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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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성은 일본 오사카시 주오구에 위치한 성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건설을 시작했다. 도요토미 가문 시대에 완공되었으나,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함락되어 소실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1931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천수각이 건설되었으며, 1997년에는 에도 시대의 모습으로 본마루가 복원되었다. 오사카성은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건물과 유적을 포함하며, 오사카조 공원역 등 여러 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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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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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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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오사카성 (大坂城, 大阪城) |
별칭 | 금성(錦城), 금성(金城) |
유형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성 |
위치 | 일본 오사카 |
역사 | |
축성 | 1583년 |
축성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재건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사용 기간 | 1583년~1945년 |
철거 | 해당 없음 |
재건 여부 | 재건됨 |
구조 | |
성곽 구조 | 윤곽식 평성 |
천수각 구조 | 1585년 축조: 복합식 또는 연결식 망루형 5중 6층 지하 2층 1626년 축조: 독립식 층탑형 5중 5층 지하 1층 1931년 복원: 독립식 망루형 5중 8층 (SRC조) |
소유 및 관리 | |
소유 | 해당 없음 |
관리 | 해당 없음 |
점령 | |
점령군 | 해당 없음 |
지휘관 | 해당 없음 |
거주자 | 해당 없음 |
관련 전투 및 사건 | |
전투 | 해당 없음 |
사건 | 해당 없음 |
문화재 정보 | |
문화재 | 국가 중요문화재 (망루, 문 등) 특별 사적 |
등록문화재 | 국가 등록유형문화재 (복원 모의 천수) |
복원 정보 | |
복원 | 복원 천수각 |
2. 역사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잇코잇키(一向一揆) 사찰 자리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즈치성(安土城)을 본떠 오사카성 건설을 시작했다.[4]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성을 능가하는 성을 짓고자 했으며, 5층의 본탑에 지하 3층을 더하고 탑 벽면에 금박을 입히는 등 화려함을 더했다. 1585년 내성 천수각이 완공되었고, 이후에도 확장을 거듭하여 1597년에 완공되었으나, 이듬해 히데요시는 사망했다. 오사카성은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속되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오사카 전투(大坂の陣)를 시작하여 오사카성을 공격했다.[5] 도요토미 측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군을 격퇴했으나, 이에야스는 외곽 해자를 메워버렸다. 1615년 히데요리가 해자를 복구하려 하자, 이에야스는 다시 군대를 보내 도요토미군을 격파했다. 결국 오사카성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씨(豊臣氏)는 멸망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는 자결했고, 성은 불탔다.[4]
도요토미 가문 멸망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는 1619년 마쓰다이라 다다아키(松平忠明)를 야마토 국(大和国) 고리야마 번(郡山藩)으로 옮기고, 오사카를 막부 직할령으로 삼았다. 1620년, 오사카성의 낡은 구조물들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6] 각 사무라이 가문에 새로운 성벽 건설 임무를 할당했고, 1620년대에 건설된 성벽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세토 내해(瀬戸内海) 근처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에는 기증한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천수각은 외부는 5층, 내부는 8층으로 건설되었으며, 1628년에 완공되었다.[7]
1660년 낙뢰로 화약고가 폭발하여 성에 불이 났고, 1665년에는 낙뢰로 ''텐슈''(天守)가 불탔다.[4] 1843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모금으로 여러 망루가 재건되기도 했다.
1868년 오사카성 함락으로 성은 반막부 세력에게 항복했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둘러싼 내전으로 성 건물들이 불탔다.[4] 메이지 정부 하에서 오사카성은 오사카 육군 병기창(大阪砲兵工廠)의 일부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주요 군수 공장 중 하나가 되었다.[15] 이로 인해 미국의 폭격 대상이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1931년 철근 콘크리트 ''텐슈''가 건설되었고[4], 1995년 오사카시 정부는 에도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사업을 승인하여 1997년 완료되었다. 현재 오사카성은 콘크리트로 재현된 건물이지만, 내부는 현대적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 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초기에는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었지만, 1580년(덴쇼 8년) 이시야마 전투 강화 직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이시야마(오사카) 지역은 서일본을 장악하는 데에도 유리했기 때문에, 『신장공기』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는 이 입지를 높이 평가하여 그 자리에 더 큰 성을 쌓을 계획이었다.[18]이시야마 전투 종결 후 다니와 나가히데와 쓰다 노부스미가 그곳을 방비했다. 일시적인 야전식 진영이 아니라, 「천관야구라(千貫矢倉)」등의 건물도 있었다(『호소카와 타다오키 군공기』). 이는 한 군대가 장기간 주둔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이 건설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혼노지의 변 발생 후, 오사카에 있던 노부스미는 오다 노부타카, 다니와 나가히데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 1582년(덴쇼 10년) 6월 야마자키 전투 후에는 이케다 쓰네오키가 오사카에 들어왔다. 1583년(덴쇼 11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리한 후, 같은 해 6월, 쓰네오키를 미노 국으로 옮기고, 히데요시가 오사카를 얻게 되었다.
