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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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과는 528년경 아버지 강문요의 뒤를 이어 안주 자사를 계승했으나, 육진의 난으로 인해 동생 강앙과 안주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군사 충돌 위험에도 불구하고 요하 국경을 넘어 강과를 맞이했으며, 이는 520년대 북위 말기의 내란 틈새를 타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했을 때 영주의 백성을 맞이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후 동위의 요구로 인해 고구려는 강과를 동위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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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강과 |
한자 이름 | 江果 |
히라가나 | こう か |
로마자 표기 | 문화관광부 2000년식: Gang Gwa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Kang Kwa |
관직 정보 | |
직책 | 안주부성 도독 |
임기 | 미상 |
군주 | 미상 |
전임 | 미상 |
후임 | 미상 |
개인 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국적 | 북위 → 고구려 |
본관 | 미상 |
성별 | 남성 |
부모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2. 생애
강과는 528년경 아버지 강문요를 이어 안주자사를 계승했지만, 육진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강앙과 안주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1] 북위군과 군사 충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은 요하의 국경을 넘어 강과를 맞이했다.[2] 동위천평 연간에 동위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여 원상 연간에 동위로 송환되었다.[1] 강과의 망명은 520년대 북위 말기 내란의 틈을 타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했을 때 영주의 백성을 맞이한 것과 관련이 있다.[2]
2. 1. 망명 이전
528년경 아버지 강문요를 이어 안주자사를 계승했지만, 육진의 난이 발발하면서 동생 강앙과 안주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1] 망명 당시 북위군과 군사 충돌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은 요하의 국경을 넘어 강과를 맞이하러 갔다.[2]2. 2. 고구려로의 망명
528년경 아버지 강문요를 이어 안주 자사를 계승했지만, 육진의 난이 발발하면서 동생 강앙과 안주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1]고구려군은 북위군과 군사 충돌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하의 국경을 넘어 강과를 맞이하러 갔다.[2]
강과의 망명은 520년대 북위 말기의 내란 틈을 타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했을 때 영주의 백성을 맞이한 것과 관련이 있다.[2]
2. 3. 동위로의 송환
528년경 아버지 강문요를 이어 안주 자사를 계승했지만, 육진의 난이 발발하면서 동생 강앙과 안주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동위 천평 연간에 동위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고구려는 원상 연간에 동위로 넘겼다.[1]3. 역사적 배경
중국에서는 팔왕의 난 이후 동진을 거쳐 유송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인들이 북중국의 전란을 피하거나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이주했다. 이 시기에 많은 중국인이 요하를 넘어 고구려로 이주했고, 고구려는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다.
3. 1. 북위 말기의 혼란과 인구 이동
팔왕의 난 이후, 동진을 거쳐 유송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인들이 북중국의 전란을 피하거나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주했다.[1] 북위의 화북 통일, 동위와 서위의 분열, 북주의 재통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서 많은 중국인이 요하를 넘어 고구려로 이주했다.[1]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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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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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國大學東洋學硏究院
2017-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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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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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史編纂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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