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르게이 어르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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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괴르게이 어르투르(Görgey Artúr, 1818–1916)는 헝가리 혁명(1848–1849) 당시 활약한 군인, 화학자이다. 그는 헝가리 독립 전쟁에서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나, 빌라고스에서 러시아에 항복한 후 배신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혁명 이전에는 화학 연구에 매진하여 코코넛 오일 연구를 통해 데칸산과 라우르산의 존재를 밝혀냈다. 1848년 혁명 발발 후에는 헝가리 국방군에서 장군으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1849년 헝가리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러시아에 항복하면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망명 생활을 거쳐 1867년 귀국했지만, 헝가리인들에게 배신자로 여겨지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괴르게이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갖춘 군인이었으며, 엄격한 규율과 병사들의 복종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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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르게이 어르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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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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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르투르 괴르게이 |
칭호 | görgői és toporci 괴르게이 아르투르 데 괴르고 에트 토포르츠 |
출생 | 1818년 1월 30일 |
출생지 | 토포레츠, 스피슈 주, 헝가리 왕국 (1526년~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 (현재 토포레츠, 슬로바키아) |
사망 | 1916년 5월 21일 |
사망지 |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국적 | 헝가리인 |
배우자 | 아델 오부앵 |
자녀 | 베르타, 코르넬 |
경력 | |
소속 | 육군 |
복무 기간 | 불명 |
계급 | 장군 |
참전 | 크로아티아 오조라 항복 브루크 전투 슈베하트 전투 모손 전투 테테니 전투 셀라크나 전투 이샤세그 전투 (1849년) 제1차 코마롬 전투 (1849년) 부다 공방전 (1849년) 페레드 전투 죄르 전투 제2차 코마롬 전투 (1849년) 제2차 바츠 전투 (1849년) |
정치 경력 | |
직책 | 헝가리 "군사 독재관", 임시 민군 통치권자 |
임기 시작 | 1849년 8월 11일 |
임기 종료 | 1849년 8월 13일 |
군주 | 프란츠 요제프 1세 (미승인) |
총리 | 베르털란 세메레 |
이전 | 라이오시 코슈트 (총독-대통령) |
이후 | 빌라고시 항복, 혁명 진압 |
직책 2 | 국방부 장관 |
임기 시작 2 | 1849년 5월 7일 |
임기 종료 2 | 1849년 7월 7일 |
총리 2 | 베르털란 세메레 |
이전 2 | 라자르 메시로시 |
이후 2 | 라이오시 아울리히 |
2. 성(姓) 표기 논란: Görgey인가, Görgei인가?
괴르게이의 성은 초기에 "Görgey"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출생 당시의 표기 방식이었다. 샨도르 페퇴의 『괴르게이 아르투르』(부다페스트, 1930), 아르투르의 동생 이슈트반 괴르게이의 『괴르게이 아르투르의 청년 시절과 혁명까지의 성장』(부다페스트, 1916) 및 『망명 중의 괴르게이 아르투르 1849–1867』(부다페스트, 1918) 등에서 이러한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 기술에서는 "Görgei"로 표기한다 (예: 로버트 헤르만과 타마시 치카니의 저서).[1]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1818년 1월 30일, 상부 헝가리(오늘날 슬로바키아 토포레츠)의 토포르츠에서 '요하네스 아르투르 볼데마르 괴르게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게저 2세 국왕(1141–1162) 치세에 스페스(오늘날 스피시) 지역으로 이주한 짚서 독일인 혈통의 가난한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2] 종교 개혁 시기에 그들은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의 가문 이름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스피시스키 흐르호프에 있는 괴르괴 마을(görgőihu, "괴르괴 출신"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1845년, 괴르게이는 군 복무를 마치고 프라하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게 되었다.[2]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이 깊어, 당시 유명한 화학자였던 요제프 레트텐바허 교수를 추천해준 친구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5]
