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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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은 987년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에 즉위하면서 시작되어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하여 서프랑크 왕국을 거쳐 프랑스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중세 시대 백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근세에는 절대 왕정을 확립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으며, 12세기 필리프 2세 치세에 대부분의 프랑스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가 국교였으나, 종교 개혁 이후 위그노와 유대인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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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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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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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프랑스 왕국 |
로마자 표기 | |
통칭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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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표어 | 몽주아 생드니! (Montjoie Saint Denis!) |
국가 | 앙리 4세 행진곡 또는 프랑스 왕자들의 파리 귀환 (Marche Henri IV or Le Retour des Princes Français à Paris) (1590–1792, 1814–1830) |
왕실 국가 | 주여, 왕을 구원하소서 (Domine salvum fac regem) (비공식) (1515) |
존속 기간 | 843년–1792년, 1814년–1815년, 1815년–1848년 |
건국 이전 | 베르됭 조약 (843년 8월 10일경) |
건국 | 카페 왕조 설립 (987년) |
주요 사건 | 백년 전쟁 (1337년–1453년) 프랑스 종교 전쟁 (1562년–1598년) 프랑스 혁명 (1789년 5월 5일) 왕정 폐지 선언 (1792년 9월 21일) 프랑스 부르봉 왕정복고 (1814년 4월 6일) 7월 혁명 (1830년 8월 2일) |
멸망 | 7월 왕정 폐지 (1848년) |
이전 국가 | 서프랑크 왕국 |
이후 국가 |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백일천하) 프랑스 제2공화국 |
공용어 | 라틴어 (1539년까지) 프랑스어 (12세기부터) |
지역 언어 | 브르타뉴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오크어 노르만어 피카르어 샹파뉴어 앙주어 갈로어 부르기뇽어 푸아투어 바스크어 알자스어 |
정부 형태 | 봉건제 절대 군주제 (843–1791) 의회 입헌군주제 (1791–1792; 1814–1815; 1815–1848) |
군주 | 샤를 2세 (843–877) (최초) 루이 필리프 1세 (1830–1848) (최후) |
총리 |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1815) 프랑수아 기조 (1847–1848) |
수도 | 파리 (843–1792; 1814–1848) 베르사유 (비공식, 1682–1789) |
입법부 | 없음 (칙령 통치) (843–1302) 삼부회 (1302–1789) 국민의회 (1789–1791) 입법의회 (1791–1792) 국민 공회 (1792년 9월 20일) 의회 (1814–1848) |
상원 | 보수 원로원 (1814) 귀족원 (1814–1848) |
하원 | 입법부 (1814년 6월 4일까지) 하원 (1814년 6월 4일–1848년) |
최대 도시 | 파리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화 | 리브르 파리 리브르 투르 리브르 데니에 솔 프랑 에퀴 루이 도르 |
통화 단위 | 프랑스 |
인구 추정 시기 | 1300년 (추정) |
인구 | 약 12,000,000명 |
인구 추정 시기 | 1500년 (추정) |
인구 | 약 11,300,000명 |
2. 역사
프랑스 왕국의 역사는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시작되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었는데, 이곳이 훗날 프랑스 왕국의 핵심이 되었다.[7] 987년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창설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9] 카페 왕조는 이후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으로 이어지며 800년 이상 프랑스를 통치했다.[9]
1066년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복잡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프랑스 서부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지만, 필리프 2세가 이 영토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다.[10]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백년 전쟁이 발발했다. 살리카 법에 따른 왕위 계승 문제와 영토 분쟁이 원인이었다.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우세했지만,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프랑스가 승리했다.[12]
15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프랑스는 봉건제에서 절대왕정으로 변화하였다. 백년 전쟁 이후 샤를 7세와 루이 11세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했고, 발루아 왕가 치세 동안 왕권이 강화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21]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절대 왕정이 확립되었다.[46]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는 말로 절대적인 군주의 권력을 상징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여 귀족들을 통제하고,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종교적 통일성을 추구했다.[21] 그러나 그의 치세 동안 잦은 전쟁과 과도한 세금 부과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결혼, 미국 독립 전쟁 개입 등으로 국가 부채를 심화시켰고, 결국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26]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왕정이 폐지되었다.[44] 이후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를 거쳐 7월 혁명과 2월 혁명으로 왕정이 완전히 몰락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2. 1. 기원
샤를마뉴 통치 말기 바이킹들이 프랑크 왕국의 북쪽과 서쪽 경계를 따라 진출했다. 814년 샤를마뉴 사후 그의 상속자들은 정치적 통일을 유지하지 못했고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고, 샤를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훗날 프랑스 왕국의 핵심이 되었다.[7]루아르 강, 센 강, 그리고 다른 내륙 수로를 따라 바이킹의 침입이 증가했다. 샤를 3세(898~922년) 통치 기간 동안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롤로 지휘하에 바이킹들이 파리 하류 센 강 유역에 정착하여, 후에 노르망디로 알려지게 된 지역을 형성했다.[8]
프랑스 왕국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프랑스 왕국"이라는 이름 자체도 "프랑크 왕국"의 발음이 변화한 것이다. 서프랑크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역사학적으로 동일한 왕국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이며, 일반적으로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에 즉위한 987년 이후의 서프랑크 왕국을 "프랑스 왕국"이라 부르고, 그 이전의 프랑스 왕국을 서프랑크 왕국이라 부른다.
