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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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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평은 중국 전한 시대의 인물로, 유방을 도와 초한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뛰어난 책략가로, 항우와 범증 사이를 이간질하고,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를 물리치는 등 다양한 계책을 통해 유방의 통일 사업을 지원했다. 유방 사후에는 여씨 정권 하에서 권력을 유지하며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문제(문제)를 옹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진평은 좌승상과 우승상을 역임하며 한나라의 안정을 이끌었으나, 음모가 많아 자손이 끊어질 것이라는 예언대로 그의 작위는 증손자 대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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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진평
원어 이름陳平
로마자 표기Chen Ping
진평, 구니후
진평 상 (구니후)
출생미상
출생지허난성란카오현
사망기원전 179년 11월 경
사망지시안시산시성
배우자장부 (張負)의 손녀 장씨
자녀진매 (陳買)
직업정치인
관직
관직명승상
재임 기간기원전 179년
군주한 문제
후임주발
기타 정보
시호헌후 (獻侯)
작위구니후 (曲逆侯)

2. 생애

진평은 양무(陽武, 현재의 허난성 란카오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가난했으나 형 진백(陳伯)의 도움으로 학문에 힘썼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9][7] 부유한 의 손녀와 결혼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교제를 넓혔다.[2][7] 마을의 사재(社宰)를 맡아 제사 고기를 공평하게 분배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때 천하를 다스릴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3][7]

진승·오광의 난 이후 혼란기에 처음에는 나라 왕 위구를 섬겼으나 뜻이 맞지 않아 떠났고, 이후 항우에게 귀순하여 도위(都尉)까지 올랐다.[9][8] 그러나 항우가 부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려 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항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9] 도망치는 과정에서 뱃사공에게 재물을 노린 습격을 당할 뻔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9]

이후 유방에게 귀순하여 그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초한쟁패기 동안 여섯 차례 기묘한 계책을 내어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대표적인 계책으로는 항우와 범증 사이를 이간질한 반간계(反間計)와 형양 전투에서 유방을 탈출시킨 금선탈각(金蟬脫殼) 등이 있다.[9]

한나라 건국 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戶牖侯|호유후중국어와 曲逆侯|곡역후중국어에 봉해졌다.[9] 기원전 200년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에게 포위된 유방을 기책으로 구출하기도 했다.[9][11] 여후 집권기에는 左丞相|좌승상중국어과 右丞相|우승상중국어을 역임하며 여씨 세력의 전횡 속에서도 신중하게 처신했고, 여후 사후에는 주발 등과 협력하여 여씨의 난을 평정하고 문제를 옹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4][7][9]

문제 즉위 후 우승상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좌승상이 되었으나, 곧 문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다시 승상의 직책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다.[9][8] 그는 재상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식견을 보여 문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기원전 178년에 사망했으며, '헌후(獻侯)'라는 시호를 받았다.[9] 그의 이야기는 『사기』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와 『한서』 「진평전(陳平傳)」에 기록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진나라 말기의 혼란

양무(陽武) 戶牖鄉|호유향중국어(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란카오현) 출신이다. 타고난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젊어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나 독서를 좋아했고, 형인 진백(陳伯)이 농사일을 하며 진평의 공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형수는 공부만 하고 집안일을 돕지 않는 진평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이에 화가 난 형 진백은 형수를 내쫓았다.[9][7]

진평은 오랫동안 결혼하지 못하다가,[2] 張負|장부중국어라는 부유한 사람의 눈에 띄었다. 장부에게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모두 일찍 죽어 사람들이 결혼하기를 꺼리는 손녀가 있었다. 장부는 진평의 집이 낡았음에도 문 밖에 귀한 손님들의 수레 자국이 많은 것을 보고(이는 진평이 마을에서 인기가 많음을 암시했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손녀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장부의 아들은 진평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장부는 진평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진평은 장부의 손녀와 결혼했고, 아내의 지원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어 교제를 넓힐 수 있었다.[2][7]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은 진평을 사재(社宰, 마을 제사를 주관하는 직책)로 추천했다. 진평은 제사 후 고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공정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때 진평은 "만약 내가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는다면, 고기를 나누듯 공정하게 처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굶주리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큰 포부를 드러냈다고 한다.[3][7]

기원전 209년, 진이세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진승·오광의 난진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반란이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진평은 처음에는 젊은이들을 이끌고 나라 왕이 된 위구를 섬겨 태복(太僕)이 되었으나, 주변의 모함을 받아 위구를 떠나야 했다.[9]