헝가리 이름에서 이름 마지막 글자를 "y" 대신 "i"로 표기하는 것은 귀족의 이름이 평민보다 먼저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고풍스러운 철자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어 철자가 바뀐 후 평민의 성에는 "i"가 사용되었다.[1]
귀족 출신인 괴르게이는 처음에는 "y"를 사용했지만, 1848–49년 헝가리 혁명 기간 동안 많은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들이 "y"를 "i"로 변경했다. 요카이 모르가 대표적인 예이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졌던 괴르게이 역시 이름을 변경했고, 혁명 진압 후에도 "Görgei"를 계속 사용했다. 사후 출판된 일부 작품과 헝가리어 번역본에서 "Görgey" 형식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괴르게이가 사망할 때까지 선호한 형태는 "Görgei"였다.[1]
3. 초기 생애
1832년 괴르게이는 재단에서 제공하는 무상 교육 혜택을 받아 툴른의 공병 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그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지만, 처음에는 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군인보다는 철학자나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2] 그는 이 학교에서 거의 13년을 보냈고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는 가족에게서 돈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고, 힘든 삶을 스스로 단련하기 위해 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낡은 옷을 입었다.[1] 학교 기록에 따르면 그의 품행은 매우 훌륭했고, 실수가 없었으며, 타고난 재능이 뛰어났고, 열정과 근면함이 끊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격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지에서 존경하지 않는 장교에게 복종해야 하는 군인의 삶을 혐오하며, 군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유롭고 활동적인 삶을 꿈꾼다고 썼다.[4] 졸업 후, 그는 나도르 후사르 연대에서 복무하며 부관 역할을 수행했다. 1837년까지 그는 중위 계급에 도달했고, 비엔나의 헝가리 귀족 근위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와 대학에서의 학업을 병행했다.[1]
4. 화학자로서의 경력
괴르게이는 코코넛 오일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데칸산과 라우르산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는 지방산 동족체의 분리에 분별 증류 대신 바륨 염의 용해도를 이용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6]
괴르게이의 연구 결과는 여러 저명한 학술지에 게재되었다.[7]
괴르게이의 화학적 업적은 보이테흐 샤파르지크와 카롤리 탄과 같은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7] 1851년, 괴르게이는 화학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명예 훈장과 40HUF를 받았다.[2]
5. 1848년 헝가리 혁명과 군사적 활약
1848년 3월,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괴르게이는 위그노 프랑스 소녀와 결혼 준비를 잠시 멈추고 혁명군에 합류했다. 헝가리군에 대위로 임명된 그는 신병을 훈련하고, 라요스 바티아니 총리의 비서로 일하면서 국가 경비대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무기 조달을 위해 이스탄불 등지로 파견되기도 했다.[1]
9월에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가 요십 옐라치치에게 헝가리 공격 권한을 부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옐라치치의 군대가 헝가리로 진입하자 괴르게이는 체펠 섬에서 크로아티아군의 보급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친오스트리아 귀족 외되니 지치 백작을 체포하여 군사 재판에 넘겨 교수형에 처했다.[1] 이 사건은 라요스 코슈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괴르게이를 장군으로 파격 승진시켰다.[1]
이후 괴르게이는 1848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1849년 봄 작전을 통해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헝가리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오조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슈베하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후퇴하는 헝가리군을 성공적으로 보호했다.[133][135] 겨울 동안에는 험난한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헝가리군의 재정비 시간을 확보했다. 1849년 봄 작전에서는 하트반, 터피오비치케, 이서세그, 너지셜로, 코마롬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헝가리 영토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48][149][150][154] 이러한 공로로 국방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849년 6월, 러시아 군의 개입으로 헝가리 혁명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괴르게이는 코슈트와의 갈등, 머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60] 죄르에서의 패배[63] 이후, 코마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괴르게이는 그들을 격파하여 수도를 빨리 정복하려는 적의 계획을 뒤엎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날 무렵 괴르게이는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었다.[66]
