("하부 게노")로 분할되었다. 나라 시대의 다이호 율령에 따라 이들 주는 가미쓰케노노쿠니|上毛野国|일본어와 시모쓰케노노쿠니|下毛野国|일본어가 되었다. 어느 시점에서 "들판"을 의미하는 ''no''는 소유격 조사 ''no''로 재해석되어, ''Kamitsuke''와 ''Shimotsuke''의 축약된 이름(쿠니|国|일본어 또는 "주" 부분 제외)이 생겼다. 713년, 주 이름을 두 개의 한자로 표준화하면서, 이 이름은 '''가미쓰케'''|上野|일본어와 '''시모쓰케'''|下野|일본어가 되었다. 이후의 정기적인 음운 변화로 인해 ''Kamitsuke''는 ''Kaudzuke''로, 그리고 현대의 ''Kōzuke''로 바뀌었다.[2][3][4]
일본서기에 따르면, 가미쓰케노쿠니노미야쓰코의 가미쓰케노노키미는 스진 천황의 장자이자 동국 통치를 맡았던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를 시조로 한다고 한다.[22] 또한, 조노는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가 에미시를 평정하고 히다카미국에서 서남쪽의 땅인 히타치국으로 돌아와 가이국에 이르러, 그 북쪽에 있어 따르지 않는 시나노 및 고시를 정벌하기 위해 무사시 및 '''조노'''를 경유하여 우스히 언덕을 올라 우스히 봉우리에서 동남쪽을 내려다보며 "아즈마자야"라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23]
또한, 서기에서는 가미쓰케노노키미는 닌토쿠 천황 시대에 신라와 싸워 포로를 얻었다고 하며, 그 후 덴지 천황 시대에는 백제가 신라에게 공격받았을 때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었다고 한다.[5] 이 사이 스이코 천황 9년(601년) 9월 8일에는 신라 첩자 가마타가 쓰시마에서 체포되어 조노로 유배되었으며[5], 조노국과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니노미야쓰코 혼기에서는 닌토쿠 천황 시대에 시모쓰케노쿠니노미야쓰코가 분치되었다고 한다.
와도 4년(711년)에 칸라 군의 오리모, 카라시나, 야타, 오오야의 4향, 미도노 군의 타케미 1향, 카타오카 군의 야마나 1향, 총 6향이 각 군에서 분리되어 타고 군이 신설되었고[24], 와묘루이쥬쇼가 성립될 당시에는 우스히, 카타오카, 칸라, 타고, 미도노, 나바, 군마, 아즈마, 토네, 세타, 사이, 니후타, 야마다, 오하라키의 총 14군이 있었다 (『와묘루이쥬쇼』).
3. 2. 율령 국가 성립
율령제를 실시하기 전 고대 일본에는 고분 시대부터 가토리 바다(香取海)로 흘러들어가는 게노 강(毛野川) 유역을 중심으로 이즈모 신(出雲神)을 섬기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여, '게노 국(毛野國일본어)'을 이루고 있었다. 豊城入彦命을 시조로 하는 이들 게누 씨(毛野氏일본어)는 기비 씨(吉備氏)나 지쿠시 씨(筑紫氏)와 대등한 대호족으로서 고대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權)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문화권역은 지금의 일본 군마현 가부라 강(鏑川) 유역과 이노 강(井野川) 유역에 걸치는 넓은 범위였다.게노 국 또는 게누 씨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일찍이 야마토 왕권으로부터 '에미시(毛人)'가 사는 땅으로서 '털의 나라(毛の國)'라 불리던 것이 두 글자로 '게노(毛野)'로 정리되었다.
- 게노 국의 '게(毛)'란 이모작(二毛作)의 '모(毛)'와 같으며, 즉 벼와 같은 곡물을 가리킨다. 이 지역이 옛날 곡물 생산지였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게노 국은 훗날 가미쓰케노쿠니노 미야쓰코(上毛野國造)의 영역과 시모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下毛野国造)로 나뉘는데, 이 중 가미쓰케누노쿠니노 미야쓰코에서 영제국(令制国)의 가미쓰케 국(上毛野國)이 성립되었다(일본의 고대 사료에서는 두 구니가 원래 하나의 '게노 국'이었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그 나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2] 그 뒤 와도(和銅) 6년(713년)에 일본 국내의 여러 행정지명을 두 글자로 된 지명으로 바꾸도록 명한 율령에 따라 시모쓰케 국(下野國)과 짝을 맞추어 고즈케 국(上野國)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한자로는 上野國이라고 적지만 읽을 때에는 가미노쿠니(かみのくに)가 아니라 가미쓰케노쿠니(かみつけのくに), 또는 고즈케노쿠니(こうずけのくに)로 읽는다.[2][3][4]
헤이안 시대인 고닌 2년(811년)부터 고즈케는 히타치와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인 친왕 임국(親王任国)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고즈케노스케(上野介)가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덴초 3년(826년)에는 좋은 말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칙지목이 설치되었다.
