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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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첫날 전투로, 1863년 7월 1일에 벌어졌다. 북군의 존 뷰퍼드 기병대는 남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며 묘지 언덕, 묘지 능선, 컬프스힐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오전 전투에서 북군은 헤어 능선과 맥퍼슨 능선에서 격전을 벌였고, 존 F. 레이놀즈 소장이 전사했다. 오후에는 남군이 북군 11군단을 무너뜨리고 게티즈버그로 진격했지만, 북군은 묘지 언덕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리 장군은 이월에게 묘지 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지만, 이월은 공격을 주저했다. 첫날 전투는 2만 2천 명의 북군과 2만 7천 명의 남군이 참전하여 북군 9천 명, 남군 6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게티즈버그 전투의 중요한 전초전이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에 시작된 교전으로, 미국 남북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는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 연합의 북버지니아군이 펜실베이니아주를 침공하는 게티즈버그 전역 과정에서 발생했다. 북부 연방의 포토맥군은 조지 미드 소장의 지휘 아래 남부군의 북진을 저지하고자 했다. 7월 1일의 전투는 양측의 선봉 부대가 게티즈버그 마을 북쪽과 서쪽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본격적인 전투로 확대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 첫날, 북군의 포토맥군과 남군의 북버지니아군이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충돌했다. 각 군의 자세한 전투 서열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배경
2. 1. 군사 상황
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의 배경과 전반적인 군사 상황은 게티즈버그 전역, 게티즈버그 전투, 게티즈버그 전장 문서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대치하는 군대
3. 1. 북군 (Union)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여한 북군의 자세한 전투 서열은 게티즈버그 연방군 전투 서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2. 남군 (Confederate)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여한 남군의 자세한 전투 서열은 게티즈버그 남부군 전투 서열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오전
7월 1일 아침, 존 버포드 준장이 이끄는 연방군 기병대는 게티즈버그 서쪽에서 접근하는 헨리 히스 소장의 남부 연합군 보병 부대와 마주쳤다.[1] 버포드는 게티즈버그 남쪽 고지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맥퍼슨 능선 등에서 후장식 카빈 소총을 활용한 효과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다.[2][3][8] 그의 목표는 레이놀즈 소장이 이끄는 연방군 I 군단 주력이 도착하여 핵심 방어 지점을 확보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3][4]
오전 10시경, 레이놀즈의 선두 부대가 도착하여 전투에 가담했으나, 레이놀즈 장군은 병력 배치를 지휘하던 중 안타깝게 전사하여 애브너 더블데이 소장이 군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10][13] 챔버스버그 파이크를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북쪽에서는 리샌더 커틀러 여단이 데이비스 여단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기도 했으나,[14] 남쪽에서는 솔로몬 메레디스 준장의 강철 여단이 아처 여단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워 격퇴하고 아처 준장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16][17] 특히 미완성된 철도 절개지에서는 제6 위스콘신 연대를 포함한 북군 부대가 데이비스 여단 병력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다수의 포로를 확보하며 승리했다.[14][20] 이 오전 전투를 통해 연방군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방어선을 유지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4. 1. 뷰퍼드 기병대의 방어

7월 1일 아침, 존 버포드 준장이 이끄는 연방군 기병대 사단은 북서쪽 캐쉬타운 방면에서 남부 연합군 보병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들은 J. 존스턴 페티그루 준장의 여단 소속 병력이었는데, 페티그루는 전날 게티즈버그에서 연방군과 조우했지만, 그들이 포토맥군을 엄호하는 정규군 기병대가 아니라 중요도가 낮은 펜실베이니아 민병대일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1]