이후 바츠 2차 전투에서 파스케비치의 병력을 막아내고,[69] 북동쪽으로 후퇴하여 러시아 군대를 자신에게 유인하여[64], 거의 한 달 동안 헝가리 평원에 있는 헝가리 주력군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8월 9일 테메슈바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이후[81] 코슈트는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섭정-대통령 직에서 사임하고 모든 정치적 권력을 괴르게이에게 넘겨주어 그에게 독재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82]
결국 괴르게이는 1849년 8월 13일, 쇼르스 평원에서 러시아군에게 항복했다.[86] 그는 러시아에 항복하면 차르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헝가리군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며, 헝가리 국민에게도 자비를 베풀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1]
항복 이후, 괴르게이는 나지바라드에 있는 파스케비치의 본부로 이송되었다. 파스케비치는 괴르게이에게 그의 생명만 보장할 수 있으며, 다른 장교와 병사들의 운명은 오스트리아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괴르게이는 자신의 군대와 장교들은 잘못이 없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파스케비치는 그들을 위해 변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장군들을 처형했다.[1]
5. 1. 장군으로 임명되기까지
1848년 3월,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괴르게이는 혁명군에 합류하여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헝가리 제5대대 소속으로 신병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요스 바티아니 총리의 비서였던 임레 이반카의 추천으로 바티아니의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반카와 함께 자발적인 이동식 국가 경비대를 조직하는 계획을 세워 솔노크의 국가 경비대 캠프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1]괴르게이는 신병 훈련뿐만 아니라 무기 조달에도 힘썼다.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로 파견되어 무기를 구매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비너 노이슈타트의 국영 공장과 셀리에 앤 벨로 공장에서 충격 캡슐과 프라이머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1] 그는 혁명의 평등주의적 이상에 따라 귀족 성을 버리고 '괴르게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1848년 8월 30일에는 라요스 코슈트를 처음 만나 충격 캡슐과 프라이머 생산 공장 건설을 제안하며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8]
1848년 9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가 요십 옐라치치에게 헝가리 공격 권한을 부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옐라치치의 군대가 헝가리로 진입하자 괴르게이는 체펠 섬에서 크로아티아군의 보급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지역 주민들을 조직하여 옐라치치에게 보내는 특사와 보급 마차를 포획했다. 이 과정에서 친오스트리아 귀족 외되니 지치 백작을 체포하여 군사 재판에 넘겨 교수형에 처했다.[1] 이 과감한 행동은 코슈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30세의 소령이었던 괴르게이를 장군으로 파격 승진시켰다.[1]
5. 2. 1848-49년 가을 및 겨울 작전
1848년 9월, 옐라치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군의 헝가리 침공에 맞서 오조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재능을 입증했다.[133] 슈베하트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135] 후퇴하는 헝가리군을 성공적으로 보호하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상 도나우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헝가리 서부 국경 방어를 담당했다.[135]코슈트와의 갈등 속에서도 전략적 판단에 따라 부다와 페슈트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했으며, 바츠 선언을 통해 헝가리 혁명 정신을 고수했다. 겨울 동안 험난한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빈디쉬-그레츠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헝가리군의 재정비 시간을 확보했다.
다음 표는 괴르게이가 직접 참여했거나, 그가 최고 사령관이었던 부대가 참여한 전투를 보여준다.