987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후, 로베르 1세의 손자인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으로 선출되면서 카페 왕조가 성립되었다.[42]
2. 2. 중세
987년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창설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는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 등의 분파를 포함하여 800년 이상 프랑스를 통치했다.[9]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는 왕국의 귀족들이 왕실의 승인을 받은 행정 당국을 구성했으며, 귀족들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왕실에 충성하고 군사적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새 왕조는 센강 중류와 그 인접 지역을 넘어서는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거의 하지 못했고, 블루아의 영주와 같은 유력 제후들은 세력을 넓혀갔다.
1066년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략으로 잉글랜드 왕국을 차지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윌리엄은 프랑스 외부에서 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후 헨리 2세는 노르망디 공국과 앙주 백작령을 상속받고, 1152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프랑스 서부의 절반을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세력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의 후계자들 간의 분쟁과 잉글랜드의 존과 필리프 2세 간의 다툼으로 필리프 2세는 이 영토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고, 1214년 부비네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텐 공국에서만 권력을 유지했다.[10]
루이 9세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었고, 왕은 훌륭한 기사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았다. 사후에 루이 9세는 시성되어 "성왕 루이"(성왕 루도비코)라고 불렸다.
2. 2. 1. 백년전쟁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살리카 법에 따라 여자가 직접 왕위 계승은 불가능했지만,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영국 왕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샤를 4세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주장도 가능했다. 이를 구실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 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필리프 6세 입장에서도 자신의 신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타국의 왕이기도 했다. 영국 왕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로서 가지고 있는 봉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국왕의 위신을 높여야 할 필요성과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인한 두 왕가의 갈등은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백년 전쟁 제1기(1337-1360) 동안 영국군에 밀려 패배했지만, 제2기(1369-1396) 초반에는 이런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1415년에 영국의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면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실 내부적으로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로 나뉘자, 헨리 5세는 1420년의 트루아 조약을 맺고 7년간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영역은 루아르 강 이남으로 제한되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는 1429년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부터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영국군에 포위당한 오를레앙을 구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한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녀는 샤를 7세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군을 이끌어 오를레앙을 구했고, 샤를 7세는 랭스가 탈환된 이후인 1429년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녀는 부르고뉴 군에 붙잡혀 영국군에 포로로 팔렸으며, 1431년 루앙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마녀로서 화형당했다.
1435년에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1436년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되찾았으며,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칼레 시를 떠나야 했다.
백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 남부의 가스코뉴에 대한 오랜 권리 분쟁과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직물 도시들 간의 관계 등이 원인이 되었다. 1세기 동안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은 막대했는데, 특히 1348년 이탈리아에서 유입되어 전국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1328년 당시 약 1,800만~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 인구는 150년 후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12]
2. 3. 근세
15세기 말 프랑스 르네상스부터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까지의 근세 시기 프랑스는 봉건제에서 벗어나 절대왕정으로 불리는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변화하였다. 왕권신수설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은 절대왕정은 억압적인 체제로 인해 결국 프랑스 혁명을 초래했다.백년 전쟁 이후 샤를 7세는 잉글랜드 봉토를 국왕 직할령으로 편입했고, 루이 11세는 귀족 반란을 진압하며 중앙집권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16세기까지 발루아 왕가 치세 동안 왕권이 강화되며 중앙집권제가 강화되었다.