이후 항우에게 귀순하여 그의 밑에서 일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이 삼진(三秦) 지역을 평정하자 은왕(殷王) 사마앙이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붙었다. 진평은 항우의 명으로 신무군(信武君)에 봉해져 옛 위나라 출신 인물들을 모아 은나라를 공격했고, 사마앙의 항복을 받아내는 공을 세워 도위(都尉)가 되었다.[9][8]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이 다시 은나라를 공격하여 사마앙을 사로잡자, 항우는 크게 분노하여 은나라 평정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진평은 항우에게 받은 금과 관직의 인장(印綬)을 모두 버리고 도망쳤다.[9]

도망치는 길에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뱃사공이 진평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필시 도망치는 귀한 인물일 것이며 금은보화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 여겨 그를 죽이려 했다. 위험을 감지한 진평은 재빨리 옷을 벗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 직접 노를 저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9] 이후 진평은 유방에게 귀순하게 된다.

2. 2. 초한쟁패기와 유방의 책사

기원전 209년, 진이세 황제의 통치에 맞서 진나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평은 주요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인 항우에게 합류했다. 기원전 207년 말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수도 함양을 점령하여 약탈할 무렵, 진평은 항우를 떠나 또 다른 주요 반란 지도자였던 유방에게 귀순했다.

진평은 옛 은나라 땅인 수무현에 주둔하던 유방을 찾아가 옛 지인인 위무지의 추천을 받았다. 유방은 진평과의 면담 후 그를 마음에 들어 하여 즉시 도위에 임명하고 자신의 수레에 함께 태워 군 감찰 임무를 맡겼다. 이후 호군중위 직책까지 받게 되자, 서초의 망명객이 갑자기 자신들을 감독하게 된 것에 기존 한나라 장수들은 불만을 품고 유방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유방은 진평을 더욱 신임하고 총애했다.

진평은 팽성 대회전에 참전했으나 한나라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이후 형양에서 유방이 패잔병을 수습할 때 아장(亞將)이 되어 한왕 신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주발과 관영 등이 유방에게 "진평은 위나라와 초나라에서 불성실했고, 고향에서는 형수와 불미스러운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으며, 뇌물을 받고 지위를 옮겨 다닌다"고 비난했다. 잦은 참소에 유방도 진평을 의심하여 위무지에게 그의 평판에 대해 물었다. 위무지는 "제가 추천한 것은 진평의 재능이지, 그의 행실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초나라와의 싸움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당장 필요한 기발한 계책을 가진 인물이 중요합니다"라고 답했다. 유방은 진평을 불러 주군을 여러 번 바꾼 것을 책망하자, 진평은 "위나라에서는 제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초나라의 항우는 항씨 일족 외에는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항우가 저를 벌하려 했기에 실망하여, 사람을 잘 쓴다는 한왕께 온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왔기에 직무 수행을 위해 금품을 받았을 뿐이며, 제 계책이 쓸모없다면 모든 것을 반납하고 물러나겠습니다"라고 해명했다. 유방은 진평의 말을 납득하고 사과했으며, 그를 정식으로 호군중위로 임명하여 전군을 감독하게 했다. 이후 진평의 임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9]

형양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의 맹공에 시달리며 강화 요청마저 거부당하자, 진평에게 계책을 물었다. 진평은 항우가 의심이 많고 믿는 신하는 범증, 종리말, 용저, 주은 등 소수에 불과하므로, 황금 4만 근을 사용하여 반간계를 쓰면 초나라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여 와해시킬 수 있다고 진언했다.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진평에게 황금 4만 근[10]을 주며 사용처를 묻지 않았다. 진평은 이 자금으로 초나라 진영에 "범증 등이 공을 세워도 항우가 상을 주지 않아 한나라와 내통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의심이 많던 항우는 이 소문을 믿게 되었다. 특히 항우가 한나라 진영에 사신을 보냈을 때, 진평은 처음에는 극진히 대접하다가 범증의 사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거친 음식을 내놓았다. 사신의 보고를 들은 항우는 범증을 더욱 의심했고, 범증이 형양성을 속히 공격하자는 제안도 듣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범증은 항우 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사(憤死)했다. 이렇게 진평은 초나라 최고의 지략가를 싸우지 않고 제거했다.[9]