5. 3. 1849년 봄 작전과 국방 장관 임명
Görgey Artúrhu는 1849년 봄 헝가리군 임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봄 작전을 지휘했다. 이 작전에서 헝가리군은 하트반, 터피오비치케, 이서세그, 너지셜로, 코마롬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헝가리 영토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48][149][150][154]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괴르게이는 국방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코슈트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특히 1849년 4월 14일 코슈트가 발표한 합스부르크 왕조 폐위에 대한 괴르게이의 비판은 코슈트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65]
괴르게이가 참여했거나 지휘했던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5. 4. 헝가리 최고 사령관 및 독재관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1849년 6월, 러시아 군의 개입으로 헝가리 혁명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코마롬(Komárom) 주변에 헝가리 군을 집중시키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코슈트와의 갈등, 머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60]6월 26일,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수도에서 열린 의회 회의에 참석하여 코슈트에게 헝가리군을 코마롬 주변에 집중시킬 것을 설득하려 했다. 이 계획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과의 전쟁을 최소한의 타협으로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방법이었다.[60] 그러나 회의 참석으로 인해 6월 28일 죄르에서 헝가리군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전투가 끝날 무렵에 도착했는데, 압도된 헝가리군을 구할 시간이 너무 늦었다.[63]
죄르에서의 패배와 파스케비치 원수가 이끄는 러시아 주력군의 진격을 알게 된 헝가리 정부는,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집중 계획을 포기하고 요새를 포기하고 그의 군대의 주력과 함께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이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부의 계획을 따르기로 동의했다.[64]
7월 2일,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군대는 코마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그들을 격파하여 수도를 빨리 정복하려는 적의 계획을 뒤엎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날 무렵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었다.[66]
전투 전에 오해로 인해 코슈트는 괴르게이 어르투르를 지휘에서 해임하고 메죄로시를 대신 임명했다.[65] 메죄로시가 페슈트로 돌아갔기 때문에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지휘에서 해임된 것을 알지 못했다.[1]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해임에 대한 편지는 괴르게이 어르투르가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7월 3일에 도착했다. 그의 장교들은 지휘관을 해임하는 결정에 반대했다.[8]
7월 15~17일 바츠 2차 전투에서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파스케비치의 병력을 막아냈다.[69] 비록 그는 머리 부상으로 고통을 겪고 전투 이틀째에 두개골 수술을 받았지만[70], 북동쪽으로 후퇴하여 러시아 군대를 자신에게 유인하여[64], 거의 한 달 동안 헝가리 평원에 있는 헝가리 주력군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강행군(하루 40~50 km)을 통해 이를 달성했으며, 그를 포위하거나 헝가리 남부에 있는 헝가리 주력군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러시아의 반복적인 시도를 피했다.[71]
미슈콜츠, 7월 23~24일;[72] 알소졸차, 7월 25일;[73] 게스텔리, 7월 28일;[74] 등 7번의 방어전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했다. 단 한 번의 패배, 8월 2일 데브레첸에서 패전을 격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진격을 늦추고 헝가리군이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64]
러시아의 개입으로 헝가리 독립은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헝가리 정부는 괴르게이 어르투르와 협상을 시작했다.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헝가리 정부에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77] 그러나 러시아 사령관은 무조건적인 항복에 대해서만 논의할 것이라고 응답했다.[78]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전 극장에서는 다른 헝가리 장군들이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8월 9일 테메슈바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81] 따라서 괴르게이 어르투르가 2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결정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이 패배 이후 코슈트는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섭정-대통령 직에서 사임했다.[82]
1849년 8월 10일. 괴르게이 어르투르와 코슈트는 아라드에서 생애 마지막으로 만났다. 코슈트는 그 후 모든 정치적 권력을 괴르게이 어르투르에게 넘겨주어 그에게 독재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82]
5. 5. 빌라고스 항복