버포드는 게티즈버그 남쪽에 위치한 고지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파악했다. 그는 만약 남부 연합군이 이 고지들을 먼저 점령한다면, 미드가 지휘하는 포토맥군 주력이 도착하더라도 이들을 몰아내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2] 이에 버포드는 게티즈버그 서쪽으로 뻗어 있는 세 개의 능선, 즉 서쪽부터 헤르 능선(Herr Ridge), 맥퍼슨 능선(McPherson Ridge), 그리고 세미너리 능선(Seminary Ridge)을 방어선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형은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의 기병 사단이 강력한 남부 연합군 보병 부대를 상대로 시간을 벌며 지연 작전을 펼치기에 적합했다. 그의 목표는 연방군 보병 주력 부대가 도착하여 마을 남쪽의 묘지 언덕(Cemetery Hill), 묘지 능선(Cemetery Ridge), 컬프스힐(Culp's Hill)과 같은 핵심적인 방어 지점을 확보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3] 같은 날 아침 일찍, 포토맥군 좌익을 지휘하던 레이놀즈 소장은 휘하 I 군단에게 버포드가 위치한 게티즈버그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올리버 O. 하워드 소장이 이끄는 XI 군단도 바로 뒤따르도록 지시했다.[4]
한편, 남부 연합군에서는 A. P. 힐 중장이 지휘하는 제3군단 소속 헨리 히스 소장의 사단이 게티즈버그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히스는 기병 정찰 부대 없이 윌리엄 J. 페그램 소령의 포병대대와 함께 이동 중이었다.[5] 제임스 J. 아처 준장과 조셉 R. 데이비스 준장이 이끄는 두 개의 보병 여단이 챔버스버그 파이크(Chambersburg Pike)를 따라 동쪽으로 행군했다. 오전 7시 30분경, 마을 서쪽 약 약 4.83km 지점에서 히스 사단의 선두 부대는 윌리엄 갬블 대령이 지휘하는 연방군 기병 전초부대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즉시 전투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투의 첫 총성은 8 일리노이 기병대 소속 마르셀러스 E. 존스 중위가 약 반 마일 떨어진 거리에서 회색 말을 탄 식별 불명의 남군 병사를 향해 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6] 버포드의 약 2,748명 규모의 기병대는 곧이어 전열을 가다듬고 접근하는 7,600여 명의 남부 연합군 보병과 마주하게 되었다.[7]

갬블 여단의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울타리 같은 엄폐물 뒤에서 후장식 카빈 소총을 이용하여 빠르고 정확한 사격을 가하며 남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늦췄다.[8] 이들이 사용한 카빈은 샤프스, 번사이드 등에서 제작된 단발 후장식 총기였으며, 비록 일부에서 스펜서 연발총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으나[9], 일반적인 전장식 소총보다 2~3배 빠른 발사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특히 후장식 구조는 연방군 기병들이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엄폐물 뒤에서 안전하게 재장전할 수 있게 해주어, 재장전을 위해 일어서야 했던 남부 연합군 보병들에 비해 생존성과 화력 유지 면에서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
오전 10시 20분경, 수적 우위를 앞세운 남부 연합군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인해 연방 기병대는 결국 헤르 능선에서 동쪽의 맥퍼슨 능선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바로 그 시점에, 레이놀즈 장군이 직접 이끌고 온 I 군단의 선두 부대인 제임스 S. 워즈워스 소장의 사단이 마침내 전장에 도착했다. 레이놀즈는 버포드와 잠시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논의한 후, 후속 부대를 재촉하고 지휘하기 위해 급히 후방으로 이동했다.[10]
4. 2. 데이비스 대 커틀러

오전의 보병 전투는 챔버스버그 파이크 양쪽, 주로 맥퍼슨 능선에서 벌어졌다. 북쪽에는 미완성 철도 부지가 능선에 세 개의 얕은 절개지를 만들었고, 남쪽의 주요 지형은 윌러비 런과 허버스트 숲(종종 맥퍼슨 숲으로 불리지만, 원래 존 허버스트의 사유지다)이었다.[11] 리샌더 커틀러 준장의 북군 여단은 데이비스 준장의 남군 여단과 맞섰다. 커틀러 여단의 3개 연대는 파이크 북쪽에, 2개 연대는 남쪽에 배치되었다. 커틀러의 왼쪽에는 솔로몬 메레디스 준장의 강철 여단이 아처 여단을 상대했다.[11]

존 F. 레이놀즈 소장은 이 두 여단을 직접 지휘하여 전투 위치에 배치하고, 제임스 A. 홀 대위의 메인 포병대를 칼레프 중위가 미리 자리 잡은 곳에 배치했다.[12] 레이놀즈는 허버스트 숲 동쪽을 따라 말을 달리며 "앞으로! 신을 위해 앞으로 가서 저 녀석들을 숲에서 몰아내라!"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하던 중, 귀 뒤에 총탄을 맞고 즉사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이는 북군에게 큰 손실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저격수의 소행으로 보지만, 2 위스콘신 연대 방향에서 날아온 유탄에 맞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레이놀즈의 전사로 제1군단의 지휘권은 애브너 더블데이 소장에게 임시로 넘어갔다.[13]