나라 시대 이전의 석비 중 전국에 10여 개 밖에 현존하지 않는 석비 중 3개가 다고군에 있다. 후지와라 궁 목간에는 조게노 국(上毛野国)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쿠가가 있던 고쿠후는 군마군에 있었으며, 현재의 마에바시시 모토소자마치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그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고쿠분지 터, 고쿠분니지 터, 소자 신사가 있다.
3. 3. 중세
덴케이 연간에 간토 동부에서 내란을 일으킨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고즈케국 국부를 함락하고 일시적으로 고즈케국을 지배했지만,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에 의해 토벌되었다.[1] 히데사토의 자손은 고즈케 각지로 진출하여 후치나, 사이, 아즈마, 소노다, 오고, 야마가미 등의 일족으로 나뉘어 유력한 무사단으로 성장했다.[1]덴닌 원년(1108년), 아사마산 분화로 고즈케국 일원의 농경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 황폐해진 경작지는 재지 영주의 대규모 재개발로 사령이 되었고, 그 권익을 지키기 위해 중앙 귀족에게 기진되어 장원이 성립되었다.[1] 고즈케국의 장원으로는 하치만 장원, 후치나 장원, 도이데카사시나 장원, 사누키 장원, 아즈마 장원, 닛타 장원과 이세 신궁의 미쿠리야인 다마무라 미쿠리야, 호소이 미쿠리야, 오라쿠 미쿠리야가 있었다.[1] 이러한 장원 개발에 성공한 것은 히데사토류 후지와라 씨와, 신세력으로 진출한 미나모토노 요시시게에서 시작된 닛타 씨였다.[1]
3. 4. 센고쿠 시대와 근세
센고쿠 시대 동안, 고즈케는 후호조씨, 다케다씨, 우에스기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된 후, 주의 상당 부분이 여러 번에 할당되었다. 나카센도와 미쿠니 가이도 고속도로가 이 주를 통과했으며, 수많은 역참 마을이 건설되었다.덴케이 연간에 간토 동부에서 내란을 일으킨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고즈케 국 국부를 함락하고, 일시적으로 고즈케 국을 지배했지만,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에 의해 토벌되었다. 히데사토의 자손은 고즈케 각지로 진출하여, 후치나, 사이, 아즈마, 소노다, 오고, 야마가미 등의 일족으로 나뉘어, 유력한 무사단으로 성장했다.
12세기 초 덴닌 원년(1108년), 아사마 산의 분화로 인해, 고즈케 국 일원의 농경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황폐한 경작지는 재지 영주의 대규모 재개발로 사령이 되었고, 그 권익을 지키기 위해 중앙의 귀족에게 기진되어, 장원이 성립된다. 고즈케 국의 장원으로는 하치만 장원, 후치나 장원, 도이데카사시나 장원, 사누키 장원, 아즈마 장원, 닛타 장원과, 이세 신궁의 미쿠리야로서 다마무라 미쿠리야, 호소이 미쿠리야, 오라쿠 미쿠리야가 있다. 이러한 장원의 개발에 성공한 것은 히데사토류 후지와라 씨와, 신세력으로서 진출한 미나모토노 요시시게에서 시작된 닛타 씨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하에, 고즈케 국의 슈고(守護)로 임명된 것은 우에스기 씨였다. 야와타 장원이 슈고령으로 지정되었고, 슈고쇼는 이타하나에 설치되었다. 다만, 우에스기 씨는 간토 간레이를 겸임하여 가마쿠라에 있었고, 현지 지배는 슈고다이인 나가오 씨에게 위임되었다. 나가오 씨는 소샤(惣社)와 시라이(白井)의 두 가문으로 나뉘어 각각 고즈케 국부, 시라이 성에 거점을 구축했다.
