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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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진의 난은 북위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육진의 군인들이 효문제의 한화 정책과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일으킨 일련의 반란을 말한다. 육진은 유연의 침략을 막고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으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인해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불만이 쌓였다. 523년,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과 진장의 부패가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고, 파륙한발릉의 봉기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북위는 여러 차례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이주영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북위는 동서로 분열되어 멸망했다. 육진의 난은 고환, 우문태, 양견, 이연 등 이후 왕조의 건국에 기여한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육진은 초기에는 회삭진(懷朔鎭)·무천진(武川鎭)·무명진(撫冥鎭)·유현진(柔玄鎭)·옥야진(沃野鎭)·회황진(懷荒鎭)을 가리켰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방의 여러 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1] 육진은 북쪽의 유연의 침입을 막고, 반란을 진압하며, 남쪽 세력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2][3]
북위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 근처에 6개의 군사 주둔지인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선비족이나 흉노족 유력 호족을 육진의 영민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특권을 받았으나,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으로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지면서 냉대받기 시작했다.
2. 육진의 설치와 초기 역할
2. 1. 초기 육진의 구성과 역할
육진은 원래 회삭진(懷朔鎭)·무천진(武川鎭)·무명진(撫冥鎭)·유현진(柔玄鎭)·옥야진(沃野鎭)·회황진(懷荒鎭)을 가리키지만, 후에는 북방 여러 진을 총칭하는 단어로 바뀌었다.[1] 이러한 진들은 북방의 유연의 침략을 막고 반란을 진압하며 남방 세력의 진공을 막기 위해 쓰였다.[2][3]
3. 육진의 난의 배경
이후 육진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으며 정광(正光) 4년(523년)에는 북부 유목부락 유연(柔然)의 침입으로 식량까지 빼앗기게 된다. 회황진(懷荒鎭) 백성들은 진장(鎭將) 우경(于景)에게 구휼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하여 우경 부부를 살해했다.
3. 1. 효문제의 한화 정책과 육진의 소외
북위는 자신들과 같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 근처에 요새를 쌓고 북쪽 수비를 강화했다. 초기에는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유력 호족을 6진의 영민으로 이주시켜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으로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지면서 북쪽 영민들은 점차 냉대받기 시작했다.[4]
진인각(陳寅恪)에 따르면, 육진 군인은 원래 직업 군인이자 귀족 계층의 선비 문화를 갖춘 이들이었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 이후에도 직업군인과 선비문화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으나 사회 계급이 급속히 하강하였으며, 이전의 특권은 없어졌다. '국지폐부(國之肺腑)'는 점차 진호(鎭戶)와 부호(府戶)로 전락하였고 신분도 낮아졌다. 그러나 낙양으로 이사간 '강종자제(强宗子弟)'들은 한화되었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변진(邊鎭)에서 군복무를 하는 사람들은 '관리들은 그 이름만 남았을 뿐 부호라고 불리면서 노예와 같은 역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육진 군민의 불만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육진 일대에 한화가 되지 않았고, 최후에는 반(反) 한화로 인하여 육진의 봉기를 일으켰다.[5]
설해파(薛海波)는 육진의 상층 군관은 북위의 중하층민인 대인(代人), 부락의 추장, 한족의 호강 자제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부락의 무장세력에 근거하여 육진 통치 엘리트가 되었고 대량의 귀부 인구를 제어하였다. 그러나 육진은 반농반목 경제였기에 경제 기초가 매우 약했으며, 북위의 국가적 진휼 정책 역시 효과가 없었다. 육진 자신의 경제력으로는 난관을 넘지 못한 가운데, 군진 장권을 담당한 호강 추장들은 육진 내부 자원을 점유하여 손실을 메우고 북위 후기 육진 지구의 탐오 부패를 야기하였으며, 육진의 사회 갈등을 야기하였으며 이로 인해 구휼받지 못한 진민들과 압박을 받았던 호족(胡族) 추장들이 생존을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6]
본래 명족(名族) 출신이었던 그들은 '''부호'''(府戶)라는, 출세가 제한되는 호에 편제되고 중앙에서 임명된 도대장(都大將)에게 착취당하면서 불만이 커졌다.