북군 전선의 우측에서는 커틀러 여단의 3개 연대가 능선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데이비스 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데이비스의 공격선이 커틀러 여단의 우익을 깊숙이 파고들어 북군의 방어는 어려워졌고, 사단장 워즈워스는 커틀러의 연대들에게 신학교 능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4] 하지만 147 뉴욕 연대는 연대장 프랜시스 C. 밀러 중령이 후퇴 명령을 전달하기 직전 총에 맞아 쓰러지는 바람에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147 뉴욕 연대는 다른 부대들이 철수한 뒤에도 홀로 남아 남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으며 힘겹게 싸워야 했다. 30분도 안 되는 짧은 교전 동안 커틀러 여단은 1,007명 중 45%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특히 147 뉴욕 연대는 장교와 병사 380명 중에서 207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14]
승기를 잡은 데이비스의 부대 중 일부는 철도 절개지 남쪽의 북군 진지로 방향을 틀었고, 다른 일부는 신학교 능선을 향해 동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이로 인해 챔버스버그 파이크 북쪽에서의 남군 공격은 다소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15]
4. 3. 아처 대 메레디쓰

게티즈버그-챔버스버그 파이크 남쪽에서 아처의 부하들은 말에서 내린 기병들을 상대로 손쉬운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숲 속에서 검은색 하디 모자를 쓴 병사들과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서부의 인디애나, 미시간, 위스콘신 주 연대들로 구성된 유명한 강철 여단이었다. 강철 여단은 격렬하고 끈기 있는 전사들이라는 명성으로 남군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남군이 윌러비 런을 건너 허버스트 숲(Herbst Woods)으로 비탈길을 올라갈 때, 그들은 파이크 북쪽의 상황과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더 긴 전선을 형성한 북군에게 포위되었다.[16]
여단장 아처는 이 전투 중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로버트 E. 리의 북버지니아군에서 포로가 된 첫 번째 장군이었다. 아처는 2 위스콘신 연대 G중대의 "용감하고 애국적이며, 정열적인 젊은 아일랜드인" 패트릭 몰로니 이병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14 테네시 연대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처는 체포에 저항했지만, 몰로니 이병은 힘으로 그를 제압했다. 몰로니 이병은 그날 늦게 전사했지만, 그의 용맹을 기려 사후에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아처가 후방으로 이송될 때, 그는 옛 군대 동료였던 더블데이 장군과 마주쳤다. 더블데이는 아처를 반갑게 맞으며, "안녕, 아처! 잘 지내나? 자네를 보게 되어 기쁘네!"라고 인사했다. 아처는 "이런 젠장, 난 자네를 보게 되어 전혀 기쁘지 않네!"라고 대답했다.[17]
4. 4. 철도 절개지 (Railroad Cut) 전투

오전 11시경, 더블데이 장군은 예비 연대인 아이언 여단 소속 제6 위스콘신 연대를 루퍼스 R. 도스 중령의 지휘 아래 북쪽으로 보냈다.[14] 위스콘신 병사들은 유료 도로를 따라 있는 울타리에서 멈춰 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데이비스 여단이 커틀러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고, 많은 남군 병사들이 미완성된 철도 절개지 안으로 피신했다. 제6 위스콘신 연대는 유료 도로를 따라 에드워드 브러시 파울러 대령이 지휘하는 제95 뉴욕 연대 및 제84 뉴욕 연대(제14 브루클린 연대)와 합류했다.[14] 이들 세 연대는 데이비스의 병사들이 숨어 있는 철도 절개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 절개지는 대부분 약 약 182.88m 길이에 깊이가 약 4.57m에 달해, 남군에게는 효과적인 사격 위치가 되지 못했다.[18] 게다가 데이비스 장군의 행방이 묘연하여 남군은 지휘관 없이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19]
세 연대의 북군 병사들은 절개지를 향해 돌격하면서 격렬한 사격에 노출되었다. 돌격 과정에서 제6 위스콘신 연대의 미국 국기는 최소 세 번이나 땅에 떨어졌다. 도스 중령이 직접 떨어진 깃발을 집어 들기도 했으나, 기수 중 한 명이 다시 빼앗아 들었다. 북군 전선이 남군에게 접근하면서 양쪽 측면이 안으로 접혀 역 V자 형태를 이루었다. 마침내 북군 병사들이 철도 절개지에 도달하자 격렬한 백병전과 총검 전투가 벌어졌다. 북군은 절개지 양쪽 끝에서 측사 사격을 가할 수 있었고, 많은 남군 병사들이 항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스 중령은 "이 연대의 대령은 어디 있는가?"라고 외치며 상황을 주도했다. 이에 제2 미시시피 보병 연대의 존 블레어 소령이 나서며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도스는 "내가 이 연대를 지휘한다. 항복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답했다.[20] 도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21]
:''그 장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내게 칼을 건넸고, 아직 칼을 쥐고 있던 그의 병사들은 소총을 던졌다. 우리의 병사들이 일제 사격을 가하지 않도록 막은 침착함, 자제력, 규율은 적의 생명 100명을 구했고, 그 순간의 무서운 흥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는 그것에 경탄한다.''
