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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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거병은 한나라 무제 시대의 장군으로, 흉노 정벌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외척의 배경과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시중으로 발탁되었고,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참여하여 관군후에 봉해졌다. 이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하서 협로에서 흉노를 격파하고, 대규모 원정을 통해 흉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에는 흉노를 짓밟는 말의 석상이 세워졌다. 곽거병은 위청과 비교되며, 그의 무덤은 현재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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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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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훠취빙 (霍去病) |
로마자 표기 | Hwo Chu-byeong |
출생 | 기원전 140년 |
출생지 | 산시 성린펀 시 |
사망 | 기원전 117년 (23세) |
사망 장소 | 장안 |
묻힌 곳 | 좌표: |
다른 이름 | 관군경환후 (冠軍景桓侯) |
아버지 | 훠중루 (霍仲孺) |
어머니 | 웨이샤오얼 (衛少兒) |
가족 관계 | 곽광 (이복 형제) |
자녀 | 훠산 (霍嬗)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인 |
2. 생애
=== 출생과 성장 ===
곽거병은 평양현(平陽縣)의 관리 곽중유(霍中孺)와 평양후 집안의 여종 위소아(衛少兒)의 사생아로 태어났다.[3] 곽중유는 평양이후 조시(의후 조참의 증손)의 집에서 일하던 중 위소아와 사통하여 곽거병을 낳았으나,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여 다른 여인과 혼인하면서 곽거병과의 관계가 끊어졌다.[39] 곽거병의 이모 위자부는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고, 곽거병 또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위소아는 진평의 현손 진장(陳掌)과 밀통하고 있었는데, 위자부가 황후가 되면서 진장도 귀해졌다.[39]
곽거병은 나중에야 자신의 생부가 곽중유임을 알게 되었으나,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다. 표기장군이 되어 출진할 무렵 하동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하동태수가 직접 마중을 나왔고, 곽중유를 맞이했다.[39]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자신이 아들임을 밝혔고, 곽중유는 부복하고 고두하며 감격했다.[39]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밭과 집, 노비를 사주고 떠났으며, 돌아오는 길에 이복동생 곽광을 데려갔다.[39]
곽거병은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위자부의 언니 위군유(衛君孺)는 한 무제의 고문인 공손허(公孫賀)와 결혼했다.[5] 18세에 무제의 총애로 입궁하여 시중이 되었으며, 기사에 능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종군했다.[39] 용맹함을 인정받아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되었고,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원정에서 8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39]
곽거병은 어릴 때부터 이미 그의 가문은 외척이었고, 그의 삼촌이 흉노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삼촌과는 대조적으로 거만했고,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들은 호화로운 천막 아래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궁정에서나 병사들 사이에서나 곽거병의 인기가 더 높았다. 위청은 무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고, 지나치게 겸손하여 아첨하는 면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곽거병의 거만함조차도 당당한 용맹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어느 때 무제가 손씨(孫氏)·오씨(吳氏)의 병법을 가르치려고 하자 "옛날 병법은 알 필요가 없고, 실전에서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 또한 자신의 성격상 적극적이고 용감한 곽거병을 더욱 좋아했다.
=== 흉노 정벌과 전공 ===
곽거병은 이모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면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39] 18세에 시중이 되었고, 기사에 능해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다.[6]
원삭 6년(기원전 123년), 곽거병은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위청의 원정에 종군했다.[6] 8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하여 흉노의 상국과 당호, 선우의 큰아버지뻘인 적약후(籍若侯) 산(産)을 베고 작은아버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8]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하서 협로(河西回廊)에서 두 차례 흉노와 싸웠다.[9] 봄에는 1만 기병을 이끌고 6일 만에 서역 5개 왕국을 지나 흉노 왕자 2명과 9,000명에 가까운 적군을 사살하고, 흉노의 유물인 금인상(金人像)을 노획하였다.[9] 여름에는 1만 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주연호를 지나 칠련산까지 진군하여 3만 명이 넘는 흉노 병사들을 사살하고 10여 명의 흉노 왕자들을 생포하였다.