발루아 왕가가 단절된 후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즉위했다. 그는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 부르봉 왕가는 중앙집권제와 군주 권력 강화를 추구했으며, 루이 13세 대에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절대 왕정을 확립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는 말로 절대적인 군주의 권력을 상징했다.
1539년 프랑수아 1세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제정하여 모든 법적 문서에 프랑스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이탈리아 전쟁 이후 프랑스는 종교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계기로 프랑스 종교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 독일, 스페인이 개입했다. 앙리 4세의 즉위와 낭트 칙령 발표로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다.
앙리 4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유럽 패권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마다가스카르에서 무역을 시작하고, 퀘벡을 건설했으며, 북아메리카의 그레이트레이크스와 미시시피 강으로 진출했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30년 전쟁 동안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프롱드의 난이 발생했고,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1659)으로 이어졌다.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는 루시용을 획득했다.
2. 3. 1. 부르봉 왕조와 절대왕정

발루아 왕조가 단절되고, 카페 왕가의 다른 분가인 부르봉가의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부르봉 왕조(1589년 - 1792년, 1814년 - 1830년)가 성립되었다.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루이 14세의 재위기 (1643년~1715년)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뒤를 이어 쥘 마자랭 추기경이 국왕의 선임대신으로서 외교를 주도해 나가며 유럽 내 지배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마자랭 추기경은 프랑스 왕립해군의 창설을 추진하여 기존 전함규모가 25척에 그쳤던 것을 200척에 준하는 대형 함대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프랑스 왕립육군의 규모도 대폭 확대하였다. 이러한 군사력 증강을 기반으로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이 국왕의 직접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특히 1667년 상속 전쟁,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치르며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와 플란데런, 북동부 부르고뉴 공국 등을 합병하여 국토를 넓혀 나갔지만, 왕정권력을 향한 반대세력의 확대와 날로 늘어나는 국가부채를 대가로 치렀다.
루이 14세는 권력의 기원을 신으로 두고 군주제를 향한 지상의 구속력은 없다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수도 파리로부터 전국토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중앙집권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는 봉건제의 잔재를 타파하려 노력하였으며, 파리 외곽에 호화궁전인 베르사유궁을 건설하여 과거 프롱드의 난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귀족들을 초대하여 정기적으로 머무를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절대군주체제를 공고히 하며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는 18세기 말까지 약 150년간의 안정된 정치기반을 이루어냈다.[46]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프랑스의 완전한 종교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조치에 나섰다. 폐지 직후 이어진 박해 속에서 프랑스 국외로 탈출한 개신교 신자들은 15만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7] 이른바 위그노라 불리우는 개신교도들의 탈출 행렬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어 수많은 지식인과 기술장인 등 인력유출의 원인이 되었다. 국왕 주도의 종교박해는 일부 가톨릭교 종파로도 확대되었는데 특히 자유의지를 부정하면서 교황으로부터 비난받았던 얀센주의자들이 대표적이었다. 루이 14세로서는 과거 모든 교회재산을 교황청이 아닌 국가 관할로 둠으로서 적대관계가 되었던 교황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았다.[48]
1688년에는 루이 14세의 호전성을 경계하던 신성로마제국과 잉글랜드 왕국, 스페인 제국 등이 대동맹을 결성하면서 9년 전쟁이 발발했다. 1697년 종전 이후 머지않아 1700년 11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식을 알렸다. 스페인 제국의 상속을 노리던 루이 14세로서는 뜻밖에도 카를로스 2세가 프랑스 왕실가문의 손자 필리프 당주 공작을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는 곧 스페인이 프랑스의 영구적인 동맹국이 되었음은 물론,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위성국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국력 균형의 변화로 유럽의 각 군주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으나 그렇다고 합스부르크가의 다른 후손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카를 5세 시절 거대제국의 재림을 피할 수 없었다. 9년간의 긴 전쟁을 이제 막 끝마친 시점에서 또다른 전쟁은 루이 14세로서도 부담스러운 선택지였으나, 스페인을 향한 루이 14세의 야망을 두고볼 수 없었던 타국들의 의지로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1714년까지 이어졌다.[49]
루이 15세 재위기 (1715년~1774년)는 선임대신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과 그 후계자인 국무총리 플뢰리 추기경의 수권하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로 돌아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빈곤해진 유럽은 장기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년~1735년) 등 사소한 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결국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영국과 프로이센의 국력증강을 경계하던 프랑스는 1756년 두 국가의 오랜 적국인 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으며 이른바 '외교 혁명'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이어지는 7년 전쟁으로 패전을 겪은 프랑스는 재정고갈 문제와 북아메리카 식민지 (누벨프랑스) 상실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50]