1849년 8월 11일, 괴르게이는 군사 회의를 소집하여 항복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 결과, 헝가리군은 오스트리아군보다 러시아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더 나은 조건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1] 괴르게이는 러시아에 항복하면 차르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헝가리군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며, 헝가리 국민에게도 자비를 베풀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1] 또한 러시아에 항복하는 것은 헝가리 혁명이 불법적인 봉기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제국의 연합군에 맞선 정당한 항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8월 13일, 헝가리군은 쇼르스 평원에서 러시아군에게 항복했다.[86]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고, 후사르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과 작별했다.[1]
항복 이후, 괴르게이는 나지바라드에 있는 파스케비치의 본부로 이송되었다. 파스케비치는 괴르게이에게 그의 생명만 보장할 수 있으며, 다른 장교와 병사들의 운명은 오스트리아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괴르게이는 자신의 군대와 장교들은 잘못이 없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파스케비치는 그들을 위해 변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장군들을 처형했다.[1] 이로 인해 괴르게이는 헝가리인들에게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87]
6. 혁명 이후의 삶
괴르게이는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으로 헝가리 군인과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발표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1867년 6월 9일 사면이 허가되었고,[89] 7월 16일 클라겐푸르트 경찰서장은 괴르게이에게 억류가 종료되었으며 헝가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발표했다. 7월 19일, 괴르게이는 사면에 대한 공식 결정을 받고 헝가리로 가는 기차를 탔다.[89]
하지만, 헝가리로 돌아온 괴르게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신자'라는 오명이었다. 코슈트는 망명지에서 괴르게이를 배신자로 낙인찍는 편지를 보냈고, 이로 인해 많은 헝가리인들은 괴르게이를 비난하고 멸시했다.[89] 미하이 뵈뢰슈머르티는 괴르게이를 저주하는 시 "Átok"(저주)을 썼고,[95] 여러 매체에서 괴르게이를 혁명과 자유의 배신자로 묘사했다.[96]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괴르게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격을 받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괴르게이는 만년에 병을 자주 앓았고, 1916년 5월 21일 부다페스트에서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1][104][105] 그의 장례식에는 이슈트반 티사 총리를 비롯한 많은 헝가리인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01] 그의 시신은 헝가리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져 헝가리 정부와 군대의 예우를 받았으며,[101] 이후 케레페시 묘지에 안장되었다.[101]
6. 1. 클라겐푸르트에서의 망명 생활
오스트리아 당국은 괴르게이와 그의 아내 아델을 클라겐푸르트로 이주시켰고, 그곳에서 괴르게이는 주로 화학 관련 일을 하며 생활했다.[88] 그는 도시와 그 주변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었고, 경찰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89]이후 괴르게이는 아내의 유산 일부로 클라겐푸르트 근처 빅트링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등 농사일을 했다.[90]

괴르게이는 수입을 확보하여 오스트리아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헝가리 자유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빈의 출판업자 프리드리히 만츠는 책 출판에 동의했고, 괴르게이는 오스트리아 비밀 경찰의 감시하에 집필을 진행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괴르게이가 망명 중인 코수트를 비판하고 합스부르크가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책을 쓸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괴르게이의 저서 ''1848년과 1849년 헝가리에서의 나의 삶과 활동''(Mein Leben und Wirken in Ungarn in den Jahren 1848 und 1849de)은 오스트리아 정부와 군 지도부의 약점, 실수, 비인간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만츠는 원고를 읽은 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원고를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로 밀반입하여 F. A. Brockhaus AG에서 1852년 여름에 출판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책의 내용에 격분했고, 책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많은 오스트리아 정치인과 군 지도자들은 괴르게이의 처벌을 요구했다. 만츠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반입된 책은 모두 파기되었다.[1]
망명 중에 태어난 아르투르 괴르게이와 달리,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1856–1857년에 아델과 아이들은 헝가리를 방문하여 괴르게이의 친척들과 1년을 보냈다.[89]
아델과 딸 베르타는 파리를 방문하여 친척들을 만났는데, 이때 괴르게이는 아델에게 나폴레옹 3세에게 전달할 메모를 건네주었다. 이 메모에는 코수스와 망명 중인 헝가리 정치인 및 장교들의 상반된 이해관계와 나폴레옹이 헝가리-오스트리아 타협을 지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나폴레옹 3세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89]