이 이봉(移封)에 대해,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것은 실로 그(쓰네오키)의 바람에 반하여 행해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일본야소회 연보』). 한편, 히데요시는 덴쇼 11년 11월 5일자 편지에서, 「오사카의 일, 고키나이의 적합한 장소가 있는 동안, 거성을 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사카 입성 직후인 덴쇼 11년 7월에는 다회가 열렸고, 센노 소에키, 쓰다 소우큐, 이마이 소우큐, 마쓰이 유칸, 아라키 도쿤, 야마가미 소우지 등이 모였다.
2. 1. 1.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
1583년 센고쿠 시대 이시야마 혼간지와 그 절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개시했다.완성에 1년 반이 소요된 혼마루는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조성되었고, 천수는 옛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외관은 5층 5계이다. 기와 등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히데요시 임종까지 니노마루, 산노마루에는 소가마에[47]를 건설해 3중 해자와 운하가 있는 견실한 성으로 완성되었다.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 히데요시를 방문한 오토모 소린은 성 주위를 둘러보고 〈오사카성은 삼국[48]무쌍〉이라 불렀다고 한다.
축성자인 히데요시는 교토에 주라쿠 다이, 후시미성을 차례차례 축성하고, 오사카보다는 주로 교토에 머물렀다. 1599년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 혼마루로 이주했다. 고다이로(五大老)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오사카성 니노마루로 옮겨와 정무를 보았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잇코잇키(一向一揆) 사찰 자리에 성 건설을 시작했다.[4] 기본 설계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본거지였던 아즈치성(安土城)을 본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성을 본뜨되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성을 짓고자 했다. 5층 본탑에 지하 3층을 더하고,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탑 벽면에 금박을 입히는 계획이었다. 1585년에 내성 천수각이 완공되었다. 히데요시는 계속 성을 확장하고 개량하여 공격자들에게 더욱 견고한 요새로 만들었다. 1597년에 건설이 완료되었고, 히데요시는 이듬해 사망했다. 오사카성은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속되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겨울 동안 오사카 전투(大坂の陣)를 시작하여 오사카성에 있던 도요토미 측 세력을 포위 공격했다.[5]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군보다 약 2배 적었지만, 20만 명에 달하는 도쿠가와군을 격퇴하고 성 외곽 성벽을 지켜냈다. 이에야스는 성 주요 방어 시설 중 하나였던 외곽 해자를 메웠다. 1615년 여름, 히데요리는 외곽 해자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이에야스는 다시 오사카성에 군대를 보내 6월 4일에 외곽 성벽 안 도요토미군을 격파했다. 이후 오사카성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씨(豊臣氏)는 멸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요도도노(淀殿)는 할복했고 성 건물들은 전소되었다.[4]
1583년(덴쇼 11년)부터 히데요시에 의해 축성이 시작되어 하시바가(도요토미씨) 본거지가 되었다.
같은 해,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 카타기리 카츠모토,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채석봉행으로 아와지섬에 파견했다. (후에 히데요리는 오사카성 수리 때문에 게이초 4년(1599년)에 쿠로다 타카타카를 아와지섬에 파견했다.)
도요토미 오사카성 공사는 4기로 구분되는데, 1기(덴쇼 11년~13년)에 본마루, 2기(덴쇼 14년~16년)에 니노마루, 3기(분로쿠 3년(1594년)~5년)에 총구(미노마루), 4기(게이초 3년(1598년))에 우마데 구루와와 다이묘 저택을 정비했다.