18세기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군주제와 사회질서를 향한 불만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루이 15세를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쇠약한 모습과 지나친 성생활, 자국 식민지의 영국 양도 등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는 전임자 루이 14세가 군주의 권위를 강화했던 것과는 달리 루이 15세는 본의아니게 왕권을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특히 비교되었다. 볼테르를 비롯한 당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일련의 저작을 통해 왕정을 향한 불만을 적극 표하였으나, 루이 15세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로 일관하였다. 1774년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할 당시 눈물을 보인 백성들은 없다시피 한 실정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바다 건너 이웃국가 영국에서 도래하던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봉건제가 철폐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어리석고 경박하고 답답한 구식제도와 상류층에 점점 더 좌절감을 느끼는 여론이 도시의 신흥중산층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의 교육계층을 중심으로 계몽주의 사상이 자리잡게 된 것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49]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손자 루이 16세는 초반에는 민심을 얻었지만 17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국민들의 혐오 여론에 시달리게 되었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 대공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자 앙투아네트를 향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나가며 민심악화에 힘을 보탠 한편, 미국 독립 전쟁에 개입하면서 나라 재정을 더욱 악화시킨 것도 위기에 한몫했다.[51]
국가부채 문제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튀르고를 재정총감에, 말제르브를 국무장관에 임명하며 급진개혁을 추진토록 하였으나, 귀족층의 저항으로 1776년 튀르고 내각은 실각하고 말제르브도 국무장관에서 물러났다. 그들의 뒤를 이어 자크 네케르가 임명되었지만 네케르 역시 1781년에 사임, 칼론-브리엔 체제를 거쳐 1788년 네케르가 다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해 프랑스는 혹독한 겨울로 식량부족을 겪으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프랑스 전역이 언제라든 불만이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화약고로 변하고 말았으며, 이는 이듬해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52]
루이 14세 시대에는 영토 확장 등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국민에게는 중세를 부과하여 프랑스 혁명을 초래하였다.
2. 3. 2. 구체제 말기와 프랑스 혁명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옛 질서' 또는 '구체제'로 번역되는 프랑스어로,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 후기 프랑스의 귀족적, 사회적, 정치적 체제를 의미한다. 앙시앵 레짐은 수년간의 국가 건설, 입법 행위, 내부 갈등의 결과였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지역 특권과 역사적 차이가 섞인 혼란스러운 상태로 남아있었다.[19]루이 14세 (재위 1643년 ~ 1715년, "태양왕") 시대에 프랑스는 유럽 최강국이었다. 쥘 마자랭 추기경의 외교력 덕분에 프랑스 왕립 해군은 영국 해군에 필적할 정도로 성장했고, 프랑스 왕립 육군도 크게 강화되었다. 합법 계승 전쟁(1667년 ~ 1668년)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1672년 ~ 1678년)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지만, 막대한 국가 부채를 남겼다. "왕권 신수설"을 신봉한 루이 14세는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통해 귀족들을 통제하며 절대 군주제를 강화했다. 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종교적 통일성을 추구했지만, 이는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의 망명을 초래했다.[21]
1700년 스페인의 샤를 2세 사망 후,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 필립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 ~ 1714년)이 발발했다. 이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23]

루이 15세 (재위 1715년 ~ 1774년) 시대 초기에는 평화와 번영이 회복되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 ~ 1748년)과 7년 전쟁(1756년 ~ 1763년)으로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를 상실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24]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군주제와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루이 15세는 무능력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기가 없었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미국 독립 전쟁에 개입했지만, 이는 국가 부채를 심화시켰다.[25] 네케르 등 재정 개혁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26]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부르봉 왕가는 단절되었다.[44]
2. 4. 왕정의 몰락과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나폴레옹 치세의 프랑스 제1제국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1814년 반(反)나폴레옹 유럽 강대국 연합인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나폴레옹을 축출하고 부르봉 왕가를 재옹립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엘바섬 망명 후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 1세는 다시 프랑스 황제로 짧게나마 통치했는데, 이를 백일천하라 한다.1815년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다시 축출하면서 부르봉 왕정복고가 재차 이루어졌다. 루이 16세의 형인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의 첫 국왕이 되었다. 루이 18세는 의회 설립과 헌장 제정을 허용하며 혁명과 구체제의 유산을 계승하려 했다.
