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률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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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곡률광은 북제의 장군으로, 무장 곡률금의 아들로 태어났다. 북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고환, 고징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북주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정 내 권력 다툼에 휘말려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북제의 국력 약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북주의 무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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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제의 사도 - 북제 무성제
북제 무성제는 동위의 실력자 고환의 아들로, 북제의 제4대 황제로서 사치와 폭정을 일삼다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곡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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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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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곡률(斛律, húlǜ) |
휘 | 광(光, guāng) |
시호 | 무(武, wǔ) |
작위 | 현양군개국공(present良郡開國公) |
민족 | 고차족 |
생몰년 | 515년 ~ 572년 |
시대 | 남북조시대 |
출생지 | 삭주 평삭현(朔州 平朔縣, 현재의 산시 성 숴저우시) |
사망지 | 업성 |
관력 | |
주요 활동 | 군인, 장군 |
주요 경력 | 북위 유격 동위 대도독 북제 대장군 |
최종 관직 | 태부, 대사마 |
봉작 | 현양군개국공(顯陽郡開國公) |
소속 | 북위 동위 북제 |
가계 | |
아버지 | 곡률금(斛律金) |
아들 | 곡률세웅(斛律世雄) 곡률창(斛律昌) 곡률종(斛律鍾) 곡률증(斛律甑) 곡률안(斛律晏) |
딸 | 곡률씨 |
기타 | |
관련 인물 | 고환 고징 고양 고담 모용락 위율 조원심 고위 |
2. 생애
곡률광은 곡률금(斛律金)의 장남으로, 칠륵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무예로 이름을 알렸고,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고환과 고징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 관직에 올랐으며, 북제 건국 후에는 북주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주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력과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북망산 전투에서는 울지형(尉遅迥)이 이끄는 북주군을 대파하고, 적장 가질웅(可叱雄)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태위에 오르고, 딸은 북제 후주의 황후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지면서 조정, 목제파 등 권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이들은 위효관과 결탁하여 곡률광이 모반을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572년 그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곡률광의 죽음은 북제의 군사력 약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북주 무제는 "곡률광이 살아있었다면 북제를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곡률광은 곡률금(斛律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31년 아버지를 따라 북주 정벌에 처음 출전하여 우문태(宇文泰)의 장수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2] 고환(高歓)에게 인정받아 도독으로 발탁되었다. 고징(高澄)이 세자가 되면서 곡률광은 친신도독(親信都督), 정로장군(征虜將軍),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547년 영락현자(永樂縣子)로 책봉되었다.같은 해, 고환이 사망하고 고징이 섭정을 승계하면서 장군 후경의 반란에 직면했다. 곡률광은 고징이 후경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모용소종(慕容紹宗) 휘하에서 복무했다. 모용소종과 유풍생(劉豐生)이 후경에게 패배하자, 곡률광과 장시현(張恃顯)은 이들을 질책했다. 모용소종은 후경과의 전투 경험을 언급하며 곡률광과 장시현에게 직접 싸워볼 것을 제안했다. 곡률광은 후경에게 도전했지만, 후경은 곡률광이 모용소종의 가르침을 받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의 말을 쏘아 죽였다. 곡률광은 퇴각했고, 후경은 장시현을 생포했다가 풀어주었다. 이후 모용소종은 후경을 격파했다.[2]
2. 2. 북제 건국 이후
550년 북제가 건국되자 곡률광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서안현자(西安縣子)로 임명되었다.[1] 552년 고양을 따라 고막해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고 개선하면서 진주자사(晋州刺史)로 임명되었다.[1] 556년 보병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천주(天柱), 신안(新安), 우두(牛頭) 등 3곳을 함락하고, 북주의 장수 왕경준(王敬儁)을 물리치고 개선하였다.[1] 558년 북주의 강천, 백마, 회교, 익성 등 4곳을 빼앗고 삭주자사(朔州刺史)로 임명되었다.[1] 559년 특진개부의동삼사(特進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1] 2월,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북주의 장수 조회공(曹迴公)을 공격하여 사로잡고 처형하였다.[1] 백곡성주(栢谷城主) 설우생(薛禹生)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곡률광은 문후진(文侯鎭)을 차지하고 울타리를 세워 방어하고 돌아왔다.[1] 그 뒤에 병주자사가 되었다.[1]560년 거록군공(鉅鹿郡公)이 되었다.[1] 고백년이 황태자가 되자, 곡률광의 장녀를 태자비로 삼았다.[1] 561년 곡률광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고, 중산군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1] 562년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임명되었다.[1]