효명제 시기 육진은 매년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다. 정광(正光) 4년(523) 2월, 북위 북부의 유목부락 정권인 유연(柔然)도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북위 역시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았던 데다 일관적으로 유연을 멸시하였기에, 유연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유연의 가한(可汗) 아나괴(阿那瓌)는 마침내 4월 북위를 침입하여 약탈을 하였고 이를 통해 기근을 해결하려 하였다. 회황진(懷荒鎭) 백성들은 식량을 대부분 약탈당하여 생계가 곤란해지자 마침내 진장(鎭將)인 무위장군(武威將軍) 우경(于景)에게 구휼을 요청했지만 우경은 이들의 요청을 거칠게 거절하였고, 이에 백성들이 분노하여 우경 부부를 죽였다. 이에 북위 조정은 육진 변민들을 탄압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북위와 육진의 불신을 더했다.
3. 2.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만
북위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 근처에 요새를 쌓고, 선비족이나 흉노족 유력 호족을 6진의 영민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특권을 받았으나,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으로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지면서 냉대받기 시작했다.
진인각(陳寅恪)에 따르면, 육진 군인은 원래 직업 군인이자 귀족 계층이었으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 이후 사회 계급이 하락하고 특권도 사라졌다.[4] '국지폐부(國之肺腑)'는 진호(鎭戶)와 부호(府戶)로 전락했고, 낙양으로 이주한 이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변방의 군인들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불만이 커졌다.[5]
설해파(薛海波)는 육진 상층 군관이 북위 중하층민인 대인(代人), 부락 추장, 한족 호강 자제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육진 통치 엘리트가 되어 귀부 인구를 제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육진은 경제 기반이 약했고, 북위의 구휼 정책도 효과가 없었다. 군진 장권을 담당한 호강 추장들은 자원을 점유하여 손실을 메웠고, 이는 탐오 부패와 사회 갈등을 야기하여, 굶주린 백성과 압박받던 호족 추장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6]
효명제 시기 육진은 매년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다. 정광(正光) 4년(523), 북부 유목부락 유연(柔然)도 기근으로 북위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유연의 가한(可汗) 아나괴(阿那瓌)는 북위를 침략하여 약탈했고, 회황진(懷荒鎭) 백성들은 식량을 빼앗겨 생계가 어려워졌다. 진장(鎭將) 우경(于景)에게 구휼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백성들은 분노하여 우경 부부를 살해했다. 북위 조정은 육진 변민들을 탄압했고, 이는 불신을 더욱 키웠다.
4. 육진의 난의 전개
정광(正光) 5년(524년) 3월, 파륙한발릉이 봉기하면서 육진 지역 전체가 반란에 휩싸였다. 파륙한발릉은 옥야진을 시작으로 무천진, 회삭진 등을 공격했고, 북위는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오원군과 백도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고평진에서 호침이 봉기하고, 막절대제, 우보리, 호연웅, 유안정, 취덕흥 등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듬해에는 북위 종실인 원법승마저 반란을 일으켰다.
525년, 북위는 소보연과 최연백을 파견해 진주 지역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호침이 보낸 묵기추노와 숙근명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호태후와 원후는 정변을 일으켜 원예를 제거하고, 유연에 도움을 요청했다. 유연의 아나괴는 군대를 이끌고 옥야진을 공격했고, 북위의 원침도 회삭진을 공격하여 파륙한발릉을 격파했다. 원침은 내부분열 책략으로 먀렬하를 투항시켰고, 파륙한발릉 군대를 다시 대파하여 20만 명을 하북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하북 지역은 수재와 가뭄으로 인해 유랑민이 발생했고, 525년 두락주가 봉기했다. 526년에는 안주에서 두락주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선우수례도 정주에서 봉기했으나 양진에게 패했다. 두락주는 계성을 공격했으나 상경에게 저지당했다. 이후 선우수례 부대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갈영이 권력을 잡았고, 갈영은 백우라 전투에서 북위군을 대파하고 원연을 죽였다.
