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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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은 불국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1966년 도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해체 및 보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단순하고 균형 잡힌 외형을 특징으로 하며, 다보탑과 비교되기도 한다. 석공 아사달과 아내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무영탑 전설로도 알려져 있다.
이 탑은 751년(경덕왕 10년)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때 세워졌다고 추정되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 고려 초 지진으로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5]
이 탑은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된다.[4] 고려 초 지진으로 인해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5] 해체 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2. 역사
높이 10.75m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6]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점 등이다. 그 구조법이 지금도 눈에 뜨인다. 탑의 기단 아래 노출되어 있는 바위가 암좌인데, 들여다보면 그렝이한 부분이 보인다.[7] 이는 유례가 드물며, 주목할 만하다.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8]
2. 1. 건립 및 중수
이 탑은 751년(경덕왕 10년)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 고려 초 지진으로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5]
2. 2. 도굴 미수 및 보수
1966년 가을, 도굴꾼들이 탑을 훼손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10] 이 사건을 계기로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석 상면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41cm, 깊이 19cm로 구성되었으며, 금동제 사리 외함과 동경, 비천상, 구슬, 목제소탑 등의 공양물들이 함께 발견되었다.[10]
1973년에는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하였다. 보수 과정에서 나무로 된 전신주가 부러지면서 옥개석이 떨어져 훼손되기도 했다.
3. 구조
다보탑의 복잡함과 대비되는 석가탑의 단순함은 부처의 관조와 세상과의 초월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되었거나, 천상과 지상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2][3]
3. 1. 외형
751년(경덕왕 10년)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때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이 탑은 높이 10.75m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6]과 상륜부가 있는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이다.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고 간결하며,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따 없어진 부분을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7] 탑의 기단 아래 노출되어 있는 바위가 암좌인데, 들여다보면 그렝이한 부분이 보인다.[7]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8] 석가탑은 더 정교한 형제탑인 다보탑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데,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인 디자인이며, 3층은 4:3:2의 조화로운 비율을 이루어 탑에 균형감, 안정감, 그리고 대칭성을 부여한다. 석가탑의 단순함은 석탑 면에 조각이나 부조가 없다는 사실로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석탑은 8개의 연꽃 모양의 돌로 둘러싸여 있다.[2]
3. 2. 탑신부
옥신석(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7]
3. 3. 상륜부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 없어진 부분을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7]
3. 4. 특징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6]과 상륜부가 있고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따 없어진 부분을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 탑구(塔區)를 형성하고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를 배치한 점,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점 등이 특징이다. 기단 아래 노출된 바위(암좌)에는 그렝이 공법(자연석에 맞춰 인공석의 형태를 다듬는 기법)이 사용되었다.[7]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8] 다보탑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석가탑은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인 디자인이며, 3층은 4:3:2의 조화로운 비율을 이루어 탑에 균형감, 안정감, 그리고 대칭성을 부여한다. 석가탑의 단순함과 다보탑의 복잡함의 대비는 부처의 관조와 세상과의 초월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되었거나, 어쩌면 천상과 지상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2][3]
석탑의 3층은 2단 기단 위에 놓여 있다. 석탑 면에 조각이나 부조가 없다는 사실로 석탑의 단순함은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석탑은 8개의 연꽃 모양의 돌로 둘러싸여 있다. 비교적 정교한 석탑의 상륜부는 1973년에 석가탑 이후 100년 후에 세워진 탑과 일치시키기 위해 추가되었다.
4.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966년 가을, 도굴 미수 사건으로 석가탑이 일부 훼손되었다. 이 사건으로 2층 탑신석 상면 중앙 사리공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41cm, 깊이 19cm 크기이며, 중앙에는 금동제 사리 외함이 있었고, 주위에는 동경, 비천상, 구슬, 목제소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등의 공양물이 함께 있었다.[10]
사리함은 집 모양으로, 지붕이 새겨져 있다. 각 벽에는 지붕까지 이어지는 덩굴 문양이, 전체적으로는 연꽃 문양이 사용되었다. 지붕 꼭대기에는 잎 모양 장식이 있다.
발견된 유물 중에는 불교 영의 청동상, 청동 거울, 소형 나무 탑, 비단, 향, 곡옥, 구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0]
4. 1.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평가받는다. 이 경전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자체가 751년에 지어졌고 그 이전에 인쇄물이 제작되었어야 하며, 다른 인쇄물 중 750~751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길이는 620cm, 너비는 8cm로, 한 줄에 평균 8~9자의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인쇄물은 산화로 인해 손상되었으나, 1988년과 1989년에 보존을 위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10]5. 다보탑과의 비교
불국사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두 개의 탑이 있는데, 이 두 탑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석가탑은 단순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 다보탑은 복잡하고 화려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대비는 부처의 이중적인 본성인 관조와 초월을 나타내거나, 천상과 지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2][3]
法華經|법화경중국어 견보탑품의 내용을 보면,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을 이룬다.[11] 석가탑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3:2의 조화로운 비율을 이루어 균형감, 안정감, 대칭성을 보여준다.
6. 설화 (무영탑 전설)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는 뜻의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탑을 만들 당시, 건축 기술이 신라보다 앞섰던 백제의 유명한 석공 아사달이 초빙되었다. 아사달은 신라의 다른 석공들을 제치고 이 공사를 맡아 돌을 다듬고 깎아 탑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한편,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신라의 서울 서라벌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아사녀는 부정한 여인이 공사 중인 남편을 만나면 그의 믿음을 흐트러뜨릴 것이라는 생각에 멀리서 남편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사녀는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며 남편을 기다리다가 결국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9]
이후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영지(影池)라고 불렀고, 석가탑은 무영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9]
참조
[1]
웹사이트
Dabotap Pagoda of Bulguksa Temple, Gyeongju
http://english.cha.g[...]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20-10-09
[2]
URL
https://search.naver[...]
2024-08
[3]
웹사이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https://encykorea.ak[...]
[4]
뉴스
석가탑 완공시기 9년 앞당겨야”… ‘석가탑 중수기’ 새 해석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5]
뉴스
석가탑 고려초에 지진으로 두 차례 붕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4-10-15
[6]
문서
현지 안내문
[7]
서적
토암산에 이룬 이상세계 불국사
조선일보사
2004
[8]
문서
글로벌세계대백과
[9]
웹인용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 문화콘텐츠닷컴
https://web.archive.[...]
2018-04-29
[10]
문서
불교중앙박물관 안내문 인용
[11]
웹인용
다보탑과 석가탑의 또 다른 진실
http://shindonga.don[...]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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