에도 시대에는 누마타번, 마에바시번, 안나카번, 다카사키번, 이사사키번, 나노카이치번, 요시이번, 오바타번, 다테바야시번이 설치되었다. 이 외에 메이지 유신까지 실질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번으로 소자번, 나바번, 이타하나번, 야다번, 고즈케 도요오카번, 오고번, 시라이번, 아오야기번, 가미사토미번, 시노즈카번이 있다.
3. 5. 근대
헤이안 시대 811년부터 고즈케는 히타치,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말 생산으로 유명했다.[2] 주의 원래 수도는 현재의 마에바시시에 위치했으며, 주의 고쿠분지와 소자도 함께 위치했다. ''이치노미야''는 현재의 토미오카시에 위치했다.덴케이 연간에 간토 동부에서 내란을 일으킨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고즈케 국 국부를 함락하고, 일시적으로 고즈케 국을 지배했지만,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에 의해 토벌되었다. 히데사토의 자손은 고즈케 각지로 진출하여, 후치나, 사이, 아즈마, 소노다, 오고, 야마가미 등의 일족으로 나뉘어, 유력한 무사단으로 성장했다.
12세기 초 덴닌 원년(1108년), 아사마 산의 분화로 인해, 고즈케 국 일원의 농경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황폐한 경작지는 재지 영주의 대규모 재개발로 사령이 되었고, 그 권익을 지키기 위해 중앙의 귀족에게 기진되어, 장원이 성립된다. 고즈케 국의 장원으로는 하치만 장원, 후치나 장원, 도이데카사시나 장원, 사누키 장원, 아즈마 장원, 닛타 장원과, 이세 신궁의 미쿠리야로서 다마무라 미쿠리야, 호소이 미쿠리야, 오라쿠 미쿠리야가 있다. 이러한 장원의 개발에 성공한 것은 히데사토류 후지와라 씨와, 신세력으로서 진출한 미나모토노 요시시게에서 시작된 닛타 씨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하에, 고즈케 국의 슈고(守護)로 임명된 것은 우에스기 씨였다. 야와타 장원이 슈고령으로 지정되었고, 슈고쇼는 이타하나에 설치되었다. 다만, 우에스기 씨는 간토 간레이를 겸임하여 가마쿠라에 있었고, 현지 지배는 슈고다이인 나가오 씨에게 위임되었다. 나가오 씨는 소샤(惣社)·시라이(白井)의 두 가문으로 나뉘어 각각 고즈케 국부, 시라이 성에 거점을 구축했다.
센고쿠 시대 동안, 고즈케는 후호조씨, 다케다씨, 우에스기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다.[2]
에도 시대에는 누마타번, 마에바시번, 안나카번, 다카사키번, 이사사키번, 나노카이치번, 요시이번, 오바타번, 그리고 다테바야시번이 설치되었다. 이 외에 메이지 유신까지 실질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번으로 소자번, 나바번, 이타하나번, 야다번, 고즈케 도요오카번, 오고번, 시라이번, 아오야기번, 가미사토미번 및 시노즈카번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된 후, 주의 상당 부분이 여러 번에 할당되었다. 나카센도와 미쿠니 가이도 고속도로가 이 주를 통과했으며, 수많은 역참 마을이 건설되었다.[2]
구고구령취조장에 기재되어 있는 메이지 초년 시점에서의 국내 지배는 다음과 같다[28](1,263 마을, 635,181석여). 막부령은 관동 재방걸의 이와하나 진야가 관할.
- 게이오 4년
- * 4월 3일(1868년5월 5일) - 오카베번이 번청을 이전하여 미카와'''한바라번'''이 된다. 비지령은 존속.
- * 6월 17일(1868년8월 5일) - 신정부가 이와하나 진야에 '''이와하나현'''을 설치. 막부령, 기토령을 관할.
- 메이지 초년
- * 마에바시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우스이군·나파군·군마군·세타군에서 막부령·기토령 등의 일부가 마에바시번의 관할이 된다.
- * 다테바야시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닛타군·야마다군·오라군에서 막부령·기토령 등의 일부가 다테바야시번의 관할이 된다.
- * 마에바시번·다테바야시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오라군의 마에바시번령이 다테바야시번령이 된다.
- * 이사사키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사이군에서 막부령·기토령 등의 일부가 이사사키번의 관할이 된다.
- * 가즈사 이치노미야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사이군의 비지령이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된다.
- * 가즈사 세이사이번의 개역, 데와 마쓰야마번의 감봉에 의해, 야마다군의 영지가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된다.