527년, 갈영은 은주와 기주를 함락시키고 업으로 진격했다. 528년, 두락주가 정주와 영주를 함락시켰으나, 반군 내 내란으로 갈영에게 흡수되었다. 형고 등 산동 지역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으나, 원천목과 이주조에게 진압되었다.
이주영은 하음의 변을 일으켜 북위 조정을 장악하고, 528년 36만 대군을 일으켜 반군을 공격했다. 이주영은 기병 7만으로 갈영을 급습하여 격파하고, 갈영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12월, 갈영 휘하 한루가 유주에서 봉기했으나 후연에게 진압되었다.
4. 1. 파륙한발릉의 봉기 (523년)
정광(正光) 5년(524년) 3월[7], 옥야진 출신 파륙한발릉은 '고궐(高闕)의 수주(戍主)가 부하를 통솔함에 조화를 잃었다'는 이유로,[8][9] 수주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스스로 진왕(眞王)이라 칭하였다.4. 2. 반란의 확산
524년 3월, 옥야진(沃野镇) 출신 파륙한발릉(破六韩拔陵)은 '고궐(高闕)의 수주(戍主)가 부하를 통솔함에 조화를 잃었다'는 이유로[8][9] 수주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진왕(眞王)이라 칭하였다. 반군은 곧바로 옥야진을 공격하고, 북진하여 무천진과 회삭진을 포위하였다. 회삭진 장수 양균(楊鈞)은 하발도발(賀拔度拔)과 세 아들 하발윤(賀拔允), 하발승(賀拔勝), 하발악(賀拔岳)에게 명하여 대응하게 하였다. 북위는 임회왕(臨淮王) 원욱(元彧)을 도독북토제군사(都督北討諸軍事)로 임명하고 파륙한발릉을 토벌하게 하였다.[10] 원욱은 병사를 이끌고 운중(雲中)에 주둔하였다.4월, 고평진(高平鎭) 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칙륵(敕勒) 추장 호침(胡琛)을 고평왕(高平王)으로 삼고, 고평진을 공격하여 파륙한발릉에 호응하였다. 북위 장수 노조천(盧祖遷)이 이를 격파하자 호침은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반군 위가고(衛可孤)는 같은 달 무천진(武川鎭)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회삭진(懷朔鎭)도 무너뜨렸으며, 하발승 부자는 모두 위가고에게 붙잡혔다.[10] 원욱은 오원군(五原郡)에서 파륙한발릉에게 패배하였고, 북위의 이숙인(李叔仁)이 거느린 부대는 백도(白道)에서 패배했다. 북위는 이숭(李崇)을 북토대도둑(北討大都督)으로 다시 파견하였고, 무군장군(撫軍將軍) 최섬(崔暹)과 진군장군(鎭軍將軍) 광양왕(廣陽王) 원연(元淵) 모두 이숭의 통제를 받았다. 7월, 최섬은 이숭의 통제를 무시하고 파륙한발릉과 함께 백도에서 전투하여 패배하였고 홀로 도주해 왔다. 파륙한발릉은 힘을 모아 이숭을 공격하였고, 이숭은 역전하였으나 방어하지 못하고 운중으로 돌아갔으며, 그와 함께 대치하였다.[10] 이에 육진은 모두 진민들에게 점령당하였다.
같은 해 북쪽 땅에서는 계속 반란이 발생했다.
- 6월, 강인(羌人) 막절대제(莫折大提)가 진주(秦州)에서 봉기했다.
- 7월, 양주(涼州) 당수(幢帥) 우보리(于菩提)와 호연웅(呼延雄)이 자사(刺史) 송영(宋穎)을 붙잡고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10월, 유안정(劉安定)과 취덕흥(就德興)이 영주(營州)에서 봉기했다.
- 이듬해 정월, 북위 종실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원법승(元法僧)이 송(宋)을 세웠다.