범증이 제거되었지만 형양의 포위는 계속되었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진평은 금선탈각 계책을 내놓았다. 기신을 유방으로 위장시켜 동문으로 내보내 항복하는 척하며 초나라 군사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유방은 서문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진평은 기신에게 여자 2천 명에게 갑옷을 입혀 여군을 이끌게 했는데, 이는 초나라 군사들이 여군을 보고 방심하거나 겁탈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을 노린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예상대로 초나라 군사들이 여군에게 시간을 끄는 동안 유방은 무사히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기신은 시간을 벌다 항우에게 붙잡혀 화형당했고, 남은 수비 책임자인 주가와 종공 등도 성이 함락된 후 처형되었다. 진평은 또한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위표를 일부러 형양에 남겨두어, 주가 등이 그를 경계하여 제거하도록 유도했다. 유방은 이 계책 덕분에 관중으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9]

이후 초한 쟁패 기간 동안 진평은 유방을 보좌하며 여러 중요한 전략을 제시했다. 한신이 제나라 왕을 자칭하려 하자 분노하는 유방의 발을 밟으며 장량과 함께 "지금 한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가 독립하여 초나라와 손잡을 위험이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광무산에서 항우와 강화 조약을 맺은 후에는, 조약을 깨고 지친 항우 군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장량과 함께 주장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하자 진평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호유후(戶牖侯|호유후zho)에 봉해졌다. 유방이 그의 공을 칭찬하자 진평은 "위무지가 아니었다면 한나라를 섬길 수 없었으며, 저에 대한 비방이 있을 때 위무지가 변호해주었다"고 답했다. 유방은 "그대처럼 근본을 잊지 않는 자야말로 진정한 인물"이라며 위무지에게도 상을 내렸다. 이후 진평은 곡역후(曲逆侯|곡역후zho)라는 작위도 받았다. 그는 한 혜제와 여태후 집권기에 각각 좌승상(左丞相|좌승상zho)과 우승상(右丞相|우승상zho)을 역임했다.

기원전 200년, 유방이 흉노의 묵돌 선우에게 백등산 전투에서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진평의 기책으로 화의를 맺고 탈출할 수 있었다. 계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묵돌 선우의 아내(연지)에게 한나라 미녀가 선우의 총애를 받게 될 것이라고 부추겨 질투심을 이용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2. 3. 한나라 건국과 여씨 정권

한신이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려 하자 한왕이 분노했을 때, 진평은 장량과 함께 한왕을 설득하여 한신을 왕으로 삼도록 조언했다. 이 공으로 진평은 호유후(戶牖侯zho)에 봉해졌다. 이후 연왕 장도의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9]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에 대한 모반 고변이 들어오자, 진평은 직접적인 군사 충돌 대신 계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고제가 진(陳) 땅에서 사냥을 명분으로 제후들을 소집하게 하고, 이때 찾아온 한신을 사로잡는 방식을 제안했다. 고제는 이 계책을 따라 한신을 사로잡았고, 이후 한신을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진평은 이 공으로 세습 부절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자신을 추천한 위무지에게 공을 돌렸다.[9]

고제 7년(기원전 200년), 고제를 따라 흉노와 연계한 한신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평성에서 묵돌이 이끄는 흉노군에게 포위되었다. 곤경에 처하자 진평은 묵돌의 연지(閼氏)에게 뇌물을 주어 화평을 유도하는 계책을 내었고, 이는 고제가 포위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11] 이후 고제는 곡역현이 큰 것을 보고 진평을 곡역후(曲逆侯zho)로 봉하고 이전의 봉국은 회수했다.[9] 진평은 계속 호군중위로서 고제를 따라 진희의 난, 영포의 난 등 여러 반란 진압에 참여하며 여섯 차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봉읍이 늘어났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비밀에 부쳐져 알려지지 않았다.[9]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고조 말년에 연왕 노관 토벌에 나선 번쾌여후가 꺼리는 척부인 소생 유여의를 해치려 한다는 참소가 있자, 고조의 명으로 주발과 함께 번쾌를 체포하러 갔다. 그러나 진평은 번쾌가 여후의 동생 여수의 남편인 점, 그리고 고조의 판단이 일시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체포하여 압송하기로 결정했다. 압송 도중 고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장안으로 돌아가, 여후와 여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고조의 관 옆에서 슬픔을 표하며 머물렀다. 여후는 진평을 가엾게 여겨 낭중령으로 삼아 혜제를 보좌하게 했다. 이후 여수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번쾌는 사면되었다.[9]