- 메이지 2년
- * 6월 - 데와 마쓰야마번이 '''쇼레이번'''으로 개칭.
- * 12월 26일(1870년1월 27일) - 요시이번이 폐번이 되어, 영지가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된다.
- 메이지 4년
- * 7월 14일(1871년8월 29일) - 폐번치현에 의해 번령이 '''마에바시현''', '''다카사키현''', '''안나카현''', '''오바타현''', '''나누카이치현''', '''이사사키현''', '''다테바야시현''' 및 쇼레이현, 이즈미현, 사노현, 이와쓰키현, 요도현, 한바라현, 니시하타현의 비지가 된다.
- * 10월 28일(1871년12월 10일) - 제1차 현 통합에 의해, 닛타군·야마다군·오라군을 제외한 가미노국 각 군이 '''군마현'''(제1차)의 관할이 된다. 군마군 다카사키정에 현청을 설치. 일시적으로 닛타군·야마다군의 마에바시현의 관할 지역도 관할.
- * 11월 14일(1871년12월 25일) - 제1차 현 통합에 의해, 닛타군·야마다군·오라군이 '''도치기현'''의 관할이 된다. 시모쓰케국쓰가군도치기정에 현청을 설치.
- 메이지 6년(1873년)6월 15일 - 군마현(제1차)이 이리마현과 합병하여 '''구마가야현'''이 된다. 무사시국오사토군구마가야역에 현청을 설치.
- 메이지 9년(1876년)8월 21일 - 제2차 현 통합에 의해, 구마가야현이 무사시국의 관할 지역을 사이타마현에 합병, 도치기현으로부터 야마다군·닛타군·오라군을 편입한 후, 현청을 군마군 다카사키정으로 이전하여 '''군마현'''(제2차)으로 개칭. 가미노국 전역이 군마현의 관할이 된다.
- 쇼와 35년(1960년)7월 1일 - 야마다군야바가와촌의 일부(오아자 야바·우에키노의 각 일부를 제외)가 도치기현아시카가시에 편입.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여러 번이 현이 되었다. 이 여러 현은 1876년에 합쳐져 군마현을 형성했다. 그 후 이 지역은 양잠업과 실 방적 산업의 발달로 번영했다.[2]
4. 영역
고즈케국의 영역은 대체로 현재의 군마현에 해당하나, 기류시 내의 기류 강 동쪽은 포함되지 않는다.[28] 이전의 군마 현은 고즈케 국과 완벽하게 동일한 범위였으나, 1959년에 도치기현의 아시카가군 히시무라(菱村)가 1968년에 아소 군 다누마마치의 뉴히코마(入飛駒) 지구가 모두 기류 시에 합병되고, 1960년에 야마다 군의 야바가와무라(矢場川村) 일부가 도치기 현 아시카가시에 편입되면서 옛 시모쓰케국과의 경계가 바뀌어 군마 현이 고즈케 국보다 조금 더 넓어지게 되었다.[28]
메이지 유신까지 고즈케국 내에 실질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번은 다음과 같다.
구고구령취조장에 기재되어 있는 메이지 초년 시점에서의 국내 지배는 다음과 같다(1,263 마을, 635,181석여).[28] 막부령은 관동 재방걸의 이와하나 진야가 관할했다.
게이오 4년(1868년) 4월 3일(5월 5일) 오카베번이 번청을 이전하여 미카와 한바라번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17일(1868년 8월 5일) 신정부가 이와하나 진야에 이와하나현을 설치했다.
메이지 초년에 마에바시번, 다테바야시번, 이사사키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막부령, 기토령 등의 일부가 각 번의 관할이 되었다. 가즈사 이치노미야번의 영지 교체에 의해 사이군의 비지령이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되었고, 가즈사 세이사이번의 개역, 데와 마쓰야마번의 감봉에 의해 야마다군의 영지가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되었다.
메이지 2년(1870년 1월 27일) 요시이번이 폐번되어 영지가 이와하나현의 관할이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에 의해 번령이 여러 현으로 나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1871년 12월 10일) 제1차 현 통합에 의해 닛타군, 야마다군, 오라군을 제외한 가미노국 각 군이 군마현(제1차)의 관할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14일(1871년 12월 25일) 닛타군, 야마다군, 오라군이 도치기현의 관할이 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6월 15일 군마현(제1차)이 이리마현과 합병하여 구마가야현이 되었다.