분로쿠·게이초의 역 기간 중 분로쿠 5년(1596년)에 이루어진 화의 협상에 관해, 명 사신 접대를 위해 본마루 고덴은 대개축이 이루어졌다. 본마루 남쪽 오모테고덴에는 “센죠지키”라 불리는 대규모 궁전, 개별적 고덴이었던 오모테고덴과 츠메노마루 오쿠고덴을 잇는 “센죠지키의 큰 복도”도 세워졌다. 이 건축물들은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붕괴되었다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후에도 존속하고 있었다. 게이초 9년에는 히데요리가 “2층짜리 센죠지키”를 신축했는데, 이것이 궁전을 가리키는지 복도를 가리키는지는 불명확하다. 오모테고덴이 있는 본마루 남쪽과 오쿠고덴이 있는 츠메노마루 지표 차이는 3미터 이상이다.[19] “센죠지키”, “센죠지키의 큰 복도”는 오사카의 진까지 남아, 『오사카 겨울의 진도 병풍』, 『오사카 여름의 진도 병풍』 양쪽에 그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오사카성이 도요토미 정권 본거지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1585년(덴쇼 13년) 히데요시는 관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586년(덴쇼 14년)에는 관백으로서 정청·거관으로 교토에 쥬라쿠다이를 건설하여 1587년(덴쇼 15년) 규슈 정벌 이후에는 이곳으로 이사했고, 관백을 물러난 후에는 교토 남교외에 후시미성을 축성하여 죽을 때까지 후시미에서 정무를 집행했다. 다만 제후들에 의한 설날 인사는 기본적으로 오사카성에서 받았다.
1585년(천정 13년) 준공, 1615년(겐와 원년) 함락 시 소실.
도요토미 오사카성 것으로 여겨지는 평면도 『본마루도』에서는, 야마자토 구루와를 가르는 본마루 츠메 성벽을 따라, 본마루 북동쪽 구석에 그려져 있다. 도요토미 오사카성 천수각은 천수대에 가득 차게 세워지지 않고, 와카마츠성 천수각처럼 여지를 남기고 천수 구루와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천수각은 복합식 또는 연결식 망루형 5층 6개 층 지하 2층이었고, 1층 규모는 남북 11칸 × 동서 12칸(주간:7척 간)이었다고 생각되며, 외관은 흑칠 도장 아래쪽을 보이는 판자 붙임으로, 회칠 벽 부분도 회색 어두운색을 사용, 금구나 기와(금박 기와) 등에 베풀어진 금을 눈에 띄게 했다고 생각된다. 일설에는 벽판에 금 조각을 베풀었다는 것도 있다. 5층에는 황금의 다실이 있었다고 한다. 최상층은 30명 정도 들어가면 관백 옷에 닿을 정도였다고 루이스 프롤이스 『일본사』에 있다.[35]
천수각 복원안에는 가장 장대하고 화려한 『오사카 여름의 진 도병풍』(구로다 도병풍)을 기반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 도병풍』, 『오사카성도 도병풍』 등이 참고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사카 여름의 진과 겨울의 진에서는 천수각 모습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여름의 진의 것은 재건 또는 개축된 것이라고 하며, 그것에 따른 복원안도 미우라 마사유키 등으로부터 제시되고 있다. 구로다 나가마사에 의해 작성된 구로다 도병풍 모습에 가까운 미야가미 시게타카 복원안은, 오사카성 천수각 안 도요토미 오사카성 재현 모형 모델이 되고 있다.
2. 2. 에도 시대
1603년 에도 막부 성립 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 머물며 셋쓰를 지배했고, 1614년 오사카성 겨울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소마에와 산노마루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강화했지만, 조건에 없던 니노마루의 외측 해자까지 메워져 오사카성은 내측 해자와 혼마루만 남은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히데요리가 매워진 외측 해자를 다시 만들었기 때문에 강화는 파기되었고, 겨울전투 4개월 후인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패배하여 혼마루가 소실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다.[4]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측 서군 패배로 도요토미 가문은 쇠퇴했다. 220만 석에서 세쓰·가와치·이즈미 65만 7400 석의 다이묘로 전락했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 강화 조건으로 오사카성의 소가마(惣構), 사노마루(三の丸), 니노마루(二の丸)가 파괴되어 오사카성은 내호와 본마루만 남았다. 히데요리가 해자를 재건하려 하자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가 발발, 오사카성은 함락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함락 후 오사카성은 이에야스의 외손자 마쓰다이라 다다아키에게 주어졌지만, 1619년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이봉되면서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2. 2. 1.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
1619년 막부의 직할령으로 편입된 오사카성은 1620년부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하여 1629년에 완성되었다.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흙을 돋운 뒤 그 위에 높은 석벽을 쌓아 이전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은 이전 도요토미 가문의 성곽 넓이의 1/4에 불과했지만, 천수는 크기와 높이면에서 기존의 도요토미 가문의 천수를 능가했고 구조도 달랐다. 다만 외관은 5층으로 동일했는데, 이는 도요토미 가문의 기억을 지우고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를 전국에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막부 직할 성인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의 성주는 도쿠가와 막부가의 역대 쇼군이었고, 다이신[49]에서 선출된 오사카성 조다이[50]에게 위탁했다. 또한, 다이신보다 낮은 직급의 쇼신 중 6명을 선출해 2명은 오사카 조반과 오사카 가반을 두어 성을 경비했다. 에도 시대 여러 번의 화재로 손상을 입어 수리를 했지만, 1665년 낙뢰로 인해 천수가 소실되었고, 그 후 천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1868년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막부군은 오사카성으로 패주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배로 에도로 도망갔고, 오사카성은 신정부군에 개성되었다. 하지만 전후 혼란 속에 방화가 일어나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신정부는 성내 부지를 육군의 부지로 활용하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다. 동쪽에는 국철 조토선(현재의 오사카 순환선)까지의 거대한 지역에 오사카 포병공장(오사카 육군 조병창)을 지었고,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 시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15]- 1870년(메이지 3년) 육군은 고호다이[51]를 설치하고, 보시업무를 개시했다.