525년 정월, 북위가 소보연(蕭寶夤)과 최연백(崔延伯)을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진주의 관롱기의(關隴起義)를 정벌하였다. 4월, 고평진 반군 수령 호침이 대장 묵기추노(萬俟醜奴)와 숙근명달(宿勤明達) 등을 파견하여 북위 경주(涇州)를 공격하였으며, 소보연과 최연백의 대군을 패배시켰다.[11] 소보연은 안정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4. 3. 북위의 대응과 진압 노력
정광(正光) 5년(524) 3월, 옥야진(沃野镇) 출신 파륙한발릉(破六韩拔陵)은 '고궐(高闕)의 수주(戍主)가 부하를 통솔함에 조화를 잃었다'는 이유로,[8][9] 수주(戍主)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진왕(眞王)이라 칭하였다. 반군은 곧바로 옥야진을 공격하였고, 이후 북진하여 무천진과 회삭진을 포위하였다. 회삭진 장수 양균(楊鈞)은 하발도발(賀拔度拔)과 세 아들 하발윤(賀拔允), 하발승(賀拔勝), 하발악(賀拔岳)에게 명령하여 대응하게 하였다.이윽고 북위는 임회왕(臨淮王) 원욱(元彧)을 도독북토제군사(都督北討諸軍事)에 임명하고 파륙한발릉을 토벌하게 하였다.[10] 원욱은 병사를 이끌고 운중(雲中)에 주둔하였다. 4월, 고평진(高平鎭) 등의 반란으로 칙륵(敕勒) 추장 호침(胡琛)을 고평왕(高平王)으로 삼고, 고평진을 공격하여 파륙한발릉에 호응하였다. 북위 장수 노조천(盧祖遷)이 이를 격파하자 호침은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반군 위가고(衛可孤)는 같은 달 무천진(武川鎭)을 공격하여 함락하였고, 회삭진(懷朔鎭)도 무너졌으며, 하발승 부자는 모두 위가고에게 붙잡혔다.[10]
원욱은 파륙한발릉에게 오원군(五原郡)에서 패배하였고, 북위의 일파인 이숙인(李叔仁)이 거느린 부대는 백도(白道)에서 패배했다. 북위는 이숭(李崇)을 북토대도둑(北討大都督)으로 다시 파견하였고, 무군장군(撫軍將軍) 최섬(崔暹)과 진군장군(鎭軍將軍) 광양왕(廣陽王) 원연(元淵) 모두 이숭의 통제를 받았다. 7월, 최섬은 이숭의 통제를 무시하고 파륙한발릉과 함께 백도에서 전투하여 패배하였고 홀로 도주해 왔다. 파륙한발릉은 힘을 모아 이숭을 공격하였고, 이숭은 역전하였으나 방어하지 못하고 운중으로 돌아갔으며, 그와 함께 대치하였다.[10] 이에 육진은 모두 진민들에게 점령당하였다.
같은 해 북쪽 땅은 계속 반란이 발생했다. 6월 강인(羌人) 막절대제(莫折大提)가 진주(秦州)에서 봉기했다. 7월, 양주(涼州) 당수(幢帥) 우보리(于菩提)와 호연웅(呼延雄)이 자사(刺史) 송영(宋穎)을 붙잡고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유안정(劉安定)과 취덕흥(就德興)이 영주(營州)에서 봉기했다. 격년 정월 북위 종실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원법승(元法僧)이 송(宋)을 세웠다.
정광 6년(525) 정월, 북위가 소보연(蕭寶夤)과 최연백(崔延伯)을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진주의 관롱기의(關隴起義)를 정벌하였다. 4월, 고평진 반군 수령 호침이 대장 묵기추노(萬俟醜奴)과 숙근명달(宿勤明達) 등을 파견하여 북위 경주(涇州)를 공격하였으며, 소보연과 최연백의 대군을 패배시켰다.[11] 소보연은 안정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정광 6년(525) 2월, 북위 호태후(胡太后)와 원후(元詡)가 정변을 일으켜, 원예(元乂)의 병권과 직무를 제거하고 원예와 그 일당을 죽였다. 동시에 사신을 유연에 파견하였고 예물을 제공하면서 유연에게 북위를 도와 반란을 제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연 수령 아나괴(阿那瓌)는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옥야진을 공격하였다.[12] 유연군은 연전연승하였고 육진 군대는 대패하였다. 북위도 원침(元琛)을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평성(平城)을 출발, 회삭진을 공격하였다. 6월 원침은 파륙한발릉을 오원에서 대파하였고 동쪽으로 쫓아내었다. 원침은 책략을 바꾸어 내부분열을 시키고 반군을 초무하기로 결정했다. 이 책략은 효과를 거둬, 먀렬하(乜列河)가 3만명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원침은 다시 파륙한발릉이 먀렬하 군을 공격할 때를 틈타 매복하였다가 파륙한발릉 군대를 대파하였다.[13] 파륙한발릉은 강을 건너 도망쳤고 북위군에 붙잡힌 육진 군민 20만명은 북위 정권에 의해 영주(瀛州), 기주(冀州), 정주(定州) 세 곳에 분배되었다. 효명제는 효창(孝昌)으로 개원하였다.