곽거병의 승리로 흉노는 서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광대한 목초지를 잃었다. 한나라는 북방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중앙아시아와의 직접 무역이 가능해졌고, 페르가나마(현대 아할테케의 조상)를 비롯한 고급 품종의 말을 확보하여 군대를 강화하였다.
기원전 119년, 곽거병은 위청과 함께 대규모 흉노 원정을 이끌었다. 곽거병은 2,000리 이상 진격하여 좌현왕과 전투를 벌여 7만 명이 넘는 적군을 사살하고 3명의 왕과 83명의 귀족을 생포하였다.[13] 켄티이 산맥(狼居胥山)에서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식을 거행한 후 바이칼 호(瀚海중국어)까지 추격하여 흉노 부족을 사실상 멸망시켰다.[13] 이 승리로 곽거병은 5,800호의 식읍을 받았고,[14] 그의 삼촌 위청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15]
곽거병은 위청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위청은 겸손하고 아랫사람을 챙기는 성격이었던 반면, 곽거병은 오만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무제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곽거병을 더 총애했다.
=== 죽음 ===
곽거병은 기원전 117년, 23세(만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24] 곽거병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무제는 5개의 국경 군현에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장안에서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묘릉까지 행렬을 이루게 했다. 곽거병의 묘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칠련산맥 모양으로 조성되었으며,[24] 경환후(景桓侯)라는 칭호를 추증 받았다.[25] 묘 앞에는 무제의 묘인 묘릉 근처에 '말이 흉노를 짓밟는'(馬踏匈奴) 석상이 세워졌다.[26]
곽거병의 아들 곽선(霍嬗)은 경환후의 작위를 계승했지만 기원전 110년에 요절하여 곽거병의 작위는 끊겼다. 그의 손자 곽산(霍山, 후에 렙핑후)과 곽운(霍雲, 후에 구양후)은 기원전 66년 한선제를 몰아내려는 음모에 가담하여 자살했고 곽씨 일족은 처형당했다. 한평제 시대에 곽광의 후손으로 볼루후에 임명된 인물이 곽거병의 사촌 형제의 증손자인 곽양이었던 것으로 보아 곽거병이나 곽광의 남성 후손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1. 출생과 성장
곽거병은 평양현(平陽縣)의 관리 곽중유(霍中孺)와 평양후 집안의 여종 위소아(衛少兒)의 사생아로 태어났다.[3] 곽중유는 평양이후 조시(의후 조참의 증손)의 집에서 일하던 중 위소아와 사통하여 곽거병을 낳았으나,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여 다른 여인과 혼인하면서 곽거병과의 관계가 끊어졌다.[39] 곽거병의 이모 위자부는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고, 곽거병 또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위소아는 진평의 현손 진장(陳掌)과 밀통하고 있었는데, 위자부가 황후가 되면서 진장도 귀해졌다.[39]곽거병은 나중에야 자신의 생부가 곽중유임을 알게 되었으나,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다. 표기장군이 되어 출진할 무렵 하동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하동태수가 직접 마중을 나왔고, 곽중유를 맞이했다.[39]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자신이 아들임을 밝혔고, 곽중유는 부복하고 고두하며 감격했다.[39]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밭과 집, 노비를 사주고 떠났으며, 돌아오는 길에 이복동생 곽광을 데려갔다.[39]
곽거병은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위자부의 언니 위군유(衛君孺)는 한 무제의 고문인 공손허(公孫賀)와 결혼했다.[5] 18세에 무제의 총애로 입궁하여 시중이 되었으며, 기사에 능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종군했다.[39] 용맹함을 인정받아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되었고,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원정에서 8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39]
곽거병은 어릴 때부터 이미 그의 가문은 외척이었고, 그의 삼촌이 흉노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삼촌과는 대조적으로 거만했고,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들은 호화로운 천막 아래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궁정에서나 병사들 사이에서나 곽거병의 인기가 더 높았다. 위청은 무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고, 지나치게 겸손하여 아첨하는 면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곽거병의 거만함조차도 당당한 용맹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어느 때 무제가 손씨(孫氏)·오씨(吳氏)의 병법을 가르치려고 하자 "옛날 병법은 알 필요가 없고, 실전에서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 또한 자신의 성격상 적극적이고 용감한 곽거병을 더욱 좋아했다.