- 1885년(메이지 18년) 와카야마성 니노마루로부터 어전 일부를 이축해, 기슈 어전이라 명명했다.
- 1888년(메이지 21년) 혼마루 사쿠라 문이 복원되었다.
- 1928년(쇼와 3년) 당시 오사카 시장 세키 하지메는 천수의 재건을 제안했고, 시민기금을 조성해 육군 제4사단 청사를 이전하고, 천수의 건설을 진행했다.
- 1931년(쇼와 6년) 철골 콘크리트로 복원 천수각을 준공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메이지 유신시에 소실을 면한 건물이 소실되었다. 특히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공습에 의해 교토역까지 피난민으로 인파가 밀려들었고, 피난민 중 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때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 본사 옥상에서 촬영한 천수각의 배경은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그 후, 이 사진은 오사카 여름전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복원된 천수는 소실을 면했다.
종전 후 성내의 육군요지가 연합군에 접수되었고, 1947년(쇼와 22년) 미군에 의한 소실로 기슈 어전은 소실되었다.
- 1948년(쇼와 23년) 접수해제 후 건물의 수리가 진행되었고, 바깥 해자를 포함 넓은 지역이 오사카조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 1950년(쇼와 25년) 태풍 제인에 의해 손상을 입어, 본격적인 보수작업을 시작한다. 더불어 학술조사도 실시되었다.
- 1959년(쇼와 34년) 지하에 도요토미 씨의 오사카성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혼마루 내의 육군사단 사령부의 옛 시설은 잠깐 동안 오사카 부 경찰본부의 청사로 사용되어 성벽 일부를 사격훈련장으로 활용했다. 군수공장터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남겨진 대량의 철과 구리를 노린 아팟치 족이 나타났고, 이것은 고마쓰 사쿄와 가이코 다케시의 소설의 무대가 되었다.
- 1983년(쇼와 58년)〈오사카 축성 400년 마쓰리〉를 겸해 오사카 순환선에 오사카조 공원 역이 신설되었고, 오사카성 홀도 개관되었다. 남아 있던 군수공장터에는 하나둘 대기업의 빌딩이 들어섰고, 성 북동쪽에는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가 조성되었다.
-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3. 구조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가문이 축성한 성과 도쿠가와 가문이 재건한 성의 배치가 다르다. 현재 볼 수 있는 건물 배치는 모두 에도 시대의 것으로 도쿠가와 가문이 축성한 것이다. 단, 해자와 문 등의 위치는 도요토미 가문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성의 형식은 윤곽식 평성으로, 혼마루를 중심에 두고 외성을 동심원으로 배치했다. 그 사이에 내측 해자와 외측 해자를 두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 시가지에서 천수가 잘 보이도록 천수의 위치와 도로의 배열 등을 궁리했다고 전해진다.
대지의 북단에 축성한 오사카성의 방위상의 약점은 대지의 높이가 같은 남쪽이다. 그래서 서에서 남으로 해자를 만들어 성을 감쌌고, 다마쓰쿠리 문의 남쪽에 반월형의 외성 사나다마루를 축성했다. 오사카 겨울전투의 격전지가 바로 오사카성 남쪽이었다.
오사카성의 본성은 대략 1km2의 부지에 위치해 있다. 이는 뿌리박기 기법을 사용하여 절벽처럼 깎아 만든 바위벽으로 지지되는 매립지의 두 개의 높이 솟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각각은 해자를 내려다본다. 본성은 외부에서 볼 때 5층, 내부에서 볼 때 8층이며, 공격자로부터 거주자를 보호하기 위해 높은 돌 기초 위에 세워졌다.