괴르게이는 헝가리의 정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고, 페렌츠 데아크의 온건 정치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데아크를 자신의 망명 생활을 끝내줄 구원자로 여겼다. 그는 4월 법률을 헝가리의 기본법으로 수용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요구하는 데아크의 청원이 실린 헝가리 신문 ''페스티 나플로''의 사본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89] 그는 ''페스티 나플로''에 기사를 기고하여 헝가리인들에게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요구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에게는 1847-1848년에 제정된 헝가리 법률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89]
1863년 말, 괴르게이는 아내와 자녀들을 헝가리로 보내 아들을 헝가리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아내가 헝가리 정치인들을 만나 남편의 귀국을 지지하도록 설득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코수스의 배신 혐의에 대한 거짓 비난으로 인해 많은 정치인들이 괴르게이에게 비우호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괴르게이의 귀국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고, 페렌츠 데아크에게 괴르게이의 정치적 견해가 자신과 유사하며 귀국 후 그를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89] 1866년, 괴르게이의 남동생은 괴르게이의 대의에 동정적인 정치인 팔 냐리로부터 헝가리-오스트리아 타협 이후 괴르게이의 귀국과 이미지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격려의 소식을 받았다.[89]
1862년부터 괴르게이는 클라겐푸르트에서 헝가리 동료인 라슬로 베르젠체이와 함께 지냈다. 베르젠체이는 1848–1849년 독립 운동의 급진적 정치인이었으며, 망명에서 돌아온 후 클라겐푸르트에 억류되었다. 괴르게이와 베르젠체이는 페렌츠 데아크의 국내 정책에 대해 매일 논쟁했는데, 베르젠체이는 데아크의 정책을 비판한 반면 괴르게이는 옹호했다.[89]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괴르게이는 코수스가 외부에서 헝가리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코수스가 가리발디스트 혁명을 통해 헝가리를 해방하려는 생각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89]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고 프라하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헝가리-오스트리아 타협의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89]
헝가리 의회 의원이 된 옛 친구 임레 이반카는 괴르게이에게 헝가리 군 부대의 병역 의무와 통합에 대한 법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괴르게이는 1867년 초에 이 법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31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완성하여 데아크에게 보냈다.[89]
괴르게이는 원고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 현(縣)별 징병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
- 헝가리 군 개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군 지휘부의 분노를 유발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 독립 전쟁 패배 이후 잃어버린 헝가리인의 군대에 대한 공감대를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
- 군인들의 조기 결혼을 장려하고, 이를 막는 관료적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 헝가리 청년들이 어릴 때부터 배우고 공부하며 공익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 헝가리의 국방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89]
괴르게이는 헝가리 군의 내부 조직에 대한 헝가리 전쟁부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비판했다. 대신 그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전쟁부가 국가 방위에 대한 공동 제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입법화하도록 제안했다.
괴르게이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군대가 패배한 원인이 무기와 병력 부족, 부실한 국방 조직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로이센군이 현대적인 후장식 소총을 사용한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구식 전장식 소총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참호로 보호받는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실수였으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후장식 소총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분석했다.[89] 괴르게이는 군대의 강점을 결정하는 것은 병력의 수가 아니라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라고 보았다.[89]
괴르게이는 20세에서 22세가 된 모든 남성을 12년 동안 징집하는 법안을 비판하며, 이는 젊은 지식인들이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이 법안을 통해 "민주적 정치 신념을 가진 헝가리 지식인"을 무력화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89]
괴르게이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 정규군 복무 기간은 6년, 1차 예비군은 3년으로 해야 한다. 국민 방위군과 "총궐기" 참여 의무는 45세까지 지속된다.[91]
- 평시 군대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징집병과 예비군의 군사 훈련이어야 하며, 이 훈련은 매년 가을에 실시해야 한다. 군사 훈련 기간 동안 군인들은 민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 정규군은 지원병, 징집병, 휴가 중인 병사, 징벌적 징집 대상, 사관학교 학생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징집병은 1년만 복무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2년 동안 복무한다.