루이 18세 재위기 프랑스는 헌장 제정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 지지 자유주의파, 왕정과 혁명의 조화 지지 교조파, 혁명 유산을 전면 거부한 귀족과 성직자 중심 극단왕당파의 3파 갈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간 평화는 내정 개입에 신중하고 절제된 국왕의 태도와 리슐리외 공작 등 정치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53] 1823년 스페인 자유주의파 반란에 왕당파는 프랑스 개입을 주장,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1812년 스페인 헌법 폐지를 도왔다.
1824년 9월 16일 루이 18세 사망 후, 형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했다. 샤를 10세는 극단왕당파와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강력한 반동주의 성향이었다. 샤를 10세 재위 기간 신문 검열이 강화되고, 신성모독 금지법이 통과되었으며, 국외 이민 배상금이 대폭 늘었다. 한편 그리스 혁명에 개입, 그리스 반란군을 지지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이 시작되었다.
1830년 3월 18일, 프랑스 의회 교조파는 국왕의 절대주의에 반대하고 의회 권한 유지를 통해 사실상 완전한 의원내각제 전환을 지지하는 221인 연설을 했다. 샤를 10세는 이를 왕권 도전으로 간주, 7월 25일 의회 권한 축소 및 절대왕정 재확립을 위한 생클루 4대 법령 (7월 법령)을 공포했다.[54]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의회 폭동과 파리 바리케이드 시위로 대응, 7월 혁명의 서막을 알렸다.[55] 샤를 10세는 퇴위했고, 아들 루이앙투안 다르투아도 왕위 계승을 거부했다. 왕위는 샤를 10세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돌아갔고, 사촌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이 되었으나,[56] 자유주의파가 왕정을 장악했다.

1830년 8월 9일, 프랑스 하원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루이 필리프 1세로 즉위시켰다. 루이 필리프 1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처음으로 국가가 아닌 국민의 통치자로 임명된 국왕이었다. 부르봉 왕가 상징 백기는 삼색기로 대체되었고,[57] 1830년 8월 신헌장이 제정되어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58]
루이 필리프 1세는 프랑스 총리로 은행가 카시미르 페리에, 학자 프랑수아 기조, 장드디외 술트 장군 등을 임명, '시민의 왕'(Roi-Citoyen)이란 별명을 얻었다. 대외적으로 알제리 정복을 계속하고, 기니만, 가봉, 마다가스카르, 마요트 등지에 새 식민지를 건설, 타히티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초기 개혁에도 불구, 루이 필리프 1세는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 계층을 대체하고 노동 계급은 선거에서 소외되는 등 전임 국왕과 유사했다.
7월 왕정은 부패 스캔들과 금융 위기에 시달렸고, 샹보르 백작 지지 정통파, 왕권 회복 주장 부르봉파, 왕족에 맞서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지지하는 보나파르트파와 공화파는 왕정 대항 주요 세력이었다. 루이 필리프 1세는 검열로 탄압했으나, 1848년 2월 연회운동 (Campagne des banquets) 진압을 계기로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폭동, 2월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위병이 시위대 진압 명령을 거부, 루이 필리프 1세는 영국으로 도피했다.
1848년 2월 24일 왕정 폐지와 프랑스 제2공화국 출범으로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었다. 1870년대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왕정복고 시도가 실패, 현재까지 프랑스 왕정은 부활하지 않고 있다.
