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데 요시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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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이데 요시히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촌 고이데 요시마사의 장남으로, 1587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단바 이즈시번 6만 석을 받아 영지를 다스렸으며,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1619년, 이즈시로 돌아가 차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후 마쓰에성의 수비역을 맡았으며, 1666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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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데 요시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촌 형뻘 되는 인물로, 히데요시를 섬겨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동생의 활약으로 영지를 보전받고 기시와다 번주를 지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다. - 기시와다번주 - 마쓰다이라 야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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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와다번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이데 히데마사를 성주로 임명하며 시작되어 고이데 가문, 마쓰다이라 마쓰이 가문을 거쳐 오카베 가문이 다스렸고, 폐번치현 이후 오사카부에 편입된 번이다. - 고이데씨 - 고이데 히데마사
고이데 히데마사는 1540년에 태어나 1604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가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의 활약으로 영지를 보전받았다.
고이데 요시히데 | |
---|---|
기본 정보 | |
씨명 | 고이데 씨 |
이름 | 고이데 요시히데 |
한자 표기 | 小出 吉英 |
시대 | 에도 시대 |
출생 | 덴쇼 15년 (1587년) |
사망 | 간분 6년 3월 9일 (1666년4월 13일) |
이명 | 통칭: 우쿄 |
시호 | 설강원위봉불백 |
묘소 | 고토쿠지 |
관위 | 종5위 하 우쿄대부, 야마토 수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이에쓰나 |
번 | 다지마이즈시 번 번주 → 이즈미기시와다 번 번주 → 다지마 이즈시 번 번주 |
가문 | 고이데 씨 |
부모 | 아버지: 고이데 요시마사, 어머니: 장춘원 (이토 하루아키라의 딸) |
형제자매 | 딸 (가토 요시야스의 부인), 요시히데, 요시치카, 요시카게, 요시나리, 딸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의 부인), 도시사다 |
배우자 | 정실: 데이죠인 (호시나 마사나오의 딸) |
자녀 | 대도 장녀 (미우라 시게카쓰 정실 후 야마우치 가즈타다 부인) 요시시게 차녀 삼녀 호시나 마사히데 히데모토 히데노부 사녀 (다치바나 다네나가 계실) 오녀 (후지이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정실) |
양자 | 히데카쓰 (호시나 마사히데의 장남. 후에 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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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전임 번주 | 고이데 요시마사 (이즈시 번) |
후임 번주 | 고이데 요시치카 (이즈시 번) |
재임 기간 | 1604년 ~ 1613년 (이즈시 번) |
전임 번주 | 고이데 요시마사 (기시와다 번) |
후임 번주 | 마쓰다이라 야스시게 (기시와다 번) |
재임 기간 | 1613년 ~ 1619년 (기시와다 번) |
전임 번주 | 고이데 요시치카 (이즈시 번) |
후임 번주 | 고이데 요시시게 (이즈시 번) |
재임 기간 | 1619년 ~ 1666년 (이즈시 번) |
2. 약력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촌 고이데 요시마사의 장남으로 오사카에서 태어나 히데요시의 종질이 되었으며, 분로쿠 2년(1593년) 7세 때 종5위하・우쿄 대부에 서임되었다. 게이초 9년(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아버지가 이즈미 기시와다성으로 옮긴 후 단바 이즈시번 6만 석을 받아 영지를 다스렸고, 숙부 미요리에게 1만 석을 분할하여 이즈미 도키번을 건립하게 했다. 같은 해 이즈시성을 축성하고 아리코야마성에서 거처를 옮겼다. 게이초 17년(1612년) 야마토노카미에 임명되었다.[4]
게이초 18년(1613년) 아버지 사망 후 가독을 이어 기시와다로 돌아가 이즈시성을 동생 요시치카에게 양도하고, 이즈미국 오토리군, 히네군, 단바국 야부군, 케타군, 미쿠미군의 5군 중 5만 석을 영지로 받았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영지의 주인장을 받았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 초대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혼다 마사즈미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었다. 겨울, 여름 전투에서 요시치카와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히데타다의 명으로 사카이우라 경비를 맡아 도요토미 측을 체포했다.
겐나 5년(1619년) 이즈시로 이봉되어 5만 석을 다스렸고, 요시치카는 소노베번을 건립했다. 요시히데는 차남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퇴했다.[6] 간에이 10년(1633년) 마쓰에번 접수역, 간에이 14년(1637년) 마쓰에성 수비역을 맡았다. 간에이 15년(1638년) 고야산 다이토를 조영하고, 간분 3년(1663년) 이즈시군 야네 은산을 받았다. 간분 6년(1666년) 80세로 사망하여 고토쿠지에 묻혔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촌인 고이데 요시마사의 장남으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히데요시의 종질에 해당한다. 분로쿠 2년(1593년), 7세 때 종5위하・우쿄 대부에 서임되었다.2. 2. 이즈시 번주 시대
게이초 9년(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아버지 고이데 요시마사가 이즈미 기시와다성으로 옮겨간 후, 요시히데가 단바 이즈시번 6만 석을 받아 영지를 다스렸다. 이 때, 숙부인 미요리에게 요시히데의 영지에서 1만 석을 분할하도록 명하여 이즈미 도키번을 건립하게 했다. 같은 해, 요시히데는 새롭게 이즈시성을 축성하고 아리코야마성에서 거처를 옮겼다.겐나 5년(1619년), 기시와다에서 이즈시의 옛 영지로 이봉을 명받아, 단바국 이즈시군, 야부군, 케타군, 미쿠미군, 아사고군의 5군으로 이루어진 5만 석이 되었고, 이즈시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동생 요시치카는 단바국 소노베로 이봉되어 소노베번을 건립했고, 요시히데는 가독을 (아직 생존해 있는 장남이 아닌) 차남 요시시게에게 양도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6]
2. 3. 오사카 전투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서 흑인을 받았고, 오노 하루나가와 쓰다 요리나가에게서 서신을 받았으나, 요시히데는 이를 받지 않고 혼다 마사즈미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를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겨울 전투에서는 동생 요시치카와 함께 출진하여 덴노지구 공격에 참가했다. 요시히데가 지키던 기시와다성은 수비가 허술해져 오사카성과 가까웠기 때문에, 원군으로 혼다 마사타케, 마쓰다이라 노부요시가 입성했고, 잠시 후 호조 우지시게가 더해졌다. 강화 교섭에서 오노 하루나가는 아들 시나노노카미 하루토쿠를 요시히데의 진영에 보내 인질로 삼았으며, 이는 강화 성립 후 반환되었다.[4]이듬해 여름 전투에서도 요시치카와 함께 했고, 가네모리 가게시게, 이토 하루아키 등 친족[5]이 더해져 기시와다 세력을 이루었다. 4월 29일 도요토미 측이 출진하여 오노 미치이누가 기시와다 성을 점령하는 동안, 오노 하루후사를 주장으로 하나와 나오유키, 오카베 노리쓰나, 와타누마 시게마사 등이 기이국으로 침공하여 아사노 나가아키라를 공격하려 했다. 가시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하자, 5월 1일에 미치이누도 철수하려 했으므로, 요시히데 등은 성에서 쳐내어 수급 62, 포로 6명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7일, 오사카 함락 전투에 가담하여 수백 명을 베었고, 수급 107개를 올렸다. 이 수급을 각각 공의에 헌납하여 포상을 받았다. 8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을 받아 사카이우라 경비를 맡아 도요토미 측을 체포했다.
2. 4. 만년
겐나 5년(1619년), 기시와다에서 이즈시의 옛 영지로 이봉을 명받아, 단바국 이즈시군, 야부군, 케타군, 미쿠미군, 아사고군의 5군으로 이루어진 5만 석이 되었고, 이즈시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요시치카는 단바국 소노베로 이봉되어 소노베번을 건립했고, 요시히데는 가독을 (아직 생존해 있는 장남이 아닌) 차남 요시시게에게 양도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6]간에이 10년(1633년), 이즈모 마쓰에번 호리오 다다하루가 후사 없이 단절되어 개역되자, 후루타 시게쓰네, 이케다 나가쓰네와 함께 마쓰에성의 접수역이 되었다. 같은 14년에 호리오 영지를 계승한 교고쿠 다다타카가 사망하고 그 땅이 몰수되자, 다시 후루타 시게쓰네, 가메이 고레마사와 함께 마쓰에성에 수비역으로 들어갔다.
간에이 15년(1638년), 명을 받아 고야산 다이토를 조영했다. 간분 3년(1663년), 이즈시군 야네 은산을 받았다.
간분 6년(1666년)에 사망했다. 향년 80세. 고토쿠지에 묻혔다.
참조
[1]
문서
生母は正室で長男であるが、継嗣候補から外され、早世。寛永3年10月21日没、享年21。
[2]
문서
保科正英の長男。後に分家を立てる。
[3]
웹사이트
小出吉英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6-03-27
[4]
문서
以前は大和守を称していた父が、播磨守を称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以後は吉英が大和守を称する。
[5]
문서
伊東治明は吉英の祖父であるが、治明の実父は金森長近で、可重はその養子で、大叔父にあたる。
[6]
문서
ただし跡目相続が認められるのは吉英の死後。また吉重は弟たち、英本、英信、英勝にそれぞれ所領を分かち、分家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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