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호 (후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호는 후연의 관료로, 395년 참합피 전투를 앞두고 북위와의 전쟁에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나, 이후 북위에 투항하여 동아후에 봉해졌다. 북위에서 영서장군, 양주진도대장 등을 역임하며 민간에서 덕을 베풀다 70세에 사망했으며, 사후 진서장군과 진주자사로 추증되었다. 북제 문선제가 북제를 건국한 후 진주사군으로 추존되어 칠묘에 위패가 안치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북제의 추존황제 - 고징
    동위의 권신이자 북제의 추존 황제인 고징은 고환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승상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한 후 아들 고양에 의해 북제 건국 후 문양황제로 추존되었다.
  • 북제의 추존황제 - 고환 (북위)
    고환은 북위에서 태어나 이주씨와의 대립에서 승리하여 동위를 건국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효무제와 효정제를 옹립하고 서위와의 대립 속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2013년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교황 사임, 북한 핵실험, 용산 개발 사업 부도, 윤창중 사건, 스노든 폭로, 김연아 우승, 방탄소년단 데뷔, 넬슨 만델라 사망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들이 발생한 해이다.
고호 (후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진주사군
작위북제 칠묘 배향자
재위(추존)
전임자이부상서
후임자무정공
고호(Gao Hu)
시호동아경후(東阿敬侯, 북위), 진주사군(秦州史君, 북제)
부친이부상서
모친불명
배우자모용씨(慕容氏)
출생일불명
출생지북위 발해수현
사망일불명
사망지북위

2. 생애

고호는 어린 시절부터 재치와 기품이 있었고 민첩했다. 그의 형 고감(高轁)은 명성이 높아 동생인 고호도 최령(崔逞)의 존경을 받았다.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모용수의 노여움을 사 면직되었다가, 모용보 즉위 후 연군태수로 복직했다. 397년 후연의 멸망을 예견하고 북위에 투항, 동아후(東阿侯)에 책봉되었다. 태무제 시기에는 고장진(姑臧鎭)에서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다 70세에 사망했다. 사후 진서장군(鎭西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敬)이다. 550년에는 현손 북제 문선제에 의해 칠묘에 위패가 안치되었다.

2. 1. 후연에서의 관직 생활

고호는 후연에서 요직을 지냈으며 395년, 후연이 출병하여 북위로 진격하는 참합피 전투를 앞두고 황제 모용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1]

「魏燕兩國是友邦,他們有內亂,我們派兵支援他們;我們有需要,他們也沒有背棄。兩國和好多年,往來不絕。早前因為向拓跋珪求馬不果而留下他的弟弟,不對的是我們而非他們。此時本應該修補兩國關係,安定國家,但今天卻要派太子率兵遠征。而且魏主拓跋珪雄武有謀略,他們的兵馬都精銳強盛,受盡艱險苦困。而太子年輕,心高氣銳,輕敵好勝,難以獨力統軍。此行兵凶戰危,希望再加考慮。」|위와 연 두 나라는 서로 우방국이고, 위에 내란이 발생했으니 우리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급하면 그들도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간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중국어

「일찍이 탁발규에게 말을 달라고 했다가 주지 않았다 해서 그의 동생을 억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양국의 관계를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오늘은 태자(모용보)를 보내 원정을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위군은 모두 정예하여 곤경에 처할 확률이 높습니다. 태자는 젊고 드세며 적을 가벼이 여겨 군사를 통솔하는데 부적합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군대가 불리할 것 같으니 폐하께선 좀 더 생각해보기 바랍니다."|중국어

황제 모용수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워해 고호를 파직시켰다. 결국 참합피 전투는 후연의 대패로 끝났으며, 모용수는 이듬해인 396년 친정해 형세를 반전시키려 했으나 참합피를 지나다가 산처럼 쌓인 후연군의 시체를 보고 화병으로 죽었다.[1] 이후 태자였던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호를 연군태수(燕郡太守)로 다시 등용하였다. 397년 모용보는 수도인 중산(中山)을 버리고 옛 수도인 용성(龍城)으로 도주했으나,[2] 그런 상황에도 종실 간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고호는 후연의 패배를 직감하고 삼천 호를 거느린 채 북위에 투항하였다.[1]

2. 2. 북위에 투항

397년 모용보가 수도인 중산(中山)을 버리고 옛 수도인 용성(龍城)으로 도주했으나, 종실 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고호는 후연의 패배를 직감하고 3천 호를 거느린 채 북위에 투항하였다.[1]

북위에 투항한 고호는 동아후(東阿侯)에 책봉되었으며, 우장군(右將軍)을 더해 대동제부(大東諸部)를 통괄하였다. 태무제 시기 영서장군, 양주진도대장을 역임했으며 고장진(姑臧鎭)에서 민간에 덕을 베풀다가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진서장군(鎭西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3]

2. 3. 북위에서의 활동

397년, 모용보가 수도인 중산(中山)[1]을 버리고 옛 수도인 용성(龍城)[2]으로 도주했으나, 종실 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고호는 후연의 패배를 직감하고 삼천 호를 거느린 채 북위에 투항하였다.

북위에 투항한 고호는 동아후(東阿侯)에 책봉되었으며, 우장군(右將軍)을 더해 대동제부(大東諸部)를 통괄하였다. 태무제 시기 영서장군, 양주진도대장을 역임했으며 고장진(姑臧鎭)[3]을 떠나 민간에서 덕을 베풀다가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진서장군(鎭西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

3. 가계

관계이름
부친고태
아내모용씨(慕容氏)
장남고진(高眞)
차남고각발(高各拔)
3남고밀
4남고치(高稚)


참조

[1] 문서 허베이 정주시(定州市)
[2] 문서 랴오닝 조량시(朝陽市)
[3] 문서 간쑤 무위시(武威市)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