3. 영토
프랑스 왕국은 영토 확장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13세기 이전에는 현재 프랑스 영토의 일부만이 프랑크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쪽에서는 바이킹의 침입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형성되었고, 서쪽에서는 앙주 백작들이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여 12세기에는 잉글랜드 왕국을 포함한 앙주 제국을 건설하였다. 앙주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앙주 제국과 프랑스 카페 왕조 사이의 영토 분쟁은 백년 전쟁으로 이어졌고, 프랑스는 15세기 중반에야 이 영토들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3. 1. 영토 확장 과정
서프랑크 왕국에서 카페 왕조가 들어설 당시, 오늘날 프랑스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 가운데 국왕이 통제하는 영토는 일드프랑스, 랭스, 부르주, 오를레앙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9] 왕실직속령 외에 국왕에 충성을 바치는 종속국으로 샹파뉴 백국, 블루아 백국, 부르고뉴 공국, 플란데런 백국 (1369년 부르고뉴 공국에 편입), 부르봉 공국 등이 있었다. 이 시기 북쪽으로는 바이킹의 침공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세워졌고, 서쪽으로는 국왕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히는 앙주 공작령이 있었으며 11세기에는 앙주 제국을 거쳐 잉글랜드 왕국으로 상속되기에 이르렀다.[10]서프랑크 왕국의 영토 대부분이 국왕의 통치하에 있게 된 것은 12세기 말 필리프 2세 재위기에 이르러서였으며, 1204년 노르망디 공국과 투랭 백국을 합병하며 '프랑스 국왕'임을 자칭한 최초의 국왕으로 기록되었다.[10] 이후 1225년 앙주 백국과 메인 백국 병합, 1271년 오베르뉴 백국과 툴루즈 백국 병합, 1316년 샹파뉴 백국의 왕실직속령 전환, 1391년 블루아 백국의 왕실직속령 전환 등 영토 확장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도피네 지역의 경우 1349년 프랑스 국왕이 소유하게 되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 유지되었다.
14세기 들어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와 프랑스의 카페 왕조 간의 분열로 백년 전쟁이 발발하였고,[11] 유럽 본토의 잉글랜드 영토는 15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프랑스의 영토로 되돌아오게 된다. 1453년 백년 전쟁 종전 시점에서 프랑스에 양도된 영토로는 아키텐 공국 (푸아투 백국, 라마르슈 백국, 앙굴렘 백국, 페리고르 백국, 생통주 백국, 리무쟁 자작령, 가스코뉴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이 있었는데, 브르타뉴의 경우 브르타뉴 상속 전쟁으로 분쟁을 겪다 프랑스에 편입된 것으로 1547년에 왕실 직할령이 되었다.
지금의 프랑스 동부 일대는 처음부터 서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며 한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공국, 백국 등으로 쪼개져 있다가 근대 초기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된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 편입을 시작으로 추가 영토 확장에 나선 프랑스는 1558년 칼레 편입, 1620년 나바라 왕국 편입, 1648년 알자스 편입 (베스트팔렌 조약)을 이루었다.[18] 1659년에는 아르투아 백국을 편입하는 동시에 피레네 조약 체결로 루시용과 페르피냥. 몽메디, 뤽상부르, 플란데런 일부 지역을 양도받았다.
1668년에는 부르군트 자유백국을, 1679년에는 프랑스령 에노를 편입하였으며 1713년 오랑주 공국, 1766년 로렌 공국 편입으로 프랑스의 육각형 국토가 완성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1769년 코르시카 침공에 나서 지중해 영토의 추가확보에 성공하였으며, 구체제 말기였던 1791년에는 교황령의 영토였던 베네생 백국을 편입하였다.
4. 군주
왕(Roi)은 프랑스 왕국 체제의 중심 인물이었다. 왕의 의사로 법을 제정했으나, 왕은 먼저 대신들(cour), 그 다음에는 고문(conseil)의 조언을 받아야 했다.[1] 왕은 대권을 행사하고자 돈으로 매매 가능한 관직에 권력을 위임하거나 여러 공무원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4. 1. 역대 군주 목록
이름 | 재위 기간 |
---|---|
위그 카페 | 987년~996년 |
로베르 2세 | 996년~1031년 |
앙리 1세 | 1031년~1060년 |
필리프 1세 | 1060년~1108년 |
루이 6세 | 1108년~1137년 |
루이 7세 | 1137년~1180년 |
필리프 2세 | 1180년~1223년 |
루이 8세 | 1223년~1226년 |
루이 9세 | 1226년~1270년 |
필리프 3세 | 1271년~1285년 |
필리프 4세 | 1285년~1314년 |
루이 10세 | 1314년~1316년 |
장 1세 | 1316년 |
필리프 5세 | 1316년~1322년 |
샤를 4세 | 1322년~1328년 |
필리프 6세 | 1328년~1350년 |
장 2세 | 1350년~1364년 |
샤를 5세 | 1364년~1380년 |
샤를 6세 | 1380년~1422년 |
샤를 7세 | 1422년~1461년 |
루이 11세 | 1461년~1483년 |
샤를 8세 | 1483년~1498년 |