혜제 5년(기원전 190년) 조참이 사망한 후 좌승상(左丞相zho)에 임명되었다.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사망하자, 장벽강의 조언에 따라 여후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조카인 여태, 여산, 여록 등을 왕으로 봉하도록 건의했다. 여후의 시대에 왕릉이 실각하자 그 뒤를 이어 우승상(右丞相zho)이 되었으나, 여씨 세력이 군권을 장악하고 좌승상 심이기도 여씨와 가까워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 여후의 동생 여수가 "우승상은 술과 여자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참언하자, 진평은 이를 이용하여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척하며 여씨 세력의 경계심을 풀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고후 8년(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진평은 주발 등과 협력하여 여씨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육가의 조언을 받아 연회를 가장하여 반(反)여씨 세력을 규합하고, 여씨 일족인 여록의 친구 려기의 아버지를 압박하여 려기가 여록에게 병권을 반납하고 영지로 돌아가도록 설득하게 했다. 주발이 병권을 되찾자, 진평은 주발과 함께 여산 등의 제위 찬탈 시도를 진압하고 여씨 일족을 숙청하는 역쿠데타(여씨의 난)를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에게 "유씨 편은 좌측 어깨를 드러내고(左袒), 여씨 편은 우측 어깨를 드러내라"고 명하자 모두 좌측 어깨를 드러낸 것에서 '좌단(左袒)'이라는 고사가 유래했다. 쿠데타 성공 후, 유방의 아들인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문제이다.[4][7]

문제 즉위 후, 기원전 180년 12월 16일,[4] 진평은 여씨 숙청의 공이 주발보다 크다며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좌승상이 되었다.[7] 얼마 후, 문제가 국정 운영에 대해 물었을 때 주발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으나, 진평은 "사건 건수는 대사구에게, 돈과 곡물의 수입은 치속내사에게 물어야 한다"며 각 담당자의 역할을 명확히 설명하고, 승상의 역할은 황제를 보좌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 제국 내 평화를 유지하며, 모든 관료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8] 이에 주발은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기원전 179년 10월 2일,[5] 병을 핑계로 사임했고, 진평이 다시 우승상이 되어 좌승상과 우승상의 업무를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8]

진평은 문제 2년(기원전 178년) 10월에 사망했으며, 헌후(獻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2. 4. 문제 시대와 죽음

여태후가 기원전 180년 8월 사망한 후, 진평은 주발 등 중신과 힘을 모아 여씨의 난을 평정하고 유씨 왕조를 복원하여 대왕으로 있던 유항(劉恒)을 문제로 옹립하였다.[9] 기원전 180년 12월 16일,[4] 진평은 좌승상이 되었고, 주발은 우승상이 되었다. 이는 진평이 주발의 공적이 자신보다 크다고 여겨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문제는 주발에게 한 해 동안 처리되는 옥사의 수효와 국가 재정의 수입(돈과 곡물)을 물었으나, 주발은 쩔쩔매며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9] 문제가 다시 진평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진평은 각 업무에는 담당자가 있으며, 옥사 건수는 정위(廷尉)에게, 재정 수입은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어야 한다고 답했다.[9] 또한 진평은 재상의 역할은 위로는 천자를 도와 음양을 다스리고 사계절의 운행에 순응하며, 아래로는 만물이 제때 자라도록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조정에 귀부하게 하고, 모든 관리가 각자의 직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진평의 답변에 크게 만족했다.[9]

주발은 이 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문제와의 관계나 재능 면에서 자신이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여, 기원전 179년 10월 2일,[5] 병을 핑계로 우승상 직에서 물러났다.[9][5] 이후 진평은 좌승상과 우승상의 업무를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진평은 기원전 179년 11월경 장안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 '헌후(獻侯)'라는 시호를 받았다.[9] 그는 호우향(戶牖鄉) 쿠상리(庫上里) 첸옌포(陳宴坡)에 묻혔다. 그의 무덤과 사당은 명나라 시대에 황하의 범람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진평의 아들 진매(陳買)가 후작위를 계승했으나, 한 무제 통치 시기에 증손자 진하(陳何)가 죄를 지어 처형되면서 그의 가문은 작위를 박탈당했다. 《사기》에는 진평의 일대기를 다룬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가 전해지고 있다.[9]