- 혹독한 군사 훈련의 오랜 전통을 완화하고, 군대 내 교육 기회를 늘려야 한다.
- 의회는 지원병의 수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군대를 징집할 책임이 있으며, 특별한 경우 3년 복무를 위해 군인을 징집해야 한다.
- 군대 중대와 연대는 징집된 지역에 남아 있어야 하며, 국왕은 헝가리 외부로 끌려간 모든 헝가리 군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 각 연대가 징집병을 받을 연대 구역은 의회 선거구와 동일해야 한다.
- 병역 의무가 있는 사람이 대리인을 고용하여 대신 복무하도록 하는 권리는 폐지되어야 한다.
- 군 복무 중인 사람은 일정 금액의 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 21세 미만의 지원병과 징집병은 복무하고자 하는 병과를 선택할 수 있다.
- 군사 교육은 고등학교에서 도입되어야 한다.
- 전쟁 시 모든 부대는 1차 예비군을 포함하여 군대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2차 예비군은 후방 방어를 보장한다. 필요하다면 국민 방위군과 국민 봉기도 소집되어야 한다.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병역이 면제되어야 한다.[89]
괴르게이와 동시에 클라프카, 안탈 베터, 임레 이반카도 헝가리 군 개혁에 대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헝가리 의회가 새로운 군대 징집을 결정할 권리와 군사 훈련 기간 동안 징집병과 예비군을 민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는 괴르게이의 제안은 헝가리 국방 법안에 포함되었다.[89]
6. 2. 헝가리 귀국과 배신자라는 오명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으로 헝가리 군인과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발표되면서 괴르게이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1867년 6월 9일 사면이 허가되었고,[89] 7월 16일 클라겐푸르트 경찰서장은 괴르게이에게 억류가 종료되었으며 헝가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발표했다. 7월 19일, 괴르게이는 사면에 대한 공식 결정을 받고 헝가리로 가는 기차를 탔다.[89]하지만, 헝가리로 돌아온 괴르게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신자'라는 오명이었다. 코슈트는 망명지에서 괴르게이를 배신자로 낙인찍는 편지를 보냈고, 이로 인해 많은 헝가리인들은 괴르게이를 비난하고 멸시했다.[89]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괴르게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격을 받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6. 3. 만년의 삶과 죽음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헝가리 군인 및 정치인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괴르게이는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사면 내용에는 그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어 귀국이 불확실했다.[89][90] 아내 아델 오보인은 헝가리 총리 줄라 안드라시와 면담했지만, 안드라시는 사면이 왕의 결정이라며 확답을 주지 못했다.[89][90] 결국 7월 16일, 클라겐푸르트 경찰서장은 괴르게이에게 억류가 종료되었고 헝가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통보했다.[89]1849년 8월 러시아에 항복한 이후, 괴르게이는 헝가리 국민들에게 '배신자'라는 오명을 받았다.[44][92] 특히 라요스 코슈트는 비딘에서 쓴 편지에서 괴르게이를 헝가리와 국민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1][93] 코슈트의 측근들은 괴르게이가 독재자를 꿈꿨고, 봄철 작전에서 빈 대신 부다를 공격해 합스부르크를 꺾을 기회를 놓쳤으며, 친 귀족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주장했다.[94]
미하이 뵈뢰슈머르티는 괴르게이를 저주하는 시 "Átok"(저주)을 썼고,[95] 여러 매체에서 괴르게이를 혁명과 자유의 배신자로 묘사했다.[96] 괴르게이는 망명 중 이러한 비난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1862년 라슬로 베르젠체이를 만나고 나서야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89] 베르젠체이는 괴르게이의 무죄를 확신하고 그를 지원했다. 괴르게이는 "Briefe ohne Adresse"(주소 없는 편지)라는 소책자를 통해 자신에 대한 비난에 답했다.[94]
헝가리로 돌아온 후에도 괴르게이는 '배신자'라는 비난과 공격에 시달렸다.[8][98][99] 페렌츠 데아크는 괴르게이에게 국가의 자부심과 명예를 위해 은둔하며 희생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89] 1874년부터 괴르게이는 비셰그라드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학생들의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99]
괴르게이는 만년에 병을 자주 앓았고, 1916년 5월 21일 부다페스트에서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1][104][105] 그의 장례식에는 이슈트반 티사 총리를 비롯한 많은 헝가리인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01] 그의 시신은 헝가리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져 헝가리 정부와 군대의 예우를 받았다.[101] 이후 케레페시 묘지에 안장되었다.[101]