::— 루퍼스 R. 도스 대령, ''제6 위스콘신 의용병과의 복무'' (1890년, p. 169)
이러한 항복에도 불구하고, 도스 중령이 7자루의 칼을 어색하게 들고 서 있는 동안에도 전투는 몇 분간 더 이어졌고, 상당수의 남군 병사들은 헤르 능선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북군 3개 연대는 투입된 1,184명 중 390명에서 440명 사이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으로 데이비스 여단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아이언 여단의 후방을 지켜냈으며, 남군 여단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여 남은 전투 시간 동안 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군의 손실은 1,707명 중 사상자 약 500명, 포로 2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22]
5. 정오의 정적

오전 11시 30분경, 전장은 일시적으로 조용해졌다. 남부 연합군 측에서는 헨리 히스가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리 장군의 명령에 따라 북버지니아군 전체가 집결하기 전까지는 대규모 교전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군화를 찾기 위한 정찰이었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보병 사단을 동원한 그의 게티즈버그행은 결국 전면전을 촉발했고, 그때까지 그는 북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오후 12시 30분까지 존스턴 페티그루 준장과 존 M. 브로큰브로우 대령이 이끄는 히스의 나머지 두 여단이 현장에 도착했고, 힐 군단 소속의 윌리엄 도시 펜더 소장이 지휘하는 사단(4개 여단)도 도착했다. 힐의 나머지 사단(리처드 H. 앤더슨 소장)은 그날 늦게 도착했다.[23]
한편, 훨씬 더 많은 남부 연합군 병력이 이동 중이었다. 리처드 S. 이월 중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의 두 사단이 북쪽의 칼라일과 요크 방면에서 게티즈버그로 접근하고 있었다. 로버트 E. 로즈 소장의 다섯 개 여단은 칼라일 로드를 따라 행군하다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오크 능선의 숲이 우거진 곳으로 방향을 틀어 힐 군단의 좌익과 연결하려 했다. 주벌 얼리 소장의 네 개 여단은 해리스버그 로드를 따라 접근했다. 마을 북쪽의 북군 기병 초소는 이 두 부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이월의 나머지 사단(에드워드 "앨리게니" 존슨 소장)은 그날 늦게 도착했다.[24]
북군 측에서는 더블데이가 1군단의 추가 부대가 도착함에 따라 방어선을 재정비했다. 먼저 찰스 S. 웨인라이트 대령이 지휘하는 군단 포병대가 도착했고, 이어서 더블데이 사단의 두 여단(더블데이가 군단 지휘를 맡게 되면서 토머스 A. 로울리 준장이 지휘)이 도착하여 전선 양쪽에 배치되었다. 11군단은 정오 무렵 남쪽에서 태니타운 로드와 에미츠버그 로드를 따라 도착했다. 올리버 하워드 소장은 약 11시 30분경, 시내 중심가 파네스톡 형제의 직물 가게 지붕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25] 그는 레이놀즈가 전사했으며, 이제 자신이 현장의 모든 북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 마음은 무거웠고 상황은 정말 심각했지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신께서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는 군대가 올 때까지 여기에 머물 것이다. 나는 이 전장의 지휘를 맡았다."[27]
하워드는 즉시 북군 3 군단(다니엘 E. 시클스 소장)과 12군단(헨리 W. 슬로컴 소장)에 증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워드의 11군단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카알 슈르츠 소장의 사단은 북쪽으로 보내져 오크 능선에 자리를 잡고 1군단의 우익과 연결하도록 지시받았다. (이 사단은 슈르츠가 하워드를 대신해 군단 전체 지휘를 맡게 되면서 알렉산더 쉬멜페닝 준장이 임시로 지휘했다.) 프랜시스 C. 바로우 준장의 사단은 슈르츠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그를 지원했다. 세 번째로 도착한 아돌프 폰 쉬타인베어 준장의 사단은 두 개의 포대와 함께 묘지 언덕(Cemetery Hill)에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이는 북군이 현재 위치를 사수하지 못할 경우 집결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며, 레이놀즈가 전사하기 직전 하워드에게 내린 지시와도 일치하는 조치였다.[28]
그러나 하워드의 계획과 달리, 로즈의 남군 사단이 슈르츠보다 먼저 오크힐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11군단 사단은 오크힐 동쪽 아래, 마을 북쪽의 넓은 평야에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29] 그들은 이월 군단의 접근 소식을 듣고 더블데이가 전진시킨 존 C. 로빈슨 준장의 1군단 예비 사단과 연결되었다.[30] 하워드의 방어선은 북쪽에서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31] 그는 곧 수적으로 열세에 놓였고(그의 11군단은 챈슬러즈빌 전투에서의 손실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약 8,700명의 병력만 있었다), 부대가 배치된 지형 또한 방어에 불리했다. 하워드는 슬로컴의 12군단 증원군이 볼티모어 파이크를 통해 제때 도착하여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32]
6. 오후

오후 전투는 게티즈버그 서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서쪽에서는 힐의 제3군단이 북군 제1군단을 다시 공격했고, 북쪽에서는 이월의 제2군단이 제1군단과 제11군단을 공격했다.[33] 오크 힐에 있던 이월은 하워드의 부대가 전개되는 것을 보고, 이를 북군의 공격 개시로 판단하여 전면 교전을 피하라는 리 장군의 명령을 어기고 교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06][33] 이후 로즈, 히스, 얼리, 펜더 등이 이끄는 남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6. 1. 로즈의 오크 언덕 공격