3. 주요 계책과 업적

초한 쟁패 시기, 진평은 유방을 보좌하며 여러 계책을 내어 경쟁자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처음에는 "호유후"(戶牖侯|호유후zho)에 봉해졌고, 이후 "곡역후"(曲逆侯|곡역후zho)로 봉해졌다.[9] 그는 한 혜제와 여태후 집권기를 거쳐 한 문제 시대까지 좌승상(左丞相|좌승상zho)과 우승상(右丞相|우승상zho)을 역임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진평은 유방 휘하에서 활동하며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주요 계책을 성공시켜 한나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 항우와 그의 핵심 참모인 범증 사이를 이간질하여 범증을 실각시켰다. 이는 항우 세력 약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한전쟁#성고 전투 참조)

# 성양 전투에서 위장술을 사용하여 유방이 포위망을 탈출하도록 도왔다.

# 한신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유방에게 한신을 제후왕으로 봉하여 그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도록 조언했다.

# 제나라와 동맹을 맺어 항우를 견제하도록 건의했다.

# 종리말을 숨겨주었다는 의심을 받던 한신을 계책을 써서 사로잡도록 도왔다. 이후 한신은 사면되었으나 제후왕에서 열후로 강등되었다.

#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의 묵돌 선우에게 포위된 유방을 구하기 위해 계책을 제안했다.

이 외에도 진평은 여러 중요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했다. 형양 전투에서 유방이 포위되었을 때, 기신을 가짜 유방으로 내세워 적을 속이고 유방이 탈출할 시간을 버는 금선탈각 계책을 성공시켰다. 또한, 한신이 제나라 왕을 자칭하려 하자 분노한 유방을 장량과 함께 설득하여 이를 승인하게 함으로써 한신의 이탈을 막았고, 항우와의 강화 조약 이후 지친 항우 군대를 추격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도록 장량과 함께 건의하기도 했다.

여태후 사후에는 주발과 협력하여 여씨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유씨 황실의 정통성을 회복하여 대왕 유항을 한 문제로 옹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9] 이후 문제에게 승상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국정 운영의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발에게 공을 양보하여 좌승상이 되었으나, 곧 문제의 신임을 얻어 좌우 승상의 업무를 모두 총괄하게 되었다.[9][5]

3. 1. 반간계를 통한 범증 제거

유방항우에게 쫓겨 형양성에 포위되었을 때(형양 전투),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평은 계책을 내놓았다. 항우가 의심이 많은 성격임을 이용하여 부하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다고 진언한 것이다.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진평에게 4만 금이라는 거금을 주어 자유롭게 사용하게 했다.

진평은 이 자금으로 "범증, 종리매, 용저, 주은과 같은 항우의 핵심 신하들이 공적을 세워도 항우가 상을 주는 데 인색하므로, 한나라와 내통하여 항우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항우는 이 소문을 믿고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항우가 가장 신임하던 책사 범증을 실각시키기 위해, 초나라의 사자가 한나라에 왔을 때 계략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사자를 범증이 보낸 것으로 대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범증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자가 항우의 명으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태도를 바꾸어 매우 초라하게 대접했다. 이 모습을 본 사자가 돌아가 항우에게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결국 범증은 항우의 불신을 견디지 못하고 실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이로써 진평은 초나라의 가장 뛰어난 지략가를 직접적인 전투 없이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항우가 패배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2. 백등산 전투에서의 기지

고제 7년(기원전 200년), 흉노와 손잡은 한왕 신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백등산 전투가 벌어졌다. 고제는 흉노선우인 묵돌의 유인책에 속아 평성에서 포위되었고, 7일 동안 식량조차 구하지 못하는 큰 위기에 빠졌다.[9] 이때 진평은 묵돌 선우의 아내인 연지(閼氏)에게 몰래 뇌물을 보내 과 화평하도록 남편을 설득하게 하는 계책을 내놓았다.[9][11][6] 연지가 묵돌에게 화평을 권하자, 묵돌은 포위를 풀었고 고제는 무사히 평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9][11] 이 공으로 고제는 곡역(曲逆)을 지나다가 그곳이 큰 고을임을 보고 진평을 곡역후(曲逆侯)로 봉하고 이전의 봉국은 거두었다.[9]