본성은 일련의 해자와 방어 시설로 둘러싸여 있다. 성에는 두 개의 해자(내해자와 외해자)가 있다. 내해자는 성 내부에 있으며 습지(북동쪽)와 건지(남서쪽)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된다. 한편, 외해자는 성 전체를 둘러싸고 성의 외곽 경계를 나타내며, 각각 북, 동, 남, 서의 네 방향을 나타내는 네 개의 개별적인 물이 채워진 구역으로 구성된다.
약 61000m2에 달하는 성터에는 일본 정부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한 13개의 구조물이 있다.[2]
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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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테몬(大手門) |
사쿠라몬(桜門) |
이치반야구라(一番櫓) |
이누이야구라(乾櫓) |
로쿠반야구라(六番櫓) |
센간야구라(千貫櫓) |
타몬야구라(多聞櫓) |
긴메이수이(欽明天皇井戸) |
킨조(金蔵) |
엔쇼구라(煙硝蔵) |
오테몬 주변 3개 구역 도베이(土塀) |
문어석을 포함한 몇몇 거석이 성에 있지만, 이것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외해자에는 두 개의 주요 초소인 아오야몬(青屋門)(북동쪽)과 오테몬(남서쪽)이 있다.
외해자와 내해자 사이에는 후시미야구라(伏見櫓) 유적, 엔쇼구라, 오사카 게이한칸, 호쇼안 다실, 오사카성 니시노마루 정원, 센간야구라, 타몬야구라, 타이코야구라(太鼓櫓) 유적, 오사카 슈도칸 무도관, 호코쿠 신사, 이치반야구라(첫 번째 야구라), 매화밭이 있다.
내해자를 건널 수 있는 곳은 두 곳으로, 고쿠라쿠바시(極楽橋) 다리(북쪽에 위치)와 사쿠라몬(남쪽의 주요 초소)이 있다.
내해자 안에서 성은 본마루와 야마자토마루의 두 개 주요 지역으로 나뉘었다. 본마루 안에는 본탑, 긴메이수이, 일본 정원, 타코이시(문어석), 긴조, "타임캡슐 엑스포 '70"이 있다. 야마자토마루 안에는 표석 광장과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자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이후의 거의 모든 일본 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인 본성|tenshu일본어는 평화로운 시대에는 창고로, 전쟁 시대에는 요새화된 탑으로 사용되었고, 봉건 영주|大名|daimyo일본어의 관청과 주택은 ''텐슈'' 근처의 단층 건물들과 주변의 야구라|櫓|yagura일본어 그룹에 위치해 있었다.[3]
도쿠가와 씨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씨의 오사카성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후지도우 타카토라를 총책임자로 하는 천하부흥을 실시했다. 전체적으로 높이 약 1미터에서 10미터의 성토를 한 위에 더 높게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도요토미 오사카성의 유구는 지하에 묻혔다. 또한 천수각 등 건물도 구조를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인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도요토미 오사카성은 당시에는 30년 이상 전의 "낡은 성"이었으며, 임진왜란·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의 전훈과 천하부흥을 통해 발달한 성곽 기술에 부합하는 새로운 성이 요구되었다.
9년에 걸쳐 3기에 걸친 천하부흥의 결과, 성곽의 면적은 도요토미 시대의 4분의 1 규모로 축소되었지만, 최대 폭 약 90m에 달하는 외해자를 두르고, 천수각은 그 높이와 총 바닥 면적 모두 도요토미 씨의 것을 능가하는 규모의 것이 건설되었다. 삼중이층(三重櫓)은 본마루에 서쪽 첫 번째 이층(西之一番櫓)을 포함하여 12기, 이중이층(二重櫓)은 산자락 곡륜에 동쪽 마름모꼴 이층(東菱櫓)을 포함하여 15기에 달했다. 성벽의 높이는 본마루 동쪽 면에서 해자 바닥으로부터 약 32m로 일본 제일이 되었다. 성문에는 문어돌을 비롯한 거대한 거울돌이 놓였다. 또한 버려진 총구도 밭이나 공터로 재건이 가능한 형태로 유지되었다.
3. 1. 입지
오사카성은 우에마치 대지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대지 북쪽으로는 요도강이 흘러 자연적인 요새 역할을 했으며, 일본 서부에서 교토로 물자를 운반하는 수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오사카성이 있는 대지의 북쪽 끝은 주변보다 높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다. 또한 북쪽에서 흐르는 요도가와 강의 지류를 이용해 성 안 해자에 물을 채웠다.[2]
오사카성은 도요토미씨가 처음 쌓은 성과, 이후 도쿠가와씨가 다시 쌓은 성의 배치와 구조가 다르다. 현재 볼 수 있는 배치는 모두 에도 시대의 것이다. 하지만 해자와 문의 위치 등은 히데요시 시대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지 북쪽 끝에 위치한 오사카성은 북쪽, 동쪽, 서쪽 세 방향이 본마루에서 볼 때 낮은 지대이다. 북쪽 고지 아래에는 요도가와 강과 그 지류가 흘러 천연 해자 역할을 하면서 성내 해자로 물을 끌어들이는 데 이용되었다.
