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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에르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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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이에르모 3세는 1194년 잠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었으나, 재위 기간이 짧았다. 그는 레체 백작 탄크레디와 아체라의 시빌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193년 형 루제로 3세가 사망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194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왕위를 찬탈했고, 구이에르모 3세는 투옥되어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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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에르무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굴리에르모 (왼쪽)와 그의 아버지 (오른쪽), 형제 (가운데)를 묘사한 그림.
굴리에르모 (왼쪽)와 그의 아버지 (오른쪽), 형제 (가운데)를 묘사한 그림.
군주 칭호시칠리아 국왕
통치 기간1194년 2월 – 1194년 10월
즉위1194년 1월/2월
이전 군주탄크레디
다음 군주콘스탄차 1세 & 하인리히 1세
왕가오트빌 가문
아버지탄크레디
어머니아체라의 시빌라
출생일1186년경
출생지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일1198년경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슈바벤, 알트엠스

2. 생애와 집권

굴리에르모 3세는 1185년에 탱크레디 (1139년 - 1194년)와 시빌라 (1153년 - 1205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루지에로 3세는 1193년에 공동 통치왕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 탱크레디가 1194년 2월에 55세로 사망하자, 굴리에르모 3세는 어머니 시빌라의 섭정 하에 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하인리히 6세는 왕국 정복을 준비하여 7월에 국경을 넘었다. 캄파니아의 많은 도시들과 나폴리는 전투 없이 항복하였고, 10월에는 하인리히 6세의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메시나도 항복했다.

12월 20일 팔레르모를 정복한 하인리히는 굴리에르모와 시빌라에게 항복하면 레체 백작의 지위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시빌라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하인리히는 12월 25일에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12월 28일, 시빌라와 굴리에르모 3세는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고, 시빌라의 딸들도 같은 조치를 받았다.

시빌라와 딸들은 알자스에 투옥되었다가 1197년에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한 후 석방되었다. 굴리에르모는 실명 당하고 거세되어 독일로 추방되었으며, 1198년에 사망할 때까지 4년 동안 유폐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른 설에 따르면 1232년까지 살아남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발견되어 처형되었다고도 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굴리에르모는 레체 백작 탄크레디와 아체라의 시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다. 1189년에 시칠리아의 굴리에모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풀리아 공작 루제로 3세의 서자인 탄크레디는 그의 숙모이자 루제로 2세의 딸인 콘스탄차의 권리를 부정하고,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지지를 얻어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네 살 때, 형인 루제로가 얼마 뒤에 사망하면서 굴리에르모는 팔레르모에서 아버지의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다. 아버지는 1194년 2월 20일에 사망했고, 어머니인 시빌라가 섭정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콘스탄차의 남편인 호엔슈타우펜가의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아내의 권한으로서 시칠리아의 왕위를 요구하였다. 탄크레디가 죽기도 전에, 그는 침공 계획을 세웠고,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몸값으로 받은 것을 통해 침공 재원을 더욱 충당했다.

3. 찬탈과 죽음

1194년 하인리히 6세의 침공으로 구지에르모 3세는 왕위를 잃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를 정복한 후 굴리에모와 그의 가족을 독일로 압송했다. 굴리에모는 하인리히의 명으로 눈이 멀고 거세를 당했다고 전해지며, 호헤넴스성에서 생을 마감했거나, 탄크레디 팔라마라라는 가명으로 시칠리아로 돌아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서신에 따르면 굴리에모는 119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굴리에모의 후계자는 그의 여동생이었으나, 이름은 마리아, 엘비라, 알비니아, 블랑슈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정확하지 않다.

3. 1. 하인리히 6세의 침공

1194년 8월,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를 향해 출정하였다. 시빌라는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10월 말경에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이탈리아반도 본토 영토를 모두 정복하고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다. 11월 20일에 팔레르모가 함락되었으며, 굴리에모와 그의 어머니는 칼타벨로타성으로 달아났다.

