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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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영은 육진의 난 이후 세력을 키워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선우수례에게 의탁했다가 선우수례가 살해당하자 그의 세력을 흡수했고, 스스로 제(齊)를 건국하여 천자를 참칭했다. 하북 지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나, 이주영과의 상주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그의 세력은 이주영에게 흡수되었고, 부하 한루의 저항도 실패로 끝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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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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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갈제 초대 황제 |
재위 | 526년 9월 ~ 528년 9월 |
즉위식 | 526년 9월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없음 |
개인 정보 | |
휘 | 갈영(葛荣), Ge Rong (거룽) |
별호 | 없음 |
연호 | 없음 |
존호 | 제제(齊帝), Qi Di (치디) |
가족 관계 | |
부친 | 갈씨(葛氏), Ge Shi (거스) |
모친 | 불명 |
황후 | 없음 |
생애 | |
출생일 | 불명 |
출생지 | 북위 옥야진 |
사망일 | 528년 9월 |
사망지 | 북위 업성 북쪽 |
2. 생애
갈영은 본래 회삭진(懷朔鎭)의 진장(鎭將)이었다. 육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선우수례에게 의탁하였다. 526년 선우수례가 원홍업(元洪業)에게 살해당하자 그를 죽이고 남은 세력을 이끌었다.[1] 이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제(齊)로 정했다.
갈영은 북위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527년에는 은주(殷州)와 기주(冀州)를 함락시켰고, 528년에는 창주(滄州)를 함락시키고 많은 백성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한족을 차별하고 두락주를 살해하는 등, 내부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결국 528년, 이주영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낙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갈영의 사후, 그의 부하들이 항쟁을 계속했으나 모두 진압되면서 갈제의 세력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반란
육진의 난이 실패로 끝난 후, 갈영은 선우수례에게 의탁하였다. 526년 선우수례가 원홍업(元洪業)에게 살해당하자, 갈영은 원홍업을 죽이고 남은 세력을 이끌었다. 같은 해 9월, 지금의 하북 여현(蠡縣) 전투에서 원융(元融)을 살해하고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국호를 제(齊)라고 하였다. 또한 우문낙생(宇文洛生)을 어양왕(漁陽王)에 봉하였다.[1]갈영은 526년 (효창 2년) 선우수례를 따라 정주의 반란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반란군의 장수 원홍업이 선우수례를 살해하고 북위에 항복하려 하자, 갈영은 원홍업을 살해하고 정주의 반란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2. 2. 세력 확장과 몰락
육진의 난이 실패로 끝난 이후 선우수례에게 의탁하였다. 526년 선우수례가 원홍업(元洪業)에게 살해당하자 그를 죽이고 남은 세력을 이끌었다. 같은 해 9월 지금의 하북 여현(蠡縣) 전투에서 원융(元融)을 살해하고 천자를 참칭함과 동시에 국호를 제(齊)라고 하였으며 우문낙생(宇文洛生)을 어양왕(漁陽王)에 봉하였다.[1]이후 북위군의 최고통수권자인 원침(元琛)을 죽이고 하북의 여러 주, 현을 차지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갈영은 한족을 하대하였고 지주를 끌여들인 후, 두락주를 살해하여 갈제군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후에도 갈영은 북위의 창주(滄州)를 함락시킬 때, 그곳의 많은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528년, 상주(相州) 전투에서 이주영은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경을 전열에 세운 다음, 친정하였다. 갈영은 이주영을 가볍게 여기고 업성에서 북쪽을 향해 좌우로 수십 리에 대형을 펼쳐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주영은 산골짜기에 군대를 매복시킨 후, 각 소대로 나누어 공격하게 하니 갈제군이 당황했으며, 이주영은 갈제군의 보급을 차단시켜 진을 펼치고 갈제군을 격파하였다.
갈제군은 북위 중기병의 공격으로 앞뒤를 관통당했고, 진형이 붕괴되어 이주영의 침입을 허용하였다. 이후 갈영은 포로로 붙잡혀 낙양으로 끌려가 참수당했고, 수십만 명의 갈제군은 이주영에게 항복하여 이주영군에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갈영의 부하 한루(韓樓)가 유주(幽州)에서 항쟁하였으나 후연(侯淵)에게 패배, 처형당하여 갈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2. 3. 최후
528년, 상주 전투에서 이주영은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경을 전열에 세운 다음,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갈영은 이주영을 가볍게 여기고 업성에서 북쪽을 향해 좌우로 수십 리에 걸쳐 대형을 펼쳐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주영은 산골짜기에 군대를 매복시킨 후, 각 소대로 나누어 공격하게 하니 갈제군이 당황했으며, 이주영은 갈제군의 보급을 차단시켜 진을 펼치고 갈제군을 격파하였다.[1]갈제군은 북위 중기병의 공격으로 앞뒤를 관통당했고, 진형이 붕괴되어 이주영의 침입을 허용하였다. 이후 갈영은 포로로 붙잡혀 낙양으로 끌려가 참수되었고, 수십만 명의 갈제군은 이주영에게 항복하여 이주영군에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갈영의 부하 한루(韓樓)가 유주에서 항쟁하였으나 후연에게 패배, 처형당하여 갈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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