3. 3. 여씨 정권 하에서의 처신

혜제 7년(기원전 188년) 가을 8월, 혜제가 붕어하자 여태후가 임조칭제하며 실권을 장악하고 여씨 일족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당시 우승상이었던 왕릉고조의 유언을 근거로 반대했지만, 좌승상이었던 진평은 대위 주발과 함께 이를 찬성했다. 여태후는 왕릉에게 분노하여 그를 실권 없는 태부로 좌천시키고, 자신의 총애하는 심이기를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모든 정사는 심이기를 거쳐 처리되었다.[9]

진평은 장량의 아들 장벽강의 조언에 따라 여태후를 안심시키고자 여태후의 조카인 여태, 여산, 여록 등을 왕으로 봉하도록 적극 건의했다. 왕릉이 실각한 후 진평이 우승상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여씨 일족이 중앙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좌승상마저 여씨와 가까운 심이기였기에 실질적인 권한은 미미했다.

이 시기, 여태후의 여동생이자 번쾌의 부인인 여수는 진평에 대해 "우승상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낸다"고 여태후에게 자주 참소했다. 이 말을 들은 진평은 오히려 그 말대로 행동하며 주색에 빠진 척하여 여태후와 여수 등의 경계심을 풀었다. 여태후는 진평을 불러 여수의 참소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이처럼 진평은 여씨 정권 하에서 표면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9]

고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사망하자 진평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마침 그의 집에 방문한 육가는 진평의 고민을 간파하고 조언을 주었다. 진평은 육가의 조언에 따라 연회를 명분으로 삼아 대위 주발을 비롯한 반(反) 여씨 세력 및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아 비밀리에 인맥을 구축하고 여씨 축출 계획을 세웠다. 평소 그의 행실 덕분에 여씨 측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진평은 육가에게 자금(하인 100명, 수레 50대, 돈 500만 닢)을 지원하며 인맥 형성을 돕게 했다.[9]

이후 제나라 왕 유양의 봉기 및 토벌군 사령관 관영의 배신 등으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진평은 기회를 포착하여 책략을 실행했다. 그는 주발 등과 함께 여록의 친구인 려기의 아버지 려상에게 압력을 넣어, 려기가 여록에게 "중앙에 계속 머물면 야심을 의심받을 수 있으니, 영지로 돌아가면 의심도 풀리고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설득하게 했다. 이 설득에 넘어간 여록이 병권을 내놓자 주발이 즉시 군권을 장악했다. 확보한 병력과 사전에 구축한 인맥, 정보망을 동원하여 진평과 주발 등은 여산의 제위 찬탈 시도를 막고, 이를 빌미로 여씨 일족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9]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주발이 병권을 쥐었으나 병사들의 충성심을 확신할 수 없자, "유씨 편은 왼쪽 어깨 옷을 벗고(zho), 여씨 편은 오른쪽 어깨 옷을 벗으라(zho)"고 명했는데, 모든 병사가 왼쪽 어깨를 드러내 보였다. 여기서 의로운 편에 서서 지지함을 뜻하는 '좌단(左袒)하다'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9]

여씨 세력을 제거한 후, 진평과 주발 등은 유방의 아들이자 당시 대왕(代王)이었던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문제이다. 진평은 문제에게 주발의 공이 자신보다 크다며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좌승상에 머물렀다.[9]

3. 4. 문제 옹립과 한나라 안정

여태후가 기원전 180년 8월 사망하자, 진평은 주발 등 중신들과 협력하여 여씨의 난을 평정하고 유씨(劉氏) 황실을 복권시켜 대왕(代王)으로 있던 유항(문제)을 황제로 옹립하였다.[9] 기원전 180년 12월 16일,[4] 진평은 좌승상이 되었고, 주발은 우승상이 되었다. 이는 진평이 주발의 공적이 자신보다 크다고 여겨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9]

얼마 후, 문제가 주발에게 한 해 동안 처리되는 옥사(獄事)의 수와 국가 재정 수입(돈과 곡물) 규모를 물었으나, 주발은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부끄러워했다. 문제가 같은 질문을 진평에게 하자, 진평은 각 사안에 담당자가 있으며, 옥사 건수는 정위(廷尉, 사법 담당)에게, 재정 수입은 치속내사(治粟內史, 재정 담당)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답했다. 나아가 승상의 역할에 대해 묻자, 진평은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사계절의 운행에 순응하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이 자라나도록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이민족과 제후들을 안정시키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황실에 귀부하게 하고, 모든 관료가 각자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9]