로즈는 처음에 제1군단의 우익과 제11군단의 좌익으로 보이는 연합군 부대를 향해 남쪽으로 3개 여단을 내보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지 P. 돌스 준장, 에드워드 A. 오닐 대령, 그리고 알프레드 아이버슨 준장의 여단이 배치되었다. 돌스의 조지아 여단은 측면을 경계하며 얼리의 사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닐과 아이버슨의 공격은 헨리 백스터 준장이 지휘하는 6개 베테랑 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백스터의 부대는 뭄마스버그 로드 뒤 언덕 북쪽을 향해 얕은 역 V자 형태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오닐의 부대는 아이버슨 부대와의 협조 없이 독자적으로 전진하다가 제1군단의 격렬한 사격에 밀려 후퇴했다.[34]아이버슨은 기본적인 정찰조차 실시하지 않고, 자신은 후방에 머무른 채 부하들을 전진시켰다. 이는 몇 분 전 오닐이 했던 실수와 유사했다. 백스터 부대의 병력 중 상당수가 돌담 뒤 숲에 매복해 있다가, 약 91.44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노스캐롤라이나 병사들에게 맹렬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아이버슨 여단 1,350명 중 800명 이상이 쓰러졌다.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이 마치 열병식 대형처럼 부츠 뒤꿈치까지 완벽하게 정렬된 채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시신들은 현장에 그대로 매장되었고, 이 지역은 후에 "아이버슨의 구덩이"로 불리며 초자연 현상에 대한 지역 설화의 배경이 되었다.[35]
백스터의 여단은 전투로 지쳤고 탄약도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오후 3시경, 백스터는 여단을 후퇴시켰고, 로빈슨 장군은 가브리엘 R. 폴 준장의 여단으로 그 자리를 메웠다. 로즈는 예비로 남겨두었던 두 개 여단, 주니어스 다니엘 준장과 도드슨 램서 준장의 부대를 투입했다. 램서 여단이 먼저 공격에 나섰지만, 폴 여단은 중요한 고지를 굳건히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폴 준장은 총알이 한쪽 관자놀이를 관통하여 다른 쪽으로 나오면서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었다. 그는 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전투 후 20년을 더 살았다. 이날 폴 여단에서는 폴 준장 외에도 3명의 지휘관이 더 부상을 입었다.[36]
이어서 다니엘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이 챔버스버그 파이크를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하며 제1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전에 격전이 벌어졌던 철도 절개지 부근에서 로이 스톤 대령이 이끄는 펜실베이니아 "벅테일 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치열한 전투 끝에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37]
6. 2. 히스의 재공격
리 장군은 로데스의 부대가 공격 중이던 오후 2시 30분경에 전장에 도착했다. 그는 대규모 공격이 진행 중임을 확인하고, 이전에 내렸던 전면적인 교전 금지 명령을 해제했다. 그리고 힐에게 오전에 시작했던 공격을 재개하도록 허가했다. 공격의 선봉에는 다시 히스의 사단이 섰으며, 이번에는 페티그루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과 존 M. 브로켄브로 대령의 버지니아 여단 등 두 개의 새로운 여단이 투입되었다.[38]
페티그루의 여단은 북군 철의 여단이 방어하던 지점보다 더 남쪽으로 길게 배치되었다. 남군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페티그루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은 제19 인디애나 연대의 좌익을 포위하며 압박했고, 이는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교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철의 여단은 숲에서 밀려났고, 동쪽의 개활지에서 세 차례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루터교 신학교 방향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여단장 메레디스 장군은 말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철의 여단 좌측에서는 채프먼 비들 대령의 여단이 맥퍼슨 능선의 개활지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남군의 포위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사실상 궤멸되었다. 우측에서는 체임버스버그 파이크를 따라 서쪽과 북쪽을 동시에 방어하던 스톤 대령의 '벅테일' 여단이 브로켄브로와 다니엘 여단의 공격을 받았다.[39]
이날 오후 전투에서의 사상자는 매우 심각했다. 남군의 제26 노스캐롤라이나 연대는 전투 시작 시 839명으로 남군 전체에서 가장 큰 연대였으나, 첫날 전투 후 약 212명만 남을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연대장 헨리 K. 버그윈 대령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치명상을 입었다. 3일간의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났을 때, 이 연대는 약 152명만이 생존했는데, 이는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단일 전투에서 연대가 입은 가장 높은 사상자 비율 중 하나로 기록된다.[40] 북군 측에서도 피해가 컸다. 제24 미시간 의용 보병 연대는 참전 병력 496명 중 399명이 죽거나 다쳤다.[41] 이 연대는 9명의 기수가 쓰러졌고, 연대장 헨리 A. 모로우 대령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비들 여단 소속의 제151 펜실베이니아 연대 역시 467명 중 337명이 사상자로 기록되었다.[42]
이 교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사상자는 히스 장군이었다. 그는 머리에 총알을 맞았으나, 당시 쓰고 있던 모자가 너무 커서 안에 종이 뭉치를 채워 넣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졌다.[43] 하지만 이 부상으로 히스는 24시간 이상 의식을 잃었고, 남은 게티즈버그 전투 기간 동안 더 이상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는 후방에 있던 펜더의 사단에게 전진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라고 독려할 기회를 놓쳤다. 펜더는 전투의 이 중요한 단계에서 이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리 장군의 군대에서 젊은 장군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던 적극성을 고려할 때 의아한 부분이었다. 힐 역시 펜더에게 전진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그는 당시 질병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펜더가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다음 날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전투 보고서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44]