2. 3. 북주와의 항쟁
563년,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훈장성(勲掌城) 지관(軹關) 서쪽에 200리 길이의 장성을 쌓고 13개의 수(戍, 변경을 지키는 요새)를 설치하여 북주의 침입을 방어했다.[1] 564년 1월, 북주의 달해성흥(達奚成興)이 평양(平陽)을 침공하자, 곡률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방어했다. 달해성흥은 곡률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고, 곡률광은 북쪽으로 추격하여 북주 국경에 들어가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1] 같은 해 4월에는 북방의 돌궐족을 토벌했다.[1]564년 겨울, 북주 무제가 울지형(尉遅迥), 우문헌(宇文憲), 가질웅(可叱雄) 등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곡률광은 기병 5만을 이끌고 요격하여 북망산 전투에서 울지형의 군대를 격파하고 가질웅을 사살했다.[1] 565년, 그의 차녀가 북제 후주의 황후가 되었다.[1]
567년, 아버지 곡률금(斛律金)의 함양왕(咸陽王) 작위를 계승하고, 태부(太傅)로 승진했다.[1]
570년 1월, 북주가 낙양을 포위하기 위해 북제의 양도(糧道,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려 하자, 곡률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북주의 장수 우문걸(宇文桀), 양사언(梁士彦), 양경흥(梁景興)을 녹로교(鹿盧交道)에서 물리쳤다. 의양(宜陽)에서 북주 우문헌(宇文憲)과 100일 동안 대치하며 통관(統關), 풍화(豊化) 지역에 성을 건축했다. 안업(安鄴)에서 우문헌이 추격해 오자, 곡률광은 기병을 이끌고 격파했다. 양낙도(梁洛都), 양경흥, 양사언의 군대를 다시 물리치고 양경흥을 잡아 처형했다.[1] 그해 겨울에는 5만 명을 이끌고 옥벽(玉壁)에 화곡(華谷)과 용문(龍門) 지역에 성을 쌓고 우문헌의 군대와 대치했으나, 우문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곡률광은 군대를 이끌고 정양(定陽)을 포위하고 남분성(南汾城)을 쌓았다.[1]
571년, 평롱, 위벽, 통융 등 여러 지역에 진지 13곳을 건설했다. 북주의 장수 보둔위(普屯威), 위효관(韋孝寛)이 평룽으로 진입하자, 곡률광은 분수(汾水) 북쪽에서 전투하여 격파했다.[1] 군을 돌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평양도(平陽道)로 나가 요양, 백정 2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성주와 장수 9명을 생포하고 수천 명의 포로를 얻었다.[1]
2. 4. 모함과 죽음
북제의 권신 조정과 목제파 등은 평소 곡률광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이들은 곡률광이 고위에게 진양(晉陽)의 공공 경작지를 요청했을 때, 군대의 말 방목에 해롭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더욱 앙심을 품었다.[1]572년, 북주의 장수 위효관은 곡률광의 명성을 싫어하여 간첩을 보내 수도 업에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내용은 "백 개의 승(升)이 하늘로 날아가고, 밝은 달(明月, 곡률광의 자)이 장안을 비춘다", "높은 산이 저절로 무너지고, 다이묘 오크(槲)가 저절로 똑바로 선다"는 것이었다.[2] 조정과 목제파는 이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곡률광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3] 결국 곡률광은 모반 음모 죄로 처형당했다.
곡률광의 죽음은 북제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훗날 578년 북주 무제(武帝)는 "곡률광이 살아있었다면 북제를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곡률금(斛律金)
- 형제: 곡률선(斛律羨)
- 자녀
이름 | 설명 |
---|---|
곡률무도(斛律武都) | 특진, 태자태보, 개부의동삼사, 양연이주자사를 역임. 곡률광이 죽은 후, 북주에서 참수됨. |
곡률수달(斛律須達) | 중호군, 개부의동삼사. 곡률광보다 먼저 사망. |
곡률항가(斛律恒伽) | 가의동삼사. 곡률광과 함께 죽음을 받음. |
곡률종(斛律鍾) | 곡률광이 죽었을 때, 수세로, 목숨을 용서받음. 북주에서 숭국공을 이음. 수나라 개황 연간, 표기장군으로 사망. |
斛律씨 | 고백년의 태자비. |
斛律씨 | 후주 斛律황후. |
4. 평가
곡률광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북제의 국방을 튼튼히 했다.[1] 간신 조정, 목제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여, 북제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1] 특히 북주의 장수 위효관은 곡률광의 명성을 시기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간첩을 보내 모함에 일조했다.[1]
5. 기타
호율광은 '낙조도독(落鵰都督)'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활을 잘 쏘아 독수리를 떨어뜨린 데서 유래했다. 고징을 따라 환교에서 사냥을 하던 중, 큰 독수리를 쏘아 맞혀 형자고로부터 "이것이 사조수(독수리를 쏘는 명사수)다"라는 평을 들었다.[1]
호율광은 과묵하고 엄격했으며, 군을 통솔할 때 형벌을 사용했고, 축성 부역에 채찍질을 가했지만, 절도를 잃은 적은 없었고, 적에게 깊이 두려움을 샀다.[2] 억울한 죄로 처형되자, 조정과 민간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북주의 무제는 호율광의 죽음을 듣고 기뻐하며 대사를 행했다. 건덕 6년(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호율광에게 상주국, 숭국공의 위를 추증했다. 무제는 "이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찌 짐이 업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3]
참조
[1]
서적
Bei Qi Shu
[2]
서적
Book of Northern Qi
531
[3]
문서
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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