문제는 진평의 답변에 만족했다. 주발은 스스로 진평보다 능력과 황제와의 관계에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느껴, 기원전 179년 10월 2일,[5] 병을 핑계로 우승상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진평이 좌승상과 우승상의 업무를 모두 총괄하게 되었다. 진평은 문제 2년(기원전 178년)에 사망하였고, '헌후'(獻侯)라는 시호를 받았다.[9]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평의 전기가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9]

4. 평가와 영향

한나라의 개국공신 진평은 뛰어난 모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받는다.[1] 유방 휘하에서 장량과 함께 대표적인 책사로 꼽히지만, 특히 기이한 계책을 내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능숙했다.[1] 그러나 그의 모략은 때로는 주위의 경계를 사기도 했으며, 유방조차 임종 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을 남겼다.[1]

진평 스스로도 음모를 많이 사용한 것에 대한 업보를 예감했으며, 실제로 그의 사후 가문은 예언대로 몰락하는 과정을 겪었다.[1] 정치적인 면에서도 문제와의 일화에서 나타나듯, 국가 운영의 큰 그림을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에게 실무를 맡기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1] 이러한 진평의 능력과 행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마천조조 등 여러 인물에 의해 그의 공과 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내려졌다.[1]

4. 1. 후대의 평가

유방 휘하의 대표적인 책사로 장량이 꼽히지만, 모략 면에서는 진평이 더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 때문에 주위의 경계를 사기도 했으며, 유방조차 임종 직전 "진평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위험할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1] 진평 스스로도 생전에 "나는 국가를 위해 부득이하게 음모를 많이 꾸몄다. 이는 도가에서 금하는 바이니, 내가 죽으면 자손이 끊어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두 내 업보이다"라고 예견했다.[1]

실제로 진평의 예언처럼, 아들 진매와 손자 진회 대까지는 작위가 이어졌으나, 증손자 진하가 간통죄로 처형당하면서 작위가 몰수되었다.[1] 현손 진장은 곽거병의 어머니와 사통하여 곽거병의 의붓아버지가 되었고, 이를 이용해 제후 신분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모략가로서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여씨 세력 숙청주발과 함께 승상이 되었을 때, 문제가 주발에게 연간 재판 건수와 국가 재정 수입/지출 규모를 물었으나 주발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1] 반면 진평은 같은 질문에 "재판은 정위에게, 재정은 치속내사에게 담당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물으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문제가 승상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진평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다스리며 각자가 역할을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세한 실무는 담당자의 역할입니다"라고 답하여 문제의 칭찬을 받았다.[1] 이 일화는 진평이 국가 운영 시스템과 자신의 역할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주발은 진평에게 능력 차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승상직에서 물러났다.[1]

후대의 인물들도 진평을 높이 평가했다. 삼국시대 의 양옹은 제갈량이 직접 장부 확인까지 하는 것을 보고, 진평의 사례를 들어 국가 운영은 각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간언했다.[1] 사마천사기에서 진평에 대해 "기이한 계책으로 어려움을 해결하고 유방을 구했으며, 여후 사후 혼란기에도 한 왕조를 안정시킨 뛰어난 재상이다. 시작과 끝이 모두 좋았으니, 지모가 뛰어난 선비가 아니면 어찌 이를 해낼 수 있었겠는가"라고 극찬했다.[1] 조조는 인재를 구할 때 "진평처럼 형수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거나 뇌물을 받은 과거가 있더라도 재능만 있다면 등용할 것이니, 망설이지 말고 내게 오라"는 포고를 내려, 진평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샀음을 보여준다.[1]

5. 가계

진평의 아들 진매(陳買)는 아버지의 사후 후작위를 상속받았다. 이후 증손인 진하(陳何)가 작위를 이어받아 23년간 곡역후를 지냈다. 그러나 한 무제 통치 기간 동안 진하는 죄를 지어 기시되었고, 그의 봉국은 폐지되었으며 가족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작위를 박탈당했다. 한편, 진평의 또 다른 증손인 진장(陳掌)은 위청한 무제의 외척 위씨와의 인척 관계를 이용하여 조상의 작위인 곡역후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9]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hiji and Han Shu
[3] 서적 Shiji, vol.56 & Book of Han, vol.40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Shiji vol. 06
[7] 문서
[8] 문서
[9] 사기 사기 (역사서)
[10] 문서
[11] 위와 같음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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