6. 3. 얼리의 11군단 공격
제11군단 사령관 올리버 O. 하워드 소장은 게티즈버그 북쪽의 넓고 특징 없는 농지를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는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단 두 개 사단(4개 여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워드와 잠시 군단 지휘를 맡았던 칼 슈르츠 소장은 알렉산더 쉬멜페니히 준장의 사단을 좌측에, 프랜시스 C. 바로우 준장의 사단을 우측에 배치했다. 좌측부터 조지 폰 암스베르크 대령(쉬멜페니히 지휘), 블로지미에르 크르지자노프스키 대령, 아델버트 에임스 준장, 레오폴드 폰 길사 대령의 여단 순서로 배치되었다. 하워드는 이 배치가 좌측의 제1군단 방어선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역사가 에드윈 B. 코딩턴 등은 이 진형이 너무 앞으로 나갔고 우측 측면이 적의 포위 공격에 취약했다고 비판했다. 코딩턴은 철도 북쪽 약 약 182.88m 지점의 스티븐스 런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더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위치는 방어선이 더 짧고 시야 확보가 용이하며 우측 측면 방어에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45]연방군의 방어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바로우 준장이 쉬멜페니히 사단보다 더 북쪽으로 진격하여 록 크릭 위에 있는 약 15.24m 높이의 블로처 언덕(오늘날 바로우 언덕으로 알려짐)을 점령한 결정이었다.[46] 바로우는 남군 로데스 사단의 돌스 여단이 이 언덕을 점령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포병 진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고지를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슈르츠 장군은 나중에 바로우가 자신의 명령을 오해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지만, 공식 보고서에서는 바로우가 명령을 오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총알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칭찬할 만한 침착함과 용맹함으로 그의 부대의 움직임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고 덧붙였다.[47] 바로우의 행동은 주벌 얼리 사단의 진격을 막고 묘지 언덕에 포병 진지를 구축하려는 하워드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위치는 여러 방향에서 공격받기 쉬운 돌출부를 형성하여 결과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슈르츠는 도시 북쪽 끝에 있던 크르지자노프스키 여단에게 바로우를 지원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들은 너무 늦게, 그리고 부족한 병력으로 도착했다. 역사가 해리 W. 팬츠는 바로우의 결정을 "군단의 패배를 보장한" "실수"라고 평가했다.[48]
주벌 얼리의 두 번째 사단은 해리스버그 로드를 따라 남하하며 3개 여단을 넓게 펼쳐 약 약 1.61km에 달하는 전선을 형성했다. 이는 북군 방어선보다 거의 약 0.80km 더 넓은 범위였다. 얼리는 대규모 포격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존 B. 고든 준장의 조지아 여단이 바로우 언덕에 정면 공격을 가해 방어군을 묶어두는 동안, 해리 T. 헤이스 준장과 아이작 E. 에이버리 대령의 여단이 노출된 북군 우측 측면을 공격했다. 동시에 돌스 여단도 고든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고든의 공격 목표가 된 바로우 언덕을 방어하던 병력은 폰 길사 여단의 900명이었다. 이들 중 54, 68 뉴욕 연대는 지난 5월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스톤월 잭슨의 측면 기동 공격을 처음으로 받은 부대였다. 병사들은 할 수 있는 한 오래 버텼지만 압도적인 공격에 밀려났고, 153 펜실베이니아 연대마저 무너졌다. 바로우는 부대를 수습하려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에임스 준장이 지휘하던 바로우의 다른 여단도 돌스와 고든의 공격을 받고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49]
제11군단 좌측의 쉬멜페니히 사단 역시 로데스와 얼리 포대의 격렬한 포격과 돌스 보병대의 공격에 시달렸다. 남군은 측면 공격을 사용하여 쉬멜페니히 사단의 세 여단을 오른쪽부터 차례로 격파했고, 북군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게티즈버그 시내로 후퇴했다. 폰 암스베르크 여단의 157 뉴욕 연대는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삼면에서 포위되어 병력의 75%에 달하는 307명의 사상자를 냈다.[50]
이 재앙적인 상황을 목격한 하워드 장군은 아돌프 폰 슈타인베어 사단의 예비대에서 찰스 코스터 대령이 지휘하는 포병 1개 포대와 보병 1개 여단을 급파했다. 코스터 부대는 게티즈버그 북쪽 쿤의 벽돌 공장 근처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헤이스와 에이버리 여단의 공격에 압도당했다. 코스터 부대는 후퇴하는 아군에게 귀중한 엄호를 제공했지만, 그 대가로 800명의 병력 중 313명이 포로로 잡히고 보유했던 4문의 대포 중 2문을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51]
제11군단의 붕괴는 전투 시작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오후 4시에 완료되었다. 그들은 총 3,200명의 사상자(그 중 1,400명이 포로)를 냈는데, 이는 묘지 언덕에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반면, 공격을 주도한 남군 고든과 돌스 여단의 손실은 750명 미만이었다.[52]