메이지 9년(1876년) 8월 21일 제2차 현 통합에 의해 구마가야현이 무사시국의 관할 지역을 사이타마현에 합병, 도치기현으로부터 야마다군, 닛타군, 오라군을 편입한 후 군마현(제2차)으로 개칭되어 가미노국 전역이 군마현의 관할이 되었다.
1960년 7월 1일 야마다군 야바가와촌의 일부가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 편입되었다.
5. 국내 시설
延喜式神名帳이며, 다음과 같다.
- 간라군 누키마에 신사
- 비정사: 이치노미야 누키마에 신사 (군마현 도미오카시 이치노미야)
- 군마군 이카호 신사
- 비정사(산노미야): 이카호 신사 (군마현 시부카와시 이카호마치이카호)
- 비정사(사토미야): 산노미야 신사 (군마현 기타군마군요시오카정)
- 세타군 아카기 신사
- 비정사(산노미야):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미야자와마치)
- 비정사(사토미야): 니노미야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니노미야정)
- 참고사: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후지미마치 아카기산)
『중세 제국 일궁제의 기초 연구』에 근거한 소우샤·이치노미야 이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26]
현재는 산노미야인 아카기 신사도 니노미야를 칭하고 있으며, 이카호 신사도 산노미야를 칭하고 있다.
5. 1. 국부(國府)
헤이안 시대인 811년부터 고즈케는 히타치,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말 생산으로 유명했다. 주의 원래 수도는 현재의 마에바시시에 위치했으며, 주의 고쿠분지와 소자도 함께 위치했다. 이치노미야는 현재의 토미오카시에 위치했다.[2]군마군 국부촌에 있었다는 설(『고즈케 명적고』)이 있으며, 이후 군마군 구 모토소샤촌(현재 군마현 마에바시시 모토소샤마치 부근)의 창해성터로 보는 설(『군마군 촌지』 등)이 정설이 되었지만, 콘도 요시오에 의한 군마군 오토모촌(현재 군마현 마에바시시 오토모정 부근) 남쪽의 평탄지로 보는 설이 한때 정설이 되었다.[25]
국부 구역을 확정하기 위해 콘도 설에 근거하여 1961년(昭和|쇼와일본어 36년)부터 오자키 키사오 등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모토소샤 지구가 가장 유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25] 다만, 국부 구역이나 국아의 터는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25]
고즈케 국 국부 추정지
5. 2. 국분사(國分寺)·국분니사(國分尼寺)
나라 시대 쇼무 천황의 명으로 건립된 고쿠분지는 마에바시시 모토소샤 정 및 다카사키시 히가시코쿠분 정, 히키마 정에 위치한 고즈케 국 분사 터이다. 국가지정 사적으로, 도다이지식 가람 배치를 따랐다. 사역은 동서 220미터, 남북 235미터 규모였다. 북쪽에는 후계 국분사(다카사키시 히가시코쿠분 정)가 있다.고쿠분니지는 고즈케 국 분니사 터(군마현 마에바시시 모토소샤 정 및 다카사키시 히가시코쿠분 정)로, 승사 터의 동쪽에 위치한다. 도다이지식 또는 홋케지식 가람 배치를 따랐으며, 추정 사역은 1.5정 사방이다. 발굴된 유구는 현재 보존을 위해 다시 메워져 있으며, 후계 사찰은 없다.
5. 3. 신사(神社)
延喜式神名帳|엔기시키 진묘초일본어에는 대사(大社) 3좌 3사, 소사(小社) 9좌 9사로 총 12좌 12사가 기록되어 있다(고즈케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대사 3사는 모두 묘진대사이며, 다음과 같다.- 간라군 누키마에 신사
- 비정사: 이치노미야 누키마에 신사 (군마현 도미오카시 이치노미야)
- 군마군 이카호 신사
- 비정사(산노미야): 이카호 신사 (군마현 시부카와시 이카호마치이카호)
- 비정사(사토미야): 산노미야 신사 (군마현 기타군마군요시오카정)
- 세타군 아카기 신사
- 비정사(산노미야):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미야자와마치)
- 비정사(사토미야): 니노미야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니노미야정)
- 참고사: 아카기 신사 (군마현 마에바시시 후지미마치 아카기산)
'''소우샤·이치노미야 이하'''
『중세 제국 일궁제의 기초 연구』에 근거한 일궁 이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26]
현재는 산노미야인 아카기 신사도 니노미야를 칭하고 있으며, 이카호 신사도 산노미야를 칭하고 있다.