2. 2. 흉노 정벌과 전공
곽거병은 평양현(平陽縣)의 관리 곽중유(霍中孺)와 평양후 집안의 여종 위소아(衛少兒)의 사생아로 태어났다.[39] 이모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면서 곽거병도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39] 18세에 시중이 되었고, 기사에 능해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다.[6]원삭 6년(기원전 123년), 곽거병은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위청의 원정에 종군했다.[6] 8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하여 흉노의 상국과 당호, 선우의 큰아버지뻘인 적약후(籍若侯) 산(産)을 베고 작은아버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8]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하서 협로(河西回廊)에서 두 차례 흉노와 싸웠다.[9] 봄에는 1만 기병을 이끌고 6일 만에 서역 5개 왕국을 지나 흉노 왕자 2명과 9,000명에 가까운 적군을 사살하고, 흉노의 유물인 금인상(金人像)을 노획하였다.[9] 여름에는 1만 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주연호를 지나 칠련산까지 진군하여 3만 명이 넘는 흉노 병사들을 사살하고 10여 명의 흉노 왕자들을 생포하였다.
곽거병의 승리로 흉노는 서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광대한 목초지를 잃었다. 한나라는 북방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중앙아시아와의 직접 무역이 가능해졌고, 페르가나마(현대 아할테케의 조상)를 비롯한 고급 품종의 말을 확보하여 군대를 강화하였다.
기원전 119년, 곽거병은 위청과 함께 대규모 흉노 원정을 이끌었다. 곽거병은 2,000리 이상 진격하여 좌현왕과 전투를 벌여 7만 명이 넘는 적군을 사살하고 3명의 왕과 83명의 귀족을 생포하였다.[13] 켄티이 산맥(狼居胥山)에서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식을 거행한 후 바이칼 호(瀚海중국어)까지 추격하여 흉노 부족을 사실상 멸망시켰다.[13] 이 승리로 곽거병은 5,800호의 식읍을 받았고,[14] 그의 삼촌 위청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15]
곽거병은 위청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위청은 겸손하고 아랫사람을 챙기는 성격이었던 반면, 곽거병은 오만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무제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곽거병을 더 총애했다.
2. 3. 죽음
곽거병은 기원전 117년, 23세(만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24] 곽거병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무제는 5개의 국경 군현에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장안에서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묘릉까지 행렬을 이루게 했다. 곽거병의 묘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칠련산맥 모양으로 조성되었으며,[24] 경환후(景桓侯)라는 칭호를 추증 받았다.[25] 묘 앞에는 무제의 묘인 묘릉 근처에 '말이 흉노를 짓밟는'(馬踏匈奴) 석상이 세워졌다.[26]곽거병의 아들 곽선(霍嬗)은 경환후의 작위를 계승했지만 기원전 110년에 요절하여 곽거병의 작위는 끊겼다. 그의 손자 곽산(霍山, 후에 렙핑후)과 곽운(霍云, 후에 구양후)은 기원전 66년 한선제를 몰아내려는 음모에 가담하여 자살했고 곽씨 일족은 처형당했다. 한평제 시대에 곽광의 후손으로 볼루후에 임명된 인물이 곽거병의 사촌 형제의 증손자인 곽양이었던 것으로 보아 곽거병이나 곽광의 남성 후손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와 논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위청과의 비교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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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감숙성(甘肅省) 주천(酒泉)은 곽거병이 황제가 하사한 술을 샘에 타서 병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셔 사기를 복돋았다는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서(漢書)』에는 기원전 121년 곽거병 장군이 오늘날 감숙성(甘肅省) 지역의 휴투왕(休屠王) 군대를 물리쳤을 때 "휴투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금인(金人) 또는 금박을 입힌 인물상"을 노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7][28] 이 금인은 흉노가 불교와 무관했기 때문에 불상일 가능성은 낮다.[29] 이후 이 상들은 궁궐의 별장인 감천궁(甘泉宮)(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시안(西安) 근처) 또는 그 근처에 있던 운양(雲陽) 사원으로 옮겨졌다. 감천궁은 진(秦)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27][30] 막고굴(타림 분지(塔里木盆地)의 돈황(敦煌) 근처) 323번 석굴에는 한무제가 두 개의 금인을 향해 예배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27]