6. 4. 로즈와 펜더의 돌파

오후 2시에 시작된 로즈의 최초 공격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그는 멈마스버그 로드(Mummasburg Road) 돌출부의 폴 여단에 램서 휘하 예비 여단을 투입하고, 돌스 여단을 제11군단 좌익에 배치했다. 다니엘 여단은 오크 능선에서 벅스터를 상대로 동쪽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이번 공격은 얼리가 측면 공격을 조율하면서 더 성공적이었다.[53]
서쪽에서 북군은 신학교로 후퇴하여 슈머커 홀(Schmucker Hall) 서쪽 면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548.64m 길이의 급조된 참호를 구축했고, 웨인라이트 포병대대 소속 포 20문의 지원을 받았다. 힐의 군단 소속 도시 펜더 사단은 오후 4시경, 히스의 지친 병력 대열을 통과하여 제1군단 생존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 앨프레드 M. 스케일스 준장의 여단이 먼저 북쪽 측면을 공격했다. 1,400명의 노스캐롤라이나 병사로 구성된 그의 5개 연대는 이후 피켓의 돌격에 비견될 만큼 치열하고 집중적인 포격으로 사실상 전멸했다. 약 4.57m 간격으로 배치된 20문의 포가 접근하는 여단에 구형 탄약, 폭발성 포탄, 캐니스터탄, 이중 캐니스터탄을 퍼부었고, 전투 후 생존자는 500명과 지휘관 1명뿐이었다. 스케일스는 나중에 "연대가 있던 자리를 나타내는 분대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했다.[54]
공격은 남중앙 지역에서도 계속되어, 애브너 M. 페린 대령은 그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여단(1,500명 규모의 4개 연대)에게 사격 중지 없이 신속히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페린은 말을 타고 부대를 직접 이끌었으며 기적적으로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그는 부대를 북군 좌익 참호의 약점, 즉 비들 여단의 좌익 연대인 제121 펜실베이니아 연대와 측면 방어를 시도하던 갬블 기병대 사이의 약 45.72m 간격으로 이끌었다. 페린의 여단은 이 지점을 돌파하여 북군 전선을 포위하고 북쪽으로 밀어냈으며, 스케일스 부대 역시 우측면을 계속 압박했다. 오후 4시 30분경, 북군의 방어선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병사들은 북쪽에서 제11군단이 후퇴하고 남군이 추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더블데이는 동쪽의 묘지 언덕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55]
남쪽 측면에서는 제임스 H. 레인 준장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이 해거스타운 로드에서 북군 기병대와 교전하느라 주 공격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L. 토마스 준장의 조지아 여단은 후방에 예비대로 남아 있었으며, 펜더나 힐은 이들을 돌파 지원이나 전과 확대를 위해 투입하지 않았다.[56]
7. 북군의 후퇴

북군의 전선 붕괴가 어느 부대에서 먼저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1군단과 11군단은 서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붕괴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북쪽 돌출부였던 바로우 언덕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연쇄적으로 전선이 붕괴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설명으로는 바로우 언덕과 서쪽의 신학교 능선 방어선이 거의 동시에 무너졌다는 것, 또는 중앙에 있던 로빈슨 사단이 먼저 무너지면서 양쪽으로 혼란이 퍼져나갔다는 것이 있다. 11군단장 하워드 소장은 미드 장군에게 1군단이 먼저 측면에서 무너지는 바람에 자신의 군단도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고 보고했지만, 1군단장 직무대리 더블데이와 그의 부하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논란은 더블데이의 군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29][60]
북군 부대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후퇴했다. 신학교 능선에 있던 1군단 부대들은 비교적 질서를 유지하며 천천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웨인라이트 대령의 포병대는 후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해 한때 고립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웨인라이트는 처음에는 병사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포병들에게 천천히 걸어서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남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남은 17문의 대포를 이끌고 챔버스버그 거리를 따라 급히 후퇴해야 했다.[130][61] 남군의 A. P. 힐 중장은 예비대를 투입하여 신학교 능선의 북군을 추격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131][62]
철도 절단점 근처에서는 다니엘 여단의 공격 재개로 약 500명의 북군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람세어 여단의 공격을 받던 폴 여단은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로빈슨 장군은 후퇴를 명령했다. 그는 후위를 맡은 메인 16 연대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현 위치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찰스 틸든 대령이 지휘하는 메인 16 연대는 뭄머스버그 도로의 돌담 뒤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며 여단 본대가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전투 시작 시 298명이었던 메인 16 연대는 이 전투 후 단 35명만이 살아남았다.[132][63]