루이 12세 | 1498년~1515년 |
프랑수아 1세 | 1515년~1547년 |
앙리 2세 | 1547년~1559년 |
프랑수아 2세 | 1559년~1560년 |
샤를 9세 | 1560년~1574년 |
앙리 3세 | 1574년~1589년 |
앙리 4세 | 1589년~1610년 |
루이 13세 | 1610년~1643년 |
루이 14세 | 1643년~1715년 |
루이 15세 | 1715년~1774년 |
루이 16세 | 1774년~1792년 |
루이 18세 | 1814년, 1815년~1824년 |
샤를 10세 | 1824년~1830년 |
루이 필리프 1세 | 1830년~1848년 |
5. 종교
이탈리아 전쟁이 끝난 직후, 프랑스는 국내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는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와 교황청 사이에 체결된 볼로냐 협약(1516)을 통해 왕은 고위 성직자 임명에 있어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 유럽의 패권이 흔들리는 상황에 놓였다. 이후 위그노라고 불리게 된 도시 기반의 프로테스탄트 소수파는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앙리 2세 치하에서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16] 앙리 2세가 기사 대회에서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메디치와 그녀의 아들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나라를 통치했다. 강력한 기즈 공작 가문이 이끄는 가톨릭의 반격은 생 바르텔레미 학살(1572)로 이어졌고, 이는 프랑스 종교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16] 이 전쟁 동안 영국, 독일, 스페인 군대가 라이벌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 절대 군주제에 반대한 위그노 모나르코마크는 이 기간 동안 반란의 권리와 폭정 살해의 정당성에 대한 이론을 전개했다.[16]
종교 전쟁은 세 앙리의 전쟁(1584-1598)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전쟁에서 앙리 3세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인 기즈 공작 앙리를 암살했고, 그 대가로 왕 자신이 살해당했다. 기즈 공작 앙리(1588)와 앙리 3세(1589)의 암살 이후, 나바라의 프로테스탄트 왕이 앙리 4세(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로 즉위하고 이후 프로테스탄트를 버림(1592년의 방책)으로 인해 (1593년) 갈등이 종식되었다.[17] 대부분의 가톨릭 지도층(1594)과 교황(1595)의 수용과 사적 예배의 자유와 시민적 평등을 보장하는 낭트 칙령(1598) 발표가 이어졌다.[17]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 왕국의 공식적인 국교였다.[33]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교회의 장녀(프랑스어: ''Fille aînée de l'Église'')로 여겨졌으며, 프랑스 국왕은 항상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4] 1464년 교황으로부터 "가장 기독교적인 폐하"라는 칭호를 받았다.[35] 그러나 프랑스 왕국은 특히 "갈리카니즘" 정책을 통해 주교를 교황이 아닌 왕이 임명하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다.[36]
16세기 중반 신교 개혁 시대에 프랑스는 주로 개혁파 신앙을 가진 크고 영향력 있는 신교 인구를 형성했다. 프랑스 신학자이자 목사인 장 칼뱅이 프랑스에 종교 개혁을 도입한 후, 프랑스 신교도(위그노)의 수는 인구의 10%, 즉 약 180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그 결과 발생한 프랑스 종교 전쟁, 특히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은 위그노 공동체를 몰살했다.[37] 16세기 말까지 신교도는 왕국 인구의 7~8%로 감소했다. 낭트 칙령은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수십 년간의 휴식기를 가져왔다. 그 결과 프랑스 왕국에서 위그노들이 대거 이탈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뇌 유출이 발생했다.[38]
유대인들은 적어도 중세 초기부터 프랑스에 거주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39] 프랑스 왕국은 중세 시대에 유대인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라시와 같은 영향력 있는 유대인 학자들을 배출했고 심지어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신학적 논쟁도 개최했다. 대규모 박해는 11세기에 시작되어 중세 시대 내내 간헐적으로 증가하여 여러 차례 추방과 복귀가 반복되었다.[40]
프랑스 왕국의 종교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고 여겨진다. 건국 이래 장기간 주요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987년부터 1682년 3월 19일, 1801년 7월 15일까지).
일부 국민은 갈리카니즘 교회를 1682년부터 1794년 3월까지, 그 후에는 사제 민정 기본법의 종교를 1791년부터 1801년까지로 여긴다. 그 후에는 유대교 등이 신앙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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