{{quote|漢武帝將其部眾討凶奴,並獲得二金(人),(各)長丈餘,刊〔列〕之於甘泉宮,帝(以)為大神,常行拜褐時
한무제는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토벌하여 두 개의 금인(金人)을 얻었는데, 각각 높이가 한 장(丈)(약 3미터)이 넘었다. 그는 이것들을 감천궁(甘泉宮)에 두고 신으로 여겨 항상 예배하였다. |}}
한나라의 서쪽 원정과 곽거병 장군의 전리품 획득은 잘 기록되어 있지만, 막고굴에서 이 상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통해 중국 불교의 전파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마도 허구일 것이다. 한무제가 불교를 숭배한 적이 없고, 당시에는 아마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1]
곽거병 묘의 석조 조각상 이전에는 중국에 거대한 석조 조각상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다.[32] 그의 묘에는 흉노 전사를 짓밟는 말을 묘사한 거대한 석조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33] 문헌 자료에는 기원 3~4세기경의 가능성 있는 초기 사례가 단 하나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시황릉 진시황의 능 위에 세워졌다는 두 개의 거대한 석조 기린(麒麟) 조각상에 대한 기록이다.[34] 곽거병은 서쪽 원정 중에 보았던 석조 조각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35] 거대한 석조 조각의 문화적 전통 또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에 이르고, 마침내 아소카왕의 기둥(기원전 268~232년)과 함께 인도에, 그리고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 이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전파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곽거병과 장건의 묘에 있는 석조 조각은 서아시아 문화(중앙아시아 문화 및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다른 문화)와의 접촉과 경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36][37]
마릉(좌표:, 한무제 묘 근처)에 위치한 곽거병 묘에는 15개 이상의 석조 조각상이 더 있다. 이 조각상들은 "흉노를 짓밟는 말"보다 자연주의적이지 않으며, 돌의 자연적인 형태를 따르는 경향이 있으며, 인물의 세부 사항은 고부조로만 나타난다.[38]
“거병(去病)”이라는 이름은 ‘병(病)이 사라진다(去)’는 뜻으로 지어졌지만, 그 이름과는 달리 병으로 요절했다. 그의 무덤은 한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근처에 있으며, 현재는 전망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곽거병(霍去病)의 묘비에 있는 글자를 쓰다듬으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6. 대중문화 속 곽거병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11》에 등장하는 32명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2005년 역사 드라마 《한무대제》에서는 배우 이준봉이 곽거병을 연기했다. 소설가 통화의 소설 《대막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풍중기원》에서는 팽우안/彭于晏중국어이 위무기라는 이름으로 곽거병을 연기했다. 영화 《드래곤 블레이드》에서는 성룡이 연기한 주인공이 곽거병에게 길러졌다고 언급되며, 배우 풍소봉/馮紹峰중국어이 회상 장면에서 곽거병을 연기한다. 일본의 소설가 츠카모토 아오후미/塚本靑史일본어의 소설 『곽거병 - 기린룡혜성담』(가와데쇼보 신샤, 1996년)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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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권68 곽광김일제열전제38 중 곽광
:zh:s:漢書/卷068#霍光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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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서는 정(鄭)이라 하나, 평제기에 따르면 강(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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