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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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수는 237년 아버지 공손연이 연왕을 칭하며 세자로 책봉되었다. 238년, 공손수는 아버지에게 위나라에 대한 모반을 권유했고, 공손연은 연왕을 칭하며 위와 싸웠으나 패배했다. 사마의에게 화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부자는 도주 중 붙잡혀 공손수는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아버지 공손연은 공손탁의 아들이고, 백부는 공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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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 공손씨 - 공손도
공손도는 후한 말 요동 지역의 군벌로, 요동태수를 거쳐 평주목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고구려와 오환을 정벌하며 독립 의지를 드러내다 조조에게 무위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불만을 품고 사망했다. - 요동 공손씨 - 공손연
공손연은 후한 말 요동 지역 군벌 공손강의 아들로, 요동 태수를 거쳐 스스로 연왕을 칭했으나 사마의에게 패하여 죽고 공손씨 정권이 멸망했다. - 공손연과 주변 인물 - 비연
공손연 휘하 장수 비연은 238년 위나라 군이 침공해오자 양조와 함께 요수에서 저항했으나 패배한 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 공손연과 주변 인물 - 가범
가범은 요동의 공손연의 부하로, 공손연의 반역을 간하다가 살해당했으며, 사마의가 공손연의 난을 평정한 후 그의 무덤을 후하게 받들고 후손에게 관직을 내렸다. - 랴오양시 출신 - 공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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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연은 후한 말 요동 지역 군벌 공손강의 아들로, 요동 태수를 거쳐 스스로 연왕을 칭했으나 사마의에게 패하여 죽고 공손씨 정권이 멸망했다.
공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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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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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공손(公孫) |
이름 | 수(脩) |
자 | 계보(季甫) |
생몰년도 | 154년 ~ 204년 |
출생지 | 요동군 양평현 |
시대 | 후한 |
가족 | 아버지: 공손찬 형제자매: 공손속, 공손월, 공손범, 공손공 |
관직 | |
임명된 관직 | 좌장사(左長史) |
봉해진 관직 | 열후(列侯) |
기타 | |
관련 인물 | 공손도 공손강 공손연 원소 조조 |
2. 생애
공손수는 아버지 공손연에게 위에 대한 모반을 권유했다. 238년 아버지 공손연이 연왕을 칭하고 위와 싸웠지만 패했다. 공손연은 사마의에게 화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부자는 도주하던 중 붙잡혔다. 공손수는 아버지와 마주한 채 목이 잘렸으며, 그 목은 아버지의 목과 함께 낙양에 보내져 백부인 공손황 부자의 처형이 결정되는 요인이 되었다.[1]
2. 1. 초기 생애
공손수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237년 공손연이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공손수를 세자(世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1]2. 2. 위나라와의 전쟁
238년, 위(魏)의 군주 조예가 태위(太尉) 사마의를 보내어 요동(遼東)을 공격하고 양평(陽平)을 포위하게 하였다.[1]불리한 전황을 맞은 공손연은 항복을 청하고 공손수를 인질로 삼아 줄 것을 원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매몰차게 거부하였다.[1] 공손수는 공손연과 함께 도주하였으나 곧 붙잡혀 참수당했다.[1] 아버지 공손연과 함께 낙양으로 보내진 공손수의 목은 백부인 공손황 부자의 처형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다.[1]
2. 3. 최후
238년, 위(魏)의 군주 조예가 태위(太尉) 사마의를 보내 요동(遼東)을 공격하고 양평(陽平)을 포위하게 하였다. 불리한 전황을 맞은 공손연은 항복을 청하고 공손수를 인질로 삼아 줄 것을 원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부하였다. 공손수는 공손연과 함께 도주하였으나 곧 붙잡혀 처형당했다.[1] 그와 아버지의 목은 함께 낙양으로 보내졌다.[1]3. 가계
4. 역사적 배경과 현대적 의의
공손수가 활동하던 시기는 위, 촉, 오 삼국이 대립하고, 고구려, 부여 등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복잡한 정세였다.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공손씨 정권은 이들 세력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
4. 1. 당시 동아시아 정세
공손수가 활동하던 시기는 위, 촉, 오 삼국이 대립하고, 고구려, 부여 등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복잡한 정세였다. 공손씨 정권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들 세력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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