4. 4. 하북 봉기와 갈영의 등장
정광 6년(525) 2월, 북위 호태후와 원후가 정변을 일으켜 원예의 병권과 직무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죽였다. 아나괴는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옥야진을 공격하였고, 북위는 원침을 파견하여 회삭진을 공격하였다. 원침은 파륙한발릉을 대파하고 20만 명의 육진 군민을 하북으로 분배하였으나, 이들이 수재와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자 하북봉기가 발생했다.[14]효창 원년(525) 8월, 유현진의 병사 두락주가 상곡군에서 봉기했다.[15] 효창 2년(526), 북위 안주의 수장들이 두락주에 호응하였고, 두락주는 거용관을 함락시켰다. 선우수례는 정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양진에게 격패당했다. 두락주는 계성으로 진격하였으나 상경에게 저지당했다.
8월, 선우수례 부대에 내란이 발생하여 원홍업이 선우수례를 살해하였으나, 원홍업도 갈영에게 살해되었다. 9월, 갈영은 백우라에서 북위군을 대파하고 원연을 죽였다.[17]
4. 5. 이주영의 진압과 북위의 혼란
정광 6년(525) 2월, 북위 호태후(胡太后)와 원후(元詡)가 정변을 일으켜 원예(元乂)의 병권과 직무를 제거하고 그와 일당을 죽였다. 동시에 사신을 유연에 파견하여 예물을 제공하면서 유연에게 북위를 도와 반란을 제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연 수령 아나괴(阿那瓌)는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옥야진을 공격하였다.[12] 유연군은 연전연승하였고 육진 군대는 대패하였다. 북위는 원침(元琛)을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평성(平城)에서 출발, 회삭진을 공격하였다. 6월, 원침은 오원에서 파륙한발릉을 대파하고 동쪽으로 쫓아냈다. 원침은 책략을 바꾸어 내부분열을 시키고 반군을 초무하기로 결정했다. 이 책략은 효과를 거둬, 먀렬하(乜列河)가 3만 명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원침은 다시 파륙한발릉이 먀렬하 군을 공격할 때를 틈타 매복하였다가 파륙한발릉 군대를 대파하였다.[13] 파륙한발릉은 강을 건너 도망쳤고, 북위군에 붙잡힌 육진 군민 20만 명은 북위 정권에 의해 영주(瀛州), 기주(冀州), 정주(定州) 세 곳에 분배되었다. 효명제는 효창으로 개원하였다.5. 육진의 난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육진의 난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에 해당하는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이전 출력과 동일하며, 원본 소스 부재로 인한 결과임을 명시합니다.)
참조
[1]
서적
진인각(陈寅恪) 관련 내용
[2]
서적
元和郡县志
[3]
서적
魏书
[4]
서적
북제서(北齊書)
[5]
서적
陳寅恪魏晉南北朝講演錄
黃山書社
2000
[6]
논문
5—6世紀北邊六鎮豪強酋帥社會地位演變研究
中華書局
2020
[7]
서적
위서(魏書)
[8]
서적
북사(北史)
[9]
서적
자치통감(資治通鑑)
[10]
서적
자치통감(資治通鑑)
[11]
서적
자치통감(資治通鑑)
[12]
서적
魏书
[13]
서적
资治通鉴
[14]
서적
위서(魏書)
[15]
서적
资治通鉴
[16]
서적
北魏史
[17]
서적
北魏史
[18]
서적
魏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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