11군단에게 이번 후퇴는 지난 5월 챈슬러즈빌 전투에서의 쓰라린 패배를 떠올리게 했다. 헤이스와 애버리 여단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11군단 병사들은 게티즈버그 시내로 밀려 들어갔지만, 시가전에 대한 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흩어졌고,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일부 부대는 코스터 여단이 벽돌 공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후퇴하기도 했다. 게티즈버그 시내는 달아나는 병사들과 포탄이 날아드는 혼란에 휩싸였고, 민간인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부 병사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하실이나 민가의 뒷마당에 숨었다. 알렉산더 쉼멜페닝 장군도 그중 한 명으로, 그는 한 주택의 장작더미 뒤에 숨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사흘을 보냈다.[133][64] 11군단에게 유일하게 유리했던 점은 아침에 지나왔던 길이라 묘지 언덕으로 가는 경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1군단 병사들 중 상당수, 심지어 고위 장교들조차 묘지 언덕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134][65]
북군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묘지 언덕으로 속속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단호한 윈필드 스콧 핸콕 소장이었다. 정오 무렵, 레이놀즈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포토맥군 사령관 미드 장군(당시 게티즈버그 남쪽 약 15km 떨어진 메릴랜드주 태니타운에 위치)은 즉시 가장 신임하는 부하이자 2군단장인 핸콕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핸콕에게는 전장의 지휘를 인수하고 게티즈버그가 주력 결전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인지 판단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미드는 원래 메릴랜드주 남쪽 파이프 크리크에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이었으나, 게티즈버그에서 격전이 벌어지면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다.[135][66]
묘지 언덕에 도착한 핸콕은 선임 장교인 하워드와 지휘권 문제로 잠시 마찰을 빚었으나, 하워드는 결국 미드의 명령에 따라 핸콕의 지휘를 받아들였다. 핸콕이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이후로 그날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단호하고 위엄 있는 태도는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핸콕은 지형을 둘러본 후 하워드에게 "제가 본 어떤 곳보다도 전투를 치르기에 강력한 자연 지형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하워드가 동의하자 "알겠습니다. 여기를 전장으로 삼겠습니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포토맥군 공병 참모인 거버너 K. 워렌 준장 역시 지형을 살펴본 후 핸콕의 판단에 동의했다.[136][67]
8. 저녁
리 장군은 북군이 묘지 언덕의 고지를 점령할 경우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월에게 "가능하다면 적이 점령한 언덕을 점령하라. 그러나 군대의 다른 사단들이 도착할 때까지 전면전을 피하라"는 다소 모호하고 재량권이 많은 명령을 내렸다.[137][68] 이월은 여러 이유로 공격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37][68]
이월의 부대는 늦은 오후 전투로 지쳐 있었고, 비록 "알레게니 존슨" 사단이 새로 도착했지만 전반적인 피로도가 높았다.[137][68] 또한 게티즈버그 북쪽의 좁은 도로를 통해 고지를 공격하는 것은 지형적으로 어려웠다.[138][68] 이월은 A. P. 힐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힐의 군단 역시 소모가 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리 장군도 예비대인 리처드 H. 앤더슨 사단의 투입을 원치 않았다.[68] 대안으로 컬프스힐 점령을 고려했으나, 주벌 얼리는 슬로컴의 12군단으로 추정되는 북군 부대가 요크 파이크로 접근 중이라는 보고에 반대하며 일부 병력을 견제를 위해 보냈다.[138][69] 얼리는 존슨 사단이 도착하길 기다리자고 주장했고, 존슨 사단 도착 후 컬프스힐 점령을 시도했으나 북군 초병선과의 교전 및 일부 병력 생포 후 후퇴하며 7월 1일의 컬프스힐 점령 시도는 무산되었다.[69]
리의 명령은 이월에게 지나친 재량권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받으며,[139][71] 많은 역사가들과 남부 연합의 잃어버린 대의 지지자들은 더 공격적인 스톤월 잭슨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며, 남군이 묘지 언덕을 점령했다면 둘째 날 전투 양상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39][71] 스티븐 W. 시어스는 남군이 묘지 언덕을 점령했다면 미드 장군이 포토맥군을 파이프 크리크 방어선으로 철수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리의 압박 하에서 이는 위험한 작전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140][72]
양측 군대의 나머지 병력 대부분은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착했다. 남군에서는 존슨 사단이 이월 군단에, 앤더슨 사단이 힐 군단에 합류했으며,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의 1군단 중 2개 사단이 다음 날 아침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J.E.B. 스튜어트 소장의 기병대는 여전히 북동쪽에서 작전 중이라 부재했고, 이는 리 장군이 "군대의 눈과 귀"를 잃은 상태로 전투 초기 상황 파악 및 7월 2일 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141][73] 북군 측에서는 미드 장군이 자정 이후 도착했고, 2군단과 3군단은 묘지 능선에, 12군단과 5군단은 동쪽 인근에 배치되었다. 6군단만이 상당한 거리에 있었으나 빠르게 합류 중이었다.[141][73]
게티즈버그 전투 첫날은 단순한 서곡 이상으로, 참전 병력 수 기준으로 남북 전쟁 중 23번째로 큰 전투였다. 미드 군대의 약 4분의 1(약 22,000명)과 리 군대의 3분의 1(약 27,000명)이 참전했다.[142][74] 북군 사상자는 거의 9,000명이었고, 남군은 6,000명을 약간 넘는 사상자를 냈다.[14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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