하인리히는 시빌라에게 관대한 강화 조건을 제안했는데, 굴리에모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 본거지 영지인 레체 백국과 왕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란토 공국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합의에 이르자, 굴리에모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자매들은 12월 25일에 하인리히가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4일 뒤, 새로운 왕에 대한 역모 사건이 밝혀졌는데, 많은 이탈로노르만 정치 인사들이 체포되어 독일 왕국으로 이송되었고, 이 중에 굴리에모와 그 가족들도 포함되었다.

굴리에모의 어머니와 그 자매들은 결국 풀려나 프랑스 왕국에서 조용히 살았으나, 굴리에모의 이후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인리히의 명으로 눈이 멀고 거세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이송되고 몇 년 뒤 호헤넴스성에서 구금된 채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그는 탄크레디 팔라마라(Tancredi Palamara)라는 가명으로 시칠리아로 돌아왔고, 하인리히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메시나에서 탄크레디 팔라마라를 알아보고 1232년에 처형을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몇몇 서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합의된 그의 사망 시기는 1198년이다. 굴리에모의 권리 승계자는 그의 여동생으로, 정확한 이름은 불분명하나 마리아, 엘비라, 알비니아, 블랑슈 등으로 불렸다.

3. 2. 항복과 투옥

1194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구지에르무 3세의 어머니 시빌라는 효과적인 저항을 조직할 수 없었다. 10월 말까지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이탈리아반도 본토를 모두 정복하고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다. 11월 20일 팔레르모가 함락되었고, 구지에르무와 그의 어머니는 칼타벨로타 성으로 도망쳤다.

하인리히는 시빌라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구지에르무는 왕이 되기 전 아버지 탕크레디의 고향인 레체 백국과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타란토 공국을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그 합의가 이루어지자 구지에르무와 그의 어머니, 누이들은 12월 25일 하인리히가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4일 후, 새로운 왕에 대한 음모가 발각되어 구지에르무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주요 이탈리아-노르만 정치인들이 체포되어 독일 왕국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인들의 운명에 대하여' 15세기 편집판에 실린 시칠리아의 굴리에모 3세에 대한 고문.


어머니와 누이들은 결국 풀려나 프랑스 왕국에서 평범하게 살았지만, 구지에르무의 그 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인리히의 명령으로 눈이 멀고 거세되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몇 년 후 호에넴스 성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또 다른 설은 그가 탄크레디 팔라마라라는 가명으로 시칠리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인리히의 아들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의 왕이기도 함)는 메시나에서 탄크레디 팔라마라를 발견하고 1232년에 처형했다. 그러나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여러 서신을 참조하면, 그의 사망 날짜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1198년이다. 구지에르모의 상속자는 그의 여동생이었으며,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불분명하지만 마리아, 엘비라, 알비니아 또는 블랑슈로 다양하게 불렸다.

3. 3. 비극적인 최후

1194년 8월,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시빌라는 효과적인 저항을 조직할 수 없었다. 10월 말까지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이탈리아반도 본토 영토를 모두 정복하고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다. 11월 20일 팔레르모가 함락되었고, 구지에르모와 그의 어머니는 칼타벨로타 성으로 도망쳤다.

하인리히는 시빌라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구지에르모는 왕이 되기 전 아버지 탕크레디의 고향인 레체 백국과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타란토 공국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합의가 이루어지자 구지에르모,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12월 25일 하인리히의 시칠리아 왕 즉위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4일 후, 새 왕에 대한 음모가 발각되어 구지에르모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주요 이탈리아-노르만 정치인들이 체포되어 독일 왕국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어머니와 누이들은 결국 풀려나 프랑스 왕국에서 평범하게 살았지만, 구지에르모의 이후 운명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인리히의 명령으로 눈이 멀고 거세되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몇 년 후 호에넴스 성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또 다른 설은 그가 탄크레디 팔라마라라는 가명으로 시칠리아로 돌아왔으며, 하인리히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메시나에서 그를 발견하고 1232년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여러 서신에 따르면, 그의 사망은 일반적으로 1198년으로 받아들여진다. 구지에르모의 상속자는 그의 여동생이었으며, 정확한 이름은 불분명하나 마리아, 엘비라, 알비니아 또는 블랑슈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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