초대 축성 총책임자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성곽 배치를 담당했다. 본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구역을 동심원 모양으로 연결하고, 그 사이에 안쪽 해자와 바깥쪽 해자를 배치한 형태이다. 히데요시는 효고에게 축성에 관한 지시를 내려, 오사카 시내에서 천수각이 잘 보이도록 천수각 위치와 도로 등을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다니와 나가히데가 축성한 안토 성의 성벽 축조 방법을 이어받았으며, 현재 오사카 성 지하 7미터에서 당시 성벽이 발견되었다.
본마루의 구조는 건축에 참여한 나카이 마사키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지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당시에는 높은 석벽을 쌓는 기술이 없어 3단 구조로 만들어졌다. 본마루 안에는 넓은 구역이 있는데, 북쪽부터 야마자토 구역, 가장 높은 곳에 천수각과 오쿠고덴이 있는 본마루 안쪽, 한 단 낮은 곳에 표고덴이 있는 본마루 바깥쪽, 그 서쪽에 있는 출마루 형태의 구역으로 구성되었다.
니노마루의 규모는 해자의 폭과 깊이를 제외하면 도쿠가와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각 성문 앞에는 저택 부지를 겸한 대형 우마데(말을 훈련시키는 곳)가 있었으며, 발굴 조사 결과 흙으로 쌓은 벽과 장애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오사카 겨울 전투를 그린 병풍을 보면 북쪽은 석벽, 남쪽은 흙벽, 그 중간은 요이마키 석벽으로 쌓여 있었다.
대지 북쪽 끝을 깎아 만든 오사카 성의 방어상 약점은 대군이 진을 칠 수 있는 남쪽이었다. 그래서 서쪽에서 남쪽을 둘러싸듯이 흙벽으로 된 총해자를 둘렀으며, 겨울 전투 직전에는 타마즈쿠리몬 남쪽에 사나다 노부시게가 반달 모양의 사나다마루를 쌓았다. 결국 겨울 전투는 이 방면에서 공격해 오는 도쿠가와 측과 농성하는 도요토미 측 사이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비와호 북부에 있는 타케시마의 호고지 당문(국보)은 현존하는 유일한 도요토미 오사카 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34]

3. 2. 복원 천수
도요토미의 흑색(5층)]]외관은 옛 그림을 바탕으로 재탄생되었는데, 1층부터 4층까지는 도쿠가와 풍의 백색 회벽으로, 5층은 도요토미 풍의 흑색에 금박으로 호랑이와 두루미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에 대해 도요토미 가문의 형식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대대적인 개수를 통해 한신·아와지 대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구조가 보강되었고, 외관 벽도 다시 칠해졌다. 처마 기와와 샤치호코, 귀면기와의 금박도 다시 입혀졌으며, 단체 관광객과 신체장애인을 위해 승강기 운행 구간이 연장되었다.
1997년, 오사카성 천수각은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태합 할아버지의 성”이라고도 불리지만, 1583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조한 오사카성의 유구는 현재 거의 매몰되어 있다. 현재 지표에서 볼 수 있는 오사카성의 유구는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신축에 가까운 수축을 실시한 도쿠가와 오사카성의 유구이다. 1959년 오사카성 종합 학술 조사에서 성터에 현존하는 누각이나 성벽 등도 모두 도쿠가와씨, 에도 막부에 의한 것임이 확인되었다.[17]
천수각은 1931년에 철골 철근 콘크리트(SRC) 구조로, 도쿠가와 시대에 재건된 천수대 성벽 위에 자료가 부족한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을 상상하여 복원된 창작물이지만, 1997년에 국의 등록유형문화재가 되었고, 박물관 「오사카성 천수각」으로 운영되고 있다.
