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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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황은 요동의 인물로, 숙부 공손공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동생 공손연에게 찬탈당하여 뒤를 잇지 못했다. 공손연의 반란을 조정에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손연이 조위에 반란을 일으킨 후 체포되자 사면을 기대했으나 결국 처형당했다. 고유는 공손황의 억울한 죽음을 비판했고, 배송지도 그를 동정했다.
221년, 공손공은 공손황을 수도 낙양에 볼모로 보냈다. 공손황은 동생 공손연이 모반을 꾀한다고 여러 차례 보고했다.[1]
공손황은 아버지 공손도가 사망했을 때 어려서 숙부인 공손공이 뒤를 이었다. 공손공에게는 자식이 없었고(성불구 설도 있음[1]), 처음부터 공손황이 숙부의 뒤를 이을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공손공은 허창, 후에는 낙양)에 공손황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관직을 얻게 했다.
[1]
Wikisource
三國志/卷08#公孫淵
2. 생애
이후 공손연이 조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자 공손황은 체포되었다. 공손황은 이전에 자신이 한 발언도 있었기에 사면을 바랐으며, 조예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주변의 반대가 심해 결국 주살되었다. 공손수의 수급이 낙양에 전해지자, 공손황은 처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식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위지」공손도전)[3]
「위지」고유전에 따르면, 공손황은 옥중에서 처자식과 함께 금쇄주(금가루가 들어간 독술)를 마시고 자해했다. 고유는 "공손황이 토벌을 진언했다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았다면 시장에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확실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은밀하게 처형한 조예를 비판했다. 배송지 또한 조괄의 어머니나 종육과 같은 경우였음에도 연좌되지 못한 것에 동정하고 있다.[2]
이 일로 요동 공손씨는 멸망했다.
2. 1. 가문의 후계자
공손황은 부친이 사망했을 때 어려서 숙부인 공손공이 가독을 이었다.[1]
숙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고(성불구 설도 있음)[1], 처음부터 숙부의 뒤는 공손황이 이을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숙부는 도읍(허창, 후에는 낙양)에 공손황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관위를 얻었다.
그러나 숙부는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기에 부하와 민중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를 틈타 동생인 공손연에게 찬탈당했다(228년).[1] 이 때문에 공손황은 뒤를 이을 수 없었다. 공손황은 동생을 위험 인물로 여겨 조정에 토벌을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2]
2. 2. 동생 공손연의 반란
228년, 숙부 공손공은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여 부하와 민중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에 동생 공손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1] 공손황은 이로 인해 가독을 이을 수 없게 되었다. 공손황은 동생을 위험 인물로 여겨 조정에 토벌을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237년,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조예는 공손황을 은밀히 죽이려 했으나, 고유는 공손황에게 죄가 있다면 공개적으로 참수하고, 이전의 진언이 사실이라면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밀 처형을 비판했다.
그러나 조예는 고유의 상소를 듣지 않고 공손황과 그 처자에게 금가루가 든 독주를 마시게 했다. 《위략》에 따르면, 공손연의 머리가 낙양에 도착한 후 공손황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으며, 조예는 공손황을 살리려 했으나 담당 관리가 반대하여 죽였다고 한다. 배송지는 공손황이 조괄의 어머니나 종육과 같은 경우임에도 연좌를 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동정했다.[2]
2. 3. 억울한 죽음
221년, 공손공은 수도 낙양으로 공손황을 볼모로 보냈다. 공손황은 볼모로 보내진 이후, 동생 공손연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여러 차례 보고했다.[1]
237년,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모반을 일으켰고, 이에 조예는 공손황을 은밀히 죽이려 했다. 고유는 상소를 올려 공손황에게 죄를 물어 죽이려면 그 죄를 선포하여 공개적으로 참수해야 하고, 공손황이 이전에 진언한 것이 믿을 만하다면 사면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세히 조사하지 않고 비밀리에 처형하려는 것을 비판했다.[2]
그러나 조예는 고유의 상소를 듣지 않고, 공손황과 그 처자에게 금가루가 든 독주를 마시게 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공손연의 머리가 낙양에 이른 후에 공손황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였으며, 조예는 공손황을 살리려 했으나 담당 관리가 반대하여 공손황을 죽였다.
공손황의 숙부 공손공에게는 자식이 없었고(성불구 설도 있음[1]), 처음부터 숙부의 뒤는 공손황이 이을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공손공은 도읍(허창, 후에는 낙양)에 공손황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관위를 얻게 했다.
그러나 공손공은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기에 부하와 민중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를 틈타 동생인 공손연에게 찬탈당했다(228년)[1]. 이 때문에 공손황은 뒤를 이을 수 없었다. 공손황은 동생을 위험 인물로 여겨 조정에 토벌을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2]
이후, 공손연이 조위에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자 공손황은 체포되었다. 공손황은 이전의 발언도 있었기에 사면을 바랐으며, 조예 (명제)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주변의 반대가 심해 결국 주살당했다. 동생과 조카인 공손수의 수급이 낙양에 전해지자, 공손황은 처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식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위지」공손도전)[3]
「위지」고유전에 따르면, 공손황은 옥중에서 처자식과 함께 넣어준 금쇄주(금가루가 들어간 독술)를 마시고 자해했다. 고유는 "공손황이 토벌을 진언했다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았다면 시장에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확실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은밀하게 처형한 조예를 비판하고 있다. 배송지 또한 공손황의 경우는 조괄의 어머니나 종육과 같은 경우였음에도 연좌를 면하지 못한 것에 동정하고 있다.[2]
3. 친족 관계
4. 평가
그러나 공손공은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여 부하와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를 틈타 동생인 공손연에게 권력을 빼앗겼다(228년)[1]). 이 때문에 공손황은 뒤를 이을 수 없었다. 공손황은 공손연을 위험 인물로 여겨 조정에 토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이후, 공손연이 조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면서 공손황도 체포되었다. 공손황은 이전에 자신이 공손연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사면을 바랐고, 조예 (명제)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주변의 반대가 심해 결국 처형되었다. 공손연과 조카 공손수의 목이 낙양에 보내지자, 공손황은 처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식들과 껴안고 울었다(「위지」공손도전)[3]).
「위지」고유전에 따르면, 공손황은 옥중에서 처자식과 함께 금가루가 들어간 독약인 금쇄주를 마시고 자결했다고 한다. 고유는 "공손황이 토벌을 건의했다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았다면 시장에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확실한 조사도 없이 은밀하게 공손황을 처형한 조예를 비판했다. 배송지 또한 공손황의 경우가 조괄의 어머니나 종육의 경우와 같음에도 연좌제를 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동정하고 있다[2]).
이로 인해 요동 공손씨는 완전히 멸망했다.
참조
[2]
Wikisource
三國志/卷24#高柔
[3]
Wikisource
魏略輯本/卷七#公孫淵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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