6. 인물
고즈케국은 일본의 옛 율령국 중 하나로, 현재의 군마현에 해당한다. 고즈케국의 인물에 대해 알아본다.
826년부터 고즈케국은 친왕임국이 되어, 황족이 구니노카미(국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 정무는 상야개(上野介)가 담당했다.[3]
;고즈케노카미(上野守)
고즈케노카미|上野守일본어는 고즈케국의 지방 장관직이다.
;고즈케노다이스케(上野太守)
고즈케노다이스케|上野太守일본어는 헤이안 시대인 811년부터 히타치,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였다.[2] 고즈케는 말 생산으로 유명했다.[2]
;고즈케노스케(上野介)
고즈케노스케(上野介)는 고즈케국의 지방관 직책 중 하나이다.
;슈고(守護)
가마쿠라 막부는 아다치 씨를 고즈케국의 슈고로 임명했다. 1285년 시모츠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가 몰락할 때까지 아다치 씨가 고즈케국을 지배했다. 그 후, 슈고는 막부 멸망 시까지 호조 도쿠소 가문이었다.[1]
가마쿠라 막부 시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대부분 우에스기 씨 가문이 고즈케국의 슈고를 맡았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
6. 1. 국사(國司)
국사는 천황으로부터 서임되어 국내의 정치적인 모든 일을 관장했다. 826년부터 고즈케국은 친왕임국이 되어, 황족이 구니노카미(국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 정무는 상야개(上野介)가 담당했다.[3]6. 1. 1. 고즈케노카미(上野守)
고즈케노카미|上野守일본어는 고즈케국의 지방 장관직이다. 고즈케국은 오늘날의 군마현에 해당한다.826년부터 고즈케국은 친왕임국이 되어, 황족이 구니노카미(국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 정무는 상야개(上野介)가 담당했다.[3]
다음은 고즈케노카미의 목록이다.
6. 1. 2. 고즈케노다이스케(上野太守)
고즈케노다이스케|上野太守일본어는 헤이안 시대인 811년부터 히타치, 카즈사와 함께 황족이 명목상 통치자로 지정된 세 개의 주 중 하나였다.[2] 고즈케는 말 생산으로 유명했다.[2] 다음은 고즈케노다이스케 목록이다.
6. 1. 3. 고즈케노스케(上野介)
고즈케노스케(上野介)는 고즈케국의 지방관 직책 중 하나이다. 다음은 고즈케노스케에 임명된 인물 목록이다.
6. 2. 슈고(守護)
가마쿠라 막부는 아다치 씨를 고즈케국의 슈고로 임명했다. 1285년 시모츠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가 몰락할 때까지 아다치 씨가 고즈케국을 지배했다. 그 후, 슈고는 막부 멸망 시까지 호조 도쿠소 가문이었다.[1]가마쿠라 막부 시대 고즈케국의 슈고는 다음과 같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대부분 우에스기 씨 가문이 고즈케국의 슈고를 맡았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 고즈케국의 슈고는 다음과 같다.
6. 2. 1. 가마쿠라 막부
치쇼 4년(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가미국가마쿠라에 들어가 무가 정권을 수립하자, 미나모토노 요리시게는 자립을 목표로 저항했지만, 결국 요리토모의 군문 아래 들어갔다. 또한,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계보를 잇는 후지와라 성 아시카가 씨의 아시카가 토시츠나는 요리토모에게 항거하여 몰락했다.[1]이리하여 고즈케국에 가마쿠라 막부의 질서가 세워졌다. 슈고가 된 것은 아다치 씨였으며, 코안 8년(1285년) 시모츠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가 몰락할 때까지 고즈케국을 지배했다. 그 후, 슈고는 막부 멸망 시까지 호조 도쿠소 가문이었다. 그 아래, 고즈케 무사단은 고케닌으로서 가마쿠라에 출사했다. 고케닌으로는 닛타 일족을 시작으로 사누키·오고·야마가미·누마타·아즈마·나바·후치나 씨가 보인다.[1]
겐코 3년(1333년) 닛타 장원 이키나 신사에서 거병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막부를 멸망시켰다.[1]
6. 2. 2. 무로마치 막부
겐코 3년(1333년), 닛타 요시사다는 닛타 장원 이키나 신사에서 거병하여 가마쿠라를 공격해 막부를 멸망시켰다.[27]무로마치 막부 시대 고즈케국의 슈고(守護)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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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井藩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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