4. 남아있는 건조물
현재 성내에는 오테 문, 엔쇼구라, 다몬 망루, 센간 망루, 이누이 망루, 이치반 망루, 로쿠반 망루, 가나구라, 사쿠라 문 등이 남아 있으며,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7]
현존하는 성벽도 많이 남아있다. 에도 시대의 오사카성은 에도 막부의 데쓰다이부신[52]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석벽에는 그 돌을 가지고 온 다이묘를 표시하는 각인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돌들은 세토 내해의 여러 섬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다.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은 에도 시대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 파괴되거나 매몰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볼 수 없다. 1950년대 중후반 즈음에 오사카성 종합조사에 의해 혼마루의 지하에 도요토미 가문의 석벽이 발견되었고, 현재는 일반에 개방되지 않고 뚜껑으로 구멍을 막아 지하에 보존하고 있다. 2003년에는 오테 문앞 산노마루 해자터의 발굴조사에서 해자 내측 벽에 벙커와 비슷한 형태의 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해자 자체가 오사카 겨울전투를 즈음하여 급하게 매워졌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1583년부터 1598년에 걸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조한 오사카성의 유구는 현재 거의 매몰되어 있다. 현재 지표에서 볼 수 있는 오사카성의 유구는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수축을 실시한 오사카성의 유구이다. 1959년의 오사카성 종합 학술 조사에서 성터에 현존하는 누각이나 성벽 등도 모두 도쿠가와씨, 에도 막부에 의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천수각은 1931년에 철골철근콘크리트(SRC) 구조로, 도쿠가와 시대에 재건된 천수대 성벽 위에 자료가 부족한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을 상상하여 모의 복구된 창작물이지만, 1997년에 국의 등록유형문화재가 되었고, 박물관 「오사카성 천수각」으로 운영되고 있다.
에도 시대 초기부터 후기에 걸쳐 건립된 누각과 문, 창고 등 건물 13동 및 내호와 외호가 현존하며, 성터는 710000m2의 범위가 국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7] 보신 전쟁 중 1868년 2월 2일에 소실된 본마루 고덴, 삼중 누각 11기, 이중 누각 8기 등 및 태평양 전쟁 중 1945년 8월 14일에 소실된 삼중 누각 1기, 이중 누각 3기 등을 목조로 복원할 계획은 없다.
현재 성내에는 오테몬(大手門), 엔쇼쿠라(焔硝蔵), 타몬야구라(多聞櫓), 센칸야구라(千貫櫓), 이누이야구라(乾櫓), 이치방야구라(一番櫓), 로쿠방야구라(六番櫓), 킨조(金蔵), 킨메이수이도야가타(金明水井戸屋形) 등의 건물 유구가 남아 있으며,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사쿠라몬(桜門)의 고려문(高麗門)은 1887년에 일본 육군 오사카진다이(大阪鎮台)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석축의 대부분이 당시의 유구이다. 에도 시대의 오사카 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3기에 걸친 천하부흥(天下普請)에 의해 재건되었다. 석축에 사용된 돌은 세토내해의 섬들이나 효고현의 로코산맥의 돌을 쪼는 작업장(石切丁場)에서 채석된 화강암이다. 또한 멀리 후쿠오카현유쿠하시시(行橋市) 구츠오(沓尾)에서도 채석되었다. 이코마(生駒)나 카사키(笠置), 가모(加茂) 등 기즈가와(木津川) 연안에서도 채석되었으며, 폐성이 된 후시미성(伏見城)의 석재도 재활용되어 운반되었다.
석축석에는 다이묘(大名)의 소유권을 명시하기 위한 목적이나 작업 목적 등 다양한 목적으로 각인이 새겨져 있다. 높이 5m~6m, 최대 너비 14m에 달하는 거석이 거울돌(鏡石)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성내 최대의 거석은 비젠국(備前国)오카야마번(岡山藩) 번주・이케다 다다오(池田忠雄)가 운반해 온 본마루 사쿠라몬 마스가타(桜門枡形)에 있는 다코이시(蛸石, 문어돌)로, 무게는 최대 130ton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내 4번째 거석인 오테미부키이시(大手見附石)와 5번째 거석인 오테니방이시(大手二番石)는 원래 한 장의 바위였는데 분할된 것으로 밝혀졌다. 오사카 시내나 쇼즈시마(小豆島) 등에는 석축에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석재가 있으며 "유감석(残念石)"이라고 불린다.
도쿠가와 씨는 오사카 성을 재건할 때, 도요토미 오사카 성의 흔적을 파괴하고 흙을 쌓은 위에, 성곽의 배치를 변경하여 축성했기 때문에, 현재 오사카 성지에서 볼 수 있는 유구나 이중 해자, 석축은 모두 에도 시대의 도쿠가와 오사카 성의 것이다. 오사카의 진(陣)에서 매립된 소우보리(惣堀)를 포함한 도요토미 오사카 성의 유구는 오사카 성 공원이나 주변 건물・도로 지하에 매몰된 채로, 발굴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무라카와 유키히로(村川行弘) 등에 의한 쇼와 중기의 오사카 성 종합 조사에 의해, 도쿠가와 씨 본마루 지하에서 히데요시 시대의 석축이 발견되어, 현재는 평소에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뚜껑이 있는 구멍 바닥에 보존되어 있다.