7. 지휘 스타일과 정신
괴르게이는 규율과 복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대 내 질서를 유지하고 병사와 장교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으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110] 그는 낡은 소령 제복 코트를 입고 혹독한 추위, 더위, 비 또는 눈 속에서도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110] 부다 성 점령 후 헝가리 정부가 1등 공로 훈장과 중장 계급을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자격이 없다며 거절했다.[51] 또한 코슈트가 제공한 괴될뢰 왕궁도 거절했다.[1]
그는 명령 불복종에 대해 강등이나 처형으로 엄격하게 처벌했다.[110] 병사들에게 용기와 영웅심을 요구했으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코마롬 2차 전투에서는 훌사르 기병대의 돌격을 직접 이끌다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111]
칼만 믹사트가 성공 비결을 묻자, 괴르게이는 "나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라고 답했다.[112] 그는 두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부상 후 2주 만에 바츠 2차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비범한 육체적, 정신적 회복력을 보여주었다.[113] 심지어 두개골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물그릇에 기대 서서 수술 후 바로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114],[116]
괴르게이는 장교들에게 창의성과 독립적인 주도권을 요구했다.[110] 그는 장교들에게 "자신의 재량에 따라 행동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 많이 묻지 마시오"라고 말했다.[110] 또한, 상사의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재량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다.[119]
그의 전략 계획은 대부분 참모진이 작성했지만, 전장에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렸다.[120] 필요할 경우 직접 전략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84] 그는 참모장 요제프 바이에르, 포병 대장 모르 프쇼타 등 유능한 동료들을 현명하게 선택했다.[121]
전투 중에는 질서 정연한 장교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고, 필요할 때는 직접 현장으로 갔다.[121] 코마롬 2차 전투에서는 병사들에게 "장군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들었나?"라고 외치며 사기를 북돋웠고, 훌사르 기병대에게는 "공격할 때 붉은 코트를 따라오지 않겠는가?"라고 외치며 독려했다.[122],[123]
괴르게이는 박식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군인이었지만, 냉소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121]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그를 숭배했다.[124]
로버트 헤르만은 괴르게이의 자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전략적 결정은 대부분 정확했고, 예상치 못한 사건에 대한 반응도 빨랐으며, 개인적인 개입으로 전투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125]
-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고, 부사령관을 잘 선택했으며, 함정을 피하고 전술적으로 창의적이었다.[125],[127]
헤르만은 괴르게이가 비난받는 다섯 가지 오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 1848년 12월 군대 분할: 모든 병력을 남쪽에 집중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 1849년 2월 슐리크 부대 공격 지연: 신속했더라도 클라프카가 막지 못해 탈출을 허용했을 것이다.
# 이사세그 전투 중 가스파르에게 공격 명령 게을리: 가스파르가 이미 진격 중이라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 바그 강 작전 중 지시르드 전투 부재: 새로운 군단 사령관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는 변명은 약하다.
# 사요 강 저지 후 헤르나드 강에 머문 것: 주력군을 위해 시간을 벌려고 노력했다.[128]
8. 유산
괴르게이 어르투르는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군사적 업적과 헝가리 독립을 위한 헌신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빌라고스 항복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업적과 한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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