2003년에는 오테마에 미노마루 미즈보리아토(大手前三の丸水堀跡)의 발굴 조사에서, 해자 바닥에서는 장벽이 있는 장자해자(障子堀)가 발견되었고, 해자 안쪽 벽에는 토치카(トーチカ)와 같은 유구도 발견되었다. 또한, 이 발굴 조사에 의해, 해자 자체가 오사카 동계의 진(陣) 때 긴급 공사로 매립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확인되었다. 도요토미 시대의 석축을 공개하는 계획이 있으며, 그를 위한 모금 활동이 2013년부터 이루어지고 있다.[44]
순위 | 위치 | 석명 | 추정 중량 | 추정 산지 | 담당 다이묘 |
---|---|---|---|---|---|
1 | 벚꽃문 枡形 | 문어석 | 약 130ton | 비젠국 이누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2 | 교바시문 枡形 | 히고석 | 약 120ton | 사누키국 쇼도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3 | 벚꽃문 枡形 | 후소데석 | 약 120ton | 비젠국 이누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4 | 오테문 枡形 | 오테미츠케석 | 약 108ton | 사누키국 쇼도시마 | 쿠마모토번 카토 타다히로 |
5 | 오테문 枡形 | 오테 이번석 | 약 85ton | 사누키국 쇼도시마 | 쿠마모토번 카토 타다히로 |
6 | 벚꽃문 枡形 | 고반석 | 약 82ton | 비젠국 오키노시마 또는 키타키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7 | 교바시문 枡形 | 교바시구치 이번석 | 약 81ton | 사누키국 쇼도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8 | 오테문 枡形 | 오테 삼번석 | 약 80ton | 사누키국 쇼도시마 | 쿠마모토번 카토 타다히로 |
9 | 벚꽃문 枡形 | 벚꽃문 사번석 | 약 60ton | 비젠국 이누시마 또는 마에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10 | 벚꽃문 枡形 | 용석 | 약 52ton | 비젠국 오키노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11 | 벚꽃문 枡形 | 호석 | 약 40ton | 비젠국 오키노시마 | 오카야마번 이케다 다다오 |
; 중요문화재
- 오사카성 13동
- * 오테몬(大手門) - 1628년 창건, 1848년 수리[45]
- * 성벽 3동 (오테몬 남쪽, 오테몬 북쪽, 다몬야구 북쪽)
- * 다몬야구(多聞櫓) - 1848년
- * 센간야구(千貫櫓) - 1620년
- * 이누이야구(乾櫓) - 1620년
- * 이치방야구(一番櫓) - 1628년
- * 로쿠방야구(六番櫓) - 1628년
- * 엔쇼쿠라(焔硝蔵) - 1685년
- * 킨조(金蔵) - 에도 시대(1625년 창건)
- * 킨메이수이도야가타(金明水井戸屋形) - 1626년
- * 사쿠라몬(桜門) - 1887년
; 등록유형문화재
- 「오사카성 천수각」(천수) - 1931년
; 특별사적
- 오사카성터(1955년 6월 24일 지정)






5. 교통
오사카성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은 다음과 같다.
; 철도
- JR 서일본 오사카조 공원 역 (오사카 순환선)
- JR 도자이 선 오사카조기타즈메 역 (단,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음)
- 오사카 메트로 다니마치 4초메역,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 역 (나가호리쓰루미료치 선)
- 오사카 메트로·게이한 전철 덴마바시역 (게이한 본선・나카노시마 선, 오사카 메트로 다니마치 선)
- 오사카 메트로·JR 서일본 모리노미야역 (오사카 순환선, 오사카 메트로 추오 선・나가호리쓰루미료치 선)
; 시내버스
- 오테마에 정류장 (오사카 시티버스 62호 계통)
- 바바마치 정류장 (오사카 시티버스 62호 계통)
; 수상버스
- 오사카성 항 (아쿠아라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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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城天守閣に「寅」のパネル登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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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田雅也が行く 猛虎の地(4)「タイガース」の由来は天守閣の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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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 규슈, 주고쿠 지방, 시코쿠. 동국: 간토 지방. 북국: 호쿠리쿠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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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직속 무사로 3천석이상의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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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대리로 관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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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를 위해 공포탄을 쏘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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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다